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구아다니노] 사진적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무명의 존재들
[루카 구아다니노] 사진적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무명의 존재들
  • 김민세
  • 승인 2024.04.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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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을 수는 없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중반부, 엘리오는 올리브가 읽던 책의 한 페이지를 열어 그곳에 꽂힌 메모를 읽는다. 엘리오가 집어 든 책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의 파편』, 올리브의 메모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책의 가장 핵심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한 문장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는 의미의 이 사유는 삶의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엘리오와 올리브의 욕망과 운명을 노골적으로 건든다. 이들의 욕망은 그들이 지닌 퀴어의 정체성과 맞물려 숨겨지고 연기되어 오해되기에 이르고, 자본주의 시대의 교환법칙을 벗어던지고 기이한 방식으로 뒤늦게 이루어진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올리브는 떠나고 겨울에 결혼 소식을 전한다. 금방이라도 엘리오의 가족에게 돌아올 것처럼 (두 번째라는 것이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그가 돌아올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강은 두 번 다시 똑같이 흐르지 않고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리브의 짧은 주석은 그 사유로부터 시작하는 운명과 한없는 슬픔을 부정하는 듯한 저항과 안간힘의 제스처가 된다. "강이 흐른다는 의미는 모든 것이 바뀌므로 두 번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함으로써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그가 이 주석을 통해 초점을 두고자 하는 것은 변화를 인정하고 체념하며 회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 자체가 그 존재의 이유인 순간을 무한히 긍정하는 것이다. 엘리오의 아버지 팔먼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의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기쁨을 간직하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여름이 지나고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이 흩날리는 눈을 보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문장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적어 내려가고 싶어진다.

모든 것이 변화하며 흐느적거리고 분출하는 여름과 달리 겨울은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지만, 같은 눈은 두 번 다시 내리지 않는다. 끝내 엘리오의 얼굴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 앞에 있다. 이쯤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올리브의 메모를 꺼내 들어 비평적 사유를 시작하기도 무색하게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모든 것은 변화하길 반복한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 다다라서는 가만히 정지되어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초기의 욕망 3부작(<아이 엠 러브>(2009), <비거 스플래쉬>(2015),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미장센은 고정되지 못해 넘쳐흐른다. 프레임 속 존재는 포커스에서 벗어나 불안하게 어른거리며, 그 씬의 배경이 되는 풍경은 수시로 장소를 뒤집고 뒤바꾸며,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매개로 장소를 일사불란하게 뛰어넘는다.

구아다니노는 이를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몽타주를 그려내려 한다. 속도, 슬로우모션, 아웃 포커스, 반복되는 몸짓, 교차편집, 점프 컷, 비선형적으로 맞물리는 사운드, 그리고 반사되는 거울상은 단일한 숏 안에서 혹은 이질적인 템포의 연결 안에서 기이한 몽타주를 만들어 우리의 감각을 건든다. 사물은 메타포가 되기 이전에 투명한 시각적·촉각적 이미지로서 우리의 눈에 도달하고, 그 어떤 의미에도 종속되지 않는 순수한 감각의 매개가 된다. 엘리오와 올리브가 서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복잡미묘한 언어의 교환이 보여주듯, 구아다니노의 이미지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자기 자신과 타자 사이에서 종속되면서도 자유로워지길 반복하며 의미 너머의 세계에서 유희한다.

 

 

다가오는 타자

<본즈 앤 올>(2022)에서 가장 뇌리에 박히는 순간 중 하나는 매런과 리가 처음 서로를 알아보았을 때다. 인디애나 주를 떠돌던 매런은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리라는 소년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슈퍼마켓 안의 한 남성과 시비가 붙은 리는 제대로 붙어보자는 의미로 그와 함께 매장 밖으로 나가고, 매런은 이를 지켜보기만 한다. 쇼핑을 마친 매런이 매장 밖으로 나오면 그 맞은 편에 있는 빈 건물에서 입과 가슴 부근에 핏자국이 가득한 리가 창문을 뛰어넘어 나온다(리가 창문을 뛰어넘으며 프레임에 등장하기 이전에, 빈 건물을 담고 있는 매런의 시점 숏은 사이즈를 좁혀가며 3개의 숏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구아다니노는 이를 의도적으로 불연속적인 숏과 이질적인 리듬에 따라 편집하였다). 매런은 설리번이 알려준 대로 이터(eater)의 냄새를 들이마신다. 리는 이윽고 피를 닦아내고 가방을 멘 채로 매런이 서 있는 곳(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이터의 냄새를 맡고 다시 매런 쪽으로 다가간다. 둘은 냄새를 통해서 서로의 정체를 깨닫는다.

타자가 누군가에게 다가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포의 감각과 관련한다. <본즈 앤 올>의 카메라가 경직되고 이질적인 리듬으로 살인과 식인이 행해지던 빈 건물을 조금씩 가까워지며 세 번 비추었던 것은 흡사 호러영화의 문법을 떠올리게 만들며, 공포의 감각을 예고한다. 이후에 문을 놔두고 창문을 뛰어넘으면서까지 대담하게 상체를 탈의한 채 다가오는 리의 몸짓은 그것이 아직은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임과 무관하게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는 그 움직임 자체만으로 서스펜스를 운반한다. 매런과 설리번의 첫 만남 또한 마찬가지다. 매런이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설리번은 도로 너머의 한쪽 끝 멀리서 매런을 바라보고 있다. 설리번은 도로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매런에게 다가오며 이터들이 맡을 수 있는 냄새에 관해 이야기한다. 살면서 처음으로 이터를 만난 매런은 미심쩍지만 그를 따라간다. 더불어 호숫가에서 수상한 남성 둘이 매런과 리를 찾아오는 장면에서도 남성들은 충분한 거리가 있는 곳에 차를 대고 멀리서부터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이어진 장면에서 그 남성들은 사람의 뼈까지 씹어먹는 '풀 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 장면은 원경에서부터 천천히 카메라(매런)에게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결국 동일한 숏의 반복이다. 그리고 이 공포를 견딘 너머에는 알지 못하던 것에 대한 깨달음이 따라온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반복되면서 우리의 눈에 투명하게 도달하는 주요한 감각은 원경에서부터 다가오는 타자들에 대한 공포다. 이들은 카메라 쪽에 놓인 주체의 존재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회적 합의에 위협을 가한다. 이때 무엇보다 이 주체들에게 '타자가 다가오는 것'이 남다른 공포로 느껴지는 이유는 구아다니노가 그려내는 인물이 퀴어 감수성을 보유한 소수자이거나 사회적 금기를 건드리는 욕망과 관련하기 때문이다. <아이 엠 러브>의 엠마는 아들의 친구인 안토니오와 불륜 관계이며, 재벌 가문의 삶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안토니오와의 정사 후에 머리를 짧게 자르는 엠마는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고 숏컷을 한 그의 딸 베타를 떠올리게 만들며 성소수자로서의 해방의 서사와 엮인다. <비거 스플래쉬>의 해리는 부부의 휴양을 방해하면서까지 이미 결혼한 옛 연인 마리안에게 구애한다. 동시에 그는 뒤늦게 찾게 된 딸이라고 하는 페넬로페와도 어떠한 성적 관계가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그 섬에 놓인 마리안, 폴, 해리, 페넬로페는 서로의 상대를 바꾸며 불륜 관계를 형성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와 올리브는 모두 남성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사랑하는지, 아니 무엇보다 상대방이 남성을 사랑하는지의 불투명함 때문에 서로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리고 <본즈 앤 올>의 카니발리즘이 사회적 금기를 깨는 것을 넘어서서 이터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에 대한 서스펜스로 다가올 때, 그것이 퀴어적 코드를 건드리고 있음은 당연하다.

<본즈 앤 올>이 생존과 죽음에 관련한 극단적이고 상상적인 방식으로 공포의 감각을 되살렸다면, 퀴어적 코드를 영화의 소재 전면으로 다루고 있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지에 대한 또 다른 본질적인 공포와 불안을 프레임에 불러온다. 가령 엘리오가 올리브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다가 집 안으로 들어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멀찍이서 주체를 바라보고 있는 타자는 어김없이 반복된다. 엘리오가 전경에 놓인 피아노에 앉아 연주할 때, 올리브는 원경의 문가에 서서 이를 지켜본다. 이때 올리브는 엘리오의 연주 방식에 짜증을 내다가도 결국 마지막 연주가 끝난 뒤 중경으로 서서히 움직이며 엘리오와 가까운 쪽의 소파에 앉는다. 이 하나의 긴 숏 안에서 올리브는 마음을 알 수 없는 타자로서 엘리오에게 다가가고 이 다가감의 신호에 대한 감각은 이것이 그저 엘리오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사랑의 공포와 불안으로 다가온다. 혹은 이 선택은 동성 간의 사랑이라는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관계의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세계를 집어던지고, 불안정한 세계와 믿음 안으로 몸을 던진다는 용기와 파멸을 필연적으로 불러오기에 한없이 망설여지고 연기된다.

엘리오와 올리브가 1차 대전의 피아베 전투를 담고 있는 동상을 앞에 두고 서성이며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길 반복하면서, 혹은 프레임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해 카메라에게 다가오면서 불확실한 사랑의 불안을 숏 전체에 진동하게 한다. 그것이 공포의 정서에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은 멀찍이서 배구를 하고 있던 올리브가 순식간에 엘리오의 곁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손으로 건드리고 어루만지는 때이다. 올리브는 엘리오의 시점숏 안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음 숏으로 따라오는 역숏인 엘리오의 단독숏에 갑작스레 침투하며 그 긴 거리를 위협적으로 뛰어넘는다. 이 숏 사이에 일어나는 공포는 엘리오와 올리브 모두에 있어서 상호적이다. 다시 말해, <본즈 앤 올>의 매런이 설리번을 두려워한 대신에 설리번은 매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가 갑자기 어깨에 손을 올리는 올리브에게 공포를 느끼는 만큼 올리브는 엘리오에게 상호적인 공포를 느낀다. 이후에 나무 위의 대화에서 밝혀지듯이, 올리브의 시선에서엘리오는 마치 '성추행당한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를 대했기 때문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공포는 사랑과 (성)정체성이라는 이중의 레이어 속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는 소통의 불가능성에 있다.

금기시된 욕망으로 뒤섞인 치정극 <비거 스플래쉬>에서 '다가오는 타자'는 공포와 불안보다는 매혹적인 형질을 지닌 성적 대상에 가까운 순간에 이른다. 특히 두 번의 불륜 행각이 벌어진 뒤의 밤 중에 네 명이 모두 모인 식탁에서 그 매혹의 서스펜스는 극대화된다.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식사 자리가 끝나면 페넬로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아버지 해리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이내 해리를 안던 팔을 거두고 폴과 마리안이 있는 식탁 맞은 편으로 살며시 걸음을 옮겨 다가가면서 엄지를 제외한 네 개의 손가락으로 식탁 모서리 부근을 가볍게 두드린다. 카메라는 포옹 이후의 움직임, 기묘한 손짓과 자리를 떠나는 걸음으이어지는 일련적인 몸 몸짓을 하나의 숏 안에서 손, 다리, 걸음을 옮기는 발 뒷꿈치를 순차적으로 따라가며 담아낸다. 페넬로페와 해리, 폴의 삼각관계를 (더불어 그사이에 놓인 마리안을 포함한 복합적인 관계를) 페티시적 신체와 시선을 경유하여 간결하고도 유려하게 담고 있는 이 숏은 이들의 뒤틀린 에로티시즘을 정확하게 지목하며 관계의 파멸을 예고한다.

물론, 이들의 '다가옴'이 주는 감각은 매혹이기 이전에 공포와 불안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폴과 마리안의 휴양지이자 안식처인 곳을 해리와 페넬로페가 침입하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다가오는 타자'인 폴은 공항 도착구의 자동문 너머에 멀찍이 있다가 그 문을 통과하며 다가온다. 마리안은 해리와 포옹하지만, 폴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를 보고만 있다. 여기서 구아다니노는 해리를 보고 있는 폴의 시선을 이질적인 색채를 지닌 선글라스 너머의 숏으로 보여주길 택하는데, 이에 따라 이 숏 전체를 이루는 블루 컬러의 레이어는 해리를 마치 외부인을 넘어서 접근해서는 안 될 어떠한 외계의 존재로 묘사하는 것만 같다. 한편 이 컬러를 통한 공포의 감각은 <서스페리아>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가 제의 의식이 벌어지는 지하 공간 한가운데를 뚫고 '다가올 때' 반복되기도 한다. 피 칠갑이 될 스크린을 예고하면서도 필름을 훼손하는 것 같이도 느껴지는 <서스페리아>의 레드 컬러의 레이어는 <비거 스플래쉬>의 블루 컬러의 레이어와 거울상을 이루듯이 비교되면서도 유사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문득 생각해 보면 <비거 스플래쉬>의 블루 컬러는 <서스페리아>의 레드 컬러가 피를 예고했듯, 이후 수영장에서 벌어질 살인의 광경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타자에 대한 공포가 성적인 매혹으로 전이하다가 끝내 살인의 충동으로까지 번지며 미끄러지듯이 변화하는 것이 구아다니노가 '다가오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당연한 말이지만 공포와 매혹, 성교와 살인은 다른 말이 아니다.

 

ⓒ <아이 엠 러브>

터치의 감각들, 그리고 살육의 순간

한편, <아이 엠 러브>에서 엠마를 둘러싼 세 명의 남성은 마치 삼면화를 이루듯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특히 이 남성들은 다가가는 것을 넘어서 올리브가 엘리오의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졌던 것처럼 '터치(touch)'의 몸짓을 보이며 엠마의 색다른 감각을 건든다. 먼저 한겨울의 생일 파티 이후 몇 달이 지난 시점, 엠마가 안토니오를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제삼자인 에도아르노는 그 관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듯이 엠마에게 다가간다. 이전의 숏부터 하나씩 복기해 보자면, 부엌을 둘러보던 엠마가 인기척을 느끼고 구석 쪽으로 몸을 옮길 때, 카메라는 원경에서 전경으로의 이동의 과정 중간에서 잠깐 피사체에게서 포커스 아웃한 뒤 전경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 선명한 얼굴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리고 엠마와 안토니오 서로를 프레임 한쪽에 걸친 숏과 역숏(over the shoulder shot)이 특별한 대화 없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이 숏/역숏의 교환 끝에 카메라는 엠마가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던' 그 숏과 동일한 위치와 앵글로 다시 돌아온다. 그때 '서서히 다가와 포커스 안으로 들어오던 엠마'를 반복하듯이, 멀찍이서 포커스 아웃되어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던 에도아르노가 카메라(엠마) 쪽으로 서서히 다가와 엠마의 뺨에 키스함과 동시에 포커스 인하는데, 이 포커스의 세밀한 조절이 입술과 뺨의 접촉에서부터 비롯한 생경한 떨림의 감각을 온전히 숏 안에 살아나게 한다. 이때 얕은 심도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포커스의 문법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터치로부터 비롯한 서스펜스와 설렘을 프레임에 새겨넣는 듯한 숏의 섬세한 몸짓이다.

에도아르노가 엠마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의 삶에 생의 감각을 불어넣는 존재였다면, 안토니오는 엠마의 삶에 갑작스레 침투해 새로운 생의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존재다. 딸을 따라 산레모에 간 엠마가 우연히 안토니오를 마주친다. 엠마가 은밀하게 그를 쫓다가 서로를 알아보기까지의 일련의 숏들은 카메라로 과감하게 붓질하듯 줌(zoom)과 트래킹(tracking) 등을 동원하여 도시의 거리를 일사불란하게 담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구아다니노는 안토니오에 대한 엠마의 집착을 드러내는 시점 숏을 몽타주 하는 것을 넘어서, 그가 거리의 산보자로서 움직이는 감각과 그가 지각하는 도시 자체를 인상적인 감각으로 채워 넣는 데에 주력한다. 도시를 떠나 도착한 산골에서 엠마는 산의 풍경을 둘러보다 그에게 다가오는 안토니오와 격정적으로 입을 맞춘다. 포커스에서 벗어났다가 안으로들어오는 에도아르노의 움직임이 생의 감각을 피부에 맞닿게 전달했던 것과 비교되게, 엠마와 안토니오의 키스하는 찰나를 담고 있는 아웃 포커스는 색채와 풍광, 몸의 윤곽만을 강조하며 몸과 몸이 접촉한다는 행위가 주는 감각의 진폭을 극대화한다. (이때 카메라는 원경에 있는 수목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와 올리브의 정사씬에서 그러했듯이, 구아다니노의 카메라는 결정적인 정사의 순간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물에 있다는 듯이 바람에 흩날리는 수목에게로 시선을 돌리곤 한다) 엠마의 숏에 갑작스레 침투하여 키스하는 안토니오는 또 다른 측면에서 '다가오는 타자'이며 그것은 불륜과 관련한 성적 긴장의 극단에서 멈추어진다는 점에서 어김없이 본질적인 서스펜스다.

반면 에도아르노의 죽음 이후로 몸과 몸 간의 터치는 생이 아닌 죽음의 감각을 불러온다. 안토니오와의 불륜 관계가 발각된 직후 엠마는 에도아르노와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의 손을 잡으려 하는데, 에도아르노는 그 손짓을 뿌리치면서 "만지지 마요!"라고 소리친다. 엠마의 터치에 대한 리액팅 이후 에도아르노는 발을 헛딛으며 넘어지고 머리에 상처를 입어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다시 말해, 안토니오와의 불륜이 밝혀지고 관계의 틈이 벌어지는 순간부터 터치는 쉬이 이루어지지 않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의미가 아니며 끝내 죽음의 공기를 환기한다. 에도아르노의 장례식 장면에서 탄크레디가 보여주는 '다가옴'과 '터치'의 몸짓 또한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엠마를 찾기 위해 건물 내부를 떠도는 탄크레디를 담으면서,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다가가는 움직임'을 뒤에서 팔로우한다. 앞선 산골의 장면, 자연광이 가득 차는 방안에서 안토니오가 엠마의 샌들을 벗기고 옷을 벗길 때의 터치의 몸짓들과 나체의 이미지들이 이들의 몸을 빛과 숲의 일부로 스며드는 자연적인 풍광으로 만들었다면, 비가 한참 내리는 장례식 중에 탄크레디가 엠마의 힐을 신기고 자신의 자켓을 입혔다가 도로 가져갈 때의 (반-)터치의 몸짓들과 경직된 실루엣들은 성당의 수직적인 건축적 패턴과 어우러져 그곳에 놓인 인물들을 죽어있는 정물로 만든다.

 

ⓒ <본즈 앤 올>

이쯤 와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다가오는 것'과 '터치'가 주체(그 객체를 응시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카메라이자 그 필름적 상(相)을 감각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관객)에게 갖는 '이원성' 혹은 '이중성'이다. 공포가 곧 매혹이고 성교가 곧 살인이듯, 주체에게 다가와 몸을 건드는 타자는 복합적인 이중의 의미로 서스펜스를 운반한다. 이를테면 <본즈 앤 올>의 매런이 친구로서 이웃 친구의 옆자리에 누웠을 때, 그리고 이내 식인의 본능으로 친구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넣고 깨물었을 때, 그 찰나의 한 순간으로 우정(성애)은 식인충동이 된다. 반대로 매런이 칼에 찔려 죽어가는 리를 사랑으로 끌어안다가 결국 뼈까지 먹어 치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교(터치)'의 몸짓과 파괴와 뒤틀린 욕망으로부터 비롯한 '식인(살육)'의 몸짓은 더 이상 구분이 되질 않으며, 그 구분이 의미 있지조차 않은 것 같다. 적지 않은 영화에서 종종 성교는 살인, 살인은 성교의 메타포가 되곤 하는데 <본즈 앤 올>에서는 그것이 찰나의 순간에 전환되거나 하나의 숏 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성적 코드를 내재한 터치와 금기를 깨뜨리는 살육, 매혹과 공포를 오가는 이중성이라는 테제는 <서스페리아>(2018)에서 더욱 심화한다.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는 베를린의 발레 아카데미는 서로 다른 공간의 수직적 연결을 통해 묘사되는데, 갑작스레 무용단을 떠난 올가를 대신해 수지가 단독으로 '폴크'를 추는 장면은 이 수직성으로 통일된 공간적 특성을 엿볼 수 있는 인상적인 시퀀스다. 발레 강사 블랑은 춤을 시작하기에 앞서 올가를 대신하겠다고 자진한 수지의 손과 발을 자신의 손으로 '터치'한다. 발레 강사들에게 '마녀들'이라고 외친 뒤 연습실을 빠져나왔던 올가는 나선형 계단을 밟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올가는 또 다른 강사들의 유인에 따라 어두운 복도 구석의 밝은 방으로 들어간다. 한편 수지는 그 위층에 있는 연습실에서 음악이 시작됨과 함께 춤을 추고, 모든 면이 거울로 가득한 밀실에서 흐느끼던 올가는 마치 수지와 몸이 '링크(link)'된 듯이 몸을 기괴하게 뒤틀기 시작한다. 가령 수지가 한 손을 강하게 바깥쪽으로 뻗으면 올가는 그 손동작에 타격을 받듯 벽으로 나가떨어지는 식이다. 이 시퀀스는 위층과 아래층을 수지의 액팅과 올가의 리액팅으로 잇는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때 말 그대로 수지와 올가를 '링크'하는 것은 수지의 손과 발을 만지던 블랑의 '터치'가 된다.

수지의 매혹적인 춤과 숨소리를 보고 들으며 성교의 자세와 호흡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올가의 몸을 담은 숏, 특히 신체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꺾이는 관절과 훼손되는 피부를 담은 숏이 성교를 연상시키는 수지의 숏과 극적인 충돌을 일으키며 대비되기보다는 두 인물의 동작을 주술과 대화처럼 엮어가며(몽타주) 오히려 긴밀히 연결(link)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춤의 몸짓은 성교의 몸짓이며 뒤틀리고 뜯기는 살점의 몸짓이고 부러지고 절단되는 뼈의 몸짓과 다르지 않다. 그 매혹과 살육의 몸짓들은 블랑의 기묘한 터치로 인해서 일차적으로 연결되고, 서로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는 이미지들이 교묘하게 겹쳐 자연스러운 액팅과 리액팅처럼 붙어있는 편집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시퀀스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수직적으로 연결되는 공간, 위층과 아래층의 테마 또한 지나칠 수 없다. 수지가 춤추는 위층과 올가가 죽어가는 아래층이 보여주듯이, <서스페리아>는 겉으로 보이는 예술과 표면적인 형상 아래에 살육과 신체 절단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하부구조를 교차편집을 통해 동시에 작동시킨다. '폴크'의 공연이 윗층의 공연장에서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에서, 사라는 아래층의 기이한 공간을 떠돈다. 사라는 그곳에서 신체가 절단되고 피부가 썩어가는 패트리샤를 발견하고, 어둠 속의 복도를 더듬대며 걸어가다 구멍에 발이 빠져 탈골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수지가 윗층에서 성교에 가까운 춤을 추고 있을 때, 아랫층에서 마녀의 아이들은 죽음 주위를 서성인다.

후반부, 지하공간에서 펼쳐지는 제의 의식 또한 복합성과 이원성의 몸짓들로 가득하다. 온몸이 비추어 보이는 실크 가운을 입고 있는 수지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美)'에 가까운 몸이라면, 온몸이 흘러내리고 괴상한 신체 기관을 갖고 있는 마르코스는 '추(醜)'에 가까운 몸이다. 이제까지는 성교의 몸짓과 살육의 몸짓이 위층과 아래층으로 수직적으로 분화된 공간 안에서 교차하며 형상화되었다면, 제단처럼 몇 차례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하공간에서는 그 하나의 공간 안에서 무용과 종교 제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생경하고 자극적인 몸짓들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이원성'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설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태의 존재가 갑작스레 등장할 때부터이다. '그것'은 흰 피부를 드러내고 있는 수지와 명백하게도 거울상을 이루고 있다. '그것'이 마르코스를 호명했던 마녀들의 머리를 폭발시키며 무참하게 살육할 때, 수지는 발레단의 소녀들 한명 한명에게 다가가 그들을 구원하듯이 죽음을 선물한다. 이내 수지가 소녀들에게 다가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소녀들은 "죽고 싶어요"라고 답하고, 수지가 소녀들의 얼굴에 키스를 하면 모두 힘이 빠져 편안하게 쓰러진다. 이 입술을 통한 '터치'는 살인의 도구임과 동시에 안식의 선물이다.

 

ⓒ <아이 엠 러브>

죽음, 사진적 존재들

<아이 엠 러브>의 후반부, 생의 활력으로 가득 넘치는 산레모에서의 중반부가 끝나고나면 설렘과 떨림의 서스펜스는 불안과 공포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하며, 초반부와 유사한 식사 시퀀스가 다시 한번 펼쳐진다. 안토니오는 엠마가 알려준 특별한 요리를 만찬의 식사로 올리고, 이전에 안토니오의 집에서 엠마의 머리카락을 발견한 바 있는 에도아르노는 그 요리를 보고 나서야 둘의 불륜 관계를 확신한다. 엠마는 상황을 이해시키려 밖으로뛰쳐나간 에도아르노를 따라가지만, 그는 엠마의 손을 뿌리치다가 중심을 잃고 연석에 머리를 부딪힌다. 돌에 머리를 부딪히는 둔탁한 사운드 뒤에 물에 몸이 마찰하는 파열음이 따라온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리면 엠마의 앞에는 수영장 한편에 엎드린 채로 물에 떠 있는 에도 아르노가 있다. 에도아르노의 사망 통보를 받고 돌아온 집에서 엠마는 침대 위에 힘없게 기대어 눕는다. 침대 쪽의 벽면에는 가족들과 함께한 것처럼 보이는 갖가지 사진이 붙어있다. 잠시 후 가정부가 방으로 들어와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던 창문을 닫으면, 카메라는 천천히 패닝 하며 곳곳에 놓인 또 다른 사진들을 다시 한번 비춘다. 화장실에 들어와 있던 불은 서서히 꺼지고 방은 완전한 암실이 되어 간다.

밤중의 작고 어른거리는 빛에서 시작했다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자연광의 풍광으로 나아가는 영화는 죽음이 감도는 후반부가 되어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방을 채우던 빛이 차례로 소멸하다가 어둠으로 뒤덮일 때, 그리고 이상하게도 설명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혹은 그걸 넘어서서 큰 의미가 없다 느껴질 정도로 카메라가 평범하고 무심하게 놓인 사진들을 집착에 가깝게 담아내고 있을 때, 그 암실이 된 방에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물은 종종 영화의 스크린에 비유되곤 하지만 에도아르노가 쓰러져 떠다니는 수영장과 빛을 반사하며 일렁이는 물이 사각형 프레임의 필름과 다름없다는 생각은 괜한 착각일까. 끝내 안토니오와 함께하는 산레모에서 영화의 전면에 퍼져있던 빛들이 런던에 이르고 에도아르노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겪은 뒤에 그 방으로 수렴하여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 그리고 그곳에 놓인 사진들이 사진 이미지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느껴질 때, 구아다니노는 이 장면을 통해 '사진은 곧 죽음이다' 혹은 '죽음은 곧 사진이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에도아르노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드레스를 벗어 던지며 집 밖으로 탈출하는 엠마는 어둠과 죽음을 등지고 다시 빛과 생(生)으로 돌아간 것일까. 숏에서 증발해 버린 엠마를 다시 목격할 수 있는 곳은 크레딧이 한번 올라간 뒤에 등장하는 위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숏 하나다. (여기서 위치를 알 수 없다 함은 프레임 속에 놓인 공간의 지리적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의미인 동시에 개별 영화 안에서 이 숏을 어떻게 놓고 바라보아 분석의 틀 안에 넣어야 할지 난감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숏에 있는 것은 기묘한 빛이 구석에 어른거리는 작은 동굴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동굴 안쪽에는 엠마와 안토니오(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서로를 껴안고 있다. <아이 엠 러브>에서 가장 정체를 알 수 없는 숏인 이 숏은 슬로우모션으로 나지막이 흐르며 동굴이라는 스크린 혹은 필름에 사랑으로 뒤엉킨 이들을 벽화처럼 새겨넣는다. 돌이켜보면 동굴 벽화는 죽은 자를 부활시키려는 욕망으로 탄생한 최초의 '정지된 이미지'다. 이 숏에서 엠마는 어둠이자 죽음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간다. 다시 말해 동굴의 어둠으로, 동굴 벽화의 정지된 이미지로, 죽음과 관련한 사진적 존재로 거듭난다.

 

ⓒ <비거 스플래쉬>

앞서 이야기한 듯이 루카 구아다니노가 프레임 속에 집요하게 담아내는 피사체는 '다가오는 타자'이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용인되지 않는 퀴어 정체성의 맥락으로 인해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서스펜스를 지닌 채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고, 존재를 터치하고, 신체를 깨물거나 훼손하고, 나아가 살육한다. 반면 이렇게 스크린 밖으로 흘러넘칠 것만 같이 변화하는 모호한 존재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사진들, 혹은 사진적 존재들이다. <아이 엠 러브>에서 에도아르노의 죽음을 둘러싼 이미지로 묘사되는 사각형의 프레임 속에 정지한 인물들, 또는 어둠으로 서서히 진입하는 방 안의 숏들은 <비거 스플래쉬>에서 적지 않은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유사하게 반복된다. 에도아르노가 엠마의 손을 뿌리치다가 수영장에 몸이 던져지는 것과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를 보여준 것처럼, 폴과의 몸싸움 중에 익사한 해리는 수영장이라는 사각형의 프레임 속에 놓인 '정지한 몸'이 된다. 해리의 죽음과 관련한 취조 장면에서 매리앤과 폴, 페넬로피는 신분을 조회하기 위해 스캔 된 신분증의 증명사진 속에 갇힌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면 폴은 경찰을 따라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폴은 해리의 신분증에 있는 증명사진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본다. 이 숏들의 연쇄를 통해 해리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지한 몸, 그리고 사망과 동시에 그의 신분과 존재를 대체하는 신분증의 증명사진으로 재현된다. 다시 말해, 구아다니노의 영화 속에서 죽은 자들은 사진적 존재가 되어 카메라 옵스큐라를 연상시키는 암실의 이미지 주위를 떠돈다. 사진은 때로 빛이지만,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사진은 곧 어둠이고 죽음이다. 그것은 존재의 생경한 기척이 아니라, 존재의 낡은 흔적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타이틀 시퀀스부터 사진적 이미지들의 연쇄로 시작한다. 여기서 '사진적 이미지'란 인화된 사진이라는 물질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사진 안에 담긴 프락시텔레스의 청동상, 즉 찰나의 순간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정지한 몸을 뜻하기도 한다. 이 청동상은 영화의 본편에서 두 차례 다시 등장한다. 하나, 팔먼은 중요한 것이 발견되었다며 엘리오와 올리버를 데리고 가르다호로 향한다. 호숫가에는 부러진 청동상의 조각이 있고, 보트를 타고 간 호수 한가운데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리면 조각품 전체의 모습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올리브는 그 조각상의 얼굴과 입술 부근을 어루만진다. 둘, 팔먼과 올리브는 연구를 위해 조각품의 모습을 담은 컬러 슬라이드를 스크린에 영사한다. 이때 영사기라는 영화적 도구와 스크린이라는 또 다른 프레임은 스크린에 맺히는 빛으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할 욕구를 불러오지만, 여기서 스크린을 비추는 것은 정지한 상(相)으로서의 사진이라는 점을 기억하며 다시 돌아와야 한다. 또한 이 장면에서 올리브가 조각품의 사진을 응시하는 숏과 2층의 다른 공간에 있는 엘리오를 담은 숏은 마치 숏/반응 숏의 문법을 연상시키며 교차편집된다. 올리브가 조각품의 사진 너머로 보고 있는 것은 결국 엘리오라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비거 스플래쉬>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인물들은 물에 뛰어들기를 집요하게 반복한다. 이들은 여름의 햇살과 달빛 아래서 수영장, 바다, 혹은 강에 몸을 던지며 한없이 헤엄치고, 흐느적거리고, 누운 채로 햇볕을 쬐고, 서로의 몸을 섞으며 생의 활력으로 가득한 몸이 된다. 그리고 이때마다 카메라는 그 물이 반사하는 빛이 끊임없이 일렁이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 윤슬과 뒤섞이는 몸들은 욕망으로 들끓는 동물적 이미지라기 보다는 그를 둘러싸는 초목의 형상과 어우러져 자연적이고 식물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때 이들이 지니는 식물성은 수동성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인간 중심의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데에서 오는 생동감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비거 스플래쉬>는 결정적인 죽음의 순간에 <아이 엠 러브>의 죽음을 담은 한 숏과 이상하게나마 유사하게 보이는 이미지, 즉 사각형 프레임의 수영장 속에 놓인 정지한 몸의 이미지로 돌아오고야 만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던 해리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 에도아르노처럼 본의 아니게 물속으로 자빠뜨려졌을 때, 그는 죽음과 함께 정지한 사진적 존재가 된다.

<비거 스플래쉬>의 해리의 시체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프락시텔레스의 청동상은 '물속에서 정지한 몸'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형상이다. 다른 점은 해리는 물 밖에서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죽음으로 향했다면, 청동상은 시차를 거쳐 물속에서 물 밖으로 건져나오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청동상은 올리브의 시선을 통해 엘리오라는 살아있는 사람의 투영체가 된다. 이로 알 수 있듯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청동상은 앞선 영화들이 보여준 사진적 존재들처럼 죽음의 정지된 상태로 위축하고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무엇보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며 변화하고 있는 엘리오의 몸으로 확장한다. 이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엘리오에게 올리브는 자신의 손을 내미는 것 대신 청동상의 잘려진 팔 조각을 건네며 응하는데, 청동상의 몸이 곧 엘리오의 몸의 확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 대안적인 터치의 몸짓은 이후에 이루어지는 서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복잡미묘한 언어의 교환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렇게 청동상은 정지한 사진적 존재에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소년의 몸이 되고, 고고학의 학문과 역사적 시선의 대상에서 올리브라는 개인의 욕망과 응시의 대상이 된다. 엘리오는 아버지가 준 '이름'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되듯이.

 

ⓒ <서스페리아>

끊임없이 움직이고 어른거리는 것들

<서스페리아>의 마지막 숏, 하늘을 배경으로 송전탑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를 전철이 미끄러져 지나간다. 하늘을 로우 앵글로 담던 카메라가 패닝 하면서 반대편을 비추면 수목과 햇살, 그림자로 뒤덮인 집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프레임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하는 대화가 들리지만, 카메라는 인물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집의 벽 모서리 부근으로 끊임없이 줌인 한다. 줌인하던 카메라가 충분히 가까워지면 벽 모서리에 새겨져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벽에는 하트의 표식이 새겨져 있고, 표식 안에는 누군가의 이니셜인 알파벳 'A(앙케)'와 'J(요세프)'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벽과 표식 위로 나뭇잎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의 그림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린다. 카메라는 눈앞에 있는 하트의 표식과 그림자가 포커스에서 벗어날 때까지 줌인하고 스크린은 끝내 화이트 아웃 한다.

1분가량 연속적으로 흐르는 이 하나의 숏이 주는 이미지의 감각을 우리는 이전에 유사한 방식으로 경험한 바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요제프가 아내와 부부 생활을 함께하던 옛집을 찾을 때의 장면. 이때 카메라는 텅 빈 하늘과 지푸라기로 덮인 언덕을 로우 앵글로 올려다보다가 풀 길을 걸어와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요제프를 따라 패닝 한다. 요제프가 한 손으로 벽 모서리를 짚으면, 카메라는 그 벽을 붙잡은 손의 클로즈업으로 전환(cut to)한다. 요제프가 손을 거두면 그가 짚은 곳에 새겨져 있던 하트의 표식과 'A'와 'J'의 이니셜이 보인다. 요제프는 내레이션으로 나지막이 앙케의 이름을 부른다. 이 초반부의 요제프를 담고 있는 숏과 영화의 마지막 숏은 그사이에 흐른 긴 시간의 시차를 두고 동일한 장소의 풍경을 바라보길 반복한다. 풍경을 반복시키는 것은 카메라가 보고 있는 장소와 그 연속되는 이미지들을 잇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주는 기시감, 그리고 사진적 이미지라고 볼 수 있는 이니셜이 새겨진 하트의 표식이다. 더불어 그 시차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요제프가 살아있던 시대가 RAF의 테러가 성행하던 동서독 분단 시기임을 알게 하는 도시 곳곳의 문구가 영화 곳곳에 등장하고, 반면 마지막 숏에서는 그것과는 이질적이게 현대의 시대성을 지목하는 기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비어있던 과거의 하늘에는 이제 송전탑이 놓여있고 그 아래로는 신식 전철이 지나간다. 과거 요제프의 집이었던 곳에 사는 듯한 인물은 스마트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영화의 초반부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때 놓인 그 숏은 끝내 긴 시간을 극단적으로 점프한 마지막 숏을 통해 반복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점프의 순간이 적잖이 목격된다. <아이 엠 러브>에서 엠마의 몸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카메라는 순식 간에 밀라노에서 산레모로 점프하고, 산레모에서 런던으로 점프한다. <본즈 앤 올>은 이터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하고 여러 주를 거쳐 방황하며 떠돌던 로드무비의 동선을 갑작스레 멈춰세우고 매런과 리가 함께 정착한 뒤의 안정적인 일상으로 점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라스트 씬.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혹은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된다. 엘리오는 결혼 소식을 전하는 올리브와 통화를 하고 무심코 벽난로 앞에 앉는다. 이때 카메라는 방향을 돌려 엘리오의 클로즈업으로 전환(cut to)한다. 전경에는 그 각도와 자세를 꼼짝않고 유지한 채 눈물 한 방울만을 흘리는 엘리오의 얼굴이 있고, 후경에는 함박눈이 한창 흩날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 이 숏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엘리오의 얼굴이나 눈이 내리는 창밖의 풍경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스페리아>의 마지막 숏에서 송전탑과 전철, 사람들, 스마트폰, 그리고 줌인이 끝내 도달하여 보여주는 하트의 표식만을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서스페리아>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마지막 숏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정지한 사진적 존재 혹은 형상이 아니라 그 앞에서 움직이는 빛이다. 이 빛(또는 그림자)은 벽에 맺힌 나뭇잎의 그림자로, 또는 얼굴에 맺힌 모닥불의 빛으로, 투과와 반사의 레이어를 거쳐 우리의 눈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뭇잎과 모닥불이라는 자연물의 형상이자 '이름 붙여진 사물'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고, 그 사물성을 벗어던진 채 구체적 형상을 상실한 잔상으로써 프레임에 어른거린다. 또는 정지해 있는 하트의 표식과 엘리오의 얼굴에서 문득 '사진적 형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면, 이 숏을 끝내 '영화'로 만드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어른거리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숏이 가장 순수한 감각의 형태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정지한 것들 앞에서도 모든 것은 결국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동서독 분단의 시대는 통일 이후의 다음 세대가 되고, 여름은 겨울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구아다니노가 끝내 그의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 즉 "변화함으로써 같은 것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자 '변화 그 자체'다.

이러한 변화의 감각을 숏 전체에 퍼뜨리듯, 영화의 프레임 속 피사체와 카메라는 x축과 y축, z축을 망라하는 다채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아이 엠 러브>와 <비거 스플래쉬>의 인물들은 차를 타고 산을 오르며 어디론가 향하는 상승 운동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또는 성당의 탑을 다짜고짜 오르거나, 도로를 거침없이 활보한다. 이때 풍경을 내려다보거나 먼곳을 훑어보는 카메라는 이들에게 줌 인/아웃 하거나, 컷인/아웃 하거나, 패닝 하거나, 크레인 업/다운한다. <서스페리아>는 갑작스레 패닝 하며 반사상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수직적 공간을 몽타주 한다. <본즈 앤 올>의 매런과 리는 미국의 주를 넘나들며 떠돌면서 수평적 이동의 감각을 유지한다. 이렇게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물질은 상승하고 하강하고 확대되고 축소되며 하염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이 변화와 이동이 함의하는 것에는 퀴어의 코드와 맞물린 정체성의 탐구가 있다. <본즈 앤 올>의 주요 서사가 부모를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이자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내 어떠한 특정 상태가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변화의 특성 그 자체에 있다. 나뭇잎의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모닥불처럼.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윤슬처럼.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피사체로서 프레임 안에 놓인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그 존재에게 주어진 물성을 벗어던지고 투명한 몸짓의 형상으로만 남게 된다. <아이 엠 러브>의 안토니오가 요리한 새우 요리와 풀숲 안에 있는 식물과 곤충들, <비거 스플래쉬>의 생선 요리와 페넬로페가 폴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의 카메라, 입술, 라이터를 켜는 손, 그리고 연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넘쳐 흘러나오는 삶은 계란과 엘리오가 구멍을 뚫어놓은 복숭아. 이 사물들은 어떻게 보더라도 성교의 순간을 둘러싸는 메타포이며, 그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투명한 감각을 전달하는 형상으로 프레임 내에 던져진다. 구아다니노의 존재들은 이렇게 '다가온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죽음과 관련한 사진적 존재들 앞에 어른거리며 생을 내뿜는 투명한 이미지들을 마주하고, 변화로서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시간은 정지된 사진 또는 표식 안에 각인되고, 세상은 어김없이 변화할 것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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