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부대' 썰이 되어버린 영화를 아시오
'댓글부대' 썰이 되어버린 영화를 아시오
  • 배명현
  • 승인 2024.04.19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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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드래곤과 촛불집회 사이에서 썰 풀기"

<댓글부대>는 PC방에서 글을 쓰는 '임상진'(손석구)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기자라 소개하며 촛불혁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과정을 요약한다. 1992년에 PC통신 유료화 반대를 외쳤던 시위가 촛불시위의 첫 시작이었다고 24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2016년 박근혜 탄핵 시위까지 이어졌다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있던 '만전' 그룹이 사과했고 그들은 그것을 모욕으로 기억한다고. 이때 영화는 보이스오버로 사태를 기술한다. 이 기술 방식은 러닝타임의 끝에서 작품 자체가 하나의 '썰'이었다는 영화의 구조와 엮이며 전지적 시점의 진행이 '형식과 내용의 일치'한다는 쾌감을 만들어 낸다. 

다만, <댓글부대>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퍼즐처럼 정합하게 맞추는 상태로 영화를 끝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서사적 창작물이 재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건 장르적 컨벤션에 머무는 것에 불과하다. 영화는 소재만으로 현실의 어떤 지점을 지시하고 있음을 내세운다. 여기서 <댓글부대>는 '형식과 내용의 일치'라는 장치를 영리하게 확장 시킨다. 영화 바깥으로 탈출하는 다리로 장치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넌 관객은 감상 차원의 관람을 지나 영화 자체가 음모론이었다는 결말에 도착한다. 물론,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러닝타임 동안 '고발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을 뿐, 서사-내용은 모두 사실'이라는 임상진의 능청스러운 목소리만이 우리 곁을 맴돌 뿐이다. 실화를 모티프로 한 많은 영화들이 러닝타임의 첫 시작에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달아 놓는 로그라인 한 줄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진행하는 내내 우리는 흔들리며 생각한다. "이거…진짠가?"

영화에서 임상진은 목소리의 형태로 서사 바깥에 존재한다. 그는 사건을 설명할 수 있으며 숨겨진 전개를 들춰낼 수도 있고, 판단할 수도 있다. 관객에게 정보를 직접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가장 밀접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의 설명만으로는 관객을 음모론의 세계로 견인하지 못한다. 익숙한 진실보다 생경한 이야기가 관객에겐 매혹적이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음모론의 발생과 확산의 과정이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른 곳에서 힘을 빌려와야만 했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댓글부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음모론이 그럴듯한 것이라 설득하기 위한 밈을 증거로 제시한다. 쇼트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밈(Meme)은 관객의 혼란 가중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영화는 촛불집회를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제외하면,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의 모습을 인서트로 삽입하지 않는다. 사실이 부재한 자리는 밈의 차지가 된다. 물론 커뮤니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밈이 가상의 것이란 것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밈은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영화 속 밈을 실제의 그것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는 밈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치와 밀접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피부로 경험해 보았기에 영화 속 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가상의 밈을 수용하는 감각이 임상진의 선언과 상호 작용하여 <댓글부대>가 만들어 내려는 '가상의 진실'에 몸담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상의 진실'이란 영화 서사가 구출하려는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진실(흔히 주제 의식이라 표현되는 것이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이 아닌 임상진이란 캐릭터가 보이스 오버로 전달한 '썰'이다.

실제로 밈은 영화 속 음모론과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최초의 창작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고, 대상(밈 혹은 음모론)과 접촉한 개인이 대상을 자발적으로 실어 나른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우리는 이미 수많은 음모론(밈)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영화의 산업적 측면만 보아도 밈을 가진 개봉작들이 흥행에 유리한 결과를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밈은 실로 적합한 요소다. 그리고 영화가 음모론의 발생과 확산의 외형을 밈으로 구체화해서 보여주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장을 나온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사성이 아닌 차이이다. 영화를 복기했을 때, <댓글부대>는 음모론과 밈의 확산 과정을 질병과 유사하게 묘사했다. 음모론-밈은 특정 커뮤니티를 선택하고 커뮤니티는 접촉의 매개가 되어 이용자를 전염시킨다. 그렇게 감염된 이용자들은 자발적으로 음모론-밈을 확산시킨다. 질병이란 어휘의 뉘앙스가 풍기는 이미지로 알 수 있듯 우리는 '음모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다. 영화는 이 인식을 전복시키거나 변형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만전에 굴종하지 않는 임상진은 속절없이 당하지만 부역하는 인물은 윤택한 삶을 산다)었다가 하나의 썰이었다는 결말로 음모론을 압축시킨다. 결국 우리가 영화의 끝에서 마주하는 건 질문이나 인식이 아닌 재인지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댓글부대>는 음모론에 대한 관념을 전복시킬 필요도 없었고, 만전과의 대결에서 임상진이 승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관객으로부터 인식을 끌어낼 필요는 있었다. 관객이 영화 끝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상당수의 후기가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는 답답함을 토로하며 당혹감의 근거를 '열린 결말'에서 찾지만, 이것은 당혹감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아니다.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해 보인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의 수미상관 구조가 관객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영화를 보기 이전과 다름없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화를 보았음에도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와 다름없다면, 우리는 관람이라는 수고로움을 감내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느낀 불쾌의 정체는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박탈감이 아닌 무용해져버린 수고를 바라보는 허탈감이라고.

결말에 대한 의혹은 이 원점이라는 부분에서 부푼다. 작품의 결말은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비관적 허무주의의 자세를 취한다. 진실에 거짓을 섞는다면 대중을 동원할 수 있으며 동화된 개인은 다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퍼 나르며 동화된 개인은 만전을 적극적으로 수호한다. 목적을 가지고서 만들어낸 밈이 여론을 형성하고 기업은 흑막으로써 개인과 여론을 포섭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우선, 밈은 생성자의 의도에 복무하지 않으며 불화하기도 한다. 더욱이 작성자가 밈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도를 가진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밈이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바로 여기가 영화가 밈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태도이다. '무한도전'이나 '타짜'를 자발적으로 재생산하는 짤은 밈이 되려는 의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보다 거칠게 비약하자면 이 행위는 정보를 공유하고 변형하는 놀이자 게임이다. 반면 영화 속 밈은 여론을 움직이려는 탄생 의도를 가진다는 점에서 바이럴에 가깝다(억지밈Forced meme이 존재하긴 하지만 분명히 다른 개념이므로 이 글에선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바이럴은 표면 아래로 숨기려 하는 의도를 간파당하고 파기된다. 인스타 유머 계정이 업데이트하는 정교하지 않은 바이럴 게시물을 떠올려 보자. SNS와 커뮤니티에 익숙한 현재의 사용자들은 의도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영화의 오프닝에 삽입된 짤들이 가상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댓글부대>의 결말이 비관적 허무주의로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음모론과 밈의 관계를 엮어내는 데 필요했던 자본의 권력에 대응하려 했으나, 결국엔 실패한 인물과 그 인물의 서사 바깥에 있는 인물이 마지막에 써낸 결과물이 "기자였던 썰푼다"로 마무리 지어지는 것(서사 바깥에 존재하는 임상진을 서사 내부의 이야기 이후로 가정한다면). 두 실패를 영화는 어떻게 다루었는가. 전자는 반복된 시도와 같은 방식으로 좌절된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자의 이야기는 좌절된 인물이 자신이 당했던 방식으로 재기하려는 재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썰의 조회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기에 그의 이야기가 퍼져나가 '가상의 진실'이 만전에 반격을 가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두긴 하지만 다시 이전의 실패(만전이 팀 알렙의 정체와 활동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점과 임상진이 똑같은 방식으로 당했다는 점 등)들을 생각해 볼 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물론, 임상진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는 우리가 본 것(서사)을 깔끔하게 정리해 들려주지만(편집자) 그렇기에 동시에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목소리의 임상진의 썰이 사실이라는 그 어떤 증거도 없으므로). 때문에 마지막 임상진이 올리는 썰은 만전의 실상을 폭로하겠다는 의도가 아닌 서사 속 임상진을 기레기로 만들어버린 음모론처럼 만전에 복무하는 글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애초에 다양한 해석을 위해 고안된 영화였으므로) 그저 음모론을 다루기 위해 하나의 음모론이 되어버린 영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음모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영화 바깥에 실존하는 만전? 아니면 관객?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댓글부대
Troll Factory
감독
안국진

 

출연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급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0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3.27.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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