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th BIFF] '청춘(봄)' 중국 혹은 자본주의라는 타르타로스
[28th BIFF] '청춘(봄)' 중국 혹은 자본주의라는 타르타로스
  • 박정수
  • 승인 2023.10.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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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왜 공장에 묶일 수밖에 없는가?"

오늘날 중국 영화계를 이끄는 '지아장커', '왕 샤오슈아이' 등의 '6세대 영화감독'은 주로 '중년'이 주인공인 영화를 연출한다. 그들은 요동쳤던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버텨내는 와중에, 한때 가졌던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산하고인>(2015), <강호아녀>(2018), <나의 아들에게>(2019) 등의 작품에서 모두 일관되게 ‘상실’이라는 테마가 반복된다. 이와 동시에 혜성처럼 등장한 청년 영화감독 또한 중국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웨이슈준'이나 현재는 고인이 된 '후보' 등은 자신들의 경험을 투영하여 '무언가를 가져본 적도 없는 청년'을 스크린에 그린다. 그것은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오롯이 가지지 못한 모습이다(<코끼리는 그곳에 있어>(2018), <질주>(2020)). 이는 빈부격차와 실업 문제 등 오늘날 중국이 떠안은 사회 문제가 그들의 자아를 무참히 찢어발기기 때문이다.

 

영화 <청춘(봄)> ⓒ 부산국제영화제

6세대 영화감독에 속하는 '왕빙'은 동년배 감독들과는 분명 다르다. 그는 무언가를 가져본 적도 없는 청년들의 초상을 클로즈업한다. 왕빙이 생각하기에 오늘날 중국에서 조명해야할 문제는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불가능’인 것이다. '중국의 프레더릭 와이즈먼'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일평생 '객관적인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왕빙은 신작 <청춘(봄)>에서 청년 감독들의 영화에서 항상 실종되거나 방황하던 '청년 노동자'의 초상을 냉정하게 기록한다. <청춘(봄)>에서 왕빙은 자신의 대표작 <철서구>(2003)와 같이 인물(노동자)의 곁에 카메라를 둔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도 보이는데, <철서구>에서 왕빙은 카메라를 은밀하게 숨겨 놨었고, 노동자와 일정한 거리도 유지했다. 피사체가 카메라를 의식하면 자연스러운 모습(순수한 진실)이 아닌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식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노동자는 주로 은밀한 '롱숏' 안에 담겼다.

그러나 <청춘(봄)>에서 왕빙의 카메라는 아주 적나라하다. 청년 노동자의 '측면'에서 친밀하게 말을 건네거나, 마주보며 식사하는 듯한 '근거리'를 유지한다. 이에 <철서구>와 달리 <청춘(봄)>에서 노동자들은 주로 '미디엄 숏'에 담긴다. 또 노동자들이 이따금씩 의자에서 엉덩이를 일으켜 이동할 때, 촬영은 '팔로우 숏'과 그들의 발걸음을 반영하는 '핸드헬드'로 급변한다. 이 또한 카메라를 무기력하게 사물함이나 기차 안에 고정해 두던 <철서구>의 촬영법과 정반대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그에게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을 안겨다 준 또 다른 대표작 <미세스 팡>(2017)에서도 시도한 바 있다. 다만,  <미세스 팡>에서 치매를 앓는 팡 여사는 카메라가 눈앞에 있어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사체의 진실을 위해서 굳이 시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반면 <청춘(봄)>에서 피사체는 카메라를 분명 의식한다. 대다수는 카메라 앞에서 흉하게 배를 까거나, 침이나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어떤 노동자들은 카메라를 의식하며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친절하게 교정하거나, 결혼에 관한 견해를 자체 검열하고, 또 카메라가 자신을 빙빙 따라다니니 '슈퍼스타' 내지는 '영화배우'라 자신을 일컫는다.

'시선'의 힘은 분명 무시할 수 없다. 누군가가 언짢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면, 심지어 그 시선이 권력을 가진다면, 우리는 '좋은 평가'를 받고자 시선에 따라 자신을 검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카메라가 피사체를 향하는 이상 '자신의 좋은 모습'만을 피사체는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 이런 이유로 (노출된 혹은 적나라하게 나를 향한) 카메라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청춘(봄)>에서 카메라(시선)의 힘은 생각보다 미약하다. 카메라를 신경 쓰는 노동자는 극소수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카메라를 신경 쓸 겨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잘 보여야 할 대상은 카메라가 아니다. 노동자가 시선을 의식해야 할 대상은 임금을 지급하는 사장이자, 그들까지도 지배하는 '자본주의'다. 카메라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윤을 자본주의가 내어준다. 노동자들은 카메라를 조금은 의식할지언정, 카메라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노동이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허용한 사적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 시간을 굳이 왕빙의 영화를 위해서 희생하기 싫은 그들은 카메라가 있든 말든 사적 시간에 청년들은 분방하게 군다. 왕빙은 카메라가 노출되어 있어도 누군가는 신경 쓰지 않거나, 누군가는 덜 신경 쓰는 모습을 기록하며,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인간을 쏘아보는 시선의 힘을 드러낸다.

 

영화 <청춘(봄)> ⓒ 부산국제영화제

여가 시간을 제외하고 청년들은 대체로 경직되어 있다. 우리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듣고서, 자유롭고 감정에 솔직하며 끓어오르는 혈기를 사방팔방 표출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청춘(봄)> 속 청년들은 우리의 통념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대체로 이들의 노동은 '재봉틀'로 좌우되는데, 기계가 자아내는 규칙적인 '소리'와 '운동'이 자유롭고 정력적이어야 마땅할 청춘의 팔과 손을 어색하게 옭아맨다. 특히, 원단을 재봉틀에 넣고 꿰매는 청년의 모습이 문득 생경해진다. 아주 신속한 재봉틀의 움직임에 따라 청년들의 손놀림과 고개도 일반적인 인류의 속도보다 몇 배 빨라지는데, 흡사 그 순간만 빠르게 '배속'한 것처럼 '착시'가 발생한다. 하지만 왕빙은 프레임이나 배속을 조금도 조작하지 않았다. 기계에 의해서 낯설어지고 이상해지는 인간의 육체, 그것이 곧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가하는 시선의 진실이다.

비록 청년들의 팔과 손은 기계를 따른다고 하여도, 그들의 얼굴은 비교적 자유분방하다. 몇몇 청년들은 귀에다가 '이어폰'을 끼며, 비록 ‘눈’은 보기 싫고 지루한 것들을 응시해야 하지만, ‘귀’만은 원하는 것을 듣게 한다. 또 노동자의 행동을 규칙적으로 분절하는 기계의 '박자'를 해치는, 분방한 '대중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놓는다. 그렇게 자신들이 바라는 플레이 리스트를 외부에서 빌려옴과 동시에, 청년들의 ‘입’은 항상 재잘재잘 기계 및 노동과 무관한 수다를 떤다. 청년들은 일을 하는 와중에 간식 내기를 하거나, 결혼 계획을 공유하는 등 노동과 무관한, 행복했던 과거나 실현하고픈 미래를 가리킨다. 청년들의 몸은 비록 공장과 기계에 묶여 있지만, 그들은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날을 꿈꾼다.

 

영화 <청춘(봄)> ⓒ 부산국제영화제

청년들은 왜 공장에 묶일 수밖에 없는가? 이 질문에 왕빙은 '조명'으로 답한다. 영화 속 공장은 어디로 가든 항상 쨍하다. 항구적으로 켜져 있는 '백열등'이 노동자가 봐야할 것을 비추고, 그들의 근면 여부를 감시한다. 공장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음식을 사먹으러 간 ‘노점상’도 쨍한 백열등이 밝히고 있다. ‘노동 현장’은 언제나 밝다. 이와 반대로 노점상으로 향하는 길거리는 아주 깜깜하다.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가는 통로인 ‘복도’ 또한 칠흑 같은데, 야근이나 초과근무가 일상화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퇴근하면 항상 밤이기 때문이다. 그 어둠 속에서 안 그래도 미미한 불빛은 불완전하게 깜빡거리며 '휴식하는 노동자'를 공장의 노동자와 달리 안정적으로 비추지 않는다. 노동자가 여가를 즐기러 향한 PC방에서도 마찬가지로, 게임을 하러 온 노동자는 지친 노동의 여파로 곤히 잠들어 어둠 속에 파묻혔지만,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원에겐 조명이 밝게 켜져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어두운 일터가 있을 수도 있고, 밝은 휴게 공간 역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빙은 자신이 <청춘(봄)>에서 설정한 '조명의 법칙'에 어긋나는 장면은 일절 생략하여 보여주지 않는다. 왕빙이 자신의 영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촬영할지언정, 그것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편집에는 자신의 주관과 판단이 깃든다. 영화의 왕빙의 편집(조명의 법칙)은 근면한 노동자에겐 광명이 비추어 '존재할 수 있는' 반면, 일하지 않는 노동자는 어둠 속에 잠식되어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실태를 밝힌다.

어떻게든 존재하기 위해서 노동 현장에 내몰린 청년들은 사적인 욕망을 억누른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선 자본주의에 더해 부모 세대까지 청년에게 많은 부담을 가한다. 더욱이 이들이 놓인 환경은 한 방을 여럿이서 함께 쓰는 ‘남녀 혼숙 기숙사’다. 동성이어도 충분히 불편한 와중에, 다름을 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이성들이 제 곁이 북적거린다. 총 '삼중의 굴레'에 빠져 억눌린 청년들의 욕구는 거대하게 불어나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며, 결국 활화산이 폭발하듯 분출된다. 영화 속 청년들이 보여주는 험악하고 무례한 행동은 참아낸 욕구에 비례한다. 욕설이나 침 뱉기, 흡연 등 조금 경박한 수준을 넘어서,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거나, 남자들은 몸싸움을 벌이는 등 타인에겐 해를 입히는 행동이 연이어진다. 이러한 일탈은 공장 및 기숙사에서 끝나지 않고 중국의 길거리, 곧 사회의 흉흉한 치안과 불결한 환경으로 귀결된다. 왕빙은 중국 청년들의 인내심이 임계치에 달하고 폭발하여 그것이 오늘날의 무질서를 불러왔다고 진단한다.

혼란스러운 길거리는 영화 내내 한 치도 개선되지 않고 항상 더럽다. 왕빙은 그 이유를 편집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 청년 노동자들은 여러 문제와 맞닥뜨린다. 여성 노동자의 임신 중단, 남성 노동자의 결혼, 영화 말미에는 이직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왕빙은 노동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 일부분은 보여줄지언정, 그것의 ‘결과’는 일절 보여주지 못한다. 인물과 장소는 다를지언정, 똑같은 기계를 사용하고 동일한 업무를 반복하는 '본질은 다르지 않은 공장'을 또다시 잇거나, '원점'으로 되돌아가 노동을 재개하는 ‘도돌이표’와 같은 편집이 3시간 30분가량의 길고 긴 러닝타임 속에서 무한하게 반복된다. 그 순환 속에서 노동자들은 잠시 극단적으로 일탈하지만, 결국엔 되돌아온다.

 

영화 <청춘(봄)> ⓒ 부산국제영화제

결말에서 이직을 고민하던 노동자들이 공장을 벗어나 시골로 향한다. 짧은 일탈 동안 낙관적이었고 행복했던 유년기를 ‘회고’한다. 하지만 ‘휴가’이기에 즐거운 순간은 필연적으로 짧고 끝나야만 한다. 또다시 끔찍한 일상과 현재가 이어질 것이다. 왕빙은 노동자들이 ‘바라는 현재’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걸어가기만 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길을 걷던 남성 노동자는 자두와 복숭아가 덜 익어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아마도 그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없고, 개선된 환경에도 속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를 거대한 구조가 영영 손 놓고 방치함에 악순환은 끝나지 않고, 사회도 질서를 되찾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을 능욕했거나 패륜을 저지른,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갇히는 곳은 지옥의 최하층 ‘타르타로스’다. 타르타로스가 악인에게 집행하는 형벌의 특징이라면, 단 한 번만 하더라도 아주 고통스러운 끔찍한 행위를 무한 반복시킨다는 점인데, 왕빙이 기록한 중국 공장의 풍경이 타르타로스와 별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공장의 청년 노동자들은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약속을 배반한 중국 내지는 자본주의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왕빙은 이 거대한 타르타로스를 얼굴은 다르지만, 똑같은 노동과 상황에 처하는 노동자들을 무한하게 이어내며 대신 드러낸다. 그 굴레는 공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억누르고 또 억누른 욕구는 거대하게 불어나 공장 바깥, 곧 사회에 커다란 무질서의 행렬을 불러온다. 왕빙은 <청춘(봄)>을 통해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빈부격차 및 사회 혼란의 이유 또한 진단하고,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이 또한 타르타로스처럼 무한 반복될 것임을 경고한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영화 <청춘(봄)>

청춘(봄)
Youth(Spring)
감독
왕빙
Wang Bing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212분
공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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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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