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한국영화 #3 : 애도의 실패
[TALK ABOUT] 한국영화 #3 : 애도의 실패
  • 김경수
  • 승인 2023.12.1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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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의 상상력"

조현철의 <너와 나>(2022)를 볼 때의 안타까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와 나>의 세월호에 대한 영화의 애도 작업이 너무도 뒤늦었다는 마음이다. <너와 나>의 연출을 둘러싼 뜨거운 갑론을박도 비슷한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고 짐작된다. 짐작이 아니라 더 정확히는 믿음이다. 조현철 감독의 연출에 동의하든 아니든, 애도가 뒤늦은 만큼이나 사려 깊게 세월호 참사를 그려내는 영화를 보고 싶었던 마음이 모두에게 있다고 믿고 싶다. <너와 나>는 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만으로 성공적이다. 다소 상투적이고 순진한 말일지라도 이 논쟁이 생산되는 현상 자체가 영화가 세월호를 소환하기를 바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 발자국 더 멀리서 생각해보자.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간이 세월호의 소환을 억누른 것은 아닐까?

세월호 참사도 벌써 십 년이다. 정치적인 심판도, 윤리적인 애도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제대로 애도 작업을 수행하기도 전에 세월호 참사가 진영 논리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리본을 다는 등 세월호를 추모하는 행위는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정치적인 제스처로 곡해되었다. 애도는 본디 정치적인 행위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진영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다. 똥은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 피하는 것이다. 나만의 애도가 정치적인 논리에 얽히지 않으려면, 또 보통 사람에 불과한 자신이 어떤 정치적인 성향이라고 낙인이 찍혀서 무차별적인 테러를 당하지 않으려면, 애도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탈-정치화가 아니다. 애도가 억압되는 과정이다. 2014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생긴 <다이빙벨>상영에 관한 논란은 애도를 진영 논리로 정치화하고 논란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2023년 할로윈에 생긴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행위는 시민이 주체로 진행되어야 했으나 정부가 먼저 앞서서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애도의 방법론을 논할 수 있는 공론장을 폐쇄했다. 이태원 참사에 남은 것은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음?의 줄임말로 어떠한 선택을 한 개인이 비극적인 결과를 마주했을 때, 그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고 비난하는 언술) 뿐이다. 그 자체가 애도의 억압이다. 애도의 억압은 정치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차원에, 특히 시네필이 예술을 보는 시선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박하사탕>(1999) ⓒ CGV아트하우스

2014년 즈음에 발명된 단어가 있다. 바로 '정치색'이다. 사실 정치적인 영화는 언제나 제작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든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경유하는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 노동자의 투쟁을 음모론의 문법으로 풀어낸 <지구를 지켜라>(2005), 주한미군 독극물 한강 무단 방류 사건으로 시작하는 <괴물>(2006) 등 2000년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중 정치적 소재로 한 영화가 꽤 있을 정도다. 그러나 앞서 사례로 든 영화에 정치색이라는 정체불명의 수사를 더한 비평은 드물었다. 정치색이라는 낙인이 발명된 것은 2014년 노무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변호인>이 개봉한 뒤다. 이 영화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티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를 의식했는지 언론시사회와 인터뷰에서 송강호와 김희애 등 배우는 물론 감독까지 앞서서 이 영화를 서둘러 정치와 분리하려고 애썼다. 마케팅 차원에서는 이해할 만한 일이다. 정치적 논란이 생기는 순간 대중에게 첫인상이 별로일 테니까. 정치색이라는 낙인찍기가 무색하게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정치색이라는 단어는 유령처럼 계속 쓰이기 시작했다. 이후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가 생겨날 때마다 배우와 감독이 앞서서 정치색을 부정하게 되었다.

정치색이라는 단어는 예술에 정치성이 깃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냥 정치적 성향이 강한 영화라고 했다면 이만큼의 파장이 안 생겼을 것이다. 정치색은 우리는 공산주의는 빨간색이라는 빨갱이 콤플렉스에 익숙한 나라라는 것을 겨냥한다. 정치와 색이라는 단어가 더해진 순간, 곧장 공산주의와 빨간색이 연결되는 연상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치색은 빨갱이, 혹은 좌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 깃든 단어다. 이 단어는 또한 예술은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며, 정치 등 세속적인 논리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유미주의와 맞물린다. (이는 영화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시네필의 욕망과 이어진다.) 정치색이라는 단어 뒤편에는 "묻었다"라는 말을 주로 쓰는데, 이 말의 사전적인 뜻은 "가루, 풀, 물 따위가 그보다 큰 다른 물체에 들러붙거나 흔적이 남게 된다."이다. 예술에 정치색이 묻었다라는 수사에는 정치는 예술보다는 작고, 예술에다 들러붙는 외부자이자 잉여로 지칭된다. 영화에 정치적 기호가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 규약은 이제 거시적 차원을 넘어서서 미시적 차원에서 생긴다. 왓챠피디아, 네이버 영화 등 누구든 영화 리뷰를 남길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논리가 되어서다. 정치색이 묻었다라는 수사는 "페미 묻었다," "PC 묻었다" 등의 수사로 변주되기에 이르렀다. 구시대의 빨갱이 콤플렉스는 그 대상만 달라진 채로 반복되는 수사가 되었다.

이제 <너와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너와 나>를 본 뒤에 문득 세월호 참사를 영화에 그리려고 한 여러 영화가 생각났다. 바로<너와 나>와 <비상선언>(2022)과 <엑시트>(2020), <곡성>(2016)이다. 사례로 든 영화는 과잉된 영화 문법을 공유한다. <너와 나>의 화면은 뿌연 질감으로 색칠되어 있으며, <비상선언>과 <엑시트>는 재난이 계속되고, <곡성>에서는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는 논리적 연결이 무너진다. 무언가를 드러내려고 하는 의도로 등장하나 쉬이 의미화되지 않은 잉여가 흘러넘친다. 정치색이라는 논란이 생기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계속 정치적인 것을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이 네 영화를 알레고리로 독해하면 어떨까.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알레고리를 상징과 구분했다. 상징은 역사의 슬픔을 드러내고자 의미화될 수 있는 의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데 비해 알레고리는 역사의 슬픔을 최대한 은폐하려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정치색은 그 영화의 상징을 더럽히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징은 의미화가 진행되고 있어서다. 한편 알레고리로 드러난 비극적 사건은 정치색으로 물들지 않는다. 알레고리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의미가 텅 빈 듯한 이유는 그것이 '폐허의 형태'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각의 별들이 이어져 하나의 성좌를 만드는 독해'를 진행해야 한다. <곡성>에서부터 서서히 거슬러 올라가서 <너와 나>에 이르기까지 이 글을 통해 동시에 다뤄보려 한다.

 

<곡성>, 파국의 상상력

<곡성>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나홍진의 <곡성>은 오컬트 장르가 만드는 개성, 믿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종교적 상상력, 그리고 당혹스러운 편집 문법으로 인해서 그해의 문제작이 되었다. <곡성>은 주로 세계의 불가해함와 부조리, 믿음의 문제라는 종교적인 주제로 논의되었다. 감독이 "세계에 대한 불가해한 질문"이라며 신과 믿음이라는 주제를 언급했고, 또한 그의 영화가 종교적인 모티프를 계속 넌지시 드러냈기에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전작 <추격자>(2007)의 지영민이 십자가를 그리며 본인의 종교를 발명하고 있고, <황해>(2011) 속 김구남(하정우)은 신적인 힘을 자랑하는 면정학(김윤석)의 손아귀에 있는 듯하다. 또한 <황해>의 엔딩은 종이 울리는 기적이 제거된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8)를 보는 듯했다. <곡성>에서도 악마(쿠니무라 준)가 예수의 못 박힌 손을 모방하면서 정체를 드러낸다는 설정에서도 그러하다. 오컬트의 장르적 클리셰가 두드러진 것도 여기에 한몫했다. 종교적 상징이 곳곳에 흩뿌려진 연출, <엑소시스트>(1973)와 언뜻 비슷해 보이는 딸의 마귀들림이라는 설정 덕에 이 영화는 그간 관념적인 주제와 뒤엉켜 오컬트로 독해되었다.

그러나 <곡성>의 장르는 오컬트로 가두어지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독버섯 중독으로 인한 살인 사건이 생길 때만 하더라도 이 영화는 미스터리다. 더군다나 죽은 사슴의 시체를 먹는 외지인이 등장하면서 이 영화는 호러로 돌변하고, 화재 현장에서 좀비가 등장하는 순간에 좀비 영화로 전환된다. 또한, 전종구(곽도원)과 딸의 서사는 전형적인 가족 서사이다. 마을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는 재난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무명과 악마, 그리고 무당의 삼중 대립 구도는 오컬트 장르에 주로 등장하는 설정이다. 여러 장르적 설정이 아무런 논리적 인과성이 없이 난무한다. 이는 비극이 연달아 발생하지만, 그 비극의 원인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상황과 맞물린다. 나홍진식 장르의 과잉은 희비극적인 순간과 아이러니에 기반한 봉준호의 장르 교차와 다르다. <곡성>에 등장한 여러 장르는 뒤섞이지 않고 껍데기로 머물러 있다. 이 영화의 장르 과잉은 미끼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전체를 멀리서 보게끔 만드는 장치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코미디 영화라고 반복하는 언행은 위악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1부는 일부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브레히트식 부조리 코미디로 진행된다. 장르가 전환되게끔 만드는 서사가 아니라 장르가 급작스레 전환되는 순간에 집중하도록 한 것이다. <곡성>은 이를 숏의 문법으로까지 확장한다. 1부에서는 부조리와 웃음이 주된 정서라면, 2부는 그 부조리가 세계의 논리가 되는 과정이다.

<곡성>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영화가 배경으로만 볼 때는 포크 호러라는 것을 먼저 짚어야 한다. 영국에서 생긴 장르인 포크 호러는 이성이 지배하는 문명화된 공간과 분리된, 이질적인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생기는 공포를 소재로 삼는다. 이 영화에서 곡성으로 불리는 마을은 현실의 곡성과 이질적인 시공간이다. 전종구가 도시로 나갈 수 있는 도로는 프레임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영화 안에서 외부인은 물론 외부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 마치 외부가 사라진 듯이 말이다. 이는 서울이라든지 하얼빈 등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그간의 나홍진 영화의 경향과는 아예 다르다. <황해>와 <추격자>의 빠른 평행 편집은 김구남과 지영민이 살아가는 삭막한 도시 공간을 나름대로 그려내는 소묘의 역할을 했다. 모든 것이 익명화된 도시가 자세히 그려질수록 왜 거기서 악인이 활개를 칠 수 있는지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그러나 정작 영화 제목인 곡성은 마을 전체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또한 그 마을의 지도가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다. <곡성>은 곡성이 얼만큼 커다란 시골인지 파악할 수 없도록 하는 영화다. 비약하자면 곡성은 한국만큼이나 클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곡성>이 한국의 알레고리라는 가설을 상정하고 싶다.

 

<곡성>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왜 <곡성>은 그리도 망가진 것일까. 나홍진의 수많은 인터뷰 중 하나가 눈여겨 볼만하다. 나홍진 감독은 세월호를 염두에 두었냐는 질문에 "인간의 존재에 이유가 있다면, 죽음에도 이유가 있어야 해요. '그냥'이란 있을 수 없죠. 그런데 사람들이 무작위로 죽고 있어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시나리오를 완성할 무렵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어요. '더욱 잘 찍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요."라고 밝힌 적이 있다. 더욱 잘 찍어야 한다는 생각은 감독의 연출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세월호를 경유해 달라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곡성>과 세월호의 연결고리가 처음이면서 마지막으로 드러난 발언이다. "잘"이라는 단어로 얼버무려지지만 <곡성>은 세월호를 영화에 재현하려 한 시도로 보인다.

<곡성>은 무엇을 재현하는 중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공간은 예수의 못 박은 손을 가장하는 악마로 정체가 드러나는 일본인(쿠니무라 준)이 사는 방이다. 외지인은 계속 사진을 촬영하고, 그 사진을 제사를 올릴 곳에 건다. 끝날 때도 사진은 죽음의 바로 전 단계로 드러난다. 정작 외지인이 촬영한 사진을 처음 볼 때 전종구는 혼란을 느낀다. 죽음의 전조로 드러나는지 죽은 뒤에 찍은 것에 불과한지 전혀 구분되지 않아서다. 게다가 사진의 의도와 맥락이 도저히 파악이 안 된다. 종구의 분노는 비극의 원인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절망에 의해서다. 또한 그 비극이 사진과의 모종의 인과가 있다는 어렴풋한 생각에서 비롯한다. <곡성>은 이 두 번째 감정을 중심적으로 파고든다.

영화는 2부에 무당 일광(황정민)이 등장한다. 나홍진 감독은 일광이 굿하는 장면에서 인과를 파괴하는 파격적 연출을 감행한다. 외지인이 하는 굿과 일광의 굿을 몽타주하되, 이 둘의 굿이 어느 대상으로 가는지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일광은 나중에야 외지인의 집행자로 드러난다. 일광은 외지인이 지정한 희생자 효진(김환희)에게서 악마를 소환하려고 한 것이다. 한편, 무명은 같은 시간대에 방어하는 굿을 하고, 외지인은 그것을 막으려 주술을 건 것으로 파악되지만 사실은 정확하지 않다. 잘못된 숏과 숏이 몽타주하되 의미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잘못된 숏과 숏이 충돌하는 몽타주의 형식을 우리는 두 눈으로 본 적 있다. 한 사건을 둘러싼 '여러 신문의 보도'다. <곡성>은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여러 의견의 충돌 자체를 형식으로 그려내고, 이를 시각화함으로 그 혼란을 우리에게 전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떡밥(미끼)만 문다.

미국 철학자 프레드릭 제임슨에 따르면, 1960년대 말의 세계적인 경제 위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1973년 <엑소시스트>의 흥행으로 인해 탄생한 1970년대 이후의 오컬트 영화는 선악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체제에 대한 향수다. 일광과 무명이라는 전통적인 선악의 구도는 더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 외지인은 기자처럼 대상을 눈앞에서 촬영한다. 그는 희생자 사진을 퍼뜨리면서 일광에게 전한다. 일광은 굿을 통해서 그 사진을 의미화한다. 무명은 일광의 반대편에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져 전종구의 생각을 뒤흔든다. 이는 1부에서 여러 사건이 연달아 생기지만 인과를 파악할 수 없는 혼란과 맞물린다. 진실은 사라진다.

<곡성>은 그 수많은 희생자가 있어도 인과를 파악할 수 있기는커녕, 어떻게 애도를 수행하고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혼란스럽다는 절망이 서려 있다. 또 한국 사회의 부조리는 하나의 장르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형식으로 드러나 있다. 이 영화는 오컬트 이후의 오컬트인 셈이다.

 

<비상선언>과 <엑시트>(2020), 천국 아니면 파국

영화 <비상선언> ⓒ 쇼박스

<비상선언>은 작년의 괴작 중 하나로 이야기할 만하다. <비상선언>은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모든 것이 과잉으로 둘러싸인 영화다. 한국영화에 전례 없는 초호화 캐스팅부터가 눈길을 끈다.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 한국의 중견배우부터 시작해 박해준,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등 연기력을 검증받은 스타 배우까지 대부분 흥행 배우다. 제작비도 쇼박스 영화 중에서도 역대급이다. 손익분기점은 500만 가까이 될 정도다. <관상>(2013)으로 흥행에 성공한 적이 있는 감독인데다가 배우진 때문에 크랭크인 당시만 하더라도 제법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가끔 어떤 영화는 영화 바깥의 상황과 어우러진다. <비상선언>을 둘러싼 코로나와 마케팅 논란 등 여러 악조건은 이 영화를 흥행 실패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사실 <비상선언>은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감독의 개성이 충분히 깃들어 있는 작품인데다가, 상업 영화로 잘 제작될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해서다. <비상선언>의 서사 구조는 영화를 1부와 2부로 분할한 다음에 두 파트 사이의 톤을 이질적으로 만들고 충돌하게끔 하는 한재림 감독의 전작과 이어진다. 비주얼리스트로의 재능도 곳곳에 두드러진다. 그러나 서사 곳곳이 비어있고 1부와 2부의 서사 사이의 무게축이 기울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한국 개봉판은 칸 영화제에 공개한 것보다는 러닝타임이 7분 정도 줄었는데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판이 궁금해질 정도다. 영화에서 설명되지 않은 여러 설정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특히나 후반부 30분은 감정이 텅 비어있다. 어린아이가 착륙하지 말자고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선택은 아무런 감정이 쌓이지 않고 진행된다. 게다가 그러한 선택 자체가 다수의 생존을 위해서 약자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영화로 비판을 당하기에 마땅한 선택이었다. <비상선언>의 후반을 비판하는 평론가는 대부분 영화에서 드러나는 이 선택을 비판한다. 이 논리에 동의하면서도 어딘가 이 영화가 돌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비상선언> ⓒ 쇼박스

<비상선언>의 진정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의 장르를 종잡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1부의 류진석(임시완)의 생화학 테러를 중심으로 한 재난 스릴러와 2부의 정치극은 도저히 어우러지지 않는다. 영화 중간중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촉매제마저도 부자연스럽다. 류진석의 생화학 테러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2부에서 비행기 착륙에 반대하는 시위대는 느닷없이 등장한다. 또한 일본 자위대에서 미사일을 쏜다든지 하는 설정도 느닷없다. 모든 설정이 연결되지 않으며 과장되어 있다. 교복을 입고 창가 쪽에 서 있는 여학생 셋은 노골적으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생각나게끔 한다. 비행기에 탄 승객 전원이 핸드폰을 꺼낸 뒤에 가족에게 영상통화를 하는 장면은 그러한 연상작용을 배가한다. 각각의 가족의 1인칭 시점에 이입하는 연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비상선언>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심증의 나열만 있어서다.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를 거쳐서 망가진 한국을 파편으로 흩어진 여러 단서로 드러내려는 감독의 욕망이 논리적인 서사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비상선언>의 노골적인 불편함도 여기에서 생긴다. 1부까지만 하더라도 장르적 설정으로 보이는 설정이 급작스레 의미화되는 과잉에서 생기는 불편함이다.

또한, 그것이 직유의 방식이라는 것이 더욱 거부감을 일으킨다. <비상선언>의 비행기는 한국의 총체성을 그리는 수단이다. 이 영화에는 캐릭터가 부재해 있다. 모든 인물은 담론을 드러내는 데에 기능적으로 쓰인다. 시위대마저 마찬가지다. 그들 각각이 인간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정치적 목소리로 그려진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복잡한 정치적 논리 없이, 피상적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비행기 안과 바깥, 정부 기관 셋 사이의 갈등은 인터넷에서의 키배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느낀 이유다. <비상선언>은 파국에 이르기까지 정당 논리나 혐오 등에 기반하는 한국의 인터넷 담론을 재난화한 영화다. 국가 기관, 비행기 안, 비행기 바깥의 목소리는 서로의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 셋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는 이는 관객뿐이고, 이 셋 사이의 충돌은 어떤 접점도 만들지 못한다. 인터넷에는 논리가 부재해 있으므로 이 영화에도 장르적인 클리셰가 연결되는 데에 아무런 인과가 없다. <비상선언>에서 무너지는 한국의 시스템을 목도할 수 있는 입장에서 선 관객은 그 피상성에 질릴 만하다. 그러나 그 목도야말로 우리를 너무도 슬프게 한다.

<비상선언>은 영화의 마지막에 비행기는 결국 서울에 불시착한다. 비행기가 덜컥거리는 순간, 화면이 암전되더니 곧장 드뷔시의 '달빛'이 삽입되고 흐리멍덩한 화면이 등장한다. 죽은 승객까지 함께 어울려 노는 중이다. 영화의 엔딩은 사후 세계에 가깝다.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행복하다. <비상선언>은 제대로 된 애도를 선택하는 대신 희생자를 피상에 불과한 정치적인 논쟁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한다. <비상선언>에서 한국은 파국 아니면 천국이다. <비상선언>은 한국을 추상화이자 모자이크화로 그려내는 데에 실패했다. 이 영화는 캐리커처조차 못 되었다. 이는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2020)가 달리는 두 남녀의 여로에서 한국을 드러내는 것과는 정반대의 선택이다. <엑시트>는 걸작이다. 유독가스를 피해서 달아나는 둘의 로드무비 자체가 당장 생존이 급박한 생존주의를 드러낸다. 건물에 갇힌 아이들은 세월호, 둘이 마지막에 오르는 크레인은 용산 참사를 연상하게끔 만든다. 이는 한국의 여러 위기를 촘촘히 잇는 모범적인 길을 선택한다. 오히려<엑시트>야말로 한국의 여러 재난이 단일한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유추를 가능하게끔 한다. <엑시트>와 <비상선언>은 안개 혹은 가스로 대한민국의 참사를 그려내면서.

 

<너와 나>, 천국에서의 애도

영화 <너와 나> ⓒ 그린나래미디어

<너와 나>의 오프닝은 하늘 높이 운동장을 포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야말로 평범한 운동장 풍경이 드러난다. 그 위로 뽀샤시한 조명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카메라는 평범한 운동장이 아니라 어느 교실 창가로 간다. 세미(박혜수)는 그 뒤편 거울을 통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세미는 정면이 아니라 등으로, 실체가 아니라 거울 속의 반전된 상으로 먼저 드러난 셈이다. 그다음에야 세미가 프레임에 포착되기 시작한다. 오프닝은 영화의 문법을 압축한다. 감독은 잊을 만하면 거울 속 세미의 상을 계속 카메라로 찍는다. 세미의 상이 세미보다 먼저 노출되게끔 연출해서 그녀를 유령으로 보이도록 착각을 자아낸다. 감독도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했다. 세미는 유령에 가까운 존재라고. 세미는 영화에서 열 번 가까이 거울에서 먼저 드러난다. 세미를 거울 안에 갇힌 존재로 보라는 듯이 말이다.

<너와 나>의 플롯은 단순하다. 세미와 하은은 같은 반 친구다. 하은은 자전거를 타다가 다리를 다쳐서 수학여행에 못 가게 되고, 세미는 어떠한 꿈을 꾼 뒤에 하은이 걱정된다면서 그녀를 보러 학교를 뛰쳐나간다. 세미는 하은더러 함께 수학여행에 가자고 보채러 간다. 뽀샤시한 조명에 담긴 둘의 사랑싸움은 왜인지 만화적이다. 훔바바라든지, 똘이아빠라는 남성으로부터 온 전화 등 여러 장치로 시작된 미스터리가 둘을 엇갈리게끔 만들고 그 정도에 따라서 감정이 증폭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세미가 하은에게 고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마저 타카하시 루미코 풍의 일본 러브 코미디 장르를 보는 듯하다. 두 여성 사이의 사랑을 다루는 백합물 장르로도 충분히 독해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서 둘의 감정은 멜로드라에 가깝게 확장된다. 감독이 레퍼런스로 하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감정선이 영향을 끼친 듯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라도 상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히 드러나는 데에서 그러하다.

<너와 나>는 미스터리 장르이기도 하다. 영화에 세월호 참사를 암시하는 단서로 가득해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많은 단서를 제공하지만 결코 그 단서가 하나로 맞물리지 않는다. 각각의 장치가 세월호라는 원관념과 이어져서 의미화가 가능하더라도, 그 의미화된 장치끼리의 논리적인 연결성은 없다. 앞서 이야기했던 <곡성>,<비상선언>도 파편화되고 과잉된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세월호로 인한 세계관의 혼란을 바탕으로 그리려 했다면, 이 영화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보통 사람이 느끼는 심정적인 혼란을 가시화한다. <곡성>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파편화된 이미지도 세월호를 둘러싼 총체적인 상황을 관객이 스스로 조립하기를 바란다. 마치 게임에서 아이템을 발견하듯이 말이다. 이 모든 것을 호러 영화를 분석할 때 흔히들 이야기하는 억압된 것의 회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억압된 감정이 우리 무의식 속 감정을 이미지화한다는 이야기다. 영화 속 모든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아무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은 영화이면서도 모든 것이 말해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너와 나> ⓒ 그린나래미디어

되려 우리가 그 이미지 안에서 세월호를 소환하는 것이다. 영화 전반에서 세월호를 재현하는 이미지는 없다. 소유, 매드클라운의 '착해빠졌어'가 유행하는 2014년 안산이라는 시공간, 라디오 너머로 들려오는 수색작업 등의 장치는 세월호를 둘러싼 물리적 정황을, 거울을 든 어린아이라든지, 가출한 개 등은 심리적 정황을 드러낸다. 또한 물에 빠진 공룡이라는 설정, 창고에 갇힌 개들 등은 참사 당시를 생각나게끔 한다. 특히, 가출한 개가 갇힌 트렁크는 세월호에 갇힌 아이의 이미지를 생각나게끔 한다. 하은(김시은)의 친구 중의 하나가 급작스레 병아리를 묻은 장소를 까먹었다라고 속상해하는 상황은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피사체를 우회했어도 이 영화는 (스펙터클을 거부한다는 감독의 말과 정반대로) 감정의 스펙터클로 가득하다. 그 감정을 불러내는 데에 어느 거부감도 드러나지 않는다. 저토록 풋풋하기만 한 세미가 우리에게 스크린 너머에만 있는 유령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리고 세미가 하은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꿈에서라도 "내가 너가 되어서"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것을 극한까지 다다르게 한다. 세미가 어렴풋이 듣는 나레이션마저 불안의 징조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는 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과장되어서 나온 것이다. 세미와 하은의 서로 마음을 열 때는 그 감정이 극한에 달한다.

왜 이토록 과잉되고 파편화된 이미지가 있어야 했을까. 콜럼바인 총기 사건의 하루를 인과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엘리펀트>(2003)의 재현을 따라가기를 포기해야만 했을까. 아니, 스펙터클을 거부한다는 본인의 윤리적 거부감을 왜 거슬러야만 했을까. 질문을 뒤집어보자. 어쩌면 우리는 과잉과 파편으로 흩어진 이미지 없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현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닐까? 이상용 평론가가 코아르에서 쓴 글(「[이상용의 영화일기] 10월 중순에 시작했다가 11월이 되어버린 일기」)에서 이 영화를 스펙터클의 과잉으로 지적한 것은 타당하다. 영화의 여러 장치가 감성적인 팬시(fancy)상품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우회된, 감성으로 치장된 이미지는 되려 세월호를 "감성팔이"라고 욕하는 현실의 폭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잉꼬새에게 "사랑해"라고 연달아 외치는 세미의 목소리야말로 그들 언어대로라면 감성팔이의 끝이다. 또한 세미와 하은의 멜로드라마가 만드는 슬픔까지도 감성의 극한이다. 세미와 하은이 평상시에 누리는 일상적인 감정마저 그러하다. 이 영화의 문법이 옹호해야 한다면 과잉된 문법 자체를 옹호하는 아니라 과잉된 문법을 억압하는 사회적 틀을 보게끔 하기 때문이 아닐까.

<너와 나>에서 주로 드러나는 소품 중 하나가 '거울'이다. 이 거울은 라캉의 개념을 빌려서 설명하면 대상a다. 대상a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보도록 매개하면서도, 그 세계를 차단하는 가림막이다. 세미는 세월호 희생자를 보게끔 하면서도 거기에 다다르지 못하게 한다. 세미가 개를 찾으러 공원에 올랐을 때 한 아이가 거울을 들고 논다. 그 거울에는 영사기에 번쩍거리는 불빛과 같은 빛이 번쩍거린다. 세미는 다음 쇼트에 등장한다. 세미는 빛으로 존재하는 유령으로, 아니 영화로 존재하는 유령으로 드러난다. 세미가 노래방에서 '체념'을 부를 때, 급작스레 노래방 뮤비에 진입하는 것도 세미가 스크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유령이어서다. 영화 전반에 흘러넘치는 과잉된 이미지는 세미를 화면 중앙에다가, 관객의 시선 한가운데에다가 집중하게 만든다. 세미가 너무도 혼란한 세계에 잊히지 않게끔 하려면, 이만한 과잉은 괜찮지 않을까.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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