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고장 날 때 예술은 시작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1]
세계가 고장 날 때 예술은 시작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1]
  • 박정수
  • 승인 2023.07.03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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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

파스텔톤 미장센, 완벽한 대칭과 구도, 강박적인 미술 등 특유의 탐미적인 형식으로 유명한 '비주얼 아티스트' 웨스 앤더슨. 그의 완전무결한 형식은 항상 경험해 보지 못한 과거, 유년기 때 오롯이 갖지 못한 것 혹은 지나간 시간(추억)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는 소멸하기에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강박적으로 붙잡는다. '키덜트'적인 앤더슨의 명랑한 세계는 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죽음이 에워싸고 있다.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 속 모든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항상성)하고자 한다. 앤더슨은 1960년대의 예술계와 우주에 대한 미국인의 환상을 오늘날에 소환하는 동시에, 영화 속 인물들이 각자가 '바라고 원하는 기존 상태'를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상태로 그려낸다. 이를테면, 전쟁터에서 계속 사진을 찍어 온 사진작가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도 강박적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배우는 연극무대를 벗어나서도 항상 분장을 하고 대사를 술술 외며 다닌다. 장학생 선발에 참가한 영재들은 옛 위인의 이름을 반복해서 말하며 재능을 과시하고,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계속 똑똑해지기 위해서, 다른 학부형들과 다툰다. 심지어 영화 속 공산주의 세력과 냉전을 벌이는 미국은 어떻게든 상대 진영에 '행복하고도 완전무결한 이상향'으로서 선전하고만 싶다. 그런데 이 도시에 갑자기 UFO가 출현했고, 모든 인물들은 외계인과 마주한다. 영화 속 반복되는 단어, '불확실성'이 나타난 순간이다. 이후 도시는 엉망이 된다. 영화 속 세계는 '기대하는 것', '그렇게 하기로 된 것', '본질로 여겨지는 것'들의 항상성을 위하여, 변화를 강박적으로 거스르고 부정한다.

최적의 상태, 즉 삶을 안정적이고 일정하게 유지하고 싶은 인류는 흡사 정해진 품목만을 끝없이 반복 판매하는 영화 속 '자판기'와 태도가 흡사하다. 자판기는 인간이 설정해놓은 '배역'이나 '대사'를 천편일률적으로 반복하는 '배우'라 할 수 있다. 연극에 참여하며 정해진 행동, 대사, 연기만 반복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 또한 마찬가지다. 가령 토지를 파는 자판기에 의해서 등장인물은 자연스레 '공인중개사'가 되거나 투자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인간의 항상성은 '기계의 항상성'에 의해서 좌우되기도 한다.

앤더슨은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그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인물들을 최대한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롱테이크를 구성하는 카메라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수평적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는데, 하나의 테이크는 다양한 프레임을 품으며, 그 안에 배우들은 자신이 담긴 프레임이 카메라에 노출되어야만 마치 자판기의 '버튼'이 눌린 것처럼 대사를 시작한다. 배우들은 연극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연극을 좌우하는 '각본'이나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로 인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행동을 마치 자판기처럼 규정하게 된다. 반면에 카메라가 다음 프레임으로 이동해서 배우를 외면하면 그들의 대사는 자연스레 멈춘다. 프레임 바깥에서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은, 버튼이 눌리지 않은 자판기가 물품을 내어주는 것처럼 '규칙 위반'이다. 이러한 롱테이크는 보통 '수평적인 트래킹 숏'이나 '패닝'이 구성한다. 수직적인 달리 인-아웃, 줌인-아웃이 아니라, 피사체와의 '거리'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는 수평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대상과 카메라간의 '항상적인 관계'를 가시화한다.

 

 

그런데 자판기가 고장난다. 계속해서 유지되던 영화의 규칙은 깨진다. 오직 물건만 내어주던 자판기, 피사체를 촬영만 하는 카메라, 두 사물에 의해서 등장인물의 일정한 항상성이 유지되었으나, 고장으로 인해 카메라가 이동하지 않았는데도 프레임 바깥에서 소음이 침투하는 '오반응'이 발생한다. 심지어 우주를 관측하는 '천체 망원경'이 갑자기 인간의 제어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날뛴다. 기기가 흔들리지 않았을 때, 이를 사용하는 두 청소년은 '과학자'라는 항상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망원경이 흉흉하게 흔들리며 두 남녀의 입술을 충돌시킨다. 그러더니 이들을 과학자가 아닌, '연인'으로 극에 세운다. 또 한 예로, 한 부자가 '자동차'의 속력 등을 정교하게 계산하여 대상을 파악한다. 그러나 이들이 분석한 자동차는 곧장 고장 나며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그들 역시나 허술할 수도 있는 모습을 그려낸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항상성을 유지하던 기계들이 고장 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계의 고장으로 인해 줄곧 유지되던 영화가 무드가 이탈되면서 즐거워진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서 35mm 필름으로 이탈하고, 선명한 컬러의 세계를 흑백과 아스라한 파스텔톤 미장센으로 어긋나게 만들며, 실사의 세계에 3D 애니메이션이 침투하는 본 작품의 형식이다. 연출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로, 미국으로부터 저항할 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관광지'가 되고, 아이들은 '그림'과 '음악'을 창작하며, 세계는 재밌게 변한다. 관계 또한 새로워지면서, 지지부진하고도 둔감하던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든다. 기존의 감각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 생경한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인간은 분명 모순적이다. 무언가를 고집하면서도 무언가를 주입당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이런 모습을 은폐한다. 그렇기에 변화하도록 하는 현실과 자신이 믿은 신념 사이의 간극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고장'은 자신이 믿어왔던 것으로부터 멀어져 비로소 가까워지는 것이다. 앤더슨은 고장에서 발생하는 예술이란 '가까워지고 싶은 것'이라고 형식으로 말한다.

영화에서 기계든 인간이든 세계든, 항상성을 유지할 때 카메라는 수평적인 무빙으로 카메라-피사체 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런데 항상성을 거부할 때, 영화의 카메라 워킹은 '달리 인'(dolly in)으로 변한다. 대상과 일정하게 유지되던 간극을 좁혀서 가까워진다. 달리 인으로 기차의 도착을 포착할 때,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포문을 열며 예술이 시작된다. 달리 인 뿐만 아니라 '줌인'으로 대상에게 밀착하거나, 거대한 대상인 UFO의 경우, '줌아웃'으로 멀어져서 대상의 총체를 조망한다. 자신의 항상성을 방해하는 요인을 부정하던 세계, 하지만 고장 난 항상성의 균열 사이로 틈입하는 우연과 사건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양하고 생경한 것들이 보이고 이어진다. 고장에 의해서 이어지고 재설정되는 관계는 '분할 스크린'으로도 가시화된다. 본래 서로 못마땅하던 사위-장인어른의 관계가 소중한 존재의 사망, 자동차 고장을 계기로 이어진다. 서로 쳐다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간극을 분할 스크린이 좁히고 맞댄다.

이러한 이어짐은 형식에만 그치지 않는다. 형식에 담기는 내용 또한 마찬가지로, 미 당국에 의해 격리되어 특정한 항상성이 강제된 방문객들은 '대화'를 회복한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상대를 배척했다. 하지만 미 당국에 의해서 상대와의 분리, 고립이 강제되자, 오히려 상대를 밀어내는 행위가 따분해진다. 그래서 이들은 미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관심조차 두지 않던 이들은 서로를 알아가며, 받아들이지 않던 세계와 상대를 포용한다. 미 당국이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깥과의 '접촉'을 금기시하니, 청소년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깥의 친구에게 연락하여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폭로한다. 이처럼 '무엇이 항상성이냐'에 따라서 고장의 유형, 예술이 되는 것은 제각각이다. 지상에서는 우주를 바라보는 한편, 지붕으로 올라갔을 땐 중력을 궁금해하며 땅으로 떨어지는 한 소년처럼.

 

하지만, 고장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다. 하나는 고장 난 상태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당연하게 잘 아는 항상성과는 정반대로, 고장은 해결되지 않는 찝찝한 불쾌감을 동반한다. 또 다른 맹점은 고장 난 것은 고쳐져야 한다는 것, 이로써 고장 나기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고장 나서 즐거운 세계에 항구적으로 머물 수 없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고장의 모호함은 대상의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 '의문의 부품' 등으로 처리한다. 이렇게 고장 난 기계처럼 세계가 고장 나며 발생하는 예술 또한 모호하다. 모호하다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가 '까마득하다는 것', 그래서 멀어졌을 때 가까워지고 싶은 영화는 당연히 그 모호함을 극복하고자 거리를 좁히려 안달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웠던, 또 대상이 결코 모호하지 않았던 고장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영화의 편집은 애스터로이드 시티 '극본'을 집필하는 차원인 1.33:1 화면비와 흑백을 결합한 '영화 속 현실', 그 극본이 실현되는 2.39:1 화면비와 컬러가 결합한 '영화 속 영화'를 왔다 갔다 한다. 그 이유는 고장이 동반하는 모호함에 있다. 갑갑한 흑백 차원, 널따란 파스텔톤 차원의 사람들 모두 다 아리송하다. 어느 차원에서는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해 하고, 그것을 표현한 차원에서는 해석이 긴가민가하며, 의도는 당최 무엇인지 의아하다.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고장 난 세계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호기심, 이에 그들은 '고장 나기 이전' 혹은 '고쳐진 세계'인 상대 차원을 오간다. 2.39:1의 세계에서 밝혀지지 않는 의문은 1.33:1 화면비에만 머무는, 2.39:1 화면비에서 하차한 배우만 알고 있다. 그리고 고장난 것은 올바른 상태가 아니기에 고쳐져야만 한다. 앤더슨이 강박적으로 붙잡는 당연하지 않은 것은 당연스레 고쳐지는 항상성이 아니라,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필연인 고장이다. 앤더슨은 고장 난 것들에게 가장 적합한 화면비, 색채, 매체 등을 고안하여, 고장을 정성스레 수놓는다.

설령 고장을 고칠 수 없더라도, 고장 난 상태가 이해되고 당연해진다면, 당연하지 않던 고장이 항상성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예술은 고장 난 찰나를 붙잡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항상성을 부정하고 '자해'해며 고장을 내야 하는 숙명에 처한다. 현실과 비교했을 때 고장 난 앤더슨의 세계는 분명 처음 마주하면 새롭다. 그러나 그 형식을 계속 보고 있자면 더는 신선하지 않게 된다. 이에 앤더슨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세계에 흠집을 낸다. 일단 1.33:1의 흑백과 2.39:1의 컬러, 곧 자신을 기준으로 어긋나있는 고장 난 세계를 반복해서 오가며 고장을 유지한다. 이조차도 뻔하게 오가다 보면 하나의 항상성이 되어 통속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1.33:1의 흑백에만 머물던 '나레이터'를 2.39:1의 컬러에 '실수'로 출연시킨달지, 소행성이나 UFO 등의 정체를 영영 모호한 상태로 방치시킨달지, 흑백이 유지되던 1.33:1 화면비에 컬러를 수놓는달지, 2.39:1의 널따란 세계를 때때로 1.33:1로 좁힌달지, 세계가 고장 나며 연인이 된 이들을 결말에서 갈라놓는달지, 영원불멸한 고장의 상태를 위해서 이를 수리할 작가 콘래드를 죽게 해 버리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고장을 유지한다.

영화 후반부에 격언처럼 반복되는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라는 대사, 이는 예술을 위해선 잠들고 고장 나야만 하는 크나큰 '대가'를 암시한다. 그럼에도 예술이 엄청난 위험을 부담하며 고장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재미를 주기 때문에, 멀어졌을 때 비로소 값져지는 살갗에 닿는 '감각'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은 고장을 정교하게 붙잡고 싶은 시네아스트다. 그러나 그는 영영 붙잡아 두면 뻔해질 것을 안다. 에스트로이드 시티에 원폭 실험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완전무결한 세계에 이해되지 않는 '대혼란'을, 완벽한 세트장에 '핸드 핼드'를 기꺼이 불러오기 위함이다. 어떻게든 세계를 고장내기 위해서.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감독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출연
제이슨 슈왈츠만
Jason Schwartzman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
톰 행크스Tom Hanks
제이크 라이언Jake Ryan
그레이스 에드워즈Grace Edwards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애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

 

배급|수입 유니버설 픽쳐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6.28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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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07-08 15:45:53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