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산'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여덟 개의 산' 어떤 삶을 살 것인가?
  • 이상용
  • 승인 2023.10.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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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각성을 재촉하는 영화"

<여덟 개의 산>은 단순해 보인다. 도시보다는 산의 풍경이 주를 이루고, 산에서 사는 사람을 보여주거나 산을 오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도시의 장면들도 최소한으로 등장한다. 반복되는 풍경들과 그 속에 얽혀있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영화가 선택하는 길은 좁다. 하지만 풍요로운 길이다. 왜냐하면 이 길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물론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를 동반하면서 인생에 관한 메타포를 이루기 때문이다. 네팔의 어떤 사람한테서 들었다고 하는(원작 소설에서는 닭 장수 노인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중심에는 높은 산이 하나 있다고들 하죠. 메루산이에요. 이 메루산 주변에는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죠."

(중략)

"여덟 개의 산을 돌아본 사람이 많은 것을 깨달을까요? 아니면 메루산 정상에 올라본 사람이 더 그럴까요?"

영화에 번역된 산의 이름은 '수미산'이다.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음차를 따온 한자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과 생겼다. 불교와 관련된 용어 중에는 이러한 사례가 많은데 지난번에 쓴 <강변의 무코리타>에서도 불교의 시간 단위인 무코리타를 우리 식의 한자로 부르면 달라지는 것에 상세히 쓴 적이 있다(「밥(삶)을 짓는 재능이란 무엇인가」).

수미산(須彌山)은 원어대로 읽으면 메루산인 셈이다. 수메루산이라고 불리는데 불교와 힌두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솟아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불교이든 힌두교이든 메루산에는 신들이 산다. 아무려나 그러한 중심산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여덟 개의 산을 돌아볼 것인가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여덟 개의 산>은 이 메타포를 깔아둔 채 각기 다른 삶을 선택했지만, 여름이 되면 그들이 함께 지은 산 위의 집에서 만나는 두 사람의 연대기를 풀어 나간다.

 

1984년의 여름산

<여덟 개의 산>은 어린 피에트로가 여름을 보낼 집으로 향하며 시작된다. "1984년 여름 부모님은 산골마을에 집을 빌렸고 운명의 장난인지 그곳에 아이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브루노였다. 영화는 산골마을의 집에서 산이 보이는 풍경을 내다보는 소년 피에트로와 "브루노"의 이름을 부르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화면에 담는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피에트로는 산을 처다보고 있고, 조만간 친구가 될 브루노라는 이름을 부르는 상황이 화면 속에 겹쳐진다. 컷이 바뀌면 집 앞으로 내려온 피에트로가 브루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만남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산을 바라보고, 브루노를 바라보는 피에트로의 모습은 이 영화의 '마스터 쇼트'다. 피에트로에게는 '산=브루노'이기도 하고, 그가 중심에 살거나 서 있는 것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두 아이는 절친이 된다. 원래 피에트로가 사는 곳은 이탈리아 북부의 중심도시 밀라노다. 아버지는 밀라노에 있는 큰 공장에서 근무하는 화학자다. 직원이 만 명이나 되지만 아버지의 로망은 틈이 나는 대로 며칠 혹은 몇 주씩 산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파울로 코네티가 쓴 동명의 소설에는 이 상황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데, 산자락에 있는 조그만 마을 '그라나'에 집을 얻은 것은 어머니였다. 매번 떠돌아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낀 어머니가 여름마다 머물 집을 정하고, 가족들이 함께 그 집을 향해 가는 장면이 소설 초반부에 상세히 등장한다. 그들이 머무는 곳의 지리적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에 알프스의 고봉 중 하나인 몬테로사가 등장하고, 영화의 장면 중 마테호른의 봉우리가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름에 살 집을 고른 이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알프스가 스위스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국경과 이탈리아의 국경 지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몇몇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발레다오스타 산악지대다. 피에몬테주에 속해 있고, 몽블랑산에 위치한 곳이다(‘씨네모어’ 강연 중에 영화 속 장면인 마테호른을 중심으로 보다 오른 쪽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통상적으로 밀라노에서 접근하기 쉬운 스위스 루가노  지역으로 생각했었다. 지면을 빌어 발레다오스타로 수정한다). 이들이 집을 짓는 산자락도 몽블랑의 산자락인 셈이다.

이곳에서 피에르토는 브루노라는 영혼의 단짝을 만나 즐거운 여름을 보낸다. 밀라노에서 보내야 하는 학교생활과 겨울이 지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밀라노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낸 후 피에트로의 아버지와 두 아이가 함께 '빙하'(몽블랑의 만년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몽블랑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디저트 빵인 '몽블랑'을 연상할 수 있다)를 향해 가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결정적인 초반 대목이다. 어느새 피에트로는 자발적으로 아버지를 따라 산행을 하기 시작하고, 부르노가 일하고 있는 부르노 삼촌의 집을 아버지와 함께 찾아간다. 아버지는 브루노도 빙하를 탐방하는 데 가도 좋다는 승낙을 그의 삼촌에게 받아낸다.

 

그런데 만년설을 향해 가던 세 사람 앞에 크랙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먼저 크랙을 뛰어넘고, 브루노 역시 여유롭게 뛰어넘는다. 하지만 피에트로는 크랙 앞에서 주저한다. 공포 때문인지 아버지의 말처럼 고산소증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물러서야 했던 이때의 경험은 피에트로에게 큰 사건으로 자리잡는다. 시간이 흐른 후 피에트로는 이때가 세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순간이었음을 떠올리지만 은근히 깔려 있는 것은 산에 대한 공포와 자신은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상처일 수도 있다. 브루노는 뛰어넘었지만 자신은 넘어서지 못한 것에 대한 상황이 이때의 기억에 포함되어 있다.

이어서 브루노와 결별하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집으로 돌아온 후 피에트로는 자신의 부모님이 브루노를 밀라노에서 공부시킬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피에트로는 부모님들의 생각에 반대의 의견을 피력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기적이고 핀잔을 준다. 피에트로가 반대를 한 것은 밀라노의 삶을 브루노가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에트로는 소 키우고 치즈 만드는 삶을 사는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를 따져묻는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영화는 피에트로의 얼굴과 시선을 다소 모호하게 연출하면서 이것이 소년의 질투인 것인지(앞의 크랙을 넘지 못하는 장면과 연결하면 이해가 된다), 자신의 절친이 도시에 사는 것을 끔찍하게 여긴 것인지 모두가 가능하도록 던져 놓았다. 원작에는 피에트로가 반대를 한 또 다른 연유를 생각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나는 그게 어떤 건지 알았고 그 생각에 반감을 갖기 위해 애써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브루노는 밀라노를 증오할 것이고 밀라노는 브루노의 작은어머니가 그를 말끔히 씻기고 입혀서 우리 집에 단어 공부를 하러 보냈을 때처럼 그를 망쳐놓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왜 브루노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키려 하는지 그 이유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여생을 젖소를 돌보며 살아가는 것이 뭐가 그렇게 안 좋은 걸까? 그땐 나의 이러한 생각이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브루노와 그의 바람, 미래를 진심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여름, 나의 친구, 나의 산을 지속시키는 데 그를 이용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 위의 불타버린 폐허도 길가의 퇴보 더미조차도 말이다. 브루노는 물론 폐허도 퇴비도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를 기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문장은 영화 내내 반복되는 피에트로와 브루노의 관계를 함축하기도 한다. 피에트로는 도시에 속해 있지만 브루노는 산에 속한 사람이다.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피에트로는 반기를 든다. 하지만 브루노가 산에 머물기를 바란 것은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했다. 피에트로에게는 산에 가면 언제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가 필요했던 셈이다. 이 사건으로 두 아이의 인생이 갈라진다. 중심산(몽블랑이 중심산이라고 우겨도 될 법한 장소일 것이다)에 살고 있는 산사나이 브루노와 여덟 개의 산을 방황하며 세상을 주유하는 피에트로의 반복이, 두 아이가 남자가 되며 갈라지는 세계의 모습이 펼쳐진다.

피에트로의 반대때문은 아니었지만 브루노의 밀라노행은 실현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어른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정도로 언급이 되지만 소설은 보다 직접적이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브루노의 삼촌과 달리 브루노의 아버지는 피에트로의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한다. 아마, 자신의 아들에 대해 간섭하는 것이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잠시 언급되듯이 브루노는 아버지를 따라 일을 하러다니기 시작하고, 피에트로는 이따금 이곳에 오기는 하지만 더 이상 브루노와 내밀한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크랙은 이 사건이었다. 영화는 15년간 두 사람 사이의 교류가 없었음을 설명한다.

 

아버지의 유산

두 사람의 재회는 그토록 산을 좋아하던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 등장한다. 피에트로 앞에 나타난 브루노는 친구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한 후 그를 산으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폐허가 된 집이 있었고, 이 집은 아버지가 산 둔 곳이었다. 산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도시 공장의 화학자의 소망이 담겨있는 집이었다. 여름 동안 브루노는 집을 고쳐 짓기 시작하고, 피에트로는 조수가 되어 돕기 시작한다. 마을로 내려온 피에트로는 자신이 산을 오르지 않는 지난 15년 동안 브루노와 함께 자신의 아버지가 산을 다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 사실에 당혹해 하지만 브루노를 도와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두 사람은 15년 전 여름처럼 함께 수영을 하고, 별을 보며 잠든다.

<여덟 개의 산>은 두 명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브루노가 상징적인 차원의 아들이자 산을 욕망했던 아버지의 한 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피에트로는 실질적 아들이자 도시 혹은 세상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인물이다. 두 아들이 합심하여 지붕을 올리고, 집을 완성한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지지만 여름날에는 이곳에서 함께 보내기로 약속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산을 잇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브루노는 피에트로의 친구였던 라라와 사랑에 빠지고, 이곳에 농장을 세우고, 치즈를 만들고 가족을 꾸린다. 피에트로는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세상을 두루 경험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두 아들의 모습에서 신화적인 구도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서를 슬쩍 끼워넣자면 브루노가 정착민이자 중심을 지키려고 했던 아벨이고, 피에트로는 한때 방황하고 엇나갔던 유목민 가인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신)의 죽음 이후 다시 교류를 갖기 시작하면서 삶의 방식을 고민해 나간다. 피에트로는 작가로서의 삶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원할 것 같았던 브루노의 흔들리는 모습이다(의외로 영화가 지닌 브루노의 방황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딸을 낳고 농장을 운영하지만 브루노를 흔드는 것은 현실의 경제적 압박과 자녀의 교육 문제를 비롯한 일상의 압박이다. 결국 브루노는 가족과 헤어진 후 두 사람이 함께 세운 집에 머물기 시작한다. 그에 반해 이미 방황의 시절을 겪었던 피에트로는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쓰는 작가가 되고, 이곳저곳 혹은 이산저산을 주유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경험을 넓혀간다. 집을 지은 이후 두 사람의 여정은 뒤집혀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가족이라는 상황 내부 안에서 산사나이의 방황이 엿보이고, 세상을 주유하는 피에트로의 모습에서는 흐름을 받아들이는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친구의 상황이 곤란해지는 것을 알게 된 피에트로가 자신이 도울 수 있다며, 농장에서 일을 하겠다고 제안하지만 무안해 질만큼 거절을 당한다. 어느새 산사나이는 자연의 여유로움을 품는 인물이 아니라 자연의 고집스러움을 닮은 인물이 되었다. 어쩌면 자연이라는 말도 부정확한 것인지 모른다. 집을 완성한 후 토리노에 있는 피에트로의 친구들이 놀러왔을 때 '자연'이 좋다는 타령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시에서나 '자연'이라고 말한다고 일갈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럼 어떻게 부르냐는 말에 브루노는 작은 하천의 이름과 언덕을 호명하면서 '자연'이라는 통칠을 거부한다. 그것은 꽤 섬세한 것이긴 하지만 이 섬세함 속에는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완고함이 숨어 있다. 브루노는 어느새 완고한 산사나이가 되어 버린다. 피에트로가 충고한다. "네가 괜히 마음에 담을 쌓고 있는 거라고." 그것은 타협하지 않는, 우둔한 인생의 단면이다. 피에트로의 방황이 있었다면 이 영화의 후반부는 브루노의 방황을 통해 인간은 쉼 없이 흔들리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바르마 트롤라'에서

바르마 트롤라는 두 사람이 집을 지은 장소의 이름이다. 자연이 아니라 세부적인 장소와 사물들에 이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원작에는 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등장한다.

"우리 어머니 말씀이 예전에 이곳은 바르마 트롤리라고 불렸대. 우리 어머니는 이름에 관해서는 틀리는 법이 없어. 모든 이름을 기억하고 있거든."

이름을 묻는 피에트로의 질문에 대한 브루노의 답이다. 바르마는 이곳에서 보이는 하얀 암벽을 가리키고, 트롤라는 "이상하다"는 뜻이다. 이상한 암벽. 소설에서 피에트로는 이상한 암벽을 보며 아버지의 유산을 생각한다.

"그곳에 잠깐 앉아서 주위를 살펴보고 그 유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리 아버지, 평생을 집을 떠나 있었던 그 산 위에 집 하나를 지을 희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것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 장소를 내게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원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피에트로의 생각이 지나갈 무렵 브루노가 여름동안 집을 짓자는 제안을 한다. 두 아들이 집을 짓는 것, 이상한 암벽 위에 하나의 터전을 세우고, 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가 원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이뤄지지 못한다. 비록 두 사람이 집을 짓기는 했지만 홀로 이곳에서 겨울을 나던 브루노는 실종이 되어 버리고(아마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싶다), 피에트로는 여전히 방황하면서 자신의 삶과 친구의 삶을 고민한다. 

그것은 애당초 이들의 집이 이상한 암벽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며, 나아가 세상의 모든 집은 이상한 암벽 위에 세워지기 마련이고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주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겨울 동안의 사건으로 인해 집은 무너지고, 브루노는 실종된다. 그제야 피에트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반추한다. 아마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정확히 이를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던 것을 그만둔 지 한참이 지나서야, 어떤 인생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산이 존재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나와 그(브루노)의 인생에서 정중앙에 있는 산, 우리의 인생이 시작된 처음으로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가장 높은 첫 번째 산에서 친구를 잃은 우리 같은 사람은, 단지 여덟 개의 산을 배회할 뿐이다."

<여덟 개의 산>이 보여주는 것도 정확히 이에 부합한다. 어린 시절로부터 거대한 크랙을 경험하였고, 그 후 재회를 하였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때의 산으로 다시 올라갈 수는 없다. 피에트로는 홀로 알프스의 산들을 오르며 아버지가 숨겨둔 일기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추억의 회상일 뿐 그때로의 회귀가 될 수 없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그 추억들을 되새기며 산들을 따라 방황하는 것일 뿐이다. 이 거대한 메타포는 인생의 단면이자 굳이 몇 줄의 평론으로 함축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다만, 큰 스크린을 응시하며 이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아버지와 친구를 잃은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은 모름지기 상실 속에서 방황하면서도 여전히 살아간다는, 상실의 시대는 언제나 주어져 있다는 세속적 깨달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모처럼 세속적 각성을 하게 이끄는 이 영화와 어둠의 극장은 충분히 젖어들기에 좋은 영화적 경험과 시간을 제공한다.

 

※ 추신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은 9월 23일(토)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진행한 ‘이상용의 씨네모어’의 강연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글 이상용 평론가, poema@ccoart.com]

 

여덟 개의 산
The Eight Mountains
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
Felix van Groeningen
샤를로트 반더미르히Charlotte Vandermeersch

 

출연
루카 마리넬리
Luca Marinelli
알레산드로 보르기Alessandro Borghi
필리포 티미Filippo Timi
엘레나 리에티Elena Lietti

 

배급|수입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47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9.20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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