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에서 가장 난감한 순간은 거대한 관에서 탈출한 오니가 도깨비불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닐 때이다. 머리 달린 뱀의 이야기를 듣고 묘를 다시 찾은 상덕은 이미 꺼낸 관 아래에 있던 수직으로 꽂힌 또 다른 관을 발견한다. 관을 꺼내 올리고 근처의 절에서 하루를 묵는 상덕과 그 일행은, 밤중에 관에서 탈출한 오니를 마주하게 된다. 봉길은 오니에게 공격을 받고 상덕과 화림, 영근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는 무력감 속에 그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는데, 이내 오니는 스스로 불타기 시작하더니 하늘 위로 솟아올라 절 주변의 상공을 원형으로 회전하며 활공한다. 이때 인간과 유사한 거인의 모습에 가까웠던 오니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추상화된 불의 형상만이 밤하늘의 어둠 한편을 비추며 스크린을 맴돌 뿐이다.
<파묘>는 이를 기점으로 다시 시작한다. 박지용 가족의 대물림 병을 끊어내기 위해 관을 파내던 영화는,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관(또는 쇠말뚝)을 파내는 영화가 된다. 다시 말해 관을 뚫고 한국과 미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혼령을 소멸시키던 영화는, 어떻게든 묫자리를 지켜내려는 정령을 유인하는 영화가 된다. 이 전환은 분명 낯설지 않다. 장재현은 <파묘> 이전의 두 편의 장르 영화에 걸쳐, 결정적인 순간에 서사를 멈춰 세우고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 적이 있다. <검은 사제들>의 최 부제는 구마 의식 도중에 도망쳐 도심 한복판을 떠돌다가 다시 돌아오며, 영신을 구하기 위한 구마는 김 신부와 최 부제를 스스로 구원하는 듯한 순간으로 나아간다. <사바하>의 절대 악으로 여겨졌던 존재는 신이 되어 믿음과 의심의 경계를 허물고, 신으로 여겨졌던 김제석이 쓴 예언서는 죽음을 피하기 위한 살인 지지서가 된다.
오컬트와 판타지, 미스터리의 장르성으로 나아가는 듯한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는 이러한 급전의 순간에 다다라서 다큐멘터리 기록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리얼리티와 맞닿은 이상한 풍경으로 시선을 돌린다. 인파 속의 도심, 한강과 한강 다리 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만월, 거리에 펼쳐진 크리스마스의 풍경들, 멀리 너머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 그리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함박눈. 그곳에는 어김없이 '어둠 속에 놓인 빛'이 있다. 그때 인물들 또는 카메라는 고개를 들어 그 '어둠'과 '빛'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끝내 <파묘>의 도깨비불은 장재현의 영화 프레임 한쪽에서 희미하게 점멸하던 어둠과 빛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장재현의 카메라가 장르의 스펙터클을 멈춰 세우고 반복해서 돌아오고야 마는 이 이상한 풍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한국형 오컬트의 장인'이라 오해받는 장재현의 영화가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장르성을 넘어 '한국'이라는 국가의 어떠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을까.
문 앞에 놓인 자들
<검은 사제들>이 괴상한 영화임은 성직자의 과오로 인해 죄 없는 자가 대속하는 아이러니에 있지 않다. 성과 속의 경계를 허무는 김 신부의 개성적인 캐릭터나, 구마 의식 와중에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최 부제의 운명적인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초자연적 현상을 소재로 한 오컬트 영화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사제들>이 이상한 사회극 내지 풍자극으로 변모하는 때는, 선택의 기로 또는 성장의 관문 앞의 인물이 '문 앞'이라는 복합적이고 모호한 공간에 놓일 때이다. 가령 김 신부와 최 부제는 영신의 구마를 위해 허름한 상가 안의 옷 수선 가게에 방문한다. 최 부제가 김 신부를 따라 들어가는 그 장소는, 누구는 소리를 치고, 누구는 이를 말리고, 누구는 얼빠진 얼굴로 침대 위에 앉아 있고, 어디선가 굿판을 벌이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기이한 장소다. 그곳은 옷 수선을 위한 작업장이기도 하고, 집이기도 하다.
특히 숨겨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게 무심하게 한쪽 구석에 놓인 듯한 좁은 계단은, 영신이 누워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진다. 영신의 방문 앞에서 최 부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이내 비틀거리며 뛰쳐나와 구토를 쏟아내고, 박 교수는 김 신부의 부름에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진다. 여기서 최 부제의 구토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장소로 인한 부적응으로서의 반응이었다면, 박 교수의 미끄러짐과 그들을 보고 한심해하며 "정신들 좀 차리자, 제발."이라고 말하는 김 신부의 건조한 태도, 금세 일어나 최 부제를 격려하는 박 교수의 행동은, 무언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이며 일상적인 반응처럼 보인다. 이 행동과 태도는 구마(exorcism)라는 신성하고 비장한 의식에 어울리기는커녕, 오히려 그 초자연적 현상에서 오는 서스펜스를 반감시키고 피부에 맞닿는 리얼리티의 영역으로 인물들을 끌어내리는 것만 같다.
한마디로 <검은 사제들>은 방안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이 만드는 스펙터클 이전에, 방 밖 또는 방 주변에서 발생하는 뜻밖의 삐걱거림을 보여준다. 이것이 호러와 스릴러의 장르성과 무드를 강화하거나, 분위기를 환기하는 유머로서 작동하기 보다는, 어떠한 장소적 환경 아래에서 특정 인물이 보여주는 사회적 행동 역학을 시험하기 위해 도식적으로 놓였다는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또는 그 행동의 세부가 캐릭터를 구성하는 디테일의 기능을 넘어, 도리어 서사를 지연시키고 멈춰 세우며 장르를 벗어난 리얼의 풍경을 스크린에 소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검은 사제들>의 '문 앞에 놓인 자들의 삐걱거림'은 봉준호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삑사리'와 닮았다. 그리고 봉준호와 마찬가지로, 분명 동시대 한국을 지목한다.
옷 수선 가게와 좁은 계단, 그리고 그곳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영실의 방문 앞 공간과 더불어, 기이한 리얼리티의 공간은 동시대 한국 위로도 쏟아져 내린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 한국무속신앙 등,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 <파묘>가 소재로 하는 종교는 그 자체가 타국과 구시대라는 이질감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가령 영화는 종교라는 소재를 일종의 장르로 치환하여 그 룩(look)을 통일화하곤 한다. 하지만 장재현은 그것에 균열을 일으키고 괴상한 혼종을 만든다. 이를테면 <검은 사제들>은 바티칸 교황청의 신부들이 바티칸 성당 안에서 '12 형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장르의 관습에 룩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탈리아 신부인 이들이 한국에 놓인 이질적인 모습인데, 그 한국 도시의 풍경과 그들이 타고 있는 차의 질감 등은 마치 그 룩을 점차 서양의 중심 장르의 관습(formula)에서 멀리 떼어놓는 것 같다.
<파묘>의 화림과 봉길은 무당임에도 불구하고 익히 생각하는 무당의 모습을 쉬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우선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이들이 향하는 곳은 굿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국 타지이다. 문제가 있는 아기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의식은 '세인트 조셉 메디컬 센터'라는 근대식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찾아간 의뢰인의 집 마당에는 곳곳에 야자수가 있어 이국적인 인상이 가득하다. 또한, 패셔너블한 의상과 분장도 그러하거니와, 의뢰인의 아기 위에 봉제 주머니를 올려다 놓는 봉길의 몸짓이나, 한 손을 귀밑 근처에 갖다 대고 휘파람을 부는 화림의 손짓은 그 자체로 품격 있어 색다른 긴장감을 스크린에 불러들인다.
더불어 영화는 양 팔뚝이 모두 드러나는 하프 셔츠를 입고 팔짱을 끼거나 합장하는 봉길의 자세와 전자담배를 피는 상덕과 화림의 자세를 집착에 가깝게 반복하며 스크린에 각인시키려고 하는데, 그 형상이 주는 감각은 무속을 소재로 하는 기존의 영화와는 사뭇 다른 톤앤매너다. 이렇듯 <파묘>는 유머와 동시대의 아카이브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그 혼종을 탁월한 방식으로 빚어낸 사례가 된다.
장재현은 동시대 한국의 풍경에 종교의 색채를 띤 기호가 놓이거나, 종교의 소재에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동시대의 기호가 놓이는 이질적인 이미지를 과감히 보여주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가톨릭 방식의 구마가 허름한 상가에서 이루어지고, 신부복을 입고 돼지를 끌고 다니는 신부가 도심 한복판에 있는 형상이 다소 이질적이더라도, 영화 내내 절과 시골 동네, 한적한 도로를 누비던 목사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한 도로 가운데 놓이는 과정이 다소 갑작스럽더라도, 무당이 말끔한 셔츠와 코트를 입고 헤드셋을 끼며, 최신식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모습이 다소 익숙지 않더라도. 장재현은 그 룩을 억지로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장재현의 목적은 한국화와 동시대화가 아니라, 삐걱거리는 액팅과 통일화되지 않은 이질적인 룩을 통해 스크린이 지목하는 곳이 동시대 한국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데에 있다.
어두운 골목과 도심의 불빛
이때 <검은 사제들>의 도심에 놓인 어두운 골목은 장재현의 영화의 기이한 리얼리티의 공간을 함축하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카메라는 이곳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바라본다. 하나, 골목 안에서 바깥 거리를 바라보는 방향으로의 숏. 최 부제가 골목 안에서 구마에 사용할 돼지를 들고 김 신부의 전화를 기다릴 때, 카메라는 골목 안에서 바깥 거리를 배경 삼아 최 부제의 실루엣을 담는다. 구마가 이루어지는 상가에 들어가기 전, 김 신부가 골목으로 들어서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씬의 첫 숏은 정확히 앞선 최 부제의 숏의 변주다. 그리고 도망쳤던 최 부제가 다시 돌아와 김 신부와 다짐하고 건물로들어가는 숏에서 반복된다. 이 숏들에서 인물은 역광으로 인해 골목의 어둠에 드리워져 있고, 건물벽이 만드는 프레임 속 프레임 너머 후경을 이루는 번화가의 빛은 동시대 한국의 일렁이는 풍경의 흔적으로 프레임 한편을 채운다.
둘, 바깥 거리에서 골목 안을 들여다보는 방향으로의 숏. 상가에 들어가기 전, 김 신부가 담배를 피울 동안 최 부제는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시선을 보내다 어렸을 적 사고로 죽은 여동생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최 부제가 구마 도중에 도망쳐 나왔을 때, 거리를 달리던 그는 어두운 골목 한편에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과 여동생의 환상을 본다. 이 숏들은 주로 바깥 거리 혹은 골목 안에 있는 인물이 그보다 더 깊고 어두운 쪽을 응시하는 시점숏처럼 제시되는데, 그곳에 있는 것은 항상 개인에 밀접한 트라우마에서 공동체의 죄의식으로 나아가는 기억의 현현이다. 이렇게 <검은 사제들>의 많은 사건들은 구마가 이루어지는 상가 안과 영실의 방안 보다, 때로 상가 밖의 골목과 도심 거리 위에서, 빛과 어둠, 속세와 음지가 이상한 방식으로 연합하고 공존하는 이미지 안에서 일어난다.
<검은 사제들>의 밝게 빛나는 서울의 풍경(실제 로케이션은 대구 동성로이다)은 <사바하>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거리가 된다. 티베트 승려 '네충텐파'와의 만남을 가진 뒤, 박 목사는 영월로 가는 길에 김제석의 예언서에 대한 나머지 비밀들을 모두 깨닫게 된다. 그의 모든 추론은 영월 시내의 도로 위에서 신호로 발이 묶여 있을 때 이루어지며, 이 사실을 영월군 경찰서에 알리는 와중에는 차에서 내려 거리를 서성이며 통화하기도 한다. 이때 캐럴과 함께 한국의 크리스마스 거리의 풍경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빛나는 거리와 인파를 담은 숏들이 박 목사와 그가 타고 있는 차를 에워싼다. 이 숏들은 <검은 사제들>의 서울처럼 다큐멘터리 기록물을 연상시키는 순간으로 나아가고, 한편으로는 긴박함 속에 있는 인물들을 낭만으로 포장하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나아가 <검은 사제들>에서 맥거핀과 메타포의 영역에 있던 트라우마와 죄의식은 <사바하>에서 더욱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 부친 살해로 소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나한과 철진을 포함한 4명의 소년범은 김제석의 살인 지시를 받고 수년 동안 강원도 영월의 여아들을 살해한다. 그리고 연쇄 살인의 죄의식 끝에 이들은 '어둠 속에 놓인 빛'을 마주한다. 철진이 자살하기 직전까지의 두어 개의 씬에서 일련의 숏들을 살펴보면, 그를 만나러 가는 나한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차도 위를 헤드라이트 하나에 의지한 채 미끄러져 내려간다. 밤하늘에는 월광을 내뿜는 보름달이 있다. 시신을 은폐했던 터널의 콘크리트 앞에 트럭을 세워둔 철진은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는 '하얀 물체'를 본다. 그리고 급하게 헤드라이트를 켜자, 그 형상은 사라진다. 이렇게 어둠 속의 빛은 숨겨진 진실 주위를 어른거린다.
또한 나한이 금화를 죽이기 위해 그를 포박해 들판으로 끌고 갈 때, 멀리 후경 너머에는 반짝이는 시내의 풍경들이 노골적이게나마 프레임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금화의 말을 듣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쌍둥이 자매에 대해 알게 된 나한은, 끝내 귀신이라 불리는 '그것'과 마주한다. '그것'은 철진이 마주한 귀신과 마찬가지로 투명할 정도로 '하얀 얼굴'을 갖고 있다. 그 흰 얼굴은 어두운 방 안에서 월광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데, 그 형상 또한 환상성과 죄의식의 또 다른 현현이기에 <검은 사제들>의 골목 안쪽에 있던 여동생의 트라우마와 동일 선상에 놓인다. 또는 <사바하>의 '하얀 얼굴'은 '어둠 속에 놓인 작은 빛'이다. <검은 사제들>의 창문 너머 만월이 구마를 위해 떠 있듯이, <사바하>의 하얀 얼굴은 진실과 믿음을 붙들고 진동한다. 그리고 박 목사는 엔딩에 다다라 "일어나소서. 당신의 인자함으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시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며 기도를 올리는데, 카메라는 그 기도의 자세를 의식하듯 밤하늘로 고개를 든다. 그 아래를 수놓는 것이 순백색의 눈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애도, 치욕, 그리고 청산
장재현은 한국화와 동시대화는 별개의 맥락에서 갑작스레 한국성이 드러나는 어떠한 풍경으로 자꾸만 돌아간다. 그는 <검은 사제들>, <사바하>, 그리고 <파묘>에 이어서, 장르적 서사라는 기둥을 세우고, 한국성과 동시대성을 상기시키는 바깥의 주제를 하염없이 맴돈다.
즉, 계기적 사건의 주변에서 <검은 사제들>의 번화가 속 골목을 하염없이 서성인다. 최 부제가 귀신 들린 돼지를 들고 가야만 하는 곳은 한강이다. 한강 다리 위에서 돼지를 끌어안고 투신할 때, 한강은 근현대 한국사를 건드리는 재난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그가 다시 올라와 다리 위를 활보할 때는, 그저 한국 그 자체의 풍경의 감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검은 사제들>). 나한과 김제석의 죽음 이후, 사고가 일어난 도로 위에 놓인 박 목사는 멀리 저편 시내에서 터뜨리는 불꽃놀이를 목격한다. 그 빛은 눈앞에 펼쳐진 비극과 어울리지 않게 현실적이고 일상적이고 무미건조한 시간으로 그들을 잡아당기는 논픽션의 풍경이다(<사바하>). 순덕은 호텔에서 지용과 의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딸에 관련한 이야기에 더불어 기억하게 되는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지극히 한국적인 도시의 풍경이다. 한국에서 딸을 키우고 돈을 벌어 먹고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굳이 넘어가지 않더라도, 영화는 이국적인 풍경을 거쳐서 동시대 한국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미지를 보여주고야 만다(<파묘>).
비슷한 말을 반복하자면, 장재현은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기 이전에 '이곳이 한국이다'라는 명제를 반복하는 듯한 숏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그렇다면 장재현이 장르의 스펙터클을 포기하면서까지 보고자 하는 한국은 무엇일까. 장재현의 영화에서 한국을 '다시 본다'는 것은 어떠한 감각으로 다가오는가. 장재현의 모든 영화가, 김 신부와 최 부제가 구마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상가 앞 골목, 혹은 굿이 끝나길 기다리고, 자꾸만 진입이 연기되는 영실의 방문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장재현은 그 기다림을 통해 무엇을 다시 보려 하는가. 그 기다림 끝에는 다시 시작하는 서사가 있다. <검은 사제들>의 최 부제의 트라우마, <사바하>의 사이비 교주 김제석의 여아 연쇄 살인, <파묘>의 두 번째 관에서 나온 도깨비불(또는 쇠말뚝)에는 동시대 한국을 건들 수밖에 없는 진행형으로서의 역사가 있다. 이것은 애도에 관하고, 치욕에 관하며, 청산에 관한다. 이때 인물들 또는 카메라는 어김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장재현의 영화에서 '한국을 다시 본다'는 것은, 밤하늘에 떠오르는 작은 빛의 형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묘>는 그 상상력과 대중성을 떠나서, 한국을 똑바로 다시 보려는 듯한, 즉 밤하늘의 작은 빛을 똑바로 직시하려 하는 듯한 영화다. 오니가 스스로 불타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을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상덕, 화림, 영근은 한국의 역사 또는 동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각자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때 이들이 올려다보는 도깨비불이 땅속에 묻혀있던 진실의 이면이고 공포의 해소이자 잊힌 역사의 현현이라면, 그 뒤에 따라오는 사진적인 질감을 지닌 플래시백의 파편들은 친일파들의 단체 사진에 상상적으로 대항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이 과거(플래시백)들은 애도하지 못하고, 치욕스럽고, 청산이 연기된 아픈 기억들이다. 플래시백은 잠깐의 잔상이지만, 친일파의 단체 사진은 고정된 찰나이다. 플래시백은 형체 없는 상(想)으로서의 유령이지만, 도깨비불은 육체를 지닌 정령이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 대 육체로 정령을 무찌르고 단체 사진에 대항해야 한다. 불타는 철을 피에 젖은 나무로 내려치고, 배 속의 아기라는 미래를 담보로 한 상덕의 딸의 결혼식에서 가족이 아닌 이들이 합류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때 결혼식 단체 사진은 친일파를 담은 유물로서의 사진과 정확하게 상응한다. 미래를 위한 청산의 곤봉과 역사를 바로잡는 증인으로서의 카메라. 애써 밤하늘이라는 스크린에 빛이 맺힌다는 시네마로서의 은유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어쩌면 밤하늘의 작은 빛을 올려다보던 이들은 암실에서 빛을 새기던 카메라가 아니었을까. 또는 그 불타는 철이 총기라면, 피에 젖은 나무는 잉크를 머금은 펜이다. 끝내 수십 년의 시차를 거쳐 <파묘>에서 펜은 총을 이긴다. 한편, 70여 년 전 먼 나라에서 누군가 말하길, 카메라는 펜(만년필)이라고 하였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