데이비드 핀처의 넷플릭스 영화 <더 킬러>(2023)에 대해 이미 길게 쓴 바 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남아 있었다. 이 글의 요지는 주인공 킬러가 임무에 실패한 이후 자신에게 가해진 위협에 대한 복수를 행하면서 최후에 대결(처리)하는 '자본가'를 "어째서 살려두는가"라는 이상함(궁금증)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답을 찾은 듯했지만 틸타 스윈튼이 연기하는 면봉을 닮은 킬러와 식당에서 만나 나눈 '사냥꾼과 곰'의 우화를 되새김질하면서 이 영화가 하나의 답이 아니라 알레고리(우화)의 구조를 지닌 영화일 수 있음을 탐색하면서 이 관계를 여러 가지로 궁리해 보았다. 또한, 자본주의의 분열증에 관한 핀처의 야심작이자 대표작인 <파이트 클럽>(1999)과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킬러와 자본가의 만남이 핀처가 바라보는 <파이트 클럽> 이후의 세계, 즉 밀레니엄 이후 자본주의의 심화에 대한 어떤 지점을 의식하는지를 읽어보고자 했다. 원문을 다소간 수정한 핵심은 아래와 같다.
"<파이트 클럽>이 자본주의의 분열과 간극이 심화되어 폭발을 일으키며 끝나는 영화라면, <더 킬러>는 자본주의가 붕괴되거나 폭발하기는커녕 더욱 내면화되고 심화되어 분열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 <파이트 클럽>의 분열된 주인공인 잭과 타일러를 동시에 발산하는 영화. <파이트 클럽>이 사냥꾼으로 태어난 인류가 어느새 소비하는 인류가 되어 망각해버린 '싸움의 본능'을 일깨우면서 분열된 세계의 대결을 펼치는 영화라면, <더 킬러>는 자본주의의 첨단인 펜트하우스에서 싸우기는커녕 자본가를 조용히 협박하여 더 이상은 나와 연결되지 않기를 '갈망'하는 영화다."
1999년에 선보인 <파이트 클럽>이 자본주의의 분열증으로 인해 밀레니엄적 폭발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면(잭과 타일러의 분열은 일종의 자본주의의 핵분열이다), 20년이 자나 선보인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는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복수극의 분위기와는 달리 더 이상의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킬러는 조용한 단절을 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킬러의 갈망은 과연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킬러는 이러한 갈망을 어째서 하게 되었는가. 이를 위해 다시금 파고들어야 하는 문제는 많은 이들이 <더 킬러>의 특징으로 언급하지만, 한 발 더 들어가 보지 않는 지점이다.
어째서 '현대의 킬러'는 '공유 경제'로 불리는 플랫폼을 활용하여 임무를 수행하는가? 그가 동시대적 인물이어서? 동시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공유 경제를 활용한다면, <더 킬러>의 세공은 과잉된 현재성에 지나지 않는다.
킬러는 핸드폰을 자주 버리고, 로그인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영화 초반부의 근사하게 제시되는 파리에서 암살을 준비하던 킬러는 증가하는 CCTV 때문에 더 이상 '에어비앤비'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나레이션을 깐다. 이 고백은 공유 경제를 사용하는 이유가 편의성이나 동시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익명성을 보장해 준다는 데 있다. 킬러가 자신의 공간에서 수많은 위조 신분증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렌트카를 대여하거나 비행기에 탑승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고객 카드(대부분 마일리지용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일정하게 신분증을 대체한다)를 내놓는 장면은 그만의 공유 경제 필요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사용하는 공유 경제의 필요성은 말 그대로 '경제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을 먹고살 만한 돈을 지니고 있다. 킬러의 경유 돈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러는 공유 경제를 이동이나 전환이 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의 이동수단과 물건의 구매에 있어 공유 경제는 꽤나 절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핀처 감독은 다른 킬러처럼 호화로운 식당의 고객으로 행세할 수 있는 킬러가 어째서 이러한 삶을 선택했는지를 유심히 지켜보도록 이끈다.
공유 경제에 대한 논의는 대략 2010년대부터 활발하게 펼쳐졌다. 공유 경제가 우리의 미래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긍정하는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사회』에 따르면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함께 한계비용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한계비용이란 제품을 다시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신문에 첫 발행 기사에는 여러 시스템(기사 작성, 편집, 플랫폼의 활용 등)에 의한 비용이 들어가겠지만 한번 출간된 후에는 더 이상 비용이 들지 않는다(아마 전기세를 비롯한 최소한의 비용은 소요될 것이다.) 과거에 종이로 신문을 재발행하던 시절과 비교해 보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한계비용은 현저히 낮아지거나 제로에 가까워진다.
리프킨에 따르면 이 현상은 자본주의 내부에 모순을 일으킨다. 원래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제품의 생산비용과 단가를 낮추는 것에 있다. 공장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자동차 모델을 성공시킬 때까지는 많은 개발 비용과 디자인 등의 비용이 들겠지만 자동차가 성공적으로 팔리기 시작하면 이후의 비용, 즉 한계비용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같은 공정으로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대량 생산을 통한 이익의 추억은 한계비용이 떨어지는 것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그런데 한계 비용이 제로와 가까워지는 것은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비용이 거의 필요없게 되자 어느 순간부터 무료로 공유되는 상황이 늘어나 버린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동차 한 대를 구매한 후 공유 경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나눈다면 자동차 기업으로서는 더 이상 자동차를 팔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공유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러한 현상에 속한다. 더욱 손쉬운 사례는 인터넷의 수많은 콘텐츠 관련 영상들이다. 이것들은 제작 단계에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나 사용자에게는 무료로 배포가 된다. 이 때문에 이전에 있던 유료 컨텐츠들도 자연스럽게 무료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어느새 유료가 설 자리는 좁아지고, 무료 공유가 보편성을 얻는다.
『한계비용 제로사회』의 부제는 "사물인터넷과 공유경제의 부상"이다. 공유 경제는 "개인적 소비에서 협업 소비로 바꾸는 경제 활동을 가리킨다. 차량, 숙소, 공간, 물건 등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 쓰는 협력소비를 의미한다." 리프킨은 머지않은 미래에 공유 경제가 자본주의의 종말과 지구적인 공동체 지향 사회의 등장을 알린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상대로 공유 경제의 심화는 정말 자본주의의 종식을 가져올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당근 마켓이 자본주의의 종식을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더 킬러>를 두고 공유 경제의 애용자인 킬러가 펜트하우스에서 자본가를 만나 "너 끝났어. 공유 경제로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야."라고 말하는 영화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코미디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영화의 핵심이 이런 태도라면 <더 킬러>는 <파이트 클럽>에 이어 자본주의의 붕괴를 보여주는 <파이트 클럽2>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본가도, 펜트하우스도 붕괴시키지 않는다. 조용히 경고만 할 뿐이다. "너 조심해"라고. 그것은 <파이트 클럽2>가 아니라 <더 킬러>일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에 관한 달라진 철학을 보여준다.
뉴노멀 시대의 공유 경제
새로운 미래로 각광받던 공유 경제는 판데믹과 함께 위기를 맞이하였다. 2020년 글로벌 렌터카 브랜드 허츠(Hertz)가 파산 신청을 하고, 공유 오피스로 각광을 받던 위워크(weworks)가 흔들린다는 소식이 전해지더니 작년 말에는 파산신청 소식이 들려왔다. <더 킬러>의 초반부 장면에서 암살을 시도하기 위해 파리의 한 건물에 위치한 위워크의 공유 오피스를 사용하고 있을 때 킬러 이외에는 아무도 없음음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따금 배달된 우편물을 집어넣기 위해 문 앞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전부다.
파리 장면은 공유 오피스 넘어 암살자의 일상을 관찰하는 킬러의 일상을 세공을 들여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패한다. 실패가 벌어지는 장소가 다름 아니라 '공유 오피스'다. 이 단순한 연결 속에서 자본주의를 둘러싼 어떤 관계를 상상해 본다면, 이 영화의 출발점은 공유 경제가 붕괴되는 현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배후에 깔려 있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판데믹 사태일 것이다. 판데믹과 함께 공유 오피스는 비어있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공유가 아니라 접촉 없는 공유가 된다. 그것을 반영하는 용어가 '비대면(Untact)'을 강조하는 뉴 노멀(New-Normal)이다.
킬러가 활동하는 방식은 공유 경제가 아니라 '뉴 노멀'이다. 그는 여러 개의 위조된 신분으로 차량을 렌트하고, 창고를 빌리고, 아마존을 통해 물건을 구매한다. 이 활동은 공유 경제처럼 보이지만 가짜 신분으로 얼마든지 접속할 수 있는 뉴 노멀의 시대가 강조되는 셈이다. 오히려 뉴 노멀은 신분을 쉽게 위조할 수 있다. 미유마 베유키의 『화차』나 이와 유사한 작품들처럼 일본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유달리 일본 작품 중에는 가짜 신분의 이야기들이 많은 편이다. 지난해 개봉했던 <한 남자>(2022)에서도 흐름을 이어갔다) 판데믹의 영향 아래 개인성은 익명성을 훨씬 더 강력하게 보장받기 시작했다. 개인의 정체성에 마스크를 쓴 형국이다.
그것은 접속과 접촉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 차이는 판데믹의 상황에서 선택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공유 경제 중 접촉이 필요한 모델은 인기를 얻지 못한다. 접속만으로 온전히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 경제만이 살아남기 시작했다. 차량의 공유도 판데믹 시대에는 불가피한 접촉을 요구하기 때문에 주춤한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킬러는 접속하는 존재다. 그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뉴 노멀의 원칙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에게 닥친 위기는 다른 킬러들이 도미니크 공화국의 집을 침입하여 아내를 죽기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한마디로 물리적인 '접촉'을 시도한 셈이다. 킬러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호지스가 운영하는 플랫폼을 통해 전화를 비롯한 접속만을 하던 이 세계가 접촉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킬러는 아내를 이 지경에 몰고 간 이들을 찾아간다. 한 마디로 접속의 원칙을 버리고 스스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암살 방식도 비대면 접속이 아니었던가. 호지스는 킬러가 자신과 접촉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에 다소 놀란다. 이처럼 접속하던 킬러가 접촉을 시도하면서 이 세계의 원칙이 흔들린다. 공유 경제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세계가 위기를 맞이하는 것은 접속의 원칙이 접촉으로 얼룩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가 자본가를 찾아가는 것도 매우 예외적인 접촉이었다. 심지어 자본가는 킬러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고, 그의 집 안에 나타났을 때도 그의 정체를 쉽게 짐작하지 못한다. 자본가가 행한 것은 단지 접속하여 비용을 지불하고, 접속의 결과물로 처리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가 드러내는 불쾌감도 킬러를 향한 것이기보다는 많은 돈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이가 집 안에 있다는 뉴 노멀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보여주는 또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이 또한 지면에 쓴 넷플릭스의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다. 아포칼립스물이라는 전제를 깔고 영화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의 시작은 '공유 경제'다. 플랫폼을 통해 다른 사람의 별장을 빌린 아만다의 선택에 의해 가족 모두가 뉴욕 바깥의 한 별장에서 모처럼의 가족 휴가를 보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저 멀리서 뉴욕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폭발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인적 교류를 통해 접속하는 수준에 머문다.
물론,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접촉을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침범(접촉)이 있다. 이를 라캉이나 지젝이 언급하는 '실제계'를 동원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거대한 유조선이 해안가로 밀려오고, 거대한 여객기가 추락하는 장면들은 실재의 침입 혹은 접촉의 순간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이 흥미로운 것은 해안가에 가족들이 있을 때 거대한 유조선이 밀려오지만 놀라서 달아나는 해변의 사람들과는 달리 배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CG를 쓸 비용이 없어서? 비행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땅에는 시체들이 나동그라져있지만 비행기로부터 어떤 인간의 잔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늘에서 드론을 통해 뿌리는 찌라시처럼 익명성의 덩어리로 주인공들 앞에 떨어진다. 막내 로즈가 발견하는 사슴 무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 자체로 자연적 존재이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뭐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익명성의 덩어리들이다.
그런데 아만다의 가족이 이러한 상황을 겪기 전에 이미 중요한 접촉이 있었다. 이 집을 빌려준 별장 주인 스콧과 루스가 한밤중에 찾아온 것이다. 한밤중의 방문이라는 으스스한 상황에서 스콧은 아만다와 이메일로 주고받았음을 상기시킨다.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아만다를 향해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은 후 아만다과 클레이 그리고 조지와 루스는 주방으로 향한다. 정전과 함께 통신투절이 된 현재를 파악하고, 이들이 누군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조지와 루스는 자신이 이 별장의 주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아만다와 클레이는 정체를 확인한 후에도 이 상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 가운데 하나의 원칙이 흔들린다. 공유 경제의 측면에서는 제아무리 집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집을 소유할 권한은 가족들에게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는 아만다와 이 사태가 노멀하지 않으면 무언가 애브노멀(ab-normal, 비정상)하기 때문에 새로운 계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조지에게서 제기된다. '아포칼립스'로 인해 이 장면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소 묻혀 버렸지만 오늘날의 주요한 경제 기반으로 불리는 공유 경제의 붕괴 혹은 재설정은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이 붕괴되는 순간이다. 공유 경제는 공유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때 - 판데믹이든 아포칼립스든 - 가장 손쉽게 붕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용과 신뢰 그리고 좋아요와 별점을 가장한 환대와 친절은 평화를 가장한 위장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던 중 도시의 대규모 정전 사태를 겪은 조지와 루스는 안전한 이곳에서(이곳은 정전 사태에서도 자동으로 전기가 공급되도록 설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지지만 또 다른 혹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이 집에 안전한 벙커 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머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음을 전한다. 그리고 조지가 비용을 환불해 주겠다고 하자 한밤중에 자신의 가족을 나가라고 하는 거냐며 아만다가 폭발한다. "업체에 전화해야겠어요, 이건 규정 위반이죠."
뉴 노멀의 원칙을 기반으로 설계된 공유 경제의 기반이 무너지는 순간은 대화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아만다가 플랫폼의 연락처를 찾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들은 전화가 불통이어서, 조지가 아만다에게 별장으로 가고 있다고 연락할 수가 없음을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 항의 전화를 하겠다는 아만다의 말은 모순이자 이 사태에 직면한 일상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공유 경제를 사용하며 어떤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주된 패턴은 댓글을 통한 리뷰일 따름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움은 조지가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는 아만다의 가족이 나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금액의 50퍼센트를 환불해 드릴테니, 자신과 루스를 아래층에서 묵게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전액이 아니라 절반의 환불은 아마 계약서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은 조항일 것이다.
공유 경제는 이처럼 허약하다. 사용을 할 때는 몰랐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제서야 계약서를 확인하려고 들고, 집의 주인과 집의 사용자가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의 핵심은 중계자인 플랫폼에게 전가된다. 그런데 플랫폼에 접속 할 수 없다면 이 사태은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는가. 정답은 영화 스스로가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이토록 큰 별장을 한 가족이 사용할 것이 아니라 두 가족이 사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공간을 시간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제대로 나누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공유 경제의 계약 방식은 시간과 공간을 쪼개어 재분배하고, 계약(협약)에 따라 사용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아포칼립스는 분명한 실재의 경험이다. 기존의 공유 경제가 붕괴된 자리에서 두 가족은 동시에 같은 공간을 사용해야 하고, 이를 통해 벌어지는 진정한 공동체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실해 버린 공유 경제의 핵심이 아닐까. 이 영화는 공유될 수 없는 공유 경제의 허상을 폭로하면서 세계의 붕괴에 직접적으로 접촉되어 있지 않은 뉴욕 변방의 현실을 차분히 보여준다.
공유 경제로 불리는 자본주의 방식에 따라 한 장소를 시간(일정)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을 흔히 계약이고 재활용의 위대한 아이디어라고 말하지만, 뉴 노멀이나 비 노멀의 상황에서는 언제든 붕괴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환상성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공유 경제는 얼마나 시스템적이며, 얼마나 합리적이고, 얼마나 자본주의적이며, 얼마나 이웃 친화적(타자적)인가. 공유 경제의 토대는 단 한 번의 직접적인 접촉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허약한 매트릭스임을 <리브 더 비하인드 월드>는 보여주며 시작한다.
전기의 단절과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두 가족이 겪게 되는 온갖 풍문과 찌라시 그리고 이웃의 말에 휘둘리며 것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단지 인터넷에 접속할 때만이 살아갈 수 있다. 인터넷이 양산하는 거짓 뉴스와 진짜 뉴스 사이를 오가며 혼동하고 방황한다. 결국 사람들은 선택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정보를 통한 행동의 방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유튜버 뉴스가 이처럼 활개를 치는 것은 뉴 노멀 시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의 핵심은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이는 뉴 노멀을 위한 새로운 코키토로 기능한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편향된 정보를 대량으로 섭취하기에 적합하고, 우리가 선택하는 진실은 소비하는 진실일 뿐이다. 두 가족이 한 별장에서 겪는 상황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조지가 설명하는 3단계 세계 붕괴는 그 많은 편향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가 데이터를 읽는 것이 직업이라고 했지만, 그 읽기의 방식에 대해서 누가 검증을 해 보았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가 읽은 것은 사태가 일어난 이후에 증명될 따름이지 이들의 행동방식을 미리 결정하거나 이끌지 못한다. 그것이 접속되거나 데이터화된 세계의 현실이다.
어쩌면 이들의 아포칼립스는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접속하지 못한 현실의 신경계는 곧장 마비가 되며, 사소한 정보에 집착하다가 괴멸을 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마지막을 채우는 벙커의 의미는 외부로부터의 온갖 접속을 차단할 때 비로소 자신만의 시간을 열 수 있다는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눈이 휘둥그래진 채 미처 다 보지 못한 <프렌즈>의 DVD를 향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는 로즈의 모습은, 진정한 세계를 맞이하는 기쁨의 표정일 수 있다. 세계의 모든 것이 차단된 벙커에서 십대 소녀는 온전히 탐닉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것은 완전한 뉴 노멀의 시간이자 오타쿠의 시간이다. 의미는 덕후의 세계 속에서만 탐닉적으로 발휘되는 존재성일지도 모른다.
프로슈머의 출현과 별점의 시대
이러한 맥락에서 <더 킬러>의 클라이막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킬러는 파리에서의 임무 실패 이후 이에 대한 징벌로 집을 찾아와 아내의 신체를 훼손한 킬러들(먼 의미에서 동료들이다)을 찾아가 살해하고, 플랫폼의 운영자이자 징벌 사태를 중계한 호지스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복수극처럼 볼 수 있다. 그런데 킬러들이나 변호사 호지스가 그가 벌인 복수극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하다. 만일 이 영화를 뉴 노멀의 시대의 영화로 읽는다면, 뉴 노멀의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 모든 것이 비접촉으로 이뤄진 세계를 구현하는 영화로 본다면 이러한 반응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킬러의 복수극은 곧 접촉인 셈이다.
이 모든 것을 일으킨 것은 장본인인 자본가를 만난다. 자본가는 킬러의 정체를 알아보지도 못하며, 그에 대한 관심도 사실상 거의 없다. 단지 돈을 지불하고,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기대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가는 플랫폼이 안내하는대로 비용을 지불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순진한 고객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죽음을 생산하는 생산자가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에 가깝다.
리프킨에 따르면 한계 비용 제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존재는 프로슈머(prosumer)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ler)가 사용한 이래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나타나는 생산과 소비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를 가리킨다. 개인적으로 즐겨보는 커피 유튜버들은 제품이나 식품인 커피에 관한 생산자이자 판매자이지만 동시에 많은 제품들을 사들이고 소비하는 슈퍼 소비자이기도 하다.
킬러가 펜트하우스에서 만나는 자본가는 돈으로 자신의 사업을 하는 생산자이지만, 동시에 돈을 벌기 위해 킬러를 고용하는 엄청난 소비자이기도 하다. 프로슈머는 전통적인 고용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작동시키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플랫폼이 끼어든 자본가와 킬러의 사이에서 선과 악의 구별도 어려워진다. 단지, 돈의 거래만 있을 뿐이며, 돈을 거래에 대한 결과가 있을 뿐이다. 킬러 또한 도덕을 따지며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프로세스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자본의 측면에서 자본가와 킬러는 닮아있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이었고, 돈의 지배 아래 움직이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플랫폼으로 계약된 위와 아래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킬러가 자본가에게 제안하는 최종 해결은 더 이상 자신과 연결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이자 위협이다. 킬러는 자본가를 만나 "당신에게 얼마나 쉽게 접근하는지 보여주러 왔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접촉이 불필요한 관계였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접촉할 수 있음을 과시한다. 그것은 여기에 오기까지 여러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벌인 킬러의 살인 행각이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면 자본가는 이 상황을 알지 못하고, 킬러의 접촉이 보여주는 폭력성은 관객을 위해 전시된는 쪽에 가깝지만 접근성을 강조한 킬러의 말은 뉴 노멀의 경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 속에서 가장 억울한 희생자로 보이는 택시 운전사를 죽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단순히 킬러를 딜리버리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행한 행동은 킬러의 집 앞에 ‘접촉’한 것이었다. 접촉의 결과는 곧 죽음이다.
자본가는 자신이 처리한 방식을 설명한 후 킬러를 향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자 킬러는 문제의 핵심을 환기시킨다. "궁금해지는군. 한밤중에 소음기 권총을 들고 집에 들어왔는데 내가 여기 있는 이유도 짐작이 안 가나?" 킬러는 플랫폼 자본주의, 뉴 노멀의 원칙을 벗어나 이해하지 못하는 자본가를 답답해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이 상황을 설명한다. "내가 다시 오면 당신 커피잔에 방사능이 묻어 있을지몰라. 천천히 죽어가겠지. 안면이 고통스럽게 구겨지면서 혹은 집 엘리베이터에서 안타깝게 실족하거나. 내가 약속하는 데 꼭 맞는 걸 찾아주지."
두 사람의 접촉은 폭력이자 죽음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뉴 노멀의 원칙 아래 익명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익명성이 깨어지고 직접적인 접촉이 시작될 때 ‘사냥의 시간’은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킬러 또한 자본가와 같은 방식을 살아왔기에 생산자도, 소비자도, 고용주도, 노동자도 구별이 되지 않는 뉴 노멀 시대의 익명적 플랫폼의 위상을 알고 있다. 그들은 거대한 자본의 포용 아래 움직였던 자본의 장기말들에 불과했다.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킬러가 보여준 것처럼 접속의 사슬을 끊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한적한 해변가에서 아내와 함께 단절된 채 살아가는 방법뿐이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어 이것을 '탈주'라고 명명했지만, 그곳에서도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순간 완벽한 탈출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공유 경제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암울하게 예언한다.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로 번역 출간된 한병철의 책에도 수록되어 있는, 베를린 포럼에서 타계한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논쟁을 수록한 글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공유 경제로 대변되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반대편에 서 있다고 여겨왔던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며 자본주의 아래 삶의 예속화를 전면적으로 가속화 하고 있다.
"나눔 경제는 결국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상품화하게 될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칭송하는 소유로부터 '접근'에로의 전환은 우리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은 나눔에로 접근도 할 수 없다. 접근의 시대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어 있는 '수용소'에 살고 있다. 모든 개인 주거공간을 호텔로 바꾸어 주는 커뮤니티 시장 에어비엔비(Airbnb)는 손님에 대한 환대마저도 상업화시킨다. 공동체 또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이념이 공동체를 전부 자본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목적없이 베푸는 친절함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서로 평점을 주고받는 사회에서는 친절함도 상품화된다. 더 나은 평점을 받기 위해 친절해진다."(『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13-14쪽, 김영사, 내용은 비슷하지만 인용된 것은 한병철이 '쥐트도이체 차이퉁'에 쓴 것을 가져왔다.)
한병철의 지적처럼 자본주의는 공유 경제를 앞세우든, 뉴 노멀을 앞세우든 끊임없이 주변의 것을 포섭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의 가속화는 공유라는 공산주의적 가치마저도 자본의로 환원하는 능력에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공유'의 질서 안에서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의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14쪽, 김영사)
그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문제라면 이러한 체제의 일시적인 붕괴나 아포칼립스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는 역량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성찰에 있다. <더 킬러>와 <리브 더 비하인드 월드>와 같은 영화는 자본주의의 붕괴 현상을 판데믹이든, 아포칼립스든 현재화된 방식 속에서 호출하고, 인간과 인간이 충돌하며서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를 다루고 있다.
상대적으로 아포칼립스물이긴 하지만 붕괴된 세계에서 물자를 획득하고 나누는 장면들이 다수 담겨 있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에서는 전통적인 계급의 문제나 권력을 통해 물자의 분배 이슈를 주로 다룬다. 여기에는 현재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붕괴가 있기 보다는 근대에 형성된 계급적 토대 속에서 인간성의 발로라는 전형적인 주제에 천착한다. 아파트는 그러한 계급적 상징의 표상이다. 기존의 세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계급의 역전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적 관계가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 등의 인류적 성찰은 없다. 이 영화의 경제성은 현재의 반복이나 단순한 역전이다. 현재를 비추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거울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비(非)접촉된 자본주의의 커넥션을 살던 자본가와 킬러가 만나고, 공유 경제의 별장을 호스트와 게스트가 사용해야 하는 충돌이야말로 우리가 겪었거나 겪게 될 지금의 자본주의다.
이런 점에서 <더 킬러>의 결말을 다시 음미할 수 있다. 더 이상 킬러는 친절하지 않다. 더 이상 킬러는 자신 혹은 자신의 삶을 상품화시키기를 거부한다. 더 나은 킬러 평점을 받기 위해 친절해지기를 거부하고, 자본가를 겁박한다(어쩌면 이 모습은 별점 테러를 하는 고객에게 맞대응하는 음식점의 대응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판매자와 소비자의 수직성은 해체된다.). 이것이야말로 킬러를 앞세워 자본주의의 펜트하우스로 침입하려고 시나리오를 짠 핀처의 최종 해결이다.
하지만 킬러처럼 돈이 많거나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없는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잔혹함은 더 많은 "좋아요, 구독"을 받기 위해 친절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만이 맴돌 따름이다. 친절까지 판매해야 하는 뉴 노멀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진정성'은 거대한 환영이다. 하긴, 이미 평자도 독자의 위계도 무화 된지 오래다. 우리는 서로를 착취하는 프로슈머로 전락한지 오래다. 나눔마저, 공산주의마저 포섭한 자본주의는 언제까지, 어디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까.
추신
지난해 시작한 「이상용의 영화일기」는 더 이상 연재되지 않습니다. 이를 대신하여 「메타 코멘터리」를 통해 보고 읽은 것의 나열이 아니라, 좀 더 읽고 들어가고자 하며, 자주 읽고 쓴 것을 또다시 읽고자 합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