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원 #1] 총이지만, 총이 아닌 것들
[신정원 #1] 총이지만, 총이 아닌 것들
  • 이우빈
  • 승인 2024.02.0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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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관습을 뚝심 있게 비껴가려는 신정원의 굳건한 태도"

2024년은 신정원 감독의 장편 데뷔작 <시실리 2km>가 개봉한 지 20년째인 해다. 그는 4편의 장편 영화를 내놓고 2021년에 작고했다. 그러나 지금 신정원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전술한 영화 바깥의 두 사실이 아니다. 최근 한국영화계에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도착한 경로가 신정원일 뿐이다. 유작이 된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인터뷰에서 신정원이 말한 아래의 내용이 발상의 물꼬다.

"젊은 신인들, 재기발랄한 창작자들이 나와서 판을 뒤엎을 이상한 영화들을 보여줬음 한다. 2000년대 초중반에 등장했던 막나가는 한국영화들이 없다는 게 안타까운 요즘이다."(『씨네21』, 2020-09-24)

젊은 신인들, 재기발랄한 창작자, 막나가는 영화가 없단 사실은 최근 한국영화의 결과들을 한 번이라도 살펴본 이라면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신정원 본인은 과연 재기발랄한 창작자였고 막나가는 영화를 만들었을까. 조금 달리 말한다면 신정원은 작금 한국영화계의 부진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감독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하게 그렇다.

 

ⓒ 영화 <시실리 2km>(2004)

신정원은 그 누구보다 영화와 이야기의 관습을 깨부술 줄 아는 이였다. 신정원을 두고 흔히 이야기되는 장르의 혼합이나 데드팬 코미디에 가깝게 진행되는 신정원식 코미디들도 당연히 그 탈관습적 방법론의 일부다. 그러나 그의 비범함을 밝히기 위해선 보다 더 투명하고 정량적으로, 혹은 표면적으로 증명되는 신정원의 화면(들)을 언급해야 한다. 하여 진정 중요한 대목은 그를 대담한 영화작가로 부르기에 손색없게 만드는 어떠한 주제적 반복이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신정원이 총을 다루는 방식이다.

 

신정원의 '총'의 관하여

신정원이 남긴 4편의 장편엔 모두 총이 나온다. 각각의 소재와 배경이 여실히 달랐던 작품들에 모두 총이 등장했단 사실부터 흥미롭다. 여하간 서사 매체에 총이 나왔다면 그것은 으레 발사되어야 마땅하다. (1막에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단 체호프의 말처럼) 바꿔 말해 총이란 것에 주어진 어느 정도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 충무로 상업 영화 감독이었던 신정원이기에 더욱더 그래야 했다. 총의 관습적 인과란 누구나 알듯 간단하다. 총에 따라 총알이 나와야 하고 총을 쏘는 이가 등장해야 하고 총알이 발사된다면 누군가는 총에 맞는다. 그래서 피를 흘리거나 죽는다. 그 총 쏨과 맞음은 대개 일상적이지 않은 순간인 탓에 서사의 주요 분기점이 되거나 영화의 허구성을 잔뜩 키우는 역할로 기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정원의 총은 단 한 번도 대상을 제대로 쏘지 못한다. 총은 주요 분기점이 되지도 못하고 비장하거나 진중한 영화적 허구의 순간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총의 쓰임은 자꾸만 어딘가 어긋나고 비틀어진다. 그렇게 신정원의 총은 늘 관객의 예측을 상쾌하게 비껴간다. 외려 총은 본래의 관습을 잃고 희화화되거나 전혀 다른 오브제로 바뀐다.

<시실리 2km>(2004)에서 양이(임창정)을 필두로 한 조폭들은 변 노인(변희봉)을 위시한 마을 주민과 대치 중이다. 다이아몬드를 쟁탈하기 위한 싸움이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농기구와 전동 제초기로 조폭들을 위협했고 승기를 거뒀다. 그런데 양이의 부하인 땡중(박혁권)이 차에 있던 총을 한 발 쏘더니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주민들은 지레 겁을 먹어 싸움을 포기하려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양이의 부하 해주(우현)가 초를 친다. 눈치도 없이 총에 총알이 없음을 중얼중얼 밝힌 것이다. 총알이 없음을 깨달은 주민들이 다시 공격을 이어가고 조폭들에게 승리한다. 여기서 총은 상대를 제압한단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평소 지니고 있던 폭력적 승리의 상징성을 잃는다. 도구의 상징성, 달리 말해 도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의 관습을 말살시키고 영화의 필요에 따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방식이다. 신정원이 총을 다루는 기본적 태도는 이와 같다.

다음 작품인 <차우>(2009) 역시 마찬가지다. <차우>와 총의 관계란 더욱이 중요한 것이 이 영화엔 포수들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총으로 무언가를 사냥하는 이들이니만큼 총의 존재감은 여타 영화보다도 더욱 크다. 백만배(윤제문)를 필두로 모인 포수들은 총으로 괴물 멧돼지 사냥에 성공하는가 싶었으나 사냥은 실패로 밝혀진다. 그들이 잡은 것은 진짜 괴물 멧돼지의 반려였을 뿐이었다. 이내 진짜 괴물 멧돼지가 마을 회관을 습격해 쑥대밭으로 만든다. 세계 최정상 포수 백만배는 용감하게 총을 쏘지만 총알은 멧돼지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 인물의 대사에 따르면 "슬러그탄을 세 발이나 박았는데도" 멧돼지는 끄떡없다. 결국 총에 의지하던 백만배는 끝에 가서 죽는다. 대신 돌을 한 무더기 올린 아날로그 함정, 벼락통을 쓰려던 이들은 벼락통의 원리를 이용해 멧돼지를 호쾌하게 잡는다. 요컨대 총의 전문가인 포수가 총을 쏘더라도 신정원의 세계에서 총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대신 총을 신뢰하지 않던, 현대의 관습적 사냥을 거부하던 이들이 승리한다. 연속되는 총의 배신과 불능이 반복되는 것은 기존의 영화적 관습을 뚝심 있게 비껴가려는 신정원의 굳건한 태도와도 같다.

 

ⓒ <점쟁이들>(2012)

<점쟁이들>(2012)에 이르면 총은 아예 발사의 기능을 잃는다. 신정원은 총의 고장이나 무력감을 넘어 도구의 존재론을 전면으로 바꿔 버린다. <점쟁이들>의 총은 유물이다. 오래전 모종의 이유로 땅속에 묻힌 총을 기자 역할의 찬영(강예원)이 발견한다. 그 발견의 순간 한 괴한이 찬영을 기습하고 강예원은 총의 방아쇠를 당기지만, 유물이니 당연히 발사되진 않는다. 대신 총은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점쟁이에게 사용된다. 점쟁이는 총에 신체를 접촉해 과거를 본다. 기실 이 점쟁이에게 필요한 것은 '총'이 아니었던 셈이다. 총이든 칼이든 돌이든 뼈이든 간에 과거의 기억을 매개할 어떠한 오브제가 필요했을 뿐이다. 즉 신정원에게 총이란 어떻게든 사용될 수 있는 표백된 오브제다. 오랜 관습과 예상으로 둘러싸여 버린 영화적 요소를 너무도 경쾌하게 부숴버리는 영화작가의 대담함이고 신선함이다.

마지막으로,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2020)에서 신정원은 총의 진실을 완전히 희화화해 버린다. 양선(이미도)은 남자친구 장박사(양동근)가 소희(이정현)와 바람 난 줄 알고 소희의 집을 습격한다. 양선은 그다지 잘 나가지 못하는 배우로 등장하는 터라 소품실에서 모형 장총을 들고 간 상황이다. 공포탄도 몇 발 지참했다. 이토록 재밌는 반복이 또 있을까. 다시 정리했을 때 <시실리 2km>의 총은 잠깐 발사됐지만 인간의 신체를 가격하지 못하여 전투의 패배를 불러온 한계를 보였고, <차우>의 총은 몇 번 발사됐지만 멧돼지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포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불능의 도구였으며, <점쟁이들>의 총은 진짜 총이긴 하되 발사될 수 없어 사이코메트리의 매개가 된 다른 도구였다. 이어서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속 총은 진짜 총과 같은 모양새의 표면만 공유할 뿐 아예 다른 목적으로 태어난 오브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도 협박을 받는 인물들, 더 나아가 관객은 그 총의 무서움에 순간 떤다. 총의 액션으로 상대-관객의 리액션을 적절히 예상하고, 이용하는 영화적 속임수에 신정원이 얼마나 통달했음을 보여주는 영민한 사례다.

 

ⓒ <차우>(2009)

"재기발랄하고 막 나간다"란 말을 다시금 꺼낸다. 위에서 정리한 신정원의 4개 총은 그야말로 여타 세계의 총들과 달리 독립적으로 막 나갔다. 신정원은 영화마다 총의 주제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주하며 다른 재기발랄의 오브제로 작동시켰다. 신정원의 영화, 신정원의 코미디를 무어라 정의하기 힘들단 기존 평자들의 소심한 문장들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아직 신정원의 주제적 반복은 몇 가지가 더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주제들은 신정원의 총이란 주제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총이 사실 발사되지 못함'을 들킨 이들이 한껏 당황하는 그 순간을 포함하여 타인에게 나의 무언가를 들키는 장면이 신정원의 영화에서 무척 자주 반복된단 사실을 다음 글에서 짚어 보려 한다.

[글 이우빈 영화평론가, 731dnqls@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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