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일기] 10월 중순에 시작했다가 11월이 되어버린 일기
[이상용의 영화일기] 10월 중순에 시작했다가 11월이 되어버린 일기
  • 이상용
  • 승인 2023.11.1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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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들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요즘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빠르게 걷거나 뛰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존경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가 글을 쓰기 위해 달린다는 사실에는 무한한 존경심이 있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곤 했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메가톤급 엉덩이를 부착하고 있어도 걷거나 달려야 쓸 수 있다. 엉덩이와 달리기의 관계. 개념적인 말이 아니라 실질적인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글쓰기는 손가락의 근육이 아니라 다리에 근육이 있어야 가능해짐을 절감한다. 걷거나 뛸 수 있다면 좀 더 써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승옥에 대한 단상

생전 처음으로 순천에 가 보았다. 제1회 남도영화제 행사 중 【김승옥에 관한 강연】 중 하나로 참석하면서다. 강연의 내용 전부를 공개할 필요는 없겠지만, 『무진기행』의 작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영화로 옮긴 <안개>(1967)의 각본을 직접 썼으며, 이듬해 영화 <감자>(1968)를 만든 이가 '김승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김승옥'은 196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인물이다. 생계를 도운 것은 작가로의 삶이 아니라 각본가나 각색자로서의 삶이었다. 이를 답답하(안타깝)게 여겼던 이어령은 김승옥에게 호텔을 제공하고, 출판사 직원들이 가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필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결과가 유명한 『서울의 달빛 0장』이다. 원래 제목은 '서울의 달빛'이었다. 그를 붙들어 둔 것은 내심 장편소설을 쓰라는 권유이자 상황의 마련이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듯 김승옥은 장편을 완성할 수 없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미 쓰여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0장'은 소설의 1장도 아니고 시작이라는 순서의 의미였다. 그것은 고스란히 붙어 기이한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다. 이 작품은 제1회 '이상문학상'(1977년) 수상작이 된다. 그런데 0장의 소설, 미완의 이 소설은 꽤나 통속적이다. 오늘날 보아도 놀랄 만한 부부의 심리와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 김승옥은 한국 문학사에서 누구보다 빨랐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영화 <감자>에서 이러한 묘사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문자적 언어로는 누구보다 예민했지만, 영화의 검열과 시선 속에서 움츠러든다. 김승옥은 직접적인 시각이 아니라 언어로 치환되었을 때 뉘앙스를 따라 미묘하게 욕망을 집약하고 묘사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언어적 집약에 에너지를 쓰는 탓에 긴호흡의 장편이나 연재 소설을 끝내지 못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영화라는 또 다른 생계수단과 출구가 있었다.

 

ⓒ 영화 <장군의 수염>(1969)

이어령의 원작을 김승옥이 각색하고 이성구 감독이 연출한 <장군의 수염>(1969)은 '1960년대식'이 아니라 유신 시대가 뿌리내린 한국 사회의 '1960년대 후반식'이다. 이 영화에는 여러 이름이 눈에 띈다. 이어령 원작, 김승옥 각색뿐만 아니라 한국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을 만든 신동헌 감독의 애니메이션 에피소드가 초반에 등장한다. 흔히 누벨바그 운운하며 친구들과 지인들이 결합된 프랑스의 한때를 부러운 듯 말하지만, 이 정도면 한국의 누벨바그라도 해도 과장은 아니다. <장군의 수염>은 세대의 역량이 결집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의기투합하여 내놓은 결과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이들은 4.19 세대였지만 곧바로 맞이했던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억눌린 세대이기도 하다. 하나의 달걀 안에 오롯이 혁명과 억압이 들어 있다. 군부독재를 풍자하는 애니메이션의 현실에는 자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유'라고 말한다.

<장군의 수염>은 자유없는 자유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김승옥의 그려낸 '안개'를 생각한다. 존재하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라는 현실 혹은 시대. 그것을 뒤집으면 <장군의 수염>에 삽입된 수염이다. 모두가 수염을 기른다. 하지만 주인공은 수염을 기르고 싶지 않다. 문제는 선택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점점 그를 옥죄고, 병들게 만든다. 주인공은 끝내 관리(경찰)를 찾아가지만 그로부터 듣게 되는 말은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자유 혹은 자유의 선택이 어떻게 불편함(억압)을 만들어 내는가? 그것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자유를 위해 통제를 하였으며, 자유를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시대의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제는 자유가 아니라 쿠데타, 통제, 폭력이 일상화되고 내면화되다 보니 모두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병든 것은 관리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다.

 

ⓒ 영화 <감자>(1968)

김승옥이 연출한 <감자>(1968)는 소설가 김동리의 단편을 각색한 것이다. 이 작품 또한 먹고 살기 위해 여성들이 몸을 파는 상황이 만연되어 있음을 깔고 있다. 남편도 이 사실을 방조한다. 그것은 주인공 복녀(윤정희)가 시집을 갈 때부터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무위도식하는 남편, 경제의 일선에 나서야만 하는 아내 그리고 돈을 미끼로 유혹하거나 편의를 봐주는 사내들. 어찌보면 김승옥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여럿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상한 대목을 몇 군데 집어서 보여주었다. 질문은 이어진다. 김승옥은 자신의 소설이나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라 어째서  『감자』를 선택했을까. 대학교 졸업반 시절 완성한  『서울, 1964년 겨울』로 사상계에서 주최하는 당대 최고의 문학상인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최연소(만 24세)로 수상하며 가장 각광받는 인물이 된 탓일까. 김동인에 대한 다소간의 부채의식이 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이런 추론은 흥미롭지 않다.

<감자>와 <장군의 수염>이라는 1년의 시차는 영화에 헌신하기 시작한 김승옥을 보여준다. 이 영화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김승옥은 유명한 소설가였지만, 1970년대에는 이보다 더 유명한 영화 각본가였다. 1975년에 한국영화 중 흥행 1위인 <영자의 전성시대>, 1977년에 또 한 번 한국영화 흥행 1위인 <겨울여자>의 각본을 맡는다. 두 영화는 모두 김호선의 작품이다. 이러한 흥행작을 쓰게 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재능을 입증한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너무나 통속적인 1970년대식이다. 『무진기행』으로 대변되는 김승옥은 오랫동안 너무 우아하게만 말해졌다. 오히려 그가 건드리고 싶은 인간의 본질은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무진기행』를 통해 유명해진 '안개'는 인간의 통속적인 욕망을 집약하는 말인 동시에 유명하지 않은 가장 유명한 특산품이다. 인간 혹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명산물. 욕망은 누구나 지니고 있어도 평범해 보이지만 한 인간에게 부착되어 발현될 때에는 기이한 광기를 내며 그 무엇보다도 도드라지게 자신을 발산한다. 있는 듯 없는, 없는 듯 있는 안개의 등퇴장처럼.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 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의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영화 <감자>(1968)

영화 <감자>를 안개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한다. 그것은 '시대'의 문제이고, 시대=안개라 할 수 있는 또렷한 지점들을 보여준다. 점점 불투명해지는 시대. 이를 위해 소급해 내려간 것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감자>가 아니었을까. 시대의 억압은 근대성과 함께 왔고, 1960년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혁명 혹은 근대성의 안개였고, 그것을 연결하는 고리들은 끊임없이 소환한다. 김승옥의 소설에서는 자전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진 순천과 여수의 반란사건에 대한 불안감과 불편함, 연좌제의 이미지와 공포가 자주 소환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것은 과거로부터 온 소문들이었고, 그 소문은 한 예술가의 불안을 잠식한다. 

그리하여 김승옥의 통속성은 스스로 불편함을 드러내면서 또 다른 시대적 불편함을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대학시절 읽었던  『건』에서 '극기'를 화두로 과거 혹은 시대를 견디는 각각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연은 그 자체로 불편하다. 하지만 끝내 살 수밖에 없고, 살아야 한다면 그것에 대한 기억과 불편함은 시대의 공기가 되어 인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가족사적 비극도 불편하고 불안하지만, 대학 스승(교수)의 마지막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 극기라는 것은 살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이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음이 드러난다(그는 연인을 버리고 유학을 떠난다. 교수 사회에서 한 교수 부인의 죽음이 화두에 오른다. 결국, 그녀는 버리고 떠났던 교수의 과거 연인이었다). 그들은 다시 만날 수가 없다. 과거의 불편함이 그들을 영원히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소설에 등장하는 불편함을 안개라고 읽는다. 외설성, 통속성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둘러싼 예민한 공기들이 감수성의 언어로 포착된다. 영화에도 그러한 순간들이 있다. <감자>에 등장하는 허장강이 연기하는 남편은 "이런 제길"이라는 말을 어찌나 반복하던지.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제길"이다.

김승옥이 영화로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시절 서울경제신문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4컷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한국일보에서 새 경제신문을 창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샘플 몇 장을 그려 무작정 문화부장 앞으로 보냈는데 연재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하숙비를 내고 등록금을 내기는 충분한 액수였다고. 그의 시사만화는 1961년 2월 14일까지 모두 134회에 걸쳐 신문에 실렸다. 본명 대신 '김이구'라는 필명을 썼다. 순천 고향 집 번지수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언론의 자유가 사라지자, 만화연재를 중단한다.

중요한 것은 소설가 김승옥보다 만화가 김승옥, 문화인 김승옥이 먼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영화로의 전환은 김승옥의 '외도'가 아니라 오히려 '제자리'다. 그리고 이 자리에 대해 아직까지 충분히 말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영화들을 더 소환해야한다.

 

<킴스 비디오>, 데이빗 레드몬, 애슐리 사빈 감독|2023

ⓒ 오드

확실히 시작은 향수를 자극했다. 개인적인 체험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비디오의 시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다량의 VHS 테이프뿐만 아니라 유럽의 pal 방식 테이프도 소유한 적이 있었고, 두 대의 비디오 데크를 돌리며 꽤나 부지런히 영화를 모았던 시절도 있다. 지인의 도움으로 꽤 저렴하게 VHS 공테이프를 다량으로 구입한 적도 있다. 하지만 복제의 복제를 거친 영화의 화질은 얼마나 열악했던지, b급 영화도 예술영화가 되는 신공을 발휘하고는 했다. 그것도 재미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열악한 번역 자막과 화질을 떠올리면, '상상의 영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처지라고 할 수밖에.

기본적으로 <킴스 비디오>는 넷플릭스 시대를 살게 된 옛 시네필들을 위한 노스텔지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넷플릭스의 광고가 걸린 정류장을 지나치는 장면도 등장한다.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화면으로 보인다. 아시다시피 넷플릭스의 출발점이 바로 미국 '비디오 대여점'이었다. 하지만 이 장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유수한 감독들은 모두 넷플릭스로 달려간다. 오늘날 가장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영화의 장소로 인식되니 말이다.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쿠아론의 <로마>(2018)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웨스 앤더슨이 로알드 달의 책 중 네 작품을 골라 하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었을까. 킴스 비디오의 운영자는 넷플릭스와 같은 사업 수완가는 아니었다. 영화 개봉과 함께 한국에서도 여러 인터뷰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터뷰 내용은 그저 그랬다. 그 시기에 대한 내용이 겉돈다.

영화가 다루는 핵심적인 사건은 엉뚱하다. 2000년대 들어 부가판권 시장의 판도가 바뀌면서 킴스 비디오는 5만 개가 넘는 비디오테이프을 잘 보관하고 운영해 줄 곳을 찾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시칠리아섬의 살레미가 낙점된다. 영화에서는 살레미를 담은 장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시칠리아섬이다 보니 <대부2>의 장면들도 나온다. 그런데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보니 이곳의 관리와 공개 방식은 엉망이었다.

개인적으로 살레미가 흥미로웠던 것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도 훨씬 전에 '1유로 프로젝트'의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살레미 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는 주택을 단 1유로에 경매하는 이 사업은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살펴보니 시칠리아 마을 곳곳에서 이 사업의 바통을 이어가는 모양이다. 인구도 늘리고, 주택도 개선하고. 하지만 아이디어와 달리 실제적인 행력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킴스 비디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작진은 카메라를 들고 얼치기 범죄 영화를 흉내내면서 비디오를 훔쳐오기에 이른다. 얼치기 범죄 영화 흉내를 내는 장면을 보면서 도대체 왜 이 영화를 봐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늘어나는 장면은 살레미의 시장과 이 사업을 둘러싼 이탈리아 정치인들을 거론하고 담는 장면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엇나가버린 다큐의 목표지점이 된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문화의 성지로 불리었던 킴스 비디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증언과 목소리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영화 문화를 어떻게 이어주고 있는가 하는 지점이다. 몇 컷의 밑밥이 던져지지만, 영양가는 거의 없다.

소문난 집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해당한다. 애용자였던 이들의 중요한 증언만으로도 킴스 비디오는 한 시대의 문화를 기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다르게 접근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소장된 비디오 중의 상당수는 정식적인 루트로 들어온 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왜 유료 비디오 대여점에 자신들의 작품을 무상으로 건네주었는가 하는 일은 영화 문화의 주요한 단면이다. 왜냐하면, 비디오의 형식이든 스트리밍의 형식이든 영화의 본질 중 하나는 '공공성'이기 때문이다.

야매 비디오를 가능케 했던 문화가 무엇이었는지(비판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건을 가능케 했던 토대에 대한 성찰) 들여다보는 것은 한 시대의 기록이 된다. 하지만 초반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폼잡는 게 대부분이다. 그것은 5만 개의 리스트를 나열하는 화면을 보여주는 것도 못 한 일이 되었다.

 

<괴인>, 이정홍|2022

ⓒ 영화사 진진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수상작이다. 기대했지만 뒤로 갈수록 해결하지 못한 이미지들이 쌓여간다. 이 영화에 대해 신선하다는 반응들이 오히려 신선하다. 어쩌면 괴인의 다른 표현은 보통사람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살지만, 어쩌면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상황들이 미묘하게 엇갈린다. 하지만 그 정도의 표현이 전부다. 더 이상 무엇을 찌르지도, 뒤통수를 치지도, 바깥을 향해서 나가지도 않는다. 꽤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상황으로 끝나 버린다. 그래서 일종의 허무개그인 동시에 단편으로 잡힌 아이디어처럼 보이는 영화. 무엇보다 이 영화의 포스터는 이 영화와 전혀 상관없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2022

ⓒ 디오시네마

소설가 재이와 영어 강사 건우 커플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함께 살지만 결혼하지 않으며, 출산에 대한 계획도 없다. 하지만 임신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상황이 벌어진다. 준비하는 작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짜증만 늘어가는 재이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건우가 새로운 학원을 준비하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보여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린다. 어느 정도 동시대적인 상황과 설정들이 반복되지만 두 시간 넘게 흘러갈수록 공감은 줄어든다.

가장 큰 문제는 인물들의 기계적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두 주인공의 대립이 쌓이거나 변화하는 것 없이 단조롭게 흘러간다는 것은 점점 더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재이의 경우 출판사와 친구 혹은 작가 동료들 사이에서, 건우의 경우 학원에서 꿈꾸고 계획하는 욕망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작 두 사람의 갈등은 초반의 설정이 전부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는 한 커플이 출산을 준비하면서 서로를 외면하는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이야기고, 두 사람의 결정과 책임 그리고 이에 따른 후회와 갈등의 서사임을 망각해 버렸다. 덕분에 모두가 히스테릭한 사람들이다. 

이 또한 우리 시대의 풍경이라면 풍경이겠지만, 그것만이 담기면 아쉬워진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물(배우)들이 움직이는 물리적 실체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는 운동도 있고, 갈등도 있으며, 변화도 있고, 침묵도 있다. 그 순간들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너와 나>, 조현철|2022

<너와 나>의 제목을 바꾸어야 한다면, 아마 '전날'쯤이 될 것이다. 영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날'의 '전날' 이야기를 보여준다. 화면의 느낌은 이와이 순지의 <하나와 앨리스>(2004)랄까. 이와이 순지의 영화 제목도 <너와 나>로 바꿀 수가 있겠지.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의 대부분은 다리를 다친 친구를 찾아가 내일 수학여행을 같이 가자며 조르는 과정이 대부분이다. 이 과정에 깜짝 등장하는 박정민의 연기는 발군이다. 이 에너지를 어찌할 것인지. 그런데 이와이 순지 풍의, 두 여고생의 이야기에 균열이 가는 것은 단지 그들이 다투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이 틈입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벌어진다. 안산역, 안산의 고등학교 등 무방비 상태로 영화를 보아도 심상치 않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마 조현철 감독의 의도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여고생의 일상 속에, 설레는 마음속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속에 스며들어오는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재현되기 어려운 '세월호'의 그날 혹은 전날.

그것은 또 한 번의 뒤집힘을 겪는다. 처음에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는 수학여행을 같이 가자는 세미(박혜수)로 보였지만, 영화 중반, 그러니까 수학여행을 가기도 전에 홀로 남은 하은(김시은)으로 전환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장면이 바로 버스에서 뉴스를 청취하는 이미지를 통한 시간과 순서 그리고 사건과 감정의 총체적 역전이 이뤄진다. 어찌보면 죽은 자의 회고록처럼, 우리는 수학여행 전날의 이야기를 보았고, 결국 감내해야 하는 것은 다리를 다친, 살아남은 하은의 몫으로 전이된다.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글을 쓰는 시점에서 해경의 대법원판결은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소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친구들의 감성으로, 여고생의 목소리로, 퀴어의 정서로 이를 버텨내려고 한다. 

하지만 때때로 화면은 너무 아름답기만 하고, 그것이 세월호의 고통을 일부러 망각시키거나 은폐하는 전략처럼 보일 수도 있고, 결국 대비를 통해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결의 영화이지만 아주 끔찍했던 사건을 아름답게 시작하는 영화 한 편을 떠올려 본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 콜롬바인 고교 총기난사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 작품의 시작도 아름다운 교정의 모습과 부서지는 햇살과 나뭇잎들의 결로 시작한다. 그리고 충격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어쩌면 <너와 나>에서도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실재의 충격. 그것이 있을 때 여고생들의 노래방이 되었든, 교실이 되었든, 병실이 되었든 더 생생하게 끔찍한 순간임을 환기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엘리펀트>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태도가 있다. 재현의 불가능성 수준은 아니지만 재현의 어려움(내지는 끔찍함)으로 인해 그들이 왜 그랬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그날의 풍경을 담아낼 뿐이다. 아름다움과 끔찍함이 교차하는 현실을. 그에 반해 <너와 나>는 끝내 여고생을 포옹시킨다. 이 재현의 드라마가 얼마만큼 도움이 될까. 아니면 얼마만큼 방해가 될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조현철 감독의 인터뷰 제목 때문이었다. "참사를 스펙터클로 이용하는데 윤리적 거부감 있었다."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 이 영화는 포옹하는 장면을 포함하여 곳곳에 너무 많은 스펙터클이 있지 않은가? 한 편의 영화에 스펙터클이 침입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엘리펀트>가 그러한 사례이고, <너와 나> 역시 최대한 뺄셈으로 가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우리가 영화를 통해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의미, 하나의 새로움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와 나'를 합치면 결국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것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사적인 틀 안에서 좀 더 벗어나 우리라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했던 영화가 아니었을까. 그날 혹은 전날의 우리. 

 

<당나귀 EO>,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2022

ⓒ 찬란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가져온 이 작품은 여전히 브레송적이다. 그것은 시선의 문제를 통해 드러난다. '당나귀 EO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영화인 동시에 수많은 시선을 뒤섞는 영화다. 그래서 로봇개의 모습도 등장하고, 뒤집혀진 스키의 모습도 등장한다. 이중에는 붉은 화면도 여럿 있다. 다른 시선, 다른 시점을 통해 동물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그것은 새로운 시선의 가능성을 연다.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오늘날 영화의 카메라는 인간중심주의에 빠져버렸다. 초기의 영화이론가들이 카메라의 시선에 열광한 것은 인간의 시점과 다른(그것은 화가의 시선과 다르다) 기계적 시선이 넓혀줄 가치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발터 벤야민은 마술사와 외과의사의 관계는 화가와 카메라맨의 관계와 같다고 본다. 화가의 시선이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거리를 유지하는 데 반해, 카메라는 환자를 수술하는 외과의사가 대상의 조직에 깊숙이 파고들듯이 현실의 대상 속으로 침투한다고 말한다.

<당나귀 EO>를 보면서 느꼈던 쾌감 중 하나는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EO의 시선으로, 때로는 새의 시선으로, 때로는 기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것은 폭포수가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광경에 이른다.

시선의 해방. 그것은 시각예술 속에서 무수히 이야기 되어 왔지만 정작 영화라는 산업적 장르에서는 자주 실천되지 않는(실험영화라면 다를 수 있다.) 고민이었다. 과거에 브레송이 그러했듯이(브레송은 당나귀뿐만 아니라 유작 <돈>에서도 돈이라는 메커니즘의 시선을 담아내려고 애쓴다)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 또한 이 실험이 여전히 유효하고 유의미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시선의 해방을 열어줄 수 있다는 어떤 기대 지평을 품게 만든다. 아핏차퐁의 <메모리아>가 소리를 통한 감각의 해방이었다면, <당나귀 EO>는 정확히 시선에 집중한다.

 

<더 킬러>, 데이비드 핀처|2023

넷플릭스에 올라온 궁금한 영화 <더 킬러>를 보았다. 청부 살인업자를 그린 영화인데 그는 임무에 실패한다. 그리고 사건이 커진다. 도미니크 공화국에 은둔해 있던 킬러의 아내에게 사고가 생긴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복수극이다. 아내를 이 지경으로 만든 암살자 두 명을 찾아내 복수를 하고, <미녀 삼총사>(2000)의 찰리에 해당하는 인물, 그러니까 자신을 고용한 인물을 찾아가 또다시 복수를 하고, 의뢰인의 주소를 얻어 그를 찾아간다. 그런데 모두를 죽이던(복수하면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일을 의뢰했고, 이 사태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의뢰인을 죽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그는 자신이 다시 찾아온다면 고통스럽게 죽을 거라고 경고를 한다. 장면이 바뀌면 그는 아내와 함께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코아르에 실린 김경수 평론가는 이 영화를 자본과 대결하는 킬러의 이야기로 해석한다.(「'더 킬러' 자기계발서가 그리는 현대의 지옥도」) 그리고 킬러가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읊조리는 원칙들을 자기계발서의 논리로 설명한다. 그가 의뢰인, 즉 기업가를 죽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업가는 인간이 아니어서다. 기업가는 오로지 돈의 논리대로만 움직이기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대신 킬러는 그가 언제든 거기에 있을 거라는 것을 드러낸다." 뭔가 모호한 설명이다. 그의 행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영화의 초반 장면을 잘 보는 것이 필요하다. 5일 동안 나타나지 않는 대상을 물색하면서 킬러는 쉼 없이 개똥철학을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그는 단순한 킬러이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메타포에 가깝다.

 

ⓒ 넷플릭스

사실 파리의 첫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창틀 너머의 세계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킬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내레이션으로 인간과 사회와 종교에 대한 그의 철학이 흘러나온다. 문제는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임무에 실패했고, 그 결과 그는 원칙과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먼저 나열하는 원칙들을 보자.

- 계획대로 해.

-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말고.

- 아무도 믿지 마라.

- 이점을 포기하지 마라(최근 사이시옷 규정이 바뀌었다. 잇점→이점).

- 보수가 따르는 싸움에서만 싸워라.

- 공감하지 마라. 공감은 나약함이다. 

- 나약함은 약점이다.

- 단계마다 자문해라. '이게 득이 되는가?'

반복되는 이 내레이션들은 자기계발서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가 파리에서 내려다볼 때, 마치 신처럼 굴고 있고, 이 원칙들은 다른 인간과는 다른 소수의 논리를 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킬러는 스스로 말한다. 세상은 소수에 의해 다수를 지배해 왔고, 소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원칙들은 소수가 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은신해 둔 아내마저도 사고를 당한다. 한 마디로 그의 원칙 따위는 개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원칙들을 다시 읊조리며 복수를 행한다. 이 아이러니는 꽤 재미있다. "보수가 따르는 싸움에서만 싸워라"라고 하지만 파리 사태 이후 벌어지는 싸움은 보수와 상관없는 싸움이 아닌가?

그러니까, <더 킬러>는 소수가 되려는, 신이 되려는 남자가 아내의 사고 이후 인간적 복수를 행하는 이야기다. 그럴 때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다가온다. 그는 아내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후 곁에 비치 의자에 드러눕는다. 소수가 되기를 원했지만, 마지막 내레이션은 전혀 다른 것이다.

"유일한 인생길은 지나온 길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나처럼… 다수에 속할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소수임을 꿈꾸고, 그에 따른 원칙들을 읊조리며 행동하던 킬러가 스스로 다수임을 인정하면서 끝나 버린다. 다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계획대로 하지 않고, 임기응변을 하며, 종종 누군가를 믿고(아내를), 이점을 포기하기도 하며, 보수가 따르지 않는 싸움을 하고, 공감과 연민을 가지게 되는 인간이다. 이 영화는 냉혈한 킬러의 자기 고백록이다. 한 번의 실수가 일으킨 거대한 나비 효과를 경험하면서 끝내 자신도 하나의 인간임을 자임하면서 끝나는 이야기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꽤 재미있다. 넷플릭스에서 핀처가 만든 <맹크>(2020) 이상으로 한 인간을 집요하게 보여주면서 그 안에 있는 기이함과 블랙 유머와 인생에 대한 통찰들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사람들을 무수히 죽여가면서, 킬러들과 대화를 하면서. 원칙이 무너진 세계의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가를 보여준다. 여전히 핀처는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 내는 늙지 않는 대가라는 생각이 든다.

 

<장사천재 백사장2>, tvN

채널을 돌리다 눈에 들어온 백종원의 새프로그램은 한결같은 그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장소 때문에 눈에 들어왔다. 전편의 나폴리에 이어 이번에 개업한 곳은 스페인 북부 지역, 바스크 지역에 속한 '산세바스티안'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9월 스페인 최대의 영화제인 산세바스티안 영화제가 열린다. 스페인 영화제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페인어권에 속한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도 꽤 많이 상영된다. 스페인 영화제라는 느낌보다는 '스페인어권' 최대의 영화제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인다.

아무튼 2회차 분량에서 업장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등장한다. 애초에 차린 곳과 떨어져 있는 이 위치는 산세바스타인의 구도심에 속한 '핀초' 거리다. 핀초는 스페인의 대표적 음식이라 할 수 있는 타파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왜 핀초냐면 바스크어로 부르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에서도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 첫 번째 언어가 스페인어, 두 번째 언어가 영어 그리고 세 번째 언어가 바스크어다. 사용자가 많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언어이고, 바스크어를 사용하는 문학작품 중에도 유명한 것이 있다. 아마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것은 '바스크 치즈 케이크'일 것이다. 꾸덕꾸덕한 느낌이 강한 이 케이크는 에스프레소와 잘 어울린다. 스페인식이라면 '코르타도'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핀초 거리가 눈에 익은 곳이었다. 1유로에서 비싼 것은 몇 유로에 해당하는 핀초를 마치 회전초밥집에서 먹듯이 골라 먹고, 바스크 지역 특유의 화이트와인(스파클링 종류도 꽤 있다)과 마시면 된다. 배불리 먹으려면 점심값치고는 적지 않게 나온다. 프로그램에서는 미슐랭의 도시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미슐랭 식당에서 밥을 먹을 여유는 없었다.

아무려나 화면에서 본 것과 같은 비슷한 느낌의 거리 모습을 함께 투척한다. 2018년에 찍은 사진이다. 종종 어떤 쇼프로그램을 볼 때, 어떤 사람들보다 더 장소가 눈에 띌 때가 있다. 그것은 온전한 기억과 이미지의 문제일 것이다.

 

ⓒ 이상용 영화평론가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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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 2023-11-25 22:45:36
10월에 올라오지 않아서 기다렸는데, 오늘 들어와 보니 11월 일기였네요. ㅎㅎ 늘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