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카우프만(Charlie Stuart Kaufman)의 영화는 당혹스럽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데다가 캐릭터는 시종일관 우울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고, 갈등이 무엇인지 드러나기도 전에 캐릭터는 온갖 문학과 영화를 넘나드는 레퍼런스를 인용하는 현학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의 제이크(제시 플레먼스)와 그의 여자친구(제시 버클리)가 제이크의 부모를 만나러 차에 오르는 첫 에피소드는 그의 방법론을 잘 드러낸다. 권태기에 다다른 여자친구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는 제이크와의 연인 관계가 더 깊어져서 안 될 이유를 혼자서 되뇐다. 그녀는 내레이션으로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친구의 과거를 알려는 호기심 때문이라고 뇌까리면서도 한편으로 결혼이라는, 연애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 두려워하는 감정을 토로한다.
이때 난데없이 핸드폰이 울리고, 외-화면에만 있어야 할 여성의 내레이션에 남자가 반응을 한다. 둘 사이의 대화는 어딘가 어색하고 답답하며, 왜인지 부조리극으로도 보인다. 둘 다 의식의 흐름대로 자기가 할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다. 둘은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나 비평가를 언급하며 대화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라든지, 미국의 문제적인 천재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 독설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비평가 '폴린 카엘의 비평 등 온갖 이름이 쏟아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용되는 맥락을 알 수가 없다. 둘이 대화하는 가운데에 노인이 트럭을 타고 고등학교로 가는 장면이 급작스레 삽입되고, 차창 너머 흔들리는 그네가 있는 허름한 집의 이미지는 초현실적이고 으스스한 정서를 자아낸다. 겨우 잠깐 본 것인데도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관객은 이 당혹스러움을 그냥 두 눈으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당혹감이 서스펜스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의 영화는 단서를 계속 흩뿌리지만, 그 어떠한 단서도 명확하지 않다. 모든 정보가 나열될 뿐이지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서스펜스가 서사를 관통하는 맥락에서 특정 정보가 해결되지 않아서 생기는 긴장이라면,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는 서사의 모든 정보가 맥락화되지 않는다. 사건은 인과로 설명되기보다는 쓰레기 더미가 쌓이듯 중첩되어서 점점 복잡해진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속 '여자친구의 정체다. 이 여성은 루시라고 불린 순간 루시에게서 전화를 받고, 루이자라고 불린 순간 루이자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이본이라고 불리는 순간에는 이본에게 전화를 받기에 이른다. 그녀는 숏이 전환될 때마다 과학자로도, 화가로도, 물리학자로도 등장한다. (심지어 시인이기까지 하다.) 그녀의 이름과 정체성은 남자에 의해 불리는 순간, 혹은 매초 변화하는 것이다. 이는 처음 보는 이에게 난해하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카우프만은 서사의 개연성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 퍼즐을 조립하듯이 모든 정보를 하나로 모으는 데에도 무심하다. 이는 베르그송이 설명하는 꿈의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각종 대상이 내 앞에 줄지어 나타나는 것을 본다. 그것들 중 무엇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침대 위에 아주 고요하게 누워 있으면서도 사방으로 오가며 일련의 모험을 겪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내 말을 듣고 사람들의 대답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나는 혼자이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정신적 에너지』, 앙리 베르그송, 엄태연 역, 그린비, 2019, p.99) 캐릭터가 계속 은폐된 동기를 지니고 행동하고 있기에 관객은 캐릭터가 하는 행동을 의뭉스럽게 따라갈 수밖에 없다. 찰리 카우프만은 그저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붕괴하는 호접지몽을 찍으려는 것일까. 그러나 카우프만은 단순히 서사로 꿈과 현실을 모호하게 하는 환상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되려 서사 자체를 질문하려고 한다.
인간은 여태껏 이야기를 삶을 이해하는 틀로 분석했다. 이야기는 살아야 할 의미를 부여하고자 그저 나열된 사건에 불과한 물리적인 시간에 인과를 더하고 무의미와 부조리뿐인 세계를 논리정연한 체계로 정리한다. 삶을 이야기로 가공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삶의 연속성을 일정한 틀 아래서 이해할 수 있어서다.
삶은 그래서 이야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소설같다"나 "영화같다"라는 직유가 인과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 삶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데에 동원되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소설같다와 '소설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이는 예술 창작을 철학적으로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을 완결되고 (기억에 쉽게 담을 수 있을 만큼의) 일정한 크기(처음과 중간, 끝)를 지니는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정의한 데에서부터 계속된 논의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을 하나의 생물로 보고,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이 개연성과 필연성에 기반한 크기와 배치에서부터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는 예술가의 창작술(poietika)로서 예술이 역사보다 더 철학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나열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야기는 개연성과 필연성으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역사는 어떠한 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특수성을 지니는 데에 반해, 서사는 모두에게 일어났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루기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영화는 편집으로 장면을 하나하나 잘라내 만든 것이기에 인생과 유사하지 않다. 한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영화들은 작가의 편의에 따라서 인물의 삶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로 가공한다. 한 인간의 삶을 길어야 두 시간인 시간에 담으려면 삶을 조각내고 재조립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일 것이다. 캐릭터의 삶이 비극적이든 아니든 작가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저만의 사상을 전달한다. 이야기의 탄생에 작가가 사는 시대의 윤리관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가공을 통하여 주인공(hero)은 영웅(hero)으로 격상된다. (할리우드 상업 영화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천 개의 얼굴을 지닌 영웅』에 정리된 플롯에 따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찰리 카우프만은 영웅의 삶에는 무관심한 듯하다. 그의 영화에는 영웅이라고 부르기에는 보잘것없고, 나르시시즘에 허우적대고 찌질하기까지 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의 영화가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은 이유는 영웅이 되지도 악당이 되지도 못한 이들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시네도키, 뉴욕>(2010)에서 케이든이 연극의 제목을 끝내 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장 보통의 삶에는 제목도 형식도 없다. 인생을 서사화하려는 야심은 하나같이 실패한다. 케이든은 아내와 딸과 헤어진 뒤 수상한 맥아더 기금으로 '외롭고도 망가진 존재인 자신의 삶을 다루는 연극을 만든다. 그는 무대에 도시를 새로 건설하고, 연극 단원들에게 매일 그날 일어날 일을 적어둔 쪽지를 전달한다. 예술은 '나를 드러내는 작업이기에 케이든은 자신마저도 대역이 대체하게 만든다. 무대에 현실과 똑같은 다른 세계가 탄생하지만, 규모가 확장되기만 하는 그의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끝난다. 현실이 무한하듯 케이든은 예술도 무한하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한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라는 말을 남긴 채 회색에 잠겨 가는 케이든을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그 일이 끝내 불가능하다는 암시만 남긴 채로 말이다.
'서사의 실패는 카우프만의 서사에 반복되어 드러나는 모티프다. 삶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 불가능하다는 그의 비전은 계속 성에 접근하려는 프란츠 카프카의 캐릭터 'K와 유사하다. (카프카와 카우프먼의 이니셜이 같다는 점은 모종의 연관성을 지닌 듯한 착시를 자아낸다.) 카프카는 자신이 성장한 경험이 부재하기에 인물이 성장하면서 기성사회에 입사하는 교양소설을 쓰는 데 실패했다.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카프카는 짧은 글로 인생의 전모로부터 도피한다. 그의 세 장편이 그러하듯, 카우프만의 세 영화도 삶이 이야기로 쓰일 수 없다는 어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그로 인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에 실패하기에 이른다.
찰리 카우프만의 캐릭터는 반-영웅anti-hero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반-영웅은 빌런Villan과는 다르다. 빌런은 영웅과 대척하는 논리를 지니고 영웅과 결전을 벌이는 숙적을 의미하는 데에 반해서, 반-영웅은 영웅이 아닌 사람에 불과하다. 반-영웅을 주인공으로 써서 그것을 햄릿과도 같은 보편성을 지니는 캐릭터로 탄생시킨 이는 도스토옙스키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화자 지하생활자는 나르시시즘과 과대망상, 정치적 열정과 그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무력감을 오가는 등등 자기모순에 사로잡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반-영웅은 당시에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은 페테르부르크의 급진적인 인텔리겐찌야(지식인)의 무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에 유행한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어떻게 살 것인가?』을 중심으로 퍼진 공상적인 사회주의를 이룰 힘도 없는 데다가 2x2=4라는 수식으로 드러나는 이성 중심의 서구 사상에 따르지도 못했다. 또한, 러시아 민중과도 괴리감을 느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인텔리겐찌아의 무력감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 분열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때의 지하는 인텔리겐찌아의 목소리가 묵살당하는 담론장을, 한편으로는 그들의 분열된 내면 풍경을 일컫는다. 찰리 카우프만의 관심은 후자에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의 정치적인 목소리를 발견하기는 힘들며, 카우프만의 캐릭터는 내면에 치중한다. 반-영웅으로서의 지하생활자는 진정한 삶으로부터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자존감과 유리되어 있고, 인생을 서사로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고, 카우프만의 병리적인 캐릭터도 자기혐오감을 기반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인간인데 병들었다... 나는 악독한 인간이다. 나는 매력이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내 간이 아프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병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다." 지하생활자의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아를 서술할 수 있는 윤리적인 체계가 없는 데다가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지만, 병의 정체를 모른다. 그들은 영웅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기반을 상실해버린 상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의 서문에서 지하생활자를 우리 사회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 인물로 이야기한다. 지하생활자는 그에게 동시대를 보게끔 하는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의 독백은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쓴 스파이크 존즈의 <어댑테이션>(2022)의 도입부에서 독창적으로 변형된다. "이 대머리에 독창성이 존재하기는 할까? 이렇게 진부하기도 힘든데. 병원에 가서 다리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 혹이 아무래도 이상해. 치과에서 또 전화가 왔는데 안 간 지 한참 되었다. 미루는 습관을 버리면 행복해질 텐데..."라는 독백이 한참 동안 흐른다. 이윽고 감독의 전작인 <존 말코비치 되기>(1998)의 촬영장이 나온다. 찰리 카우프만으로 분장한 니콜라스 케이지가 촬영장 한가운데에서 무기력한 표정으로 서 있다. 찰리 카우프만이 배우로 직접 등장해 본인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지하생활자로 은유하는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작가 자신을 지하생활자로 지칭하는 행위는 <시네도키, 뉴욕>에서도 등장한다. 케이든이 맥아더 기금으로 필생의 연극을 제작하기 시작할 즈음, 단원에게 하는 선언도 눈여겨볼 만한 것이다. 케이든은 매일 그들, 혹은 자신에게 그날 할 일을 쪽지로 주면서 "나의 암울하고 비겁한, 외롭고 망가진 존재 속으로 파고들게 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는 <시네도키, 뉴욕>의 2막을 시작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1부는 지하생활자의 무의식을 서술하는 장이고, 2부는 지하생활자가 지베르코프 일당과 어울리려다가 실패하고 우연히 만난 성노동자 리자와 대화하는 현실을 서술하는 작품이다. <시네도키, 뉴욕>은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역전한 방식으로 서술된다. 1부는 케이든의 현실을, 2부는 연극에서 계속 인생을 서사로 구축하려는 케이든의 관념과 창작을 다룬다. 케이든의 자기모멸은 1부에서 괜찮은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호명되지 못하고 거기에 모두 실패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카우프만이 3막, 혹은 신화적인 서사에 따라서 전개되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거부하고, 도스토옙스키의 분열적인 내면 서술을 영화 문법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근대 소설은 작가가 인물의 내면 풍경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수 있지만, 영화는 그것을 이미지로 드러내야만 한다. 찰리 카우프만은 지하생활자의 분열적인 무의식을 풍경으로 번역하고자 여러 영화적인 장치를 선택한다. 그는 <이터널 선샤인>등 여러 걸작의 각본을 쓰긴 했지만, 겨우 세 편의 영화를 찍은 영화감독일 뿐이다. 그럼에도 감독으로서 자신만의 새로운 영화 문법을 발명해냈다.
내 지각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이므로
카우프만은 반-영웅의 시간을 현재 시제로 정한다. 그의 영화(혹은 각본)에는 플래시백이 잘 삽입되지 않는다. 시간을 명확히 지시하는 기호도, 앞뒤를 뒤바꾼다거나 인과를 뒤집는 편집도 쓰이지 않는다. 도리어 평이하다고 할 수 있는 편집으로 인물을 실시간으로 추적한다. 이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지하생활자가 계속 수기를 쓰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수기를 쓰는 순간은 실시간이며, 연대기로 이어져 있다. 그는 마치 플래시백의 삽입이 삶을 조작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이 현재 시제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는 카우프만의 운명론적 시간관에서 비롯한다. 인간은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미래도 축적된 과거에 기반한 상상에 불과하다. 현재는 부패해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과거의 퇴적물에 불과하다. 과거가 지금은 물론 미래까지 삼키고 마는 카우프만의 시간관은 그야말로 공포스럽다. 그의 영화에서 플래시백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는 듯하다. 플래시백은 현재에다가 과거의 파편들을 급작스레 삽입하고, 그 둘을 편집으로 이어서 하나로 여기게 한다. 즉 플래시백은 다른 시공간의 접합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연속되는 시공간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하기에, 현재만이 우리가 살아있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카우프만의 서사를 비선형적이라 단정하는 것은 게으른 접근이다. 그의 서사는 표층과 심층, 두 층위로 나뉜다. 스크린에 보이는 표층 서사는 불가역적인 시간에서 성립한다. 불가해한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기에 관객은 이를 당혹스럽게 볼 수밖에 없다. 한편 관객의 능동적인 해석을 바라는 심층 서사는 인물의 과거와 무의식들이 뒤섞인 비선형적 시간에서 성립한다. 과거에 본 것이 변형되어서 드러나는 꿈의 이미지다. 카우프만은 이 심층 서사가 표층 서사에 침입하게끔 해서 교란을 일으킨다. 그는 우리가 마주하는 지금이 과거의 또 다른 버전이자 영원회귀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삶을 꿈과 현실이 사라진 호접지몽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꿈-현실의 괴리가 차츰 사라지는 데이비드 린치의 방법론과 다르게 꿈이 도리어 현실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한다.
카우프만이 죽음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그의 시간관이 더 선명히 드러난다. 인간이 주름살과 희디흰 털에 뒤덮여 죽어가듯 그의 영화는 끝에 다다를 즈음에 화면에 '회색빛을 물성으로 드러낸다. 영화도 인간처럼 노화를 경험하는 셈이다. <시네도키, 뉴욕>의 엔딩만큼이나 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없다. 엔딩에 다다를 즈음에 카메라는 텅 빈 연극 무대를 비춘다. 연극 연출가 케이든(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자신의 인생을 연극에 그대로 그려내고자 한 야심이 담긴 무대이다. 케이든은 거기서 인생을 그려내려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을 복제한 배우들은 모두 죽었고 남은 것은 무대뿐이다. 케이든은 거대한 연극 무대를 혼자 누빈다. 그는 우연히 만난 여자의 어깨에 기대어 사랑을 고백하면서 단말마를 뱉는다. 그때 회색이 화면에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둘은 스크린의 모든 것을 뒤덮는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도 폭설이 내리고 있는 주차장에 있는 트럭에 앉아서 "이제 그만 끝낼까 해"라고 중얼거리는 늙은 제이크의 얼굴에 푸르른 화면이 디졸브로 등장하다가 제이크의 얼굴을 뒤덮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찰리 카우프만이 시간의 불가역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우프만은 화면에 어려 있는 회색의 질감으로 죽음을 물질화한다. 그제야 인간도 죽는 순간에는 동물로서 죽는다는 냉혹한 진실에 다다른다. <시네도키, 뉴욕>의 케이든은 젊은 시절보다 뚱뚱한 육체로 죽어간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서는 비대한 몸뚱이를 이끌고 가는 제이크의 앞에다가 구더기가 낀 돼지를 포개며, 그가 죽는 과정을 담는다. 카우프만의 운명론적 시간은 그가 재현하는 공간과 합쳐지는 순간에 괴력을 발한다.
카우프만은 한 인간의 인생이 세계 전체를 압축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영화도 러닝타임이 끝나는 순간 인생처럼 죽게끔 하는 것이다. 이는 '제유라는 방법론으로 드러난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시네도키(synedoche)는 비유법 중 하나인 제유를 뜻한다. 제유는 어떠한 대상의 일부가 그 대상 전체를 함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세계의 일부이지만, 세계를 담고 있기에 제유의 대상일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이 쓴 책의 제목을 빌리면, '호두껍질 속의 우주인 셈이다. 이는 지하생활자가 계속 생각이 휘몰아치는 무의식을 지하로 규정한 것을 공간화한 것에 가깝다.
찰리 카우프만은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더 정확히는 특정 공간에 인간의 무의식을 압축하고 바깥을 세계라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나의 무의식을 세계로 확장한다. 이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제시의 대사로 드러난다. "나는 자동차 여행이 좋아. 내 머릿속보다 큰 세상이 있다는 걸. 알지? 통찰력."이라는 대사는 찰리 카우프만의 인생관을 잘 드러낸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의 존 말코비치의 무의식은 7과 1/2층이라는 공간에 드러난다. <시네도키, 뉴욕>의 케이든은 폐쇄된 연극 무대에 기억에 남아 있는 뉴욕의 풍경을 그대로 그려낸다. 또한 거기에 있는 인간의 일상을 메모로 다 정리해 거기다 우주를 구축하려 한다.
카우프만의 문제의식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서 참고하는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불안과도 이어진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스스로 스물일곱에 중년의 위기를 경험했다고 고백하며, 인터뷰에서 "전 제가 머리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라고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주제 의식은 휴버트 드레이퍼스의 지적대로 그의 소설 제목처럼 <무한한 농담infinite jest>으로 가득한 세계를 다룬다. 계속 행복과 재미를 추구하는 쾌락주의의 시대는 실존적인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 혹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자 하는 인간의 주의를 계속 빼앗는다. 계속해서 스스로 사로잡는 잡념과 중독을 통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는 인간은 불행에 이를 수밖에 없고, (포스터 본인이 마약과 설탕, 섹스 중독자이기도 하다.) 인생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무의식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다. 카우프만은 월리스를 따라 은폐된 실존적 불안과 세계를 이분화하되, 전자가 후자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시공간을 연극 무대로 연출하려는 이유도 여기서 온다. 그의 영화 속 캐릭터는 바깥에 있는데도 꼭 실내에 있는 듯하다. 화면이 밝아야 할 순간에도 어두침침하게 보인다. 영화에서 볕이 별다른 기능을 하고 있지 않아서이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케이든이 낮에 극장 직원 헤이즐과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데이트할 때 볕은 뒤로 빠져있다. 화창하기만 한 날씨는 이 둘의 사랑에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않는다. 로맨스인데도 로맨틱한 감정은 배제된다. <아노말리사>의 오프닝에서 마이클이 탄 비행기가 지나가는 창공을 비출 때도 마찬가지다. 구름 너머로 볕이 어렴풋이 드러날 뿐이다. 그때 설렘이 아닌 권태가 화면에 감돈다. 이때 볕은 프레임 외부에서 내부로 침투하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다. 영화의 프레임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는 디제시스에서도,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볕은 창문을 통과해 들어와서는 프레임이 열려 있음을 드러내는 효과를 자아낸다. 볕은 음향이 그러하듯이 프레임에 구속 받지 않고 번져가기 때문이다. 이는 프레임 바깥에 무언가가 있는 듯한 전조를 내비치고, 영화 안에 무한한 세계가 담겨 있다고 느끼게 한다.
카우프만의 영화에서는 볕이 들어도 감정이 증폭되지 않는다. 한낮이 배경이더라도 볕은 오로지 사물을 환하게 비추고, 시간을 지시하는 기능만 담당하는 듯 보인다. 실내조명처럼 기능하고 있는 볕은 화면에 감도는 생기를 차단하며 오히려 연극 무대와도 같은 인위성을 만드는 듯하다. 그는 실제로도 연극 무대 같은 장소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그는 여태 연극을 다루거나(<시네도키, 뉴욕>), 연극인 작품을 각색했다(<아노말리사>). 근작에서는 공간을 최소화해서 연극적 세팅(<이제 그만 끝낼까 해>)을 연출했다. 실내에서 하는 연극에 기반을 두었기에 그의 영화에는 풍경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의 캐릭터는 도심을 돌아다니지 않으며 무대(<시네도키, 뉴욕>)나, 호텔(<아노말리사>), 차 안이나 집 혹은 학교(<이제 그만 끝낼까 해>)처럼 폐쇄 회로로 그려지는 공간에 머무른다. 밖은 그저 인물의 이동 경로로만 등장한다. 더 이상한 것은 캐릭터의 집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시네도키, 뉴욕>과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 나오는 집의 벽은 일정한 패턴과 정갈한 톤으로 색칠이 되어 있다. 실내 공간의 이러한 색감은 영화가 현실과는 분리된 공간으로 보이게 한다.
카우프만의 공간은 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가 그이가 살아가는 세계의 한계라는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하기에 영화 전체가 한 인간의 내면을 공간화한 것으로도 느끼게 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한 개인이 어떻게 세계를 왜곡하느냐의 문제로도 보이지만, 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지니는 실존적인 한계의 알레고리에 더 가깝다. 카우프만은 이어져 있는 듯하지만, 타인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현대인의 집단 무의식을 자의식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서사
카우프만이 각본을 담당하기도 한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그가 구사하는 서사 전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언뜻 보기에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엘(짐 캐리)의 무의식을 조엘 스스로가 탐사하는 로드무비에 가깝다. 조엘이 기억 속 과거의 시공간을 오가지만 정작 사건이 일어나는 시공간은 현재다. 카우프만은 플래시백으로 보이지 않도록 각본에다가 조엘의 기억을 지우는 라쿠나 직원들이 잠든 조엘의 옆에 있는 에피소드를 삽입한다. 매리(커스틴 던스트)와 스탠(마크 러팔로)은 조엘의 침대에서 뛰논다. 둘의 행동은 조엘의 꿈에 개입한다. 관객은 스크린에서 이들의 과거를 보겠지만, 영화의 시공간은 현재에 고정되어 있다. 과거도 미래도, 꿈도 현실이라는 액자에 포함된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언뜻 스치는 듯한 장면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케이든은 딱 한 번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에 재생되는 영상은 영화의 엔딩이다. 액자 구성에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 현재가 하나의 시제에 통합되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이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서 청소부가 <오클라호마!>뮤지컬을 마주하는 장면으로 되풀이된다. 자신이 언젠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시간 안에 있는 것이다. 카우프만이 그리는 시공간은 단일한 시공간에 세 개의 시공간이 결합된 기이한 시공간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홍상수가 숏의 잘못된 연결faux raccord로 그려내는 어긋난 시공간의 구성이 카우프만의 영화에서는 한 미장센으로 뭉쳐져서 드러난다. 카우프만의 시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물의 움직임이다. 그의 캐릭터는 저마다의 동기로 공간을 오가며 움직이고, 공간에 따라서 다른 시간을 체험한다.
<시네도키, 뉴욕>를 볼 때의 당혹감은 보이는 시간과 체험되는 시간 사이의 불일치에서 온다. 케이든은 아내와 딸 올리브를 독일로 떠나보낸 뒤에 클레어(미셸 윌리엄스)와 재혼한다. 그 뒤 딸의 행방을 확인하러 베를린으로 떠난다. 이때 시간을 지시하는 신호 없이 사건들이 일어난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따라가던 중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급작스레 자라버린, 뱀 문신을 한 케이든의 딸 올리브다. 독일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 그가 연극 무대에 다시 서서 단원들에게 쪽지를 나누어줄 즈음에야 정확한 시간이 지시된다. 한 단원이 그에게 "연극은 언제 상연되냐"고 질문하면서 시간이 17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낯선 당혹감은 케이든이 다시금 딸을 마주할 때 나타난다. 연극 무대를 걷던 케이든이 급작스레 병원으로 도달할 때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하다. 딸은 죽어가는 중이고, 그를 비난한다. 너무 빨리 흘러가는 시간이 갑자기 체험된다. 공간의 이동이 급작스레 시간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공간의 흐름은 시간의 흐름에 선행한다. 카우프만은 공간이 시간을 매개하는 연극성을 통해서 영화의 시간을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케이든의 주름이 급작스레 늘어나고 17년이라는 시간의 경과가 갑자기 체험되듯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서도 폭설은 느닷없이 온 세상을 뒤덮는다. 카우프만은 인물들이 차에 있든, 밖에 있든, 인물보다 눈을 화면의 앞에 배치한다. 우리는 눈의 입자를 볼 수 있되 눈이 내리는 경로는 예측할 수 없다. 막 쏟아지는 눈의 이미지가 그가 영화에서 구현하려는 서사 구조와 비슷하다. 삶은 어쨌든 계속되고, 매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과거를 마주할 수도 있고, 미래를 마주할 수도 있는 슈뢰딩거의 상자와도 같다. 세부는 파악할 수 있되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만들기 불가능한 것이다. 카우프만의 영화를 서사적인 개연성으로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눈발이 흩날리듯 그의 영화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계속 나온다. 자신이 급작스레 늙었다는 불안(<시네도키, 뉴욕>), 사랑이 환멸로 바뀌는 순간(<아노말리사>), 이루지 못한 꿈에 느끼는 회한(<이제 그만 끝낼까 해>)이 느닷없이 느껴진다. 또한 그의 작업 중 가장 로맨틱한 이야기일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사랑이 무의식에서 급작스레 나타나는 과정, 유년기의 기억이 나타나는 과정이 평행선처럼 이어진다. 이 모든 사건은 의도된 연대기적 서술로 이어져 있다.
그가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듯 보이는 스파이크 존즈의 <어댑테이션>에서 이 문제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무 플롯도 없는 수전 올린의 에세이 《난초도둑》을 각색한 이 영화는 《난초도둑》을 각색adapt하는 과정을 자학적으로 다룬다. 《난초도둑》을 각색하는 과정은 결말에 이르러 할리우드 시나리오 룰에 적응하는 적응adapt으로 전환된다. 찰리 카우프만은 이 에세이를 그대로 쓰고자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돈은 할리우드의 정석적인 극작술에 따르는 쌍둥이 동생인 도날드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가 더 잘 번다는 것을 알고는 열등감에 사로잡힌다. 영화의 가장 웃긴 장면은 로버트 맥기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할리우드 스토리텔링의 틀을 굳힌 스토리텔링 이론가 맥기에게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은 질문한다. 사건이 없을 때, 스토리는 어떻게 짜냐는 질문이다. 여기에 극 중 카우프만은 인물이 변하지도 않고, 깨달음도 없고, 노력해도 좌절되고 해결되는 것도 없는 것이 현실이라 지칭한다. 극 중 맥기는 위기나 갈등이 없는 각본은 누구도 읽지 않으며 이 갈등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거라 호통친다. 이때부터<어댑테이션>은 로버트 맥기가 분류한 위기와 갈등이 가득한 이야기로 전환되고, B급 영화로 전락한다. 그는 할리우드가 삶을 담으려 하는 순간에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자학적 퍼포먼스는 개인을 획일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삶을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체계의 무용성을 드러낸다. 남자는 차에서 뜬금없이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넘버를 틀고, 여자친구에게 갑자기 밤새 머무르라고 한다. 집에 가겠다는 여자를 데리고는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며 쌍둥이 점원이 있는 가게에 들른다. 마지막에는 다니던 학교에 들러 학교를 둘러보게끔 만든다. 그제야 그가 늙은 청소부로 죽어가는 중이고, 학교에서 오클라호마를 공연하는 학생을 보면서 회한에 빠져 죽어가는 중이라는 단서가 드러난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루시이자 루이자, 이본이라는 이름을 지녔을 것이며 그들과 사랑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부모에게서 인정받지 못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물리학자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으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등의 책을 읽고 살지만, 누구와도 이야기가 통하지 않게 자랐음을 알 수 있다. 학교에서 뮤지컬 <오클라호마!>를 공연하는 여자 학생을 짝사랑했으나 좌절되었다. 그가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은 모두 TV에 있다는 듯 제이크는 가짜로 제작된 저메키스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본다. 뮤지컬 장르에서나 그는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다. 할리우드 서사가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진짜 삶은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와 꿈, 뮤지컬을 결합해낸 <라라랜드>의 희망은 그 누구의 삶도 설명하지 못한다. 제이크는 여러 레퍼런스를 인용해 자신의 삶을 비평의 방식으로라도 설명하고자 한다. 인생을 할리우드의 문법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삶은 어떠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일정한 서사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또한 레퍼런스로 인생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순간마다의 자신을 설명할 뿐, 인생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카우프만의 영화가 여러 장르를 경유하려 하는 것도 이러한 실존적인 인식에 의해서이다. 부모와 식사하는 자리는 호러영화 같고, 여자와 못 이룬 사랑은 뮤지컬로 그려진다. 이윽고 그가 즐겨보던 애니메이션 속 유령들이 제이크와 합쳐진다. 스크린 너머의 영화들이야말로 노인 제이크를 외롭게 한다. 우리는 나열된 단서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심리적 정황만 발견할 뿐이다. 카우프만의 영화는 끝에 이르러서 현재로 되돌아온다. 우리 삶이 그리 엉망진창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도입부만큼 카우프만의 영화에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이다. 이는 카우프만의 인물들이 무한 증식하는 방식으로 변주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현상계는 내가 인지하는 감각 기관과 인식 형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현실의 한계는 나의 한계로 드러난다. 그 너머는 인식할 수 없다. 시간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나 또한 내재되어 있다.
카우프만의 영화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들을 마주할 때의 당혹감을 잘 드러낸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존 말코비치는 자신의 뇌로 접속한 순간에 뇌라는 공간에 가득한 수많은 존 말코비치들을 마주한다. 이 세계가 나의 표상이라는 듯 그는 수많은 '나가 세계를 구성하게끔 만든다. 트렌스젠더, 퀴어로의 말코비치도 그곳에 존재한다. 카우프만의 캐릭터가 타자를 마주하기 시작하는 것은 내가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소수자를 포함한 복수의 주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마주하면서부터다.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고야 말 때의 캐릭터는 당혹감에 빠지고 만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케이든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새미를 마주했을 때 케이든은 그 자신을 마주한다. 카우프만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여자가 그러했듯, 한 인간을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인식하게 만든다. 도플갱어 모티프가 제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는 <어댑테이션>이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찰리 카우프만은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시나리오를 쓰는 쌍둥이 동생 도날드 카우프만의 이름을 자신과 공동 저자로 올린다. 도날드 카우프만은 실제 존재하지는 않는 영화 속의 가상의 인물로 창조된 것이나 카우프만과 같은 현실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찰리 카우프만은 현실에서도 계속 도날드 카우프만과 갈등할 것이라는 신호이며, 하나의 인간이 둘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여러 인간은 한 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SF소설처럼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사실 카우프만의 세 영화에서 인간의 목소리보다 이상한 것은 없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오프닝에서 여자가 속으로 "이제 그만 끝낼까 해"라고 중얼거릴 즈음, 제이크가 반응한다. 볕이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요소라면, 카우프만의 영화에서 목소리들은 안에서 울리는 듯하다. 디제시스 바깥의 내레이션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디제시스 안으로 침투한다. <아노말리사>는 이 카우프만의 소리가 얼마나 기이한지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공항에서 막 호텔로 도착한 마이클은 아내와 통화한다. 톰 누난이 더빙한 아내의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지만, 이때의 사운드 디자인은 화면에 그 소리가 담겨 있는 듯 느끼게 만든다. 이때 마이클의 목소리는 모두 여러 캐릭터의 중얼거림으로 인지된다. 말코비치가 여러 말코비치에게 말을 걸듯이, 제이크가 여자에게 말하듯이, <어댑테이션>에서 카우프만 쌍둥이가 서로에게 말하듯 그의 영화에서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두 자아가 계속 대화를 나눈다. 이는 내 안의 나와 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레이션과 스크린의 대화는 결국 인물의 신경증으로 보이기도 하며, 카우프만도 백인 헤테로 지식인 남성으로의 한계를 실감했을 것이다.
<아노말리사>는 카우프만 영화 중 유일하게 명암이 대비되는 영화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인간이 아닌 인형이 움직이게끔 할 때, 카우프만은 유독 피부의 질감에다 힘을 쏟는 듯하다. 인간과 타인을 분리하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피부고, 이러한 피부가 하나의 물질처럼 보이는 순간에 인간은 생명을 잃은 듯 보인다. 비즈니스맨인 마이클은 권태에 빠진 채로 세계를 마주하는 인물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은 피부를 지니고 똑같은 목소리를 지닌 듯 인식한다. 우연히 호텔에서 만난 리사만 그의 세계에서 다른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다. 마이클은 리사를 유혹해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데 성공하나 리사가 그 다음날에 목소리를 잃는다. 목소리를 잃는 순간에 리사의 뒤로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카우프만의 세계가 온통 '나들의 향연이었다면, 리사는 그의 세 영화에서 유일한 타인으로 등장한다. 마이클이 환멸을 겪고서 집에 돌아가 일본식 인형을 보면서 좌절할 때 리사가 등장한다. 엔딩에서 카우프만이 리사에게 그의 세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강렬한 빛을 쐬어줄 때, 이것이 카우프만의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카우프만의 영화가 상투적인 인생을 인정하기라는 단순한 결말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카우프만은 내가 내 바깥의 세계와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현재형으로 남겨둠으로서 결국 이 갈등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잠깐의 구원만이 허락될 뿐이다.
카우프만의 방법론은 후대의 여러 영화에 영향을 끼쳤다. 대니얼스는 그의 직계 후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은 <스위스 아미 맨>(2017)에서 노골적으로 <이터널 선샤인>을 모방했다. 또한 행크와 매니의 이야기는 카우프만이 즐겨 쓰는 모티프인 도플갱어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시체인 매니가 살아있다고 상상하는 것마저도 행크의 자의식이 우주 전체로 확장되는 찰리 카우프만의 세계관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는 세계관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저만의 방법론으로 발전시킨다. 카우프만의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자아 분열을 멀티버스라는 아이디어로 번안해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에블린(양자경)이 하나의 에블린이 아니라는 것을 묘사한다. 양자경은 매초 신념에 따라서 인생을 결정했고, 그 선택의 중첩으로 가장 평범한 에블린으로 자라났다. 이는 카우프만의 남성성이 동양인 여성으로 전도된 상이기도 하다. 양자경이 공간에 따라서 여러 소수자를 만나는 작업은 카우프만의 유산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레즈비언인 국세청 직원과 SM 플레이어 등은 존 말코비치의 또 다른 자아와 유사하다.
카우프만은 자의식의 심연을 탐구했고, 이는 세계의 무한함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목소리의 충돌, 공간에 따른 시공간의 매개, 외-화면의 내레이션과 스크린 속 캐릭터의 대화는 내가 인지하는 세계 외에도 무수한 세계가 바깥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는 영화가 메타버스를 여는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는 무한한 하나의 세계 안에서 하나의 프레임을 선택하는 작업이다. 카우프만의 영화는 하나의 프레임이 개개인이 갇혀 있는 감옥에 불과하고, 세계는 그런 개인의 무수한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우프만이 다른 나 자신을 조우하는 것은 멀티버스를 조우하는 작업과도 같다. 무수한 원자로 흩어져 있던 개인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감독은 우리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소수자가 있고, 그 소수자와의 공생을 모색하는 세계를 연다. 이 무한한 세계는 디즈니가 소수자를 마주하는 방식의 대안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디즈니는 환상적인 세계관에서만 소수자를 세계에 소환할 수 있는 데에 비해 카우프만의 세계는 각자 다른 현실에 있는 소수자가 스크린 아래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여기에 카우프만이 은연중에 그려내는 공상적 유토피아가 담겨 있다. '나가 소수자든 아니든, 가장 보통의 나가 모든 이와 동등할 수 있는 민주적 세계가 여기에 담겨 있다. 그 세계를 완성하는 것은 카우프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어져 나올 그의 후계자일 테지만.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