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한국영화 #2 : '다음 작가'를 찾아서
[TALK ABOUT] 한국영화 #2 : '다음 작가'를 찾아서
  • 김민세
  • 승인 2023.11.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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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
영화 <사냥의 시간>(2020) ⓒ 넷플릭스

<사냥의 시간>(2020)의 문제적 캐릭터 '한'(박해수)은 영화 중간에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네가 살던 세상이 아니야, 여기는."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경찰은 도박장에서 은밀한 거래를 하고 불법조직보다 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목표물을 추적한다. 목적은 범죄자 소탕이 아니다. "원하는 거 없어요. 가져갔어요, 이미." 그렇다면 왜 그러는 걸까. "시작을 했으면 끝내야죠." 소년들은 시궁창이 되어버린 한국을 뜨기 위해 시작한 마지막 한탕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다. 그들은 '한'이라는 정체 모를 인물이 조직 일원이 아니라 경찰 권력 아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쫓는 이유가 단순한 돈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을 뿐, 그 세계의 중심에 한 발치도 들이지 못한 채 가장자리를 서성이기만 한다. 한마디로 시작은 했지만 끝을 보지 못한다.

"재밌네. 기회를 줄게요. 최대한 멀리 도망가 봐요." 이 결정적인 대사를 포함한 '한'의 말들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광경들―소년들이 도박장을 털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다사다난한 계획을 시행하고, 겨우 현장에서 빠져나왔지만, 또 다른 적수를 만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들의 험난한 행로를 왜 따라왔을까. 지금까지 봐왔던 세계가 '우리가 알던 세계'가 아니라면 앞으로 펼쳐질 세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끝으로 '최대한 멀리' 가볼 수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소년들과 그것에 답하기도 전에 퇴장해 버리는 '한', 즉 <사냥의 시간>의 미결된 불확실의 세계다. 

윤성현이 <파수꾼>(2010)이라는 준수한 데뷔작에 이어 <사냥의 시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 앞에 선 무지한 소년들이다. <파수꾼>의 미지의 세계가 서로의 속내와 진심을 알지 못하고 오해를 반복하는 나약한 소년들 그 자체였다면, <사냥의 시간>의 미지의 세계는 소년들을 새로운 위기에 빠뜨리는 제삼자 '한'이다. <파수꾼>의 세계의 진실이 소년들이 맴돌고 있는 후회스러운 과거와 다중 시점에 있다면, <사냥의 시간>의 세계의 이면은 하염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년들 앞에서 해결되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로 남아있다. 문제는 <사냥의 시간>의 불확실한 세계가 무지한 소년들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영화 밖으로 확장되지 않고 그저 안에서 맴도는 닫힌 세계라는 점이다. 이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한'은 이들을 왜 죽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인물 간의 관계성과 각자의 욕망을 설명할 '이야기'의 자리는 비어있다. 남아있는 것은 붉은빛 아래의 텅 빈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공허한 추격전이다.

 

영화 <길복순>(2023) ⓒ 넷플릭스

텅 빈 스펙터클의 세계 : 넷플릭스 속 한국의 풍경

<사냥의 시간>이 그려내고 있는 디스토피아는 알맹이 없는 어트랙션만이 떠다니는 '공허한 이미지의 세계'다. 여기서 이 공허한 이미지들은 최근의 한국 장르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텅 빈 스펙터클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변성현의 최근작인 <길복순>(2023)은 영화 내내 넘쳐흐르는 액션의 스펙터클을 과시한다. 카메라는 과도하게 인물에게 달려들고 액션의 활로를 팔로우하며, 360도로 하염없이 돌면서 피 튀기는 싸움을 지켜본다. 특히, 영화는 첫 장면부터 길복순(전도연)과 오다 신이치로(황정민)의 대결을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의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양식적인 카메라 앵글을 통해서 액션과 운동 이미지를 과감하게 겹쳐놓는 과잉된 연출을 보여준다. 해당 시퀀스에서 길복순은 이내 칼 대 칼로 대결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권총으로 오다 신이치로를 사살하고야 마는데, 이내 장면은 그녀가 대형마트를 가로지르며 쇼핑을 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총에 맞아 피를 쏟는 오다 신이치로에게 말하듯, 길복순이 대결의 약속을 어긴 것은 '마트 문이 닫기' 때문이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 <길복순>은 이런 유머 섞인 이질적인 충돌을 통해 킬러로서의 삶과 싱글맘으로서의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길복순에게 엄마로 사는 것은 킬러의 자존심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며, 엄마의 삶은 킬러의 삶만큼 고달픈 것이다.

<길복순>은 킬러의 삶에서 '싱글맘의 삶'을 보길 반복적으로 요청한다. 여기서 킬러가 곧 엄마라는 단순명료한 도식은 그저 메타포가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세계관의 해명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길복순>의 세계에서 엄마는 '킬러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킬러의' 삶을 살고 있기에 개별 영화의 세계관은 길복순이 엄마인 동시에 킬러가 될 수 있는 세계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 간극을 잇는 백스토리, 즉 '이야기'가 있어야 우리는 길복순의 이중생활을 이해하고 그 과정에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복순>은 '이 시대의 한국에서 소수자 딸을 둔 싱글맘의 삶은 고달프므로 킬러의 삶과 같다'라는 조건 없는 단순한 명제를 돌림노래처럼 반복하고, 그것의 강력한 동기와 욕망이 될 이야기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계관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그저 엄마와 킬러라는 두 대상, 또는 소수자로서의 여성과 동성애자라는 두 대상 사이의 '닮음' 때문이고, 그렇기에 길복순은 홀로 딸을 키우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남아있는 것은 세계 최고의 킬러인 길복순이 모두를 무찌르는 과잉된 스펙터클의 이미지들인데, 결국 그 액션에는 피상적인 가족주의와 불화하는 모녀의 이야기를 제외한 강력한 동기를 찾아볼 수가 없기에 텅 비어있다.

 

영화 <발레리나>(2023) ⓒ 넷플릭스

이충현의 최근작 <발레리나>(2023) 또한 이야기를 상실한 어트랙션만으로 영화가 작동하려 할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발레리나>는 여성의 복수와 연대라는 모티프 아래서 이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에 온 힘을 주력한다. 이때, 영화의 스타일적인 이미지에서 <킬빌>(2003)과 <드라이브>(2011), <올드 보이>(2003)의 걸출하고 양식적인 액션 장면들, 혹은 <블랙스완>(2010)과 타란티노의 몇몇 영화들의 강렬한 이미지들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이를 통해 <발레리나>가 이뤄내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젊은 감각, 소위 말해 '힙함'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 '힙함'을 유지하기 위해 표현주의적인 구도와 조명으로 쇼트를 채우고, 프레임을 기울이거나 과한 카메라 무빙을 보여주며, 힙합 사운드 기반의 음악이 갖고 있는 리듬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가령 옥주의 습격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최프로가 분노에 찬 얼굴로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은 이를 제일 잘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다. 이 장면에서 최프로는 장발의 머리를 한껏 쓸어 올리며 거리를 '힙하게' 활보한다. 고속촬영과 더치앵글로 촬영된 쇼트들은 복수를 결심한 극악무도한 악당을 담고 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욕망을 보여주고 앞으로의 갈등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야기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이 영화가 유지하고 싶어 하는 '힙함'을 과시하는 데서 그친다.

특히나 여성 캐릭터의 복수와 연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함에도 불구하고 <발레리나>의 스펙터클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이다. 여기서 영화 속 남성들이 모두 일차적으로 거세된 사람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옥주라는 여성 킬러로 인해 최프로는 뺨 한가운데에 흉터를 입었으며, 그의 부하는 여고생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한쪽 다리를 절단당한다. 항상 마약에 취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약사에게 남성성은 거세된 것처럼 보이며, 거대한 사업장 속에서 권력을 과시하는 조사장조차 옥주와 몇 마디 끝에 일찍이 머리에 총을 관통당한다. <발레리나>는 영화의 중반부부터 거세된 남성들이 상실한 남성의 스펙터클을 여성의 몸/액션으로 대체하려 한다. 하지만 변해빈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발레리나' 욕망 없는 도구」) 옥주의 욕망은 수없이 반복되었던 남성의 것이며, 옥주의 몸/액션은 남성 또는 남근의 모사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 옥주는 소음기가 달린 권총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남성들을 죽이고, 화염방사기가 내뿜는 거대한 불꽃으로 최프로를 불에 태운다. 발레리나와 킬러라는 캐릭터의 스펙터클은 전형적으로 여성의 몸에 달라붙거나, 전형적인 남성의 몸의 반복이 된다. 발레리나의 스펙터클은 최프로가 여성을 보고 있는 남성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킬러의 스펙터클은 남성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걔가 진짜로 발레리나였어?"라는 최프로의 대사처럼, <발레리나>의 캐릭터는 본질 없는 가시적인 표면만이 이미지를 배회하는 텅 빈 스펙터클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2023) ⓒ 넷플릭스

넷플릭스의 자본을 등에 업은 젊은 한국 감독들의 최근작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그만의 스펙터클을 확장하기 위해 마치 필연적이라는 듯이 또 다른 시대와 공간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사냥의 시간>과 <발레리나>가 묘사하는 한국은 형형색색의 조명과 슬럼화된 도시의 풍경들로 가득한 디스토피아적 근미래이며, <길복순>의 세계는 킬러들이 조직화한 회사를 지니고 있고, 은퇴한 킬러가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으로 현역 킬러들이 모여드는 만화적 세계다. 이 세계의 구현은 프로덕션 디자인의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하기에 그 풍경을 이국적으로 만드는데, 이것은 곧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장르 합성어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1990년대 말 이래로 할리우드를 의식하는 감독이 하나의 스펙터클한 세계관을 구현해내려는 미학적 야심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1990년대 말의 감독들이 할리우드의 스펙터클이 한국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면, 지금 감독들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한국을 한국이 아닌 곳처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던 세계'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때로 '한국 최초'라는 말로 방어되곤 한다.

이때 영화가 어떠한 특징적인 시대와 이질적인 공간을 불러온다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결국 그 세계가 동시대 이곳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범죄로 들끓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사냥의 시간>의 디스토피아가 목표로 하는 것은 가진 것 없는 소년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지금의 '헬조선'을 묘사하는 것이다. 킬러로 가득한 세계라는 <길복순>의 장르적 설정은 소수자의 문제, 정치 권력을 둘러싼 비리와 관련한 문제, 한국 학교의 학부모로서 아이를 교육하는 문제와 촘촘하게 엮인다. <발레리나>의 양식적이고 과잉된 세계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남성주의적 세계다. 즉 윤성현과 변성현, 이충현은 한국을 한국이 아닌 곳으로 만들려는 미학적 야심과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을 보여주려는 윤리적 의식이라는 이중의 욕망 아래 있다. 이러한 이중의 욕망은 데뷔작 혹은 출세작에서 새로운 장르적 활력을 보여주었던 젊은 감독들의 운명이며, 더 확장된 세계에서 자신의 작가성을 증명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제시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각자의 '두 번째 챕터'가 될 기회에서 무엇을 보여주었을까. 이들의 (여러 의미에서의) '다음' 영화에서 동시대의 윤리를 의식한 소재는 이야기에 깊이 스며들기보다는 동시대성,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와 캐릭터의 욕망을 정당화하려 한다. <사냥의 시간>의 소년들이 죽어가야 하는 이유는 지금 이곳의 청년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며, <길복순>과 <발레리나>가 세계관 최강자와 같은 강한 여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이유는 동시대가 그것의 존재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영화에서 동시대와 로컬은 할리우드의 복제와는 다른 한국만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면서도, 그저 표면적인 의식 아래서 지금 이곳의 피상적인 풍경을 그려내는 데에 멈춘다. <길복순>이 9시 뉴스와 한국의 사회생활, <발레리나>가 레트로와 민트 초코를 운운하는 것이 그러한 맥락인데,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동시대를 읽어내는 날카로운 젊은 감각이 아니라, 갈피를 잃은 이상한 유머다. 미학과 윤리라는 서로 다른 이중의 욕망을 묶어낼 수 있는 것은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는 '강력한 이야기'이다. 혹자는 넷플릭스의 제작 아래 있는 이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영화 그 너머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에 주목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상실한 영화가 보여주는 어트랙션은 '텅 빈 스펙터클'일 뿐이다.

 

영화 <부산행>(2016) ⓒ NEW
영화 <염력>(2017) ⓒ NEW

지금 한국 장르 영화의 두 계보 : 연상호와 박훈정

지극히 장르적인 문법을 따르면서도 작품 안에서 동시대 현실의 어떠한 정치·사회적 풍경을 보여주려는 경향은 2010년대 중후반부 이후의 장르 영화들에서 적지 않게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이다. 21세기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를 돌이켜보았을 때, 봉준호와 박찬욱으로 대표되는 2000년대에 등장한 감독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장르관습과 작가적 개성이 균형을 이루는 고유한 독창성이다. 이내 윤종빈과 나홍진 같은 그 이후 감독들의 작품은 촘촘해지고 규모가 커진 투자 제작 환경의 영향으로 훨씬 더 장르 고착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1) 그리고 그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2010년대 중후반부 감독들의 장르 영화는 201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몇 차례의 재난과 동시대 사회적 이슈의 무의식 아래서 작동하는 정치·사회적 텍스트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영화는 도리어 장르의 스펙터클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것을 더 이상 영화라는 환상이 아닌 현실 그 자체로 볼 수밖에 없는 순간에 도착하게 만든다. 앞서 말한 감독들의 최근작, 그중에서도 특히 <발레리나>는 이런 전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경우다. 마약과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여성 성폭행의 장면들이 갖는 디테일은 버닝썬과 N번방 사태 같은 현실에 달라붙는 이미지가 되며, 남성들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옥주의 거친 액션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던 상상적인 복수가 되어 지금의 현실이 갖는 분노의 정서를 고양하고 해소한다.


1) 김영진, 『순응과 전복』, 을유문화사, pp.25-26

현실의 어떠한 역사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시감의 순간은 적극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영화 외부의 텍스트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 정치·사회적 텍스트는 작품을 방어하는 목적 그 자체가 되어 장르와 신파의 클리셰를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곤 한다. 이렇게 작품의 장르적 스펙터클이 장르의 논리를 압도하고 현실이 갖는 기억과 정서를 소환해 기어이 그것과 일치되어버리는 최근 한국 장르 영화의 경향을 되짚어 보았을 때, 그 기원에 가장 걸맞게 떠오르는 이름은 '연상호'다. 연상호는 그의 가장 성공한 작품인 <부산행>(2016)과 가장 실패한 작품인 <염력>(2017)에서 지금 한국의 어떤 역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재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탈선하여 기울어진 기차 안에서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창문을 두드리는 <부산행>의 장면에서는 세월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며, 재개발 지역의 무력 진압을 위해 크레인에 달린 컨테이너에 무장한 경찰들이 오르는 <염력>의 장면에서는 용산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부산행>과 <염력>은 좀비 영화 그리고 히어로 영화지만 결국은 재난의 역사에서 한국을 지켜내지 못한 아버지가 영화의 세계에서 상상적으로 희생하고 모두를 구원해내는 영화다. 이렇듯 연상호의 영화에서 장르의 스펙터클은 현실의 재난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신파는 마치 당연한 절차인 것처럼 따라오게 된다.

<사냥의 시간>, <길복순>, <발레리나>가 스펙터클한 세계관을 구현해내는 미학적인 야심과 동시대의 문제를 겨냥하는 윤리적 의식이라는 이중의 욕망 아래 있는 것과 같이, 연상호의 영화는 한국에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장르적 세계관과 익히 봐왔던 신파 사이에서 진동한다. 여기서 장르적 스펙터클이라는 이미지의 측면과 신파라는 정서적 측면이 맞닿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와 기억을 매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월호와 용산이라는 공동의 역사와 기억을 갖기에 장르의 스펙터클에서 재난의 이미지를 볼 수 있고 신파 앞에서 애도의 정서를 끄집어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부산행>과 <염력>을 보면서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현동 평론가가 지적하듯이(「'정이' 연상호의 또 다른 자기 복제」) <부산행> 이후 연상호의 영화는 그의 영화적 설정에서 도출해 낼 수 있는 윤리적 질문과 성찰로 나아가지 않고, 가족주의라는 편리한 구조로 이야기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불러오는 현실과 역사는 부수적인 것이 되고, 가족의 수난기라는 이야기 아래서 장르와 신파의 클리셰는 강화된다. 연상호는 우리가 보아야 하는 '한국(역사와 기억)'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한국화(한국형 신파와 가족주의)'로 덮어버리고 만다.

 

<귀공자>(2022) ⓒ NEW

2010년대 중후반부 이후의 한국영화들이 보이는 경향의 계보 중 한편에 연상호가 있다면, 반대편에는 박훈정이 있다. 연상호가 어떠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위하여 장르를 불러온다면, 박훈정은 장르 영화가 주는 쾌감을 위해 장르 그 자체를 반복한다. 출세작인 <신세계>(2013)는 <대부>(1972), <흑사회>(2005), <무간도>(2002) 등, 마피아 영화와 홍콩 누아르 영화의 반복이고, <마녀>(2018)와 <마녀2>(2021)는 <롱 키스 굿나잇>(1996), <한나>(2011), <루시>(2014) 같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반복이며, <낙원의 밤>(2019)은 기타노 다케시와 두기봉의 반복이다. 장르의 기호로 가득 찬 박훈정의 영화에는 현실이 끼어들 틈이 없다. <사냥의 시간>, <길복순>, <발레리나>의 장르가 동시대의 현실을 의식하며 주춤할 수밖에 없을 때, 박훈정의 영화에서 장르는 장르 그 자체의 미학을 실현하려는 듯 장르 영화로서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가려 한다. 그 야심은 배신과 청부 살인, 거짓말과 반전, 카체이스와 총격전만이 영화 내내 펼쳐지는 <귀공자>(2022)에서 절정에 달한다. 현실의 디테일은 장르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신세계>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의심과 배신의 활극을 위한 설정이고, <마녀>의 학생 캐릭터와 오디션 장면의 디테일한 재현은 후반부의 반전과 몰아치는 액션을 위한 맥거핀이며, <낙원의 밤>의 제주도와 소주는 누아르의 무드를 위한 배경이자 전제다.

박훈정의 영화가 점점 클리셰와 오마주, 표절과 패러디로 넘쳐나고 있다는 비판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이런 지적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는 처음부터 수많은 장르 영화들을 반복하며 복제해왔고, 대표작인 <신세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평단을 설득시키는 데 나름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무분별한 반복과 복제에 있지 않다. 장르의 반복과 복제 속에서 독창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것, 또는 장르의 파편들을 엮어낼 수 있는 강력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 박훈정이 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두 가지를, 이 중에서도 특히 후자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녀>와 <마녀2>의 초자연적 액션은 설정의 한도를 가늠할 수 없기에 그 어떠한 서스펜스도 느낄 수 없으며, <낙원의 밤>의 피 튀기는 싸움은 반전과 배신을 강조한 나머지 인위적인 붕 뜬 정서와 과도한 자극만 남는다. <마녀>와 <마녀2>는 판을 벌여놓고 수습할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유예시키며, <낙원의 밤>은 죽임(살인)과 죽음(자살)으로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종결시킨다. 우리가 박훈정의 다음 영화에서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앞선 영화의 미결된 서사의 얼룩을 명쾌하게 지워내고 완결하는 모습이다.

연상호와 박훈정의 영화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놓쳐버린 '이야기'의 행방을 떠올리게 만든다. 연상호의 성찰은 가족주의라는 낡은 서사에 멈춰 있으며, 한국의 역사와 기억은 질문 던져질 수 없는 가장자리의 영역에 놓인다. 박훈정의 어트랙션은 이야기로부터 축적된 서스펜스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왜 싸우는지 알지 못하고,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는지조차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이야기를 상실한 텅 빈 스펙터클의 세계. 붉은빛 아래의 텅 빈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사냥의 시간>의 공허한 추격전,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 사이로 보이는 <길복순>의 과잉 연출된 액션, 거리를 힙하게 활보하는 악당을 담은 <발레리나>의 겉멋에 찬 쇼트는 지금의 한국영화를 정확하게 지목하는 이미지다.

 

영화 <낙원의 밤>(2019) ⓒ 넷플릭스

이쯤에서 씁쓸해지는 것은 윤종빈과 나홍진 이후로 한국 산업영화계에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감독을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공교롭게도 윤성현과 변성현, 이충현 각각 성공적인 데뷔작과 출세작, 단편작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자본 아래의 '다음' 작품에서 이들은 가장 실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전부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연상호와 박훈정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영화 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감독들에게서조차 이전만큼의 새로움은 보기 힘들다. 과거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이 이야기하던 작가가 '특정한 장르의 전통에 놓였을 때 창조적인 자유를 펼치는 자'라면 윤종빈과 나홍진 이후의 젊은 작가는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의 화법 아래에서 자유분방하고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내던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기수들과 같은 모습을 지금의 한국 영화감독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의 영화는 종종 엔딩에서 막다른 길에 다다른 듯이 바다로 향한다. <사냥의 시간>의 준석은 꿈꾸던 나라에 홀로 도착해 에메랄드빛 바다 앞에 선다. <발레리나>의 옥주는 민희와의 추억이 있는 해변에서 최프로와 그의 람보르기니를 불에 태운다. <낙원의 밤>의 재연은 태구와 함께 담배를 피우던 해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기서 바다는 꿈과 추억의 공간이며, 복수와 완결되는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다. 이 엔딩의 이미지가 갑작스럽고 공허하더라도 영화는 마치 약속한 것처럼 바다라는 한 공간에 모인다. 바다라는 태초이자 무한한 창조의 공간. 이때 바다는 갈 곳 없는 정서가 환기되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그 존재 자체로 요동치는 바다의 풍경은 곧 이야기가 지닌 풍경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풍경은 지금의 한국영화가 서둘러 이야기로 돌아가야 함을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징후의 표지가 아닐까.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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