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EIDF] '침묵의 집' 카메라를 든 혁명의 아이들
[20th EIDF] '침묵의 집' 카메라를 든 혁명의 아이들
  • 이현동
  • 승인 2023.09.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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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지 않는 영화의 역설과 투쟁"

다큐멘터리 <침묵의 집>(2022)의 공동 감독이자 남매인 '파르나즈 주라브치안'과 '모하마드레자 주라브치안'은 수개월 동안 이란 바깥으로 출국이 금지된 상태였다. 왜냐하면 이란은 이 영화가 가진 사회 정치적 메시지가 안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겨우 영화를 처음 공개할 수 있었던 곳은 2022년 11월에 개최된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였다. 당시 이들은 "국가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서 많은 기회를 잃었다"고 호소한 바 있다.

 

우선, <침묵의 집>은 아마추어 제작자였던 감독 남매의 삶 가운데, 깊숙이 잠재하고 있던 가족의 아카이브를 끄집어내어 생동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한다. 실제 배경이 되는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로 무엇보다 국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이 오가는 장소다. '집'이란 테마로 이란 사회를 고발하려는 영화의 의도는 다채로운 아카이브로 인해 풍성한 사회 정치의 윤리 가능성을 모색하고, 무엇보다 한 가족과 마찰하면서 풍성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 중간에 "영화는 그렇게 우리 집과 우리 삶에 들어왔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는 개인사와도 밀접하지만, 동시대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영화 매체를 압축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침묵의 집>은 '침묵'이란 단어의 엄숙함과는 다르게 화면 전환이 빠르다. 반면에 '침묵'이란 단어와 다르게 이 영화가 영화 매체를 통해 침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 역설적이다.

<침묵의 집>의 첫 장면에서 캠코더로 촬영된 과거 영상과 사진, 내레이션 등의 몽타주는 '긴 시간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성격'을 규정한다. 먼저, 1979년 혁명과 더불어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중상류층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는 100년이나 된 집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가령 '엄마가 사준 캠코더를 한순간도 내려놓지 않았다'는 파르나즈의 내레이션은 어린 시절부터 아마추어 감독으로 활동해 온 그들의 이력과 열의를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그가 관객과의 시간에서 500시간 분량의 영상을 100분 분량으로 편집하는 데 3년이나 걸렸다는 소회를 푼 건 이 영화의 주요 푸티지가 가족과 남매의 삶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어 사업가로 명성을 크게 얻었던 할아버지와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집을 조명한다. 이는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예고한다. 흑백에서 컬러로, 사진에서 영상으로 이어지는 푸티지는 과거와 현재의 변환 속에서 유기적으로 시간을 연장한다.

'침묵의 집'이란 제목은 존재할 수 없는 침묵을 반어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 이 영화는 메시지로 보면 결코 침묵하는 법이 없다. 나라가 부당하게 부과하고 있는 정책과 그로 인해 발생한 혁명은 가족을 경유해 침묵의 존재를 도리어 은폐한다. 다만, 필로우 숏을 통해 의도적인 침묵을 표출하는 스타일을 고수할 뿐이다. 영화 초반에 혁명이 일어날 징후를 암시하는 메시지가 "행복한 새해 보내시길 바랍니다"라는 방송도 역설적이다.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1979년에 가족 중 유일하게 혁명가로 활동했던 감독 남매의 엄마는 당시 상황을 긴급하게 촬영했던 영상을 통해 숨을 쉬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가족의 연대와 혁명이 집뿐만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기인 파르나즈는 엄마가 시킨 대로 혁명의 노래를 부르고, 신은 위대하시다고 외친다. 먼저는 이런 아카이브를 보관한 것도 신기하지만, 영화 전체에서 국가에 봉기하는 혁명과 '신'의 의미는 이란에게 있어 전혀 매칭될 수 없는 이항 대립 법칙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인물과 공간 사이에 있는 정서적 공백 가운데 집을 조명하여 침묵의 의미를 재생성한다.

<침묵의 집>에서 '집'은 단순히 혁명의 당위성을 지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용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가 정치적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집'이 가진 역사를 가족으로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 남매의 집은 그간 그들의 영화 촬영지로도 쓰였다. 그들의 첫 단편영화인 <낯선 이들의 집> 또한 자신들의 '집'을 배경으로 찍었다. 그들에게 집은 가족의 역사이자 영화의 역사였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 집과 우리 삶에 들어왔다'는 말은 개인사와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이후 영화는 점차 삼촌들과 가족 이야기에 비중을 두기 시작한다. 이때 가족으로부터 주어지는 서사는 이 집에 극적인 요소로 부각된다. 병역을 완료하지 못하고 극장에 있다가 체포된 호세인 삼촌은 전선으로 끌려간다. 이후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도중 내레이션은 삼촌이 다른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전역을 하고 돌아온 삼촌은 가족들과 살지 않고 이전에 왕비를 대접했던 요리사의 숙소에서 거주하기 시작한다. 정원 뒤쪽에 위치한 이 집은 가족과 철저히 분리되고 고립된 장소다. 그리고 집 주변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점차 카메라가 집을 점거하면서 가족은 삼촌에게 감시를 강제당한다. 이러한 모습이 군대 이후 모습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영화는 국가와 한 가족에게 부여하고 있는 부당한 정책과 통제가 어떠한 영향을 주는 지를 보여준다.

이어 영화는 혁명 후 개혁주의라는 이상을 보였던 대통령 하타미의 선거운동과 엄마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교차시킨다. 이 장면에서 엄마를 인터뷰하는 여자는 출마 사실은 좋다고 밝히지만, 그것은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앞서 개혁은 여성이란 성별, 즉 편견 앞에서는 그 불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또 한 명의 삼촌인 모하메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명되지 않지만, 활기도 의욕도 없는 상태로 온전히 집에 정착하지 못한다. 그는 엄마의 혁명 시기에 영국행 편도 티켓을 끊고 살다가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장면과 겨울이 된 눈이 쌓인 집을 교차 편집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TV 화면은 혁명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결국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삼촌이 결국 집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이 에피소드는 혼란스러운 국가 상황을 고스란히 증언한다.

영화 마지막은 인생의 절반을 이 집에서 산 할머니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 이후 다른 가족들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내레이션은 역사를 상실한 국가를 은유한다. 엄마가 듣는 유권자 5,900만 명 중의 500만 명이 투표했다는 방송도 현재 이란의 상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집의 모든 공간을 서서히 줌 아웃 하는 장면은 그 역사와 고별을 하는 감독들의 의중을 드러낸다. 엔딩 장면 이후 잠깐 감시 카메라가 집을 감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집'이란 '국가'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침묵하고 있는 국가를 조명하는 이 혁명적 시네마는 수집된 아카이브가 일관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훌륭하다.

 

국가와 가족, 그리고 집으로 연결되는 영화문법은 영화 전체가 가진 리듬을 적절히 매칭하고 중간중간마다 틈입하는 '집'을 구조적으로 배열한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인물들과 혁명을 반어법을 통해 대립시키고, 끝낼 때쯤 집을 삽입하는 형식이다. 이때 집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침묵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점차 공백의 공간이 되는 이란이란 국가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영화 초반 할머니는 "인생은 수레바퀴"라고 말한다. 이는 이란에 예속해 있는 구조의 문제를 반복적으로 상기할 수 있게 하는, 영화를 끊임없이 통합하는 말이다. <침묵의 집>은 국가와 개혁, 결국 가족이란 공동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면서, 도리어 침묵하지 않고 영화로 그 투쟁을 선보인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침묵의 집
Silent House
감독
파르나즈 주랍시안
Farnaz Jurabchian
모하마드레자 주랍시안Mohammadreza Jurabchian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0분
공개 제20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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