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웨스 앤더슨을 기대해야 하는 이유 ['애스터로이드 시티' #2]
앞으로도 웨스 앤더슨을 기대해야 하는 이유 ['애스터로이드 시티' #2]
  • 이현동
  • 승인 2023.07.08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거되지 않을 독창적인 이미지 브랜딩"
ⓒ 유니버설 픽쳐스

본지 「[웨스 앤더슨] 시네마의 수호자 혹은 영화 굿즈의 화신」에서 김경수 평론가는 웨스 앤더슨을 '영화 굿즈의 화신'이라 표현했다. 굿즈(Goods)의 가장 큰 특징은 창작자의 특성을 브랜딩 하는 것이다. 사실 앤더슨만큼이나 브랜딩에 탁월한 시네아스트는 찾기는 어렵다. 프레임의 완벽한 대칭 구조, 영화 세트를 가공하는 레터링(lettering)과 디오라마(diorama) 디자인, 35mm 코닥 필름의 생동감, 파스텔 색조의 색감 등은 그의 영화를 대표하는 도구들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2014)을 패러디한 소노침대 광고와 <문라이즈 킹덤>(2013)을 참고로 한 SSG광고는 앤더슨의 색감을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가 이런 굿즈화 혹은 틱톡커를 경유하여 재생산되는 이유가 있다면, 앤더슨의 작품이 서사를 수단으로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길이가 긴 '광고'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전작 <프랜치 디스패치>(2021)의 옴니버스 구성은 분명 그런 요소를 배제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앤더슨의 영화를 보면서 어떤 지점에 감응하는가.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이제 그의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큰 관심이 없다. 많은 비평가가 웨스 앤더슨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또한 마찬가지다.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앤더슨을 두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완벽한 숏을 본떠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필자에게는 그 양식화된 앤더슨 영화가 점차 영화로부터 이탈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서사가 작동하는 초기작에 비해 지금 앤더슨의 영화를 오히려 점점 미디어 아트에 가깝다. 반농담으로 '앤더슨' 집안의 스웨덴 출신 감독 로이 앤더슨 영화도 그러하다. 신기하게도 두 감독 모두 광고를 연출해 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나 웨스 앤더슨은 최근까지도 H&M (2016), 프라다 <Castello cavalcanti>(2013) 등을 촬영한 바 있다. 한편의 미술 작품이나 미디어 아트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영화는 더 이상 특정한 장르로 구속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코고나다 감독이 앤더슨 영화의 대칭 구도를 모아서 비디오 에세이로 남긴 적이 있는데, 이를 보면서 그의 영화에 대해 다시금 검토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했다. 형식이 강제되고, 그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대중들의 긍정이든 부정이든 창작자가 펼치는 미학의 기능과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개별 작품을 논할 때 어디에서 영감을 받고 어떤 주제로 연출하게 되었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앤더슨의 비평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앞서 본지의 박정수 평론가가 「세계가 고장 날 때 예술은 시작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1]」를 통해 작품을 상세히 다뤘다. 이 글은 웨스 앤더슨을 상징하는 인위적·인공적이라는 말을 응시하기 위해서, 바로 <애스터로이드 시티>로 가지 않으려 한다.

 

ⓒ 유니버설 픽쳐스
ⓒ 유니버설 픽쳐스

'레퍼런스'로 감지해보는 <애스터로이드 시티>

익히 알려지다시피 웨스 앤더슨의 미장센(카메라 구도와 색감 등)은 여러 글과 연구 논문 등을 통해서 많이 분석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영화 속 '캐릭터의 얼굴'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사이트를 찾아보아도 그리 흔치는 않다. 앤더슨은 얼굴조차도 배경의 소품으로 만드는 파격적인 형식을 선보인다. 그러나 외관상으로 표정을 구현하는 방식에서 비견될 수 있을 법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로베르 브레송, 브루노 뒤몽, 아키 카우리스마키 등과는 조금은 다르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브레히트를 의식하고 얼굴의 이미지를 시대상과 함께 불안과 상실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탈 인간의 형상이며 여기에서 배제된 감정은 주변부와 주제를 응시하는 프레임이 된다.

반면에 앤더슨을 보자. 그가 규정하는 세상은 '브레히트의 탈을 쓴 낭만주의'라 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묘사하면서 세계 대전에 저항하도록 독려한 <어머니 용기와 그녀의 아이들>(1939)이 혁명을 촉발해 내는 힘이 있었다면, 앤더슨은 따뜻한 인간성, 가족을 향한 노스텔지아와 부르주아의 통제 등을 통해 세상을 묘사한다. 소격효과라 일컫는 브레히트 방법론은 앤더슨에 의해 변용되어 얼굴에 표기되는 셈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앤더슨이 지지하는 바와 같이 자크 타티 정도다. 세계대전에 속해있지 않던 앤더슨의 영화세계는 90년과 맞물려 있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중상류층 호감을 끌기 위해 클린턴이 시행했던 신자유주의 정치와도 연관이 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좀 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활로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앤더슨의 시선도 이 지점에 있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소프트뱅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스텔라, 아르투아, 현대, 소니 등의 수많은 광고를 제작하고 등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앤더슨 영화 속 캐릭터의 얼굴은 물질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기묘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가끔 광고처럼 보이는 앤더슨의 영화는 평가하기가 참 애매하다. 영화가 아니라 이를 미술로 보고 비평적 스탠스를 취한다면 '좋음'과 '나쁨'이란 잣대를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소비시장이 강조되는 영화란 매체는 대중 예술이고 이를 고려한 여러 평가 기준이 축적되어 있는 반면 미술 비평은 이야기가 다르다. 가령 아방가르드 한 미술 작품을 보면서 별점을 매길 수 없는 노릇이고, 설사 별점이 있더라도 이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파코 벨레즈와 스테파니 스프레이의 다큐멘터리 <마나카마나>(2013)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움직임 없이 대칭을 유지한다. 케이블카와 트럭의 중심에 설치된 카메라가 인물을 롱테이크로 촬영하고, 그 밖에 있는 풍경을 반복해서 감상하는 것이 끝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미학 혹은 실험 정신은 결코 점수로 환원할 수 없다. 결국, 작품에 관한 비평이 얼마나 유효한 접근인지가 더 중요하다.

 

ⓒ 유니버설 픽쳐스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보면서 웨스 앤더슨 또래 감독들이 떠올랐다. 최근 이 시대 영화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있었다. 제작의 이유와 동기와는 별개로 시대, 장소가 그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고찰해보는 건 제법 흥미로운 작업이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그레이<아마겟돈 타임>(2022), 파올로 소렌티노 <신의 손>(2021), 폴 토마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2021)가 그 예다. (앤더슨과 그레이는 동갑이고, 소렌티노와 폴 토마스 앤더슨은 한 살 어리다) 그들이 기억하는 세상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게끔 조력자 역할을 했던 가정의 소중함을 회억하는 데에 있다. 상술했듯이 그들에겐 참혹했던 세계대전은 없고, 반대로 희망을 전망한다. 이것은 이번 작품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네오리얼리즘의 루키노 비스콘티의<강박관념>(1942)와 누벨바그 주자인 프랑수아 트뤼포<400번의 구타>(1959)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 시대의 영화에서 희망이란 사뭇 생소한 단어처럼 느껴진다)

'애스터로이드'는 소행성이라는 의미다. 영화 속 1955년 미국 남서부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87명이 사는 소도시로 종종 별을 관찰하는 천문학자나 우주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방문하는 관광지다. 영화는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온 신비한 사건보다 가족과 가족이 연대하고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 더 큰 시간을 할애한다.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과 연극이 오가는 현장 묘사와 화면비의 전환, 흑백과 컬러라는 색감은 <프랜치 디스패치>에서도 활용된 바 있다. 전작과 얼마나 다른 요소가 있느냐고 했을 때, 어떤 대중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앤더슨 작품에 호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은 마치 굿즈를 모으는 것처럼 미장센에 대한 감상을 쏟아낼 것이다. 혹은 몇몇 예민한 시네필들은 곳곳마다 산포되어 있는 레퍼런스를 상기할지도 모른다. 특히 사막의 이미지는 서부 영화가 추동해 왔던 양식을 토대로 미국 영화 내부에 깊이 침식된 장소다. 일본이 물의 이미지를 사용하듯 말이다.  인터뷰를 통해 앤더슨이 종종 말하기도 했지만, 이번 영화는 빔 밴더스의 <파리, 텍사스>(1984)와의 연관성도 부정할 수 없다. 텍사스는 미국 남서부에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이지만, 주인공 트래비스가 찾는 텍사스주의 '파리'라는 마을은 비현실적 공간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이처럼 남서부에 있으면서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외계인과 서부극이 혼재되고 장르가 전복되는 순간에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가 축적해 온 시간과 무관하지 않은 또 하나의 장소성을 지니게 된다.

아울러 연극과 현실, 이 재현이란 경계에서 끊임없이 충돌을 겪는 영화들도 있다.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나이트>(1977), 프랑수아 트뤼포 <아메리카의 밤>(1977), 레오 카락스 <아네트>(2021) 이들과 결이 다르긴 하지만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2012)가 대표적이다. 호주의 영화학자 조지 쿠바로스(George Kouvaros)는 영화에 연극을 끌어들이는 효과에 대해서 자크 리베트를 예로 이렇게 설명했다. "영화가 연극에 초점을 맞추면 자기 반영의 일부로서 일정 정도의 거리 두기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그 자신만의 작용을 시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략) 리베트에겐 영화(거짓)는 삶(진실)을 담아내는 것인데, 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건 연극이다" 물론 두 종류의 공간에서 연극이 리얼리즘의 문제를 극복했다고 속단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을 등급을 분류하는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연극과 영화의 거리가 얼마나 우리와 근접해 있는지를 의미론적 지평에서 볼 수 있게 된다. 분명한 건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계속해서 (이 영화가) '연극'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 유니버설 픽쳐스

얼핏 이나마 우리는 드니 빌뇌브 <컨텍트>(2016)와 같은 SF 영화, 그리고 팀 버튼 영화에서 보일 법한 캐릭터 모델링도 연상할 수 있다. 물론 미지의 존재를 다루는 <컨택트>의 신선한 방식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주된 요소는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우발적인 사건은 앤더슨이 추구하는 특성에 대해 논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요소는 가까이서 보면 무책임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앤더슨이 수행하고자 하는 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후반부에서 연극에서 주연을 맡은 오기 스틴백이 연극 무대를 뛰쳐나와 "아직도 연극을 모르겠어"라며 외친다. 이 장면은 알랭 레네의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떠올리게 한다. 알랭 레네의 영화에서 스크린이란 인물들의 연극이 상연되는 공간으로 생과 사의 통로를 연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우리는 연극을 통해 인물의 현실이 점차 영화란 공간과 일체가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현실과 비현실의 균열은 우리가 이를 '영화'로 인식한다기보다 어디서부터 현실인가를 특정 짓게 되는 효과가 있다. 레지스 드브레가 이미지(image)의 기원을 마술(Magic)이라 규명한 것은 인식이 재설정되는 데 있다. 영화에서 중첩된 시간은 우리의 판결을 기다리며 현실이 될 준비를 하는 셈이다. 뒤죽박죽으로 배열된 레퍼런스가 혼합될 때 더 이상 개연성은 앤더슨의 관심이 아니다. 사진, 영화, 연극 이러한 기록의 수단들이 투영하고 있는 세상은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무표정하고도 인위적인 세상으로 연결된다. 웨스 앤더슨은 이 형식의 힘을 믿고 관객들에게 이 굿즈들을 펼쳐 보인다. 왜 이 굿즈가 여기에 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끝으로 앤더슨에 대해 조금은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과연 그의 영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위해서 도약해야 할 변용이란, 더 파격적이어야 할까 혹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화여야 할까. 그는 다음 영화를 베니시오 델 토로를 주연으로 '어두운 영화'를 제작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과연 이전의 영화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뚫고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을지 사실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도 앤더슨 영화가 계속해서 독보적일 수 있는 이유는 소거되지 않을 독창적인 이미지 브랜딩이 힘을 잃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서부 사막을 배경으로 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또 하나의 브랜딩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유니버설 픽쳐스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감독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출연
제이슨 슈왈츠만
Jason Schwartzman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
톰 행크스Tom Hanks
제이크 라이언Jake Ryan
그레이스 에드워즈Grace Edwards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애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

 

배급|수입 유니버설 픽쳐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6.28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