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시네마의 수호자 혹은 영화 굿즈의 화신
[웨스 앤더슨] 시네마의 수호자 혹은 영화 굿즈의 화신
  • 김경수
  • 승인 2023.05.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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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감독 '웨스 앤더슨'의 작품 세계"

올해 칸 영화제의 라인업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화려하다. 경쟁 부문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켄 로치, 빔 벤더스, 토드 헤인즈, 마르코 벨로키오, 난니 모레티, 누리 빌게 제일만, 아키 카우리스마키 등 칸 영화제에 얼굴을 자주 드러내는 감독의 신작이 공개됐다. 여기에 카림 아이노우즈, 트란 안 홍, 예시카 하우스너 등 칸이 육성한 감독도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칸에서는 얼굴을 비친 적이 없는 왕빙, 신예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 거장으로 논의되지만 칸에 초청된 적 없는 조나단 글레이저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익숙한 얼굴이다. 특히, 올해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은 '경쟁에 오를 만해서 오른 듯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인터넷 밈을 빌리자면 "다 아는 사람이구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칸에 올 때가 된 감독이거나, 칸에 이미 오랫동안 들락날락한 감독이거나. 물론 모든 작품이 궁금하긴 하지만, 이제는 수상을 점치는 재미가 조금 반감된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여러 감독 중 누가 받더라도 <티탄>(2022) 때만큼이나 파격적인 선택이 나오지는 않을 터다.

 

ⓒ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

그중에서도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은 <문라이즈 킹덤>(2012), <프렌치 디스패치>(2021)에 이어서 세 번째로 칸을 방문했다. 사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칸 영화제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또한 그는 명성에 비해서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에서 상복이 없는 편이기도 하다. 2014년 제64회 베를린영화제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이 은곰상과 심사위원상을 탄 것이 전부다. 이전에 <프렌치 디스패치>(2021)가 칸 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이 의외라 생각했다. 물론 이 영화가 내러티브가 빈약하다는 비판이 있기는 해도, 비주얼에 한해서는 그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까지 연속으로 초청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칸 영화제는 여태껏 정치적이고 시의성 있는 영화를 주로 경쟁 부문에 초청했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시의성을 감지한 것이 아닐까.

이제는 고전적인 영화 문법이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 선명해졌다. 시네마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이는 조금씩 사라져갈 것이다. '시네마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담론의 최전선에 있는 칸 영화제와 여러 유수 영화제가 정치적인 문제만큼이나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틴 스콜세이지'가 MCU(Marvel Cinematic Universe,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테마파크라고 비판하면서 '시네마와 거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적이 있다. MCU에서 스파이더맨을 연기한 배우 '톰 홀랜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감독 '제임스 건'을 필두로 많은 이가 그를 섣불리 (속된 말로) 꼰대로 몰아가기에 급급했다. 또한, <아이리시맨>을 핸드폰으로 보지 말라는 한탄까지 더해져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이제 팬데믹 시대가 끝났고, OTT 오리지널이 극장 영화를 역전했다. 숏폼과 드라마가 영화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칸 영화제는 3대 영화제 중에 가장 보수적이면서 폐쇄적인 영화제다. 넷플릭스와 갈등을 일으키기까지 할 정도로 OTT에 폐쇄적이다. 작년부터 칸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틱톡과 파트너십을 체결했으며, 작년에는 틱톡에 업로드된 숏폼 콘텐츠를 따로 심사하는 틱톡 영화제를 열기까지 했다.

그러나 칸 영화제는 여전히 '영화다운 것'을 수성하고자 한다. 올해 비경쟁작 중 장장 3시간 26분에 달하는 애플TV와 마틴 스콜세지의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2023)과 기타노 다케시의 <목>(2023)은 구로사와 아키라란 거인 아래서 성장한 두 거장 감독이 쓴 영화적인 유서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스콜세지의 작품이 OTT 오리지널인데도 굳이 초청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영화는 물론 긴 호흡의 이야기가 소비되지 않는 시대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웨스 앤더슨은 잡지의 흥망성쇠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와 시네마의 종말에 대한 우려를 보인 적이 있다. 칸이 웨스 앤더슨을 초청한 데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지 않을까. 칸 영화제가 황금종려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웨스 앤더슨에게 큰 상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시네마의 고전적인 가치를 수호하려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1960년대를 다룬 전작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55년, 운석이 떨어진 것으로 유명한 가상의 사막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배경으로 한다. 그들은 매년 운석이 떨어진 사건을 기념하는 소행성의 날 주니어 스타게이저 행사를 연다. 전국에 있는 어린이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모여서 토론하고 노는 행사다. 순조롭게 잘 흘러갈 것으로 예상되던 축제에 변수가 생긴다. 바로 외계인의 발견이다. 그로 인해서 행사에 있던 사람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갇히게 된다. 예고편으로 짐작하건대,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1950년대 매카시즘 체제 아래의 미국 SF에 대한 경의를 담는 영화다. 한편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군중이 격리된 상황에서는 팬데믹이 생각난다. 공개된 정보로 미루어 볼 때 전작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프렌치 디스패치>와 마찬가지로 옴니버스에 가까운 플롯으로 보인다. 이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는 그가 그려내려는 1950년대가 왜인지 우리 시대와 맞닿아 있어서다.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낙인찍는 매카시즘과 트럼프를 기폭제로 심화된 극우주의는 제법 비슷하다. 어느덧 세상이 신냉전 체제에 접어들었고, 1950년대의 SF가 세계의 종말에 대한 상상력을 주로 드러낸 것을 미루어볼 때, 1950년대로 복귀하는 일은 그야말로 흥미롭다. 시네필 출신 감독으로 그가 70년 전의 유산을 어떻게 그려낼지가 기대된다.

 

영화 <문라이즈 킹덤> ⓒ 영화사 진진

웨스 앤더슨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를 통해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마니아층이 굳건해진 감독이다. 그의 이름은 영화에 친숙하지 않은 대중에게도 유명하다. 그는 시네필 출신으로 1994년 단편 <바틀 로켓>을 장편으로 확장한 <바틀 로켓>(1996)으로 데뷔했다. <바틀 로켓>은 원래 장편으로 기획된 영화다. 첫 파트를 찍은 단편을 선댄스 영화제의 극작 워크숍에 들고 갔고, 그는 거기서 제작자 제임스 L.브룩스를 만나서 이 영화를 장편 영화로 개작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다만 그의 첫 장편은 미국 영화감독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선댄스와 뉴욕, 텔라루이드 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외면받았다. 그런데도 마틴 스콜세지 등의 극찬으로 그는 차기작을 계속 찍는다. 그가 대중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문라이즈 킹덤>(2012)부터다. 그의 영화 스틸컷이 인스타그램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힙스터 체크리스트에 노아 바움백, 자비에 돌란과 함께 힙스터가 소비하는 감독으로 언급되었다. 웨스 앤더슨을 필두로 아트하우스 영화를 소비하는 힙스터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영화 계정은 물론, 유머 계정 등 온갖 곳에서 그의 영화는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라라랜드>(2016),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등 영화와 함께 미장센이 아름다운 영화, 인생 영화 등으로 소비된다. 심지어 그의 팬이 웨스 앤더슨 풍의 풍경을 찍은 사진을 모아서 전시한 「우연히 웨스 앤더슨」이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했고, 그에 관련된 책 두 권이 연달아 출간되었으며, 책의 삽화를 그린 맥스 달튼의 개인전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이 열리기도 했다. 또 그의 미술감독 애니 앳킨스의 디자인을 담은 디자인북이 출간되기도 했다.

심지어 숏폼에서는 '웨스 앤더슨처럼 찍기'라는 놀이가 유행하고, 미드저니에서는 웨스 앤더슨처럼 그림 그리기가 가능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파스텔톤 색감과 회화같은 프레이밍, 레트로 감성이 가득한 소품은 그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장은 그의 영화에서 이야기가 버려지고 소비되어지는 팬시 상품이자 밈으로 만드는 양날의 검이다. 그는 의도치 않게 인스타그램 세대의 감수성을 상징하는 감독이 되었다. 한국 영화계에서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캐롤>, <라라랜드> (훗날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과 함께 영화 굿즈의 보편화를 이끈 여러 작품 중 하나다. 웨스 앤더슨만의 책임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그가 소비되는 방식을 이야기해야만 그가 문제적인 감독인 이유를 더욱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 <다즐링 주식회사>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사실 웨스 앤더슨은 칸이 사랑하는 좌파적 정치성과는 거리가 있는 감독이다. 그는 되려 '리얼리즘'과 '정치성'에 거리를 둔다. 그가 대신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몽상'이다. 그의 주제의식은 그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의 "세계는 몽상가가 필요하다"라는 대사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몽상은 주로 미성숙한 아이의 것이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몽상을 어떻게 그려내느냐'의 문제를 시기에 따라 다르게 그려낸다. 그의 필모는 정확히 그의 첫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미스터 판타스틱 폭스>(2010)를 기점으로 반으로 나눌 수 있다. <다즐링 주식회사>(2007)까지 그의 초기작으로, <문라이즈 킹덤>(2012) 이후로 그가 찍은 영화를 그의 후기작으로 구분하기가 가능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바틀 로켓>과 <문라이즈 킹덤>은 둘 다 웨스 앤더슨 영화 중에서 손꼽힐 만큼 저예산 영화다. 또 이 둘의 화면비는 1:1.85으로 동일하다. <문라이즈 킹덤>와 데뷔작 <바틀 로켓>의 스타일은 물론 정반대다. 그런데도 감독의 필모 안에서 이 둘은 배치상 데칼코마니처럼 완전히 겹친다. 그가 유달리 이 두 작품에서만, 그의 인장인 아나모픽 렌즈를 배제하는 것도 또 다른 근거가 될 수 있다. 혹시 그는 자신의 필모를 두 막으로 구성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둘을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몽상가가 누구냐'는 문제다. <다즐링 주식회사>까지 그가 그려낸 몽상가는 찌질하고 어수룩한 남성이다. 주로 3인조로 구성된 몽상가는 장-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가 누벨바그 시절에 찍은 여러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바틀 로켓>은 장-뤽 고다르의 <국외자들>(1964)과 <네 멋대로 해라>(1960)의 오마주가 선명히 들어가 있다. <바틀 로켓>과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몸은 성인이되 정신은 아이인 남성은 초기작에서 계속 변주되어 드러난다. <로열 테넌바움>(2002)에서 <다즐링 주식회사>(2007)까지의 서사는 가족 서사이다. 아버지에게 애증을 지닌 소년의 서사가 반복된다. 이는 미국 인디영화의 기수 중 하나인 할 하틀리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할 하틀리의 <심플 맨>(1992)의 아나키스트 아버지를 보려고 여정을 나서는 인물, <바보 헨리>에서의 괴상한 가족의 초상은 웨스 앤더슨의 가족과 닮아 있다. 더불어 본인이 오손 웰즈의 <위대한 앰버슨가>(1942)의 오마주라 밝힌 <로열 테넌바움>은 <프렌치 커넥션>(1971)의 진 해크만의 캐스팅에서 알 수 있듯이 뉴할리우드 시네마에 대한 찬양을 보인다. 시네필이면서도 그는 아버지에 대한 신경증적인 거부를 보인다. <다즐링 주식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잭(제이슨 슈왈츠먼)은 아버지의 죽음을 유품에 대한 패티시즘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그의 몽상가는 아버지에 저항할 수도, 아버지가 될 수도 없는 청춘의 좌절감 아래서 탄생한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피터팬픽쳐스

반면에 <문라이즈 킹덤>부터 몽상가는 웨스 앤더슨 본인이자 그의 작품에 깃든 오마주를 발견하는 시네필로 그려진다. 몽상가가 자신이 된 순간부터 웨스 앤더슨의 이야기가 달라지기에 이런 임의의 구분이 가능하다. 물론, <바틀 로켓>에서부터 색감의 대비로 미장센을 그려내는 앤더슨의 스타일이 드러나기는 했다. 또 <스티브 지소의 해저 여행>과 <다즐링 주식회사>부터 이 스타일을 점차 굳혀나갔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이 정점에 오르고 완성형에 다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스스로 몽상가이자 이야기꾼'으로 설정하면서부터다. 그의 색감은 더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수직과 수평으로 카메라가 움직이게끔 하고 강박적인 비율과 트래킹 등으로 화폭에 가까운 미장센을 그려내고자 했다. 핸드헬드 등을 최소화하고, 인물이 자동차 등의 운송 수단을 타고 있더라도 거기에다가 카메라를 고정해서 화면이 흔들리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는 카메라가 절대 미장센 바깥을 찍지 않게끔 하는 의도로 보인다. 그는 영화 안을 완전한 세계로 그려낸다. 모든 장면이 유기적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파편의 연결로 보이는 것도 이러한 연출에 의해서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 이러한 그의 연출은 그의 영화가 짧게 잘라 소비되어질 수 있는, 가령 짤방 등 인터넷 밈으로만 쓰여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웨스 앤더슨의 연출은 <쉘부르의 우산>(1962)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프랑스 감독 '자크 드미'의 스타일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자크 드미가 <로슈포르의 숙녀>(1967)에서 로슈포르 마을을 통째로 색칠해 외부와 분리된 픽션으로의 공간을 구축했듯이 말이다. 자크 드미가 모든 것을 아날로그로 그려내듯이, 웨스 앤더슨도 아날로그로 모든 소품을 제작한다. CG가 어느 정도 화면 너머에 있는 형상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도록 한다면, 아날로그로 제작된 물품은 화면 너머의 것이 또 다른 평행우주라는 느낌을 명확히 드러낸다. 더 나아가 자크 드미가 영화 속 인간을 인형극의 인형으로 그려내듯이 웨스 앤더슨도 마찬가지다. 그는 배우에게서 표정을 제거하고 그들을 이야기 전달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그의 영화는 실사인데도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웨스 앤더슨은 자크 드미에게서 사실적 몽상을 그려내는 법을 빌렸고, 심지어 그의 방법론보다 한 차례 더 나아간다. 자크 드미가 알제리 전쟁이라든지 미국 문화의 유행 등 당대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를 픽션에 개입하게끔 한 데에 비해서 웨스 앤더슨은 아예 그마저도 삭제한다. 그저 모방하기가 쉬운 스타일만 남고 사유의 깊이와 역사적인 시공간은 사라지고야 만다.

마지막으로 그의 영화를 둘로 나눌 수 있다면 그 기준은 '시간'이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속 장소는 제법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 <바틀 로켓>이나 <맥스 사랑에 빠지다>같은 초기작에서 인물이 어떠한 공간에 있는지 드러나거나 짐작할 수 있는 편이었다. <로열 테넌바움>(2002)에서부터 앤더슨의 영화적 공간은 모호해지기 이르렀다. 정점에 다다른 것이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2004)과 <다즐링 주식회사>이다. 두 작품에 이르러서야 웨스 앤더슨은 현실과 그 아무런 접점이 없는 가상의 시공간을 창조하는 데에 성공한다. 미국 등의 국가는 기호로 기능한다. 일본의 영화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를 "21세기에 걸맞은 진정한 픽션"이라고까지 상찬했다. 웨스 앤더슨은 (현대로 보이기는 하더라도) 두 영화에서 시간을 지정하지 않는다. 그는 동화를 한 차례 거친 뒤부터는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1940년대를, <프렌치 디스패치>가 196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웨스 앤더슨의 시공간이 평행우주가 아니라 대체역사를 그려내기 시작해서다. <문라이즈 킹덤>도 감독의 의도대로라면 그가 어릴 적에 하지 못한 첫사랑을 그려내려는 시도다. 이야기꾼으로 거듭나려는 과정 한가운데에 동화가 있다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만약에' 혹은 '옛날 옛적에'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으로 현실과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몽상가로 지칭하며 이러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웨스 앤더슨이 그리는 과거는 레트로나 노스탤지어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는 과거를 전적으로 빌리지만, 노스탤지어나 그 시기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물증이나 판타지로 드러내지 않는다. 되려 자신의 상상 속에만 있는 대체 역사를 그려낼 뿐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효과적이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고, 세계 2차대전이 말미에 잠깐 암시되면서 그 세계가 끝나리라는 불안이 담겨 있어서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가 그려낸 세계관의 문제를 담아낸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는 모티프를 연상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계속 발생한다. 그는 영화 개봉 시기에 『뉴요커』의 팬을 자처해 자신이 아끼는 기사를 편집한 책을 출간한 적도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지레짐작하건대 <프렌치 디스패치>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둘이다. 2부의 기자는 수전 손택, 4부의 기자는 제임스 볼드윈이다. 마비스 갈란Mavis Gallant의 <5월의 사건: 파리 노트북>을 기반으로 창조한 3부에서 그려내는 사건은 프랑스의 68혁명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현실과 똑같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되려 그가 과거로 그려내려는 세계는 모든 이야기가 공존할 수 있는 세계다. 설정에 따르면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는 재정으로부터 자유로운, 할리우드의 생태계와는 다른 이상적인 영화 생태계다. 어떤 이야기든지 간에 창작의 자유를 존중하는 한에서 저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이야기가 교차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캐릭터가 스크린 안에서 동등한 위치 안에 있도록 하는 그의 작법과도 이어져 있다. 캐릭터 사이의 중심이 해체되도록 모든 배우를 비전문 배우로 기용하는 대신에, 그는 모든 배우를 스타 배우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을 쓴다. 이는 카메라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인장이라 할 수 있는 빠른 속도의 트래킹이 특히 그러하다. 캐릭터끼리 대화할 때 그는 한 캐릭터를 비추고 빨리 다른 캐릭터를 트래킹으로 포착한다. 둘은 잘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이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웨스 앤더슨은 모든 캐릭터의 서사가 같은 위치에 서 있도록 하고, 하나하나가 존중받을 수 있게 한다. 이것이 그가 시네마를 보는 태도로 전이된 것이 <프렌치 디스패치>의 연출이다. 종이매체와 애니메이션까지 아우르는 그의 연출은 잡지야말로 이상적인 영화 생태계라는 것을 드러낸다. 웨스 앤더슨은 프랜치 디스패치의 폐간을 통해서 모든 이야기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귀속되는 세계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는 셈이다. 1부에서 그가 오웬 윌슨이 연기하는 세자렉이 창녀 등의 저속한 것을 위악적으로 언급한다든지, 3부에서 금지를 금지하라는 상황주의자의 로고를 가져와 PC와 캔슬컬처를 비판하는 등 지금 이야기가 처한 위기를 드러낸다. 특히 2부에서는 여성의 누드를 소재로 하지만 그 누드를 추상화로 그려내는 화가의 에피소드로 소재주의의 문제를 건드린다.

웨스 앤더슨은, 이야기 혹은 시네마가 사라져 가고 있고, 이야기가 제대로 존중될 수 있는 세계가 없다는 우울감 아래서, 저만의 세계를 건축하는 것이 아닐까. 1969년생인 그가 1968년 혁명을 그려내는 방식이 문제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시대에 더는 적응할 수 없다는 우울감으로 과거를 밈화하고 일그러뜨리기까지 한다.

 

ⓒ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

결국, 웨스 앤더슨이 문제적인 감독인 이유는 그가 근작에서 그려내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대중이 소비하는 방식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그가 이야기꾼으로의 도약을 시도한 것은 <미스터 판타스틱 폭스>부터다. 그는 동화책을 낭독하는 나레이터를 영화에 도입했다. 그것이 제 4의 벽을 넘는 전지전능한 위치에 서도록 했다. 나레이션의 위치는 다소 모호하다.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마찬가지다. 웨스 앤더슨에 따르면 이 나레이터도 결국 영화 속 세계관에 있는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과 '장-뤽 고다르',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위예' 등 감독이 브레히트의 전통 아래서 영화에서의 제4의 벽을 깨는 데에는 이 영화 속 세계관이 완전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웨스 앤더슨은 오히려 그 반대다. 나레이션은 그의 서사가 헐거운 것을 게우는 장치로 기능하는 데에 그친다. 그가 이야기의 재미를 이야기하는 데에 비해서 헐거운 내러티브를 구사한다는 것을 지적한 평론가는 꽤나 많다. <바틀 로켓> 등 큰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와 달리 옴니버스 영화처럼 구성한 여러 영화에서 이야기가 매력적인지는 의문이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나레이터는 저널리즘의 언어라기보다 차라리 구술문학을 전달하는 이야기꾼으로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치렁치렁한 미사여구를 통해서 말이다.

웃기게도 웨스 앤더슨이 이야기꾼으로 거듭나려고 찍은 최근의 작품은 숏츠와 짤방, 드라마 등 나날이 길이가 짧아지고 있는 동시대 콘텐츠의 형식을 앞서서 그려낸 듯하다. 하지만 이야기꾼으로의 재능이 모자란 데에 비해서 이야기꾼이고 싶다는 자의식이 영화 곳곳에 드러날 때,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불쾌감을 느끼고는 한다. 더욱이 그런 그가 가장 이야기꾼답지 않게 소비되는 모순은 그를 난감한 위치에 서 있게끔 한다. 웨스 앤더슨이야말로 시네마의 위기를 체화하고 있는 감독이다. 영화의 굿즈화에 앞장서 있으면서도 본인은 시네마의 수호자가 되고자 한다. 그는 과연 시네마의 수호자일까, 영화 굿즈의 화신일까. 아직도 둘 중 어느 쪽인지 헷갈린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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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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