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시카 하우스너]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
[예시카 하우스너]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
  • 이현동
  • 승인 2024.02.27 11: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인과 집단, 잠재적 욕망의 그늘 뒤에서"

'예시카 하우스너'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여성 작가 중 한 명이다. 오스트리아 영화계에서 누벨바그 비엔나의 일원인 그녀는 1997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단편 <플로라>(1997)로 미래 표범상과 졸업 영화로 발표한 <인터뷰>(1999)가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영화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영화에 흥미를 느껴 비엔나 영화 아카데미에 지원하면서부터였다. 그곳에서 연출과 편집, 조감독, 더빙 디렉팅 등 많은 것을 습득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왔던 건 여성 감독에 대한 편견이었다.

'실패한 연출과 학생이 되느니, 결혼하는게 낫겠다'라는 충고와 함께 디렉팅 수업을 들으면서 완전히 실패한 학생으로 지목당한 하우스너는 자신의 인식한 환경이 불우하다 느꼈다. 더욱이 자신이 존경했던 오스트리아 감독 '악셀 코르티'의 죽음 이후, 회의를 느낀 그녀는 휴학하고 베를린으로 넘어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하우스너는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를 보게 된다. 그의 영화에 감탄한 그녀는 그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함께 영화 작업을 할 수 있느냐고 먼저 물어봤다. 당시 함께 진행한 작품이 <퍼니 게임>(1997)이었는데, 그녀는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 이후에는 별다른 가르침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장편 영화인 <사랑스런 리타>(2001)를 공개하였는데, 안타깝게도 미카엘 하네케의 제자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와 비교 대상이 되었다. 하네케에게 영화 제작을 배웠다는 거짓 주장과 더불어 그녀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온전히 그녀의 것이 아니게 되었고, 몇몇 비평가들은 혹평에 가세했다. 하지만 하우스너는 담담하게 자신의 가치를 영화제를 통해 끊임없이 인정받았다. 특히나 칸과 인연이 깊은 하우스너는 베니스에서 상영된 <루르드>(2009)를 제외하곤 모든 영화(<사랑스런 리타>, <호텔>(2004), <아무르 푸>(2014), <리틀 조>(2019), <클럽 제로>(2023))가 칸 영화제의 선택을 받았다.

하우스너 작품은 유동적인 장르와 형식의 변용이 광범위하게 이뤄진다는 지점에 있다.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 시대극, 드라마, 멜로 등을 넘나들면서 주변부를 다채로운 방식으로 도려내는 그녀의 영화는 인간 내부에 있는 욕망과 정형화된 규율을 해방하고 수정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그 욕망은 청소년기에 발화되는 성적 호기심, 기적을 의심하면서도 기적을 경험한 이의 태도, 죽음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려는 실존주의, 감정이 소멸한 세계와의 공생, 생태주의에 관한 무분별한 세뇌 등은 본능적인 욕망이기도 하고, 학습된 욕망이기도 하다. 하우스너는 개인과 사회가 연동하고 있는 의식적인 규율을 통찰하면서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러한 현상이 우리의 삶과 접촉할뿐더러 연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 영화 <사랑스런 리타>(2001)

감시와 통제라는 조건 : <사랑스런 리타>, <호텔>

관행적으로 여겨져 오던 가부장 남성 중심주의와 가족주의는 노쇠한 테마처럼 여기저기서 흐느적거릴지언정 시대와 장소를 과녁으로 삼은 활촉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하우스너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사랑스런 리타>는 15세 소녀에게 주어진 통제와 감시가 어떤 역학 관계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깊이 있는 태도로 주시한다. 이 영화는 마르코 벨로치오의 <주머니 속의 주먹>(1965)이나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 <우리의 사랑>(1983)이 다루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가족주의의 붕괴로서 암시하면서도 공통적으로 중산층 가정이 지닌 보편적인 조건인 불온한 통제를 현실과 시대로부터 형상화한다. 가령 <주머니 속의 주먹>이 반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와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보면, 교회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고 싶었던 욕망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반영적 영화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화가 현실을 은유하는 방식으로 침투하기도 하지만, 실화로부터 소스를 얻는 영화인 경우엔 현실로부터 이어지는 파멸을 낙관할 수 없다. <사랑스런 리타>가 바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사랑스런 리타>는 비엔나 소년법원의 기록을 조사하던 중 중산층의 가정에서 발생한 한 살인사건에 주목하면서 기획된 프로젝트다. 기록에 따르면 권위적인 가부장적 아버지, 독단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한 한 소녀가 첫 남자친구와의 부적절한 관계, 잦은 결석과 계속되는 다툼으로 인해 부모에게 총을 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하우스너에게 관측되는 카메라의 윤리는 캐릭터가 가진 감정을 은닉하고 프레임과는 무관해 보이는 욕망을 사건의 동기로 차츰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그녀가 맨 처음 맺는 성적 충동의 대상인 어린 소년과 버스기사와의 관계에서도 그녀의 감정은 프레임에 긴밀하게 달라붙지 않는다. 감정이 조율되는 과정을 관측하는 카메라는 리타의 내밀한 감정까지 해부하지 못한다. 또한 리타를 추적하는 촬영기법인 줌인에서 보여지는 감정이란 어떠한 윤곽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무위한 표정으로 조각나 있다. 영화는 15세 소녀에게 주어진 통제와 감시를 경유하여 잠정적인 충동을 은닉하면서 언제 발화할지 모를 폭주에도 끝내 무감각한 태도를 유지한다. 감독은 비전문배우를 기용하면서 리타가 메시지를 명징하게 전달하고자 고안되고 양식화된 연기가 아닌 그저 '무엇인가'를 하는 '자연주의'적으로 방식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홈 비디오 카메라와 비전문 배우가 결합하면서 설계된 이날 것의 영화는 그 형식 자체로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 리얼리즘조차 침범이 불가한 카메라의 용례는 결국 리타가 총을 손에 쥐기 전까지도 의식할 수 없는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고 잠시뿐이라 말하는 하우스너는 이를 '기묘한 친밀감'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즉 이 기묘함이란 <사랑스런 리타>의 계절이 가진 겨울 풍경의 차가운 정서와 대비되는 제목 '사랑스러움'에 있다.

 

ⓒ 영화 <호텔>(2004)

하우스너는 이러한 주제를 <호텔>에 확장하여 사건이 발단되는 이유를 완전히 배제하고 악몽과 같은 영화를 연출한다.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관습에 도전하고자 했다. 스릴러가 갖고 있는 장르의 관행인 공포의 기원이나 이유, 그리고 귀신이나 유령 같은 영적인 존재들을 출현시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메커니즘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나 크리스토퍼 펫촐트의 <옐라>(2007)와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영화의 리듬은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정적이며 캐릭터를 구성하는 방식도 이와 동일하다. 덧붙여 <사랑스런 리타>가 캐릭터의 차가운 성질을 영화적 공간으로 표상했다면, <호텔>에서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공간에도 그 미장센이 깊게 채색한다. 현실과 상상을 경계로 상정하는 이 영화는 현대가 가장 고상한 숙소로 설계하고 건축한 호텔과 숙소의 원형인 동굴과 더불어 그 과정으로서 경유하게 되는 숲을 왕복하면서 이 두 종류의 공간의 관계를 모색하게 한다. 특히나 호텔 인근에 위치한 숲과 인근 계곡, 지역 주민들이 "악마의 동굴"이라 부르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스러운 이 장소는 1591년 주술 혐의로 화형을 당한 '숲의 여인'을 전승한 장소다. 이는 관광 장소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언제든 서스펜스가 출몰할 가능성을 지닌 지형으로 주어진다. 어찌보면 <호텔>에서 주어지는 공간은 마치 스탠리 큐브릭 <샤이닝>(1980)의 배경이 된 오버룩 호텔을 연상하게 한다. 비평가 조너선 크레리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샤이닝>의 호텔 안에서의 각기 다른 공간과 사물이 가족의 붕괴, 사회적 위계질서의 불균형, 서양 문화의 폭력적 역사를 문제적인 영역으로 개방했다는 지적은 다분히 과거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징후에 대한 적절한 암시가 된다. 마치 꿈처럼 느껴졌던 오버룩 호텔에서의 상상이 잭을 미치광이로 몰아간 것 같이 이러한 현실과 상상(혹은 꿈이라 할 수 있는)은 경계선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닿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이레네는 오스트리아 시골에 있는 호텔에 고용되면서 그전에 일하던 전임자가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론트에서 일하는 이레네는 건조한 캐릭터로 항상 머리와 옷을 단정하게 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손님을 대하지만, 규칙을 어기고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전임자의 물품인 안경에 손을 대고,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는 대조된 행위를 보인다. 음악을 크게 튼다는 이유로 호텔에 직원들과 실랑이가 이어지기도 한다. 외로움과 소통의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감시와 통제의 장소인 호텔은 리타와 마찬가지로 가족주의인 일상과 병치되는 장소다. 반면에 이레네는 외부인과 호텔이 아닌 동굴과 클럽에서 관계를 맺고 욕망을 분출한다. 욕망이 투사되고 있는 동굴이 호텔이란 일상을 침투하면서 이 공간은 마지막 장면에서 합일을 이룬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할 수 없어진 이 시퀀스에서 하우스너가 전개하는 호러의 정체가 무엇인지 상상하게 된다. 공간과 시간의 감각을 아예 상실한 채 걷고 있는 이레네의 모습은 마치 일상과 욕망이 혼합된 삶을 우리와 연관 지어 들여다보게 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 영화 <루르드>(2009)

희망의 모양들 : <루르드>, <아무르 포>

희망이란 무엇일까. 칸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도덕률을 이행하기 위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란 '희망'에 근거하여 최고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일까. 분명 이 논제에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요량으로 신의 이름이 요청되지만, 어떤 이에게 희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과 결부되어 있다. 삶과 죽음의 한계에서 희망을 선언하는 각기 다른 모양이 있다. 먼저 <루르드>와 <아무르 포>는 주제 의식인 '희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의미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루르드>는 희락이 절멸된 자의 삶에서 기적을 고대하지만 <아무르 포>는 죽음으로부터 사랑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종의 반역적 성격에서 그 해답은 상반된 모양을 갖고 있다. 두 영화는 이전보다 더욱 정적인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이 고요한 영화에서 캐릭터가 언제쯤 감정의 격양이 이뤄질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루르드>에서는 줌인과 줌아웃이라는 촬영기법을 아주 드물게 사용하는 정적인 연출을 선보이고, <아무르 포>에서는 이것마저도 거의 소거된 형식을 구사한다. 또한 이 두 영화에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마주하던 관음적 시선(창문이나 기둥 뒤에서 몰래 찍은 듯 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시선은 제도적인 차별과 폭력이 마찰하고 있는 캐릭터의 고뇌와도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루르드>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촬영되었고 프랑스인과 스위스계 프랑스인이 출현한 영화다. 기독교 신앙, 성지 순례, 기적을 다루는 이 영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이례적으로 희망을 전망하면서 자기 보존의 욕망이 장애를 초월하여 믿음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루르드는 프랑스 남부 피레네산맥의 순례지로 1858년 한 소녀가 동굴에서 성모 마리아가 자신에게 18번이나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한 곳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전승을 통해 가톨릭교회는 이 주변에 높은 교회를 세웠고 그 결과로 연간 50만 명의 순례자를 이끄는 성지가 되었다. 많은 이들은 마리아가 소녀를 인도했다고 전해지는 샘물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그곳에는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의료사무실이 있으며 교회에서는 치유자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한다. 그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은 '믿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으로 인해 자기 죽음을 보다 앞서서 예측하는 자들은 누구보다 기적을 민첩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루르드>의 아이러니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을 갖고 있는 환자인 크리스틴(실비 테스튀)이 신자가 되지 않고도 치유를 받으므로 발생하는 묘한 기류에서 비롯된다. 사제는 조건을 간과한 크리스틴의 믿음을 시험하기도 하고 의사는 그 질병이 완화되고 재발할 수도 있는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이는 영화 주변부를 조명하는 자원봉사들에도 해당하는 기류인데, 그들은 숭고한 믿음을 갖고 헌신하기보다 남성을 탐닉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 영화는 정형화된 직업적 특성이나 소명, 모든 순례자가 믿음을 갖고 있다는 편견을 다시금 재발견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갖고 있다. 마지막 장면인 잔치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가사는 이런 가사다. "공기 중에 우리 사랑의 노래가 행복한 향기를 남기며 떠다니는 걸 너는 느낄 수 있겠지" 여기서 크리스틴은 춤을 추다 넘어지고 일어나 그 광경을 지켜보다 휠체어를 타면서 영화가 끝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의 치유가 완전한 것인지. 혹은 일시적인 것인지. 그러나 다시 가사를 상기해 보면 "행복한 향기를 남기며 떠난다"는 구절에서 우린 이런 치유가 완전하든 일시적이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기는 희망의 송가를 굳이 부정적으로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영화 <아무르 푸>(2014)

이와는 반대로 죽음을 다루는 <아모루 포>는 독일의 작가인 베른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헨리에테 포겔과 동반 자살을 했다고 알려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서구에서 동반 자살을 테마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이야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이는 낭만적인 사랑을 대표하는 이야기로 호명되고 심지어는 그 사랑이 두 가문의 불화를 해소시킬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다. 반면에 이 영화의 이야기는 하우스너식으로 전개하자면 로맨틱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오해에서 시작된 우발적인 행위로 전개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기사 내용이었다. 자살을 권유한 당사자인 클라이스트가 포겔뿐만 아니라 절친한 친구, 사촌, 여러 사람에게 함께 죽고 싶은지 물어봤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포겔이 앓고 있는 악성 종양이 단순히 낭종일 수 있었다는 상상으로 사랑을 허구화한다. 영화에서는 포겔에게 단 한 번의 실신 증상 이후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난다거나 증상이 말기에 해당한다는 현상적 근거가 도출되지 않는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영화 내내 연쇄적인 작용으로 계속해서 기묘한 충동을 만들어 낸다. 포겔의 남편과 어린 딸, 어머니는 인생에서 얻는 행복과 성취감이 가짜라고 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종양으로부터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포겔은 클라이스트의 같이 죽자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죽음이란 역설은 어쩌면 포겔에게 있어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클라이스트에겐 그저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이 변주된 호기심의 형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나와 같이 자살할래요?"라는 직관적인 클라이스트의 호소는 어떤 계획과 의도라기보다 하우스너가 매번 주제로 삼았던 위조된 욕망에 불과한 짙은 아이러니를 대변한다. <아모루 포>는 시대극을 다루면서 이전 작품과는 달리 카메라 무빙을 허용하지 않고 미디엄 숏으로만 대부분의 영상을 포착한다. 이는 '연극적인' 디테일을 위한 선택이며 무엇보다 이미지가 갖고 있는 특성을 강조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관측하게 하려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다. 이처럼 기적의 모양, 희망의 모양, 사랑의 모양은 각각의 관점을 통해 해학 혹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감정과 이성이 삭제된 얼굴 : <리틀 조>, <클럽 제로>

스타일 변화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리틀 조>와 <클럽 제로>는 이전 작품과는 달리 사운드와 다양한 각도의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 대중 친화적으로 변화된 하우스너의 영화 세계를 볼 수 있다. 또한 일본 기악 선율을 구상해 낸 음악 감독 테이지 이토와 함께 작업하면서 영화는 우리의 촉수를 민감하게 하고 서스펜스 장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전에 없었던 독립성을 지닌 작품으로써 관망하게 한다. 이 두 영화는 감정과 이성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심지어 말살하는 인류를 그리는 디스토피아와 컬트적 요소를 도입한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적 소재로 전해 내려오던 이 주제는 사회를 비판하는 은유적 묘사로 표명되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으로 선언되기도 했다. 가령 트뤼포 영화에서 <화씨 451>(1963)나 그리고 아리 애스터 <미드 소마>(2019)와 같은 컬트영화에서 보이는 이질적인 공동체가 가진 기묘한 분위기는 두 영화에 지속적으로 잔재한다.

물론, <리틀 조>를 구상하면서 영감을 주었던 영화가 돈 시겔의 <신체강탈자의 침입>(1956)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는 감정이 결여된 인간의 얼굴이 어떤지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한다. 이는 얼굴이 있지만 얼굴 없는 인간으로 표정이 폐지된 세계였던 지난 코로나 펜데믹 시대를 사유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펜데믹으로 인해 강력한 조치가 이뤄지던 시기에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얼굴 없는 인간』이란 책에서 이런 시를 한 편 썼다. "인류가 폐지되었다. 생명의 명분으로. 그리고 생명이 폐지될 것이다."(마지막 구절) 그는 바이러스의 전염을 피하고자 강압적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마스크를 두고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인류가 인간의 존엄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인 얼굴을 가릴 때 역설적으로 생명이 폐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리틀 조>와 <클럽 제로>에서 위험하게 언표되는 건 인간이 불법적으로 제조해 낸 향기와 반복된 교육으로부터 감염된 인간이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어떠한 해독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틀 조>의 경우엔 감정이 삭제되면서 얼굴 없는 인간만이 남은 세상이 되고, <클럽 제로>는 철저하게 타자에게 조종당하면서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하우스너는 이러한 세계가 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보다 미래의 모습을 전망하며 장단점이 있다고 말한다.

먼저, <리틀 조>는 식물 품종을 연구하여 꽃 박람회 출품을 앞둔 연구원 앨리스(에밀리 비샴)이 불법적인 방법인 유전자 조작을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아들 이름을 딴 꽃인 '리틀 조'를 개발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뛰어난 유전 공학자이자 훌륭한 엄마 역할을 하고 싶었던 앨리스의 실수는 영화 내내 그녀에 대한 심문을 향하지 않고 도리어 그 불법에 차차 동참하는 '행복'한 얼굴을 양산한다. 그와 관련하여 의문스러운 줌인 장면이 있다. 캐릭터의 얼굴을 조명하지 않고 오히려 캐릭터 사이의 빈 공간을 응시함으로 공백을 획득하는 장면이다. 그 전작들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이 괴상한 유형의 연출은 인간관계의 공허함을 상징하는 숏인 동시에 이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기준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어 점차 꽃가루를 흡입하는 인간은 감정 없는 얼굴로 그 향을 전도하기에 이른다. 서글서글했던 아들은 엄마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이혼하여 별거 중인 아버지와 살고 싶다고 토로한다. '리틀 조'의 위험성을 인지한 앨리스는 자신의 범죄를 회사에 자백하지만 이미 감염된 상태인 상사와 직원들은 이를 만류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뭉친 이들은 리틀 조에 대한 충성심과 보호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결국 앨리스마저도 꽃가루를 마시게 되면서 이 프로젝트는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우발적이지만 강력한 현상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관조하는 <리틀 조>는 한편으로는 디스토피아 세계를 향한 음울한 비전, 또 한편으로는 대안적 세계일 수 있겠다는 두 종류의 상상을 하게 한다.

 

ⓒ <클럽 제로>(2023)

<클럽 제로>는 <리틀 조>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작된 영어 영화다. 중세 설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한 이 이야기는 130명의 아이가 사라졌다는 독일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몇몇 전승이 있지만 <클럽 제로>를 빗대어 유력해 보이는 건 이교도 지도자가 개종을 위해 어린이들을 이끌었다는 전승이다. 주인공이자 클럽장인 노박(미아 바시코프스카)은 학생들의 영양을 관리하는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음식을 먹을 때 몇몇 3가지의 권고사항을 일러둔다. 눈앞에 음식에만 집중할 것. 한 가지 종류의 음식을 먹을 것.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영화에서 이러한 광란적인 조항을 별 의심하지 않고 수용하는 이들은 어른이 아닌 청소년이다. 노박은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이념을 주입하고 모든 교육을 학교에 위임한 부모는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중재하거나 말릴만한 능력이 없다. 부모의 통제를 다뤘던 <사랑스런 리타>와는 다른 통제 체계를 학교에게 전가하는 이 이야기는 분별력을 상실하는 과정에 대한 종교적 분석으로 보여진다. 벌을 유인한다는 의미를 가진 노란색의 유니폼을 입은 이들은 집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고, 부모의 만류에도 이들은 끝까지 노박을 추종한다. 여기서 노박의 통제가 가능한 이유는 단순히 아이들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진실한 마음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럽 제로>가 제작될 당시로 돌아가면 코로나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무분별한 대처와 급박하게 선행되던 언론과 SNS의 선동이 혼재되어 있던 시기를 떠올릴 수 있다. 그중 무엇보다 그러한 내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층은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자기 경험을 넘어서서 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세대다. 또한 자기 신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밀접한 주변 환경인 부모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는 자각에 근거한다. 영화는 섭식장애를 이용하여 도리어 본능의 통제로 인한 결과로 이성의 상실을 가시화한다. 피리부는 사나이의 결말이 암시하듯 노박은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 성서에서 선지자의 말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와 같이 노박이란 구원자를 따라 아이들은 유토피아로 이동한다.

 

ⓒ <클럽 제로>(2023)

하우스너의 작품은 세상을 일률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말을 내리지 않는다. 해피 엔딩인지 배드 엔딩인지도 쉽게 재단할 수 없다. 교훈을 설파하기 위해 윤리적으로 고안된 영화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하우스너의 영화는 끝난 다음에 비로소 우리의 사유를 촉진한다. 김호영 교수는 영화관을 나온 이후부터 시작되는 변화들에 대해 롤랑 바르트의 논문인 『영화관을 나오면서』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묘사한다.

"무기력해지고 느슨해진 몸에 잉크처럼 번져오는 영화. 상영되는 동안 몰입과 거리두기 사이의 미묘한 파장을 만들어내다가 객석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심장과 머리에 스멀스멀 밀려드는 영화."

하우스너의 영화가 바로 그렇다. 어느 무엇으로도 정의될 수 없기에 사유의 가능성을 지닌다. 조건화된 세상에서 사유의 지평을 개방하는 비범한 주제들은 결코 프레임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 하우스너처럼 세계에 촘촘하게 잔류하고 있는 기준을 유연하게 파괴하는 감독은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쯤 피리부는 사나이 역할을 하는 영화에 이끌리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는 자는 아닌가. 만약 그 역할을 하는 자가 하우스너라면 한 번쯤 따라가고 싶다.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갈 것인가.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영준 2024-03-01 11:45:02
잘 몰랐던 감독이었는데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