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했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전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에서 협심하여 뜨개질로 완성한 108개의 모조성기를 불태울 때, 휴식과 탈주와 무위의 세계처럼 보였던 오기가미 감독의 영화가 도착할 곳 중의 하나가 백팔번뇌를 태워버리는 '불교'의 한 자리일 수 있겠다는 짐작을 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낯선 일본 식당에 모여든 사람들을 다룬 <카메모 식당>(2006)이나 일본의 외딴섬에 위치한 민박집 '하마다'에 모인 사람들을 다룬 <안경>(2007)을 볼 때도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장소는 낯섦의 차원을 넘어 유사 종교의 성소이자 공동체로 보였다. 그의 영화가 직접적으로 종교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제의없는 제의, 피안 없는 종교의 공동체, 신과 악마가 없는 이데아의 세계에 가깝다. 그 가운데 강조되는 것은 상처받고 휴식이 필요한 이들이 모이는 '위안의 낙원'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 모였던 이들이 어찌 될까를 상상해 보면, 일시적 평화는 단순하지 않다. 영원히 머물 수 있다면야 소소한 갈등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그럴 수 있다면 이곳은, 필연적으로 피안이 되지 않을까. 그럴 때 질서를 위한 권력과 힘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지 않을까. 구심점이 없는 공동체의 형태는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언제나 일시적이거나 임시적인 상태여야만 한다.
인물들이 이곳을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곳에서의 삶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많은 영화 속 장소는 일시적 유토피아다. 극장을 벗어나면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오기가미 나오코 영화의 상당수는 극장을 유토피아의 경험으로 설정해 놓고, 낯선 환경을 등장시켜 관객을 압도해 왔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는 '이 장소'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이 장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모으고, '이 장소'의 예찬론을 펼친다. 그곳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관객의 위치이기도 하다) 이곳은 '상상의 공동체'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필모그래피는 새로운 상상의 공동체나 상상력을 발휘할 만한 인내의 장소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그곳은 친숙한 일본 바깥의 장소이거나 일본의 안쪽이라고 할지라도 은밀하고 덜 알려진 장소다. 그런 점에서영화의 장소는 자족적이고 폐쇄적이다.
하지만 매번 같은 유형의 장소를 묘사할 수는 없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새 영화는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늘어나는 것은 과거의 장소와의 차이다. 그 차이는 단순히 장소의 새로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요청되는 것은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일반적인 어떤 장소를 요구한다. 이와 다른 방향은 완전히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어떤 경계 지대에 모인 사람을 다뤄왔던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조금 더 본격적인 장소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현실이든, 판타지이든 말이다.
전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가 그러한 경우였다. 걸핏하면 사라지는 엄마로 인해 토모는 외삼촌의 집을 찾아간다. 그곳은 남겨진 소녀를 안내하는 이상한 나라가 아니다. 엄마가 사라질 때마다 찾아갔던 반복적 일상에 속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삼촌은 린코라는 인물과 함께 지낸다. 그는 원래 남자였지만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혹은 과정에 있는) 인물이다. 친숙한 외삼촌의 집이지만 린코로 인해 이곳은 낯선 장소가 된다. 집안 곳곳은 훨씬 더 깔끔해졌고, 때마다 맛있는 밥과 요리가 나오며, 잠자리를 돌봐주는 이가 있다. 삼촌의 집은 어제의 장소가 아니라 낯선 동시에 더욱 친밀해지는 장소다.
이 방식은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를 뒤집어 보여주는 결과다. 대다수의 작품들이 낯선 장소를 보여준 후 그곳에 모여든 사람의 마음 속에 담긴 친밀함을 끌어냈다면, 이번에는 낯선 인물을 통해 친숙한 장소를 뒤집는다. 낯선 곳의 친밀성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친밀한 장소의 낯섬으로 뒤바꾼 셈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장소가 낯설든, 사람이 낯설든 모두 모여 함께 하는 식사는 장면을 통해 사람을 연결하고, 식구(가족)나 공동체의 의미를 재확립한다.
다만, 분명히 달라진 것은 외삼촌의 집이 기존의 도심과 떨어진 곳이 아니기에 린코와 함께 마트에 간 토모는 이웃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린코를 향한 공격적인 시선이지만 토모를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불쾌감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토모는 마트에서 만난 학교 친구의 엄마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지리적 가까움은 이처럼 가족(공동체) 외부의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곳은 침범당할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며, 린코는 이러한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체한다. 새롭게 경험한 공동체를 지켜내는 것은 토모의 몫인데 그러한 저항은 어린 아이라는 한계를 지닌 소극적 저항에 가깝다. 이 영화가 기존의 LGBT 영화의 차원에서도 그러하고, 오기가미 나오코 영화의 차원에서도 소재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공동체가 부딪히는 양상을 묘사하면서도 매우 제한적으로 토모의 입장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무코리타의 시간 - 애도하는 삶
<강변의 무코리타>(2021) 또한 조금씩 확장해 가는 오기가미 나오코의 시도가 보이는 영화다. 먼저 어김없이 친숙한 장소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동주택의 형태를 띠고 있는 '무코리타'는 문제가 있거나 나사가 빠진 듯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숙박시설이자 제때 월세를 내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저마다의 질서를 만들고 지키며 살아간다. 월세를 채근하지 않는 집주인 미나미는 물론이고, 이웃집 야마다의 목욕탕과 밥을 노리고 침범하는 시마다 그리고 어린 아들과 함께 묘석을 팔러다니는 미조구치 부자의 모습은 친숙한 오기가미 나오코적 인물 군상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각자의 사연이 드러나고, 그들은 서로를 보며 위로받는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지닌 문제의 해결은 문제점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거나 충돌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유사한 사람들과의 동질감을 통해서 획득된다. 드라마의 갈등보다는 인물 개인의 고민이나 번뇌가 타인의 모습에서 반복되거나 비춰질 때 그들은 마치 깨달은 것처럼 변화하기 시작한다. 해결 방식은 타인이 지닌 '유사성'(의 발견)을 통해 이뤄지며, 공감의 발견이야말로 치유와 해결책이 된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가 일종의 선문답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모인 장소의 특별함이 부각된다. 확실히 오기가미 나오코의 장소는 독특하다. 그것은 이곳에 모인 이들의 모습과 깊은 관련을 맺는데 아마 일반적인 공동체라면 일정한 목적성을 띠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규칙을 정한 후 서로 얽힐 것이다(온라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취미를 목적으로 느슨하게 결성된 인터넷 카페를 떠올리면 된다). 그런데 오기가미 나오코의 공동체에는 목적이 없다. 덕분에 한가하고, 무료하며, 무위적인 인물들이 모여 있고, 그들은 특별히 어떤 목적 아래 사람들을 호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목적 없음을 추구한다. 종종 어떤 원칙들은 강조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기묘한 웃음을 자아낸다. 예를 들어 <안경>의 숙박업소 하마다에서는 봄날 아침마다 '사쿠라'의 오리지널인 '메르시' 체조를 한다.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한 주인공 타에코에게는 낯선 모습이지만 이러한 원칙들은 일정하게 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그래봤자 팥빙수를 먹는 순간처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중요하지 않다. 타에코는 반드시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사쿠라는 아니라고 답한다. 원칙은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 이 요소들이 목적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깨우러 오는 사쿠라의 모습을 보며 이곳의 원칙들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느슨하게 모여들긴 했지만 서로에 대해 (원칙을 빌미로 하든 권유의 형태이든) 침범하는 순간들이 꽤나 인간적인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며 느슨하게 공동체를 움직이는 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민박집 주인 유지의 말에 따르면 봄날 메르시 체조를 하지 않으면 뭔가 개운치 않아서다. 봄이 아니라면 메르시 체조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렇게 민박집 하마다의 하루가 시작되고 흘러간다.
이처럼 목적은 없지만 원칙은 작동하는 공동체의 메커니즘 속에서 관객들이 목격하는 것은 현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풍경이다. 우리를 닮았지만, 어쩌면 다른, 우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장소와 사람들이 모여 작은 세상을 이룬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권력적 질서나 힘을 탐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들 스스로 힘과 부를 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런 것과는 멀어 보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약한 존재임을 표방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이러한 모습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스럽게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는 코미디가 된다. 왜냐하면 코미디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주인공의 모습이 보통의 관객들보다 약하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사실은 쉽사리 위로를 형성한다. 무성 영화 시대를 풍미한 채플린의 캐릭터 '떠돌이 찰리'가 여기에 해당하고, 1980년대 한국 사회를 대표했던 코미디언 이주일의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가 여기에 해당한다. 코미디언 혹은 코미디의 못남과 자기비하적 언행은 관객의 긴장감을 풀어준다. 제아무리 타인에 대해 엄격한 사람들도 자신보다 약하거나 못난 사람 앞에서는 너그러움을 갖고 너털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코미디가 인물을 통해 만들어 내는 웃음의 공감이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서 매번 목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강변의 무코리타>에서 인물들 전체가 하는 대사 중의 하나는 "저는 돈이 없습니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숟가락 하나만 들고 식사 자리에 끼어드는 것이 허용된다. 무례한 침범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무례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솔직하고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강변의 무코리타>에서는 전작들에서 찾기 어려운 모습이 전면에 등장한다. 영화는 '무코리타'에 대한 자막으로 시작한다.
"무코리타 - 불교의 시간 단위 중 하나로 1/30일, 약 48분. 최소 단위는 세츠나(찰나)."
불교의 시간은 죽음을 다룬 <토일렛>(2010)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지만, 피안 없는 공동체를 그려냈던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서는 적극적으로 도입되지 않았던 보편적 종교의 토대다. 아무려나 먼저 자막을 살펴보면, 다소 애매한 한글자막인데 '1/30일'은 30분의 1일이라는 뜻으로 표시한 것이다. 무코리타는 하루를 30으로 나눈 시간이며, 약 '48분'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궁금해진다. 왜 '무코리타'를 사용했을까? 무코리타는 산스크리트어 'muhūrta'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모호율다'(牟呼栗多)로 표시한다. 하루를 뜻하는 '1주야'(晝夜)는 30모호율다에 해당한다. 자막 화면에는 '세츠나'도 들어있다. 세츠나는 '찰나(刹那)'다. 모호율다 보다 한국어에서는일상적으로도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불교의 시간의 단위는 다음과 같다. 120찰나는 '1달'찰나가 되고, 60달찰나는 '1납박'이 된다. 30납박은 '1모호율다'에 해당한다. 시간은 찰나, 달, 납박, 모호율다, 주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주야, 즉 하루를 '찰나'로 환산하면 '120×60×30×30찰나=648만찰나'가 나온다. 이를 통해 1찰나가 어느 정도의 시간 길이인지 따져볼 수는 있다. 하루는 '86,400초'이므로 1찰나는 75분의 1초가 된다. 소수점으로 0.013333333…이다. 찰나는 1초에 한참 못미치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인물들의 입을 통해 무코리타에 관한 대사는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집주인 미나미가 집을 나간 줄 알았던 야마다가 돌아왔을 때 화단에 물을 주면서 "세츠나, 타세츠나, 로바쿠, 무코리타"라고 주문을 외우듯 말한다. 미나미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야마다는 "여기밖에 돌아올 곳이 없어요."라고 답한다. 또 한번은 미조구치가 장례식을 준비하는 야마다에게 검은 옷을 빌려주면서 읊조린다. "세츠나, 타세츠나, 로바쿠, 무코리타." 야마다는 미나미도 그런 말을 했다며 무슨 뜻인지를 묻는다.
"오카모토씨가 이 말을 자주 중얼거렸어요. 무코리타.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오늘 같은 하늘의 빛깔이 사라지는 그런 시간의 흐름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하늘은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간다. 그것은 이 영화를 감싸고 있는 황혼의 시간, 즉 죽음을 바라보는 시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 영화가 지향하는 어떤 시간적 감각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말은 "찰나, 달, 납박, 모호율다"를 일본어로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오카모토 할머니는 물론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새 불교의 시간 단위를 주문을 외우듯이 지니며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사는 공동주택의 명칭이 무코리타다. 시간을 장소로 삼은 작명이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서 주를 이루지는 않았지만(여태까지는 사물이나 장소가 제목의 주를 이루었다) 그의 영화에서 이미 보아온 것인지 모른다. 현실을 벗어나 다른 시간(휴식, 안위, 위로, 피안, 도피)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낯선 장소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경험적으로(영화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핀란드의 '카모메 식당'에서 오니기리와 시나몬롤을 먹으며 무코리타의 시간을 발견하기도 하고, 한 섬에서 팥빙수를 먹으며 무코리타를 찾을 수도 있다.
아무려나 '무코리타'는 오카모토 할머니가 자주 말했다는 진술에 가장 명백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곳에서 미용실을 하며 40년을 살았고, 2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죽음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고리'이자 이 영화가 현실이나 공동체 외부와 연결되는 지점을 형성한다. 주인공 야마다는 오징어젓갈 공장에서 일을 하며 공동주택 무코리타에서 살아가던 중 시청 사회복지과로부터 연락받는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가라는 통지서였다. 야마다의 부모는 4살 때 이혼하였고, 그 후 야마다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처음에 야마다는 이 사실에 대해 화를 내기도 하지만 이웃과 대화를 하면서 유골을 가져오기에 이른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던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죽음을 점점 더 받아들인다. 무코리타는 그러한 시간의 감각이기도 하다.
죽음의 상실감과 죄책감은 주인공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집주인 미나미는 5년 전에 사별한 남편을 여전히 잊지 못하며, 묘석을 팔러다니는 미조구치 부자는 반년 동안 한 개의 묘석도 팔지 못했지만, 동네를 돌며 매일 같이 죽음을 준비하라고 권유한다. 뿐만 아니라 옆방의 남자인 시마다는 아들의 죽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다(그의 죄의식은 희미하게 묘사된다).
영화를 감싸는 죽음의 모습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거나 애도해야 하는 산 자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느닷없이 등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는 야마다를 비롯하여 자신들이 맞이한 죽음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산 자들의 미숙함과 안타까움이 영화를 감싼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휴식과 위로를 찾아 어디론가 간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묻어둔 죽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중후반에는 미나미의 딸이 죽은 금붕어를 장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 지켜보던 미조구치는 하늘을 떠다니는 금붕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야마다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유품에 있었던 휴대폰에는 죽기 직전에 여러 번 전화를 한 곳이 있었다. 궁금증에 남겨진 번호로 전화를 건 야마다는 "생명의 전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방에 아버지의 유골을 둔 채 잠 못 들던(공포와 죄의식이 뒤엉켜 있다) 야마다는 결국 상담원과 대화를 하기에 이른다. 상담원은 친절하게 자살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죽음의 의미를 묻는 경우도 많다고 알려준다. 그러자 야마다가 죽음의 의미를 묻게 된다. 상담원은 개인의 어린 시절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그녀는 하늘을 떠다니는 금붕어를 어린 시절에 보았고, 그것은 영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상담원의 그 이야기를 미조구치가 정확히 들려준다. 금붕어를 통해, 생명의 전화 상담 내용을 통해 멀리 있던 인물들이 연결된다. 무엇보다 미조구치가 언젠가 생명의 전화에 전화를 건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영화로 만들어지기 이전에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이 작품을 책으로 먼저 발표했다. 그 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미조구치 부자 곁에 없는 '여성 - 아내이자 어머니'과 관련된 어떤 죽음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조구치는 아들과 묘석을 팔러 다니며 스끼야끼를 먹고, 복어회를 먹는 장면을 자주 상상한다. 과거에 그러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묘석 팔기는 아내 혹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현실과 죽음이 정확히 겹치는 장면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던 야마다는 담배를 피우며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오카모토라는 할머니를 만난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오카모토 할머니가 2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비로소 공포가 밀려오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나미는 오카모토 할머니 때문에 그 집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지 않았으며,여전히 오카모토 할머니가 그 방에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야마다에게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자신에게도 와달라는 말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무코리타에서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삶의 한 형태가 되고, 이들은 위로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 한 가운데서 일어난 죽음의 상실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공동체가 된다.
야마다는 시마다의 충고와 도움 그리고 미나미의 권유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야마다가 행하는 장례식은 49재다. 49재는 불교에서 행하는 장례식의 방식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49재는 무코리타를 의미하는 48이라는 숫자와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에서 유골의 형태로 아들과 함께 보내는 48일이야말로 영화의 무코리타인 셈이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에게 무코리타의 시간은 훨씬 더 길고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영화다. 애도는 그리움 죽은 이를 보내지 못하는 상실감과 우울의 감정을 가리킨다. 애도 속에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고, 영화는 이러한 시간을 형성해가는 야마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다룬다. 그 가운데 찾게 되는 것은 죽음에 매몰되거나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전화기를 연결하여 신호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습의 연결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조리해 보일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실존적 방식일 것이다. 그 가운데 삶이 연결되거나 찾아지는 것은 고립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연결을 통해서이고, 죽음은 생명의 전화, 시청의 사회복지와 연결되어 의미를 발생시킨다.
침입하는 공동체
야먀다가 무코리타 하이츠에 머물게 된 것은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였다. 그를 받아들인 오징어젓갈 공장의 사장님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성실히 일하다 보면 또 다음 달이 오고 그러다 내년이 오고 순식간에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지."라고 말한다. 야마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사장은 "10년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막 나가는 어머니로 인해 이른 나이에 감옥에 갔던 야마다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새로운 삶의 시험이자 갱생의 과정이 된다. 그것은 죽음의 의미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또 다른 선택이기도 하다. 낯선 장소에서 살아가는 변화를 전하는 것이기보다는 과거를 바꾸려는 한 남자의 하루하루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공동체의 경험일 것이다. 야마다는 오카모토 할머니(유령)의 침범은 물론이고, 여러 존재들의 방문을 받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웃 남자인 시마다다. 처음에는 자신의 집 목욕탕이 고장이 났다면서 목욕탕을 쓰게 해달라며 ―벽과 벽 사이가 얇아서 야마다가 방금 목욕한 사실을 알고 있다― 현관문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남자의 침입은 지속적이고 집요하다. 그는 끝내 야마다의 목욕탕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밥냄새를 맡은 시마다는 야마다의 식사 자리에 끼어든다. 시마다는 야마다가 정성스럽게 지은 밥의 냄새를 맡고 먹으며 거듭거듭 말한다. "정말 재능이 있다!"고. 야마다는 다른 재능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시마다는 이 재능도 대단한 거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 말로 인해 야마다는 조금 우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재능은 자신이 발견할 때보다 타인에 의해 발견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고, 맥주를 나눠 마시는 사이가 되고, 밭의 채소를 나눠 먹는 사이가 된다. 참으로 많은 공유다. 시마다는 작은 텃밭을 돌보고 있다. 그는 쉬고 있는 야마다를 보며 같이 일을 하자고 권유한다. 시마다는 작은 것에서의 즐거움을 찾는(소확행은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법을 몸소 보여준다. 한편으로 야마다가 사기 범죄를 저질렀고 출소한 과거를 알게 되자 거리를 두기도 한다. 나중에 시마다는 야마다를 찾아와 사과하면서 우둔했던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속았던 이력이 있음을 고백한다. 이웃의 침범은 불편을 초래하지만 타인에 대한 침범이 없다면 오해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공동체란 이러한 침범들로 쌓아올려진다. 불편함이 없다면 삶도 일어나지 않는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러한 모습들을 다양하게 그려낸다.
영화가 후반에 이르러 야마다는 '이 침범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에 이른다. 그는 아버지의 유골을 빻으며 자신을 찾아온 시마다의 행동을 보면서 비로소 웃기 시작했고, 웃어도 될지 고민되었다고 고백한다. 미나미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며 안아준다. 어쩌면 범죄를 저지른 자신이 인간의 자격이 있는지를 반문하는 야마다의 모습은 너무나 선한 오기가미 나오코식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매번 젓갈을 선물로 주는 사장의 모습도 이상적인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수히 등장하는 이들을 통해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가 강조하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침범하는 타인을 불편하게 여기지만 ―샤르트르의 표현처럼 타인은 지옥이다.― 홀로 남겨졌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타인의 침범은 기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인의 침범은 스스로에게도, 침범하는 타인에게도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확인의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침범은 SNS으로 연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에서 SNS는 자주 단절된다. <안경>에서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지역의 설정과 아침마다 알람을 대신해 등장하는 사쿠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불편함을 감내할 때 비로소 타인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이뤄지고, 일정한 무례함을 통과할 때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침범의 장면은 코미디를 동반하고 있기에 관객에 따라서는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초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불편함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이 침입을 받아들일 때이다. 타인의 침범이야말로 '살아있음의 증거'다. 타인의 침범은 무기력하거나 피로하거나 자존감이 무너진 주인공에게 새로운 계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범죄 이력과 사회복지과로부터 온 통지서 또한 주인공을 침범하는 현실이자 그의 삶을 특정한 공동체에 고립시키지 않은 채 다방면으로 연결하는 흐름을 이룬다.
아무튼 야먀다가 끝내 해결해야 하는 침범은 아버지의 유골이다. 49재를 보내고 장례를 치름으로써 야마다는 세상의 규칙(부모의 장례식)을 다하고, 아직은 작은 사회지만 직장과 집이 있는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획득한다. 그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오늘날에는 점점 더 낯설고 힘든 것이 되어버렸다. 오기가미 나오코는 이것을 멀리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무코리타 하이츠를 아주 특별한 장소로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소외되거나 약한 자들이 모여 자신만의 규칙을 이루고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침범하며 식사를 하는 공동체의 공간으로 그려낸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6개월만에 묘석을 판 탓에 돈을 벌게 된 미조구치 부자가 방문을 닫고 몰래 스키야키(소고기 전골)를 몰래 먹다가 들키는 장면이다. 시마다를 필두로 야마다 그리고 미나미 가족이 계란을 깨어 소스를 만들고 젓가락을 들어 소고기를 집어들기 시작한다. 이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오기가미 나오코의 식사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파티나 환대의 모임이 아니라 몰래 하려고 했지만 결국 모여들게 되었다는 사실의 진술에 있다. 심지어 오랜만에 묘석을 판매하는 데 성공한 미조구치는 부잣집의 강아지를 위한 것이었다며 씁쓸히 웃기도 한다. 아이러니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뤄지고, 아이러니와 아이러니 속에서 식사가 이뤄지고, 불편함은 끝내 무코리타 하이츠의 즐거운 한때로 전환된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계란과 젓가락을 들고 오는 이들이 불편하지만 함께 식사를 하는 즐거움이 일어난다. 무코리타 하이츠는 그러한 것으로 채워진 장소다. 영화 말미에 태풍이 다가오자 이들은 강변에 사는 노숙자들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무코리타에 사는 이들이 그나마 나은 삶을 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한 약자들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제한된 공동체를 넘어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는 통념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하고 돌파한 이들이기에 허락되는 성숙의 시간을 끌어안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죽음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죽은 이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영화다.
<강변의 무코리타>가 지닌 불교적인 색채라면 앞서 슬쩍 언급한 <토일렛>(2010)과 가장 닮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주인공 레이는 은둔형 외톨이 형, 버릇없는 여동생, 그리고 엄마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온 할머니가 함께 살게된 현실을 그리는 <토일렛>은 갑작스럽게 모여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일본에서 온 할머니가 영어를 하는 이들과 제대로 대화할 이가 없지만 신기하게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이해하고 포용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제목 '토일렛'이다. 그것은 버려지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재생되는 장소로서 흡사 불교의 윤회와 같은 상징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강변 혹은 강변의 무코리타가 그러한 재생의 장소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야마다는 이곳에서 재생(갱생)되며, 죽음과 상처를 지닌 인물들 또한 저마다의 재생 회로를 돌린다. 야먀다는 강변의 폐품을 모아둔 곳에서 선풍기를 가져오기도 한다. 낡고 버려진 것이지만 그가 사용하는 순간 선풍기는 새로운 필요로 재생된다.
그것이 삶일 것이다. 새로운 것을 사거나 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쉼 없이 고쳐 쓰는 것. 오징어 공장의 사장의 말처럼 그 인생은 10년 아니 50년을 살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는 의미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오기가미 나오코는 여태껏 그래왔고, 조금은 나아가는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또 한 번 재생시킨다. 그것은 충분히 유의미한 영화적 시간의 경험이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강변의 무코리타
Riverside Mukolitta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Ogigami Naoko
출연
마츠야마 켄이치Matsuyama Kenichi
무로 츠요시Muro Tsuyoshi
미츠시마 히카리Mitsushima Hikari
요시오카 히데타카Yoshioka Hidetaka
에구치 노리코Eguchi Noriko
에모토 타스쿠Emoto Tasuku
타나카 미사코Tanaka Misako
오가타 나오토Ogata Naoto
쿠로다 다이스케Kuroda Daisuke
배급 디스테이션
수입 엔케이컨텐츠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