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영화, 보기의 미학' 영화 보기의 전통에 작별을 고하다
[NETFLIX] '영화, 보기의 미학' 영화 보기의 전통에 작별을 고하다
  • 함윤정
  • 승인 2023.08.29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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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넷플릭스식 비극"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Voir>(2021)는 <영화, 보기의 미학>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예술 작품의 방법론을 함축하기 위해 '~의 미학'과 같은 표현이 쓰인 사례는 제법 흔하므로 구태여 심오해질 필요가 없겠지만, 가만히 따져 볼수록 해당 제목에는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다. 여기서 느껴지는 모호함의 원인은 아무래도 '영화'와 '보기의 미학' 사이에 찍힌 쉼표에 있는 듯하다. 이 시리즈의 각 에피소드는 '보기'라는 행위가 영화를 경험하는 일의 근간임을 미학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영화 보기'라는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일련의 통찰을 제시하는 일을 과제로 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화 보기'란 극장을 방문하는 경험과 짝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재차 언급하기도 민망할 만큼 영화 감상과 극장의 연결고리는 느슨해진 지 오래다. 심지어 이제는 관객이 집단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통념에 대해서도 전과 다른 관점의 해석이 요청된다. 감상 후의 소회 역시 문자의 형태로 정제되기보다 시청각적 이미지를 동원해 직관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세에 가깝다. 이러한 변화의 상황에, 정작 영화 감상의 고전적 조건을 무너뜨린 주역인 넷플릭스가 '영화 보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게 느껴진다.

총 여섯 개로 이루어진 <영화, 보기의 미학>의 각 에피소드는 오프닝에서 반복되는 문구처럼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담은 영상 에세이'란 하나의 주제로 묶인다. 극장에서 <죠스>(1975)를 본 경험에서 시작된 소녀의 성장담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변화(혹은 그들에 대한 대중적 관점의 변화)와 나란히 제시한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48시간>(1982)을 통해 언젠가 미국 영화가 영리하게 다루었던 인종적 함의를 분석한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각 에피소드의 내레이터가 무게중심을 두는 대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든 영상은 누군가의 실제 경험이 영화라는 대상에 관한 통찰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내레이터는 <친절한 금자씨>(2005)를 필두로 복수를 소재로 한 영화가 환기하는 윤리적 물음을 언급하고, 세 번째 에피소드의 내레이터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를 통해 영화의 주인공에게 느끼는 관객의 호감도에 관한 의외의 통찰을 제시한다. 애니메이션에서 '매력'의 의미를 재고하면서도 캐릭터 디자인과 3D 작업에 관한 애정을 표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 영화와 TV 시리즈에 관한 논의의 틀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비교적 넓은 관점에서 영화와 관련한 화두에 초점을 맞춘다.

 

ⓒ 넷플릭스
ⓒ 넷플릭스

기껏해야 20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수많은 인용 영상이 눈앞을 스쳐간다. 이처럼 <영화, 보기의 미학>은 극장 상영의 조건에 좀처럼 부합하기 어려운 영상 모음집의 포맷을 취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해당 시리즈는 넷플릭스의 어떤 콘텐츠보다 휴대용 디스플레이에서 스트리밍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때로는 해설적 양식의 완결성에 과도하게 천착하지 않으면서도 학술적으로 유효한 비평을 제기하고, 때로는 자문자답의 구성으로 엔터테인먼트와 교육적 효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물음은 단연 넷플릭스의 기획과 여타의 온라인 매체에서 공개된 컨텐츠 간 변별점이다. 당장 유튜브 검색창에 영화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를 검색해 보아도 <영화, 보기의 미학>과 유사한 형식의 영상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풍부한 예증만큼이나 빠른 리듬, 통찰력 있는 분석, 적절한 유머까지 곁들이며 열렬한 호응을 얻는 몇몇 채널이 눈에 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유튜브에 총 28개의 비디오 에세이를 연재했던 <Every Frame a Painting>(이하 <EFaP>)이 대표적이다.

흥미롭게도 <EFaP>의 소유주인 토니 주와 테일러 라모스는 <영화, 보기의 미학>의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두 매체의 양식에서 차이를 구하려는 상기 물음에 적절한 답을 제시하기란 더욱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동일한 인물이 서로 다른 매체에서 비슷한 포맷의 영상을 제작했다고 해서 두 매체의 경계가 단박에 흐려지진 않을 테다. 이는 마치 영화감독인 데이빗 핀처와 데이빗 프라이어가 <영화, 보기의 미학>의 총괄 제작을 맡았다는 사실이 이 시리즈를 '영화'로 일컬을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다만 이 시리즈는 유튜브의 어떤 비디오 에세이보다 풍부한 인용(각 에피소드에서 인용된 작품의 수는 최소 60여 개에서 100여 개에 달한다.)을 선보이며 넷플릭스라는 강고한 제작 기반의 이점을 뽐낸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로 빠른 리듬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유튜브의 포맷을 더욱 극적으로 밀어붙인 '슈퍼 컷'의 연속에서 부각되는 것은 여전히 <EFaP>의 두 인물, 토니 주와 테일러 라모스의 존재감이다.

<영화, 보기의 미학>와 <EFaP>로 대표되는 기존 영상의 변별점은 의외로 '극장'이라는 영화 감상의 전통적 창구를 화면에 끌어들이는 대목에 있다. 극장이란 어떤 장소인가. 영화 감상의 경로가 더 이상 극장에 국한되지 않는 현 세태와는 별개로, 극장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영화 감상을 위한 곳이다. 극장은 '영화 보기'를 실천하러 온 관객을 맞이할 뿐, 촬영의 대상이나 배경이 되는 일에 좀처럼 개방적이지 않은 장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극장에서 촬영 허가를 받는 일은 매우 까다로운 편인데, 그래서인지 <영화, 보기의 미학>의 장면 곳곳에 극장이 등장할 때마다 여타의 비디오 에세이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그 생경한 풍경에 자연스레 이목이 쏠린다.

 

ⓒ 넷플릭스
ⓒ 넷플릭스

첫 번째 에피소드의 화자이자 미국의 영화블로거인 사샤 스톤의 내레이션은 대개 어린 시절에 관한 그녀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어린 사샤 역할을 맡은 배우가 들어가는 극장은 실제 당시 극장의 모습처럼 다소 청결치 못하고 북적이는 곳으로 묘사된다. 반면 첫 번째 에피소드를 포함한 시리즈 전체에서 동시대의 극장은 넓고 쾌적하지만 공허한 풍경으로 제시되고, 카메라는 더 이상 스크린에 시선을 빼앗긴 군중의 모습을 담지 않는다. 물론 해당 장면들에서 매번 유일한 관객으로 각 에피소드의 내레이터가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사적인 경험에 주석을 더하는 장르적 설정에 충실한 연출로 수용하는 편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은 인물을 비추는 연출을 반복해서 고집하는 데는 또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대개의 경우 비디오 에세이의 내레이터는 외화면의 영역에 존재한다.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그 배경은 저마다의 사적인 공간으로 보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화, 보기의 미학>은 시리즈의 절반에 걸쳐 화자를 극장으로 데려간다. 다시 말해 넷플릭스는 '영화 보기'와 '극장'이란 장소의 연결이 당연시되었던 지난날의 관습, 즉 공적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경험이라는 전통을 영상 에세이라는 동시대의 형식과 결합한다. 그러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 '영화 대 텔레비전'의 엔딩에 이르러 노트북으로 스트리밍되는 영상물의 승리를 다소 노골적으로 선언한다. 영화와 드라마, 극장과 텔레비전이라는 각기 다른 영상 매체의 양식을 견주다 별안간 OTT를 긍정하는 결말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때 테일러 라모스가 호소하는 '상상력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형식이 어떻든 간에'라는 낙관적 표현을 곧이곧대로 수용하기란 석연치 않다.

<영화, 보기의 미학>은 은연중에 극장이라는 장소를 과거의 유산으로 기념한다. 해당 시리즈가 재현하는 '영화 보기'는 테일러 라모스의 설명대로 제의적 실천에 가까운 전통적 '영화 보기'의 방식과 상반된다. 오히려 이는 언제든 들어갔다 빠져나올 수 있는 오락 행위에 가깝게 그려진다. 이미 영화가 시작된 후에 팝콘과 콜라를 들고 유유자적 들어오는 인물,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에 별안간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물, 종국에는 고전 영화가 상영되는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는 인물까지. 이처럼 넷플릭스가 기용한 인물들의 '영화 보기'란 밀폐된 공간 속에서 스크린이라는 평면에 꼼짝없이 감각을 내맡기는 일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그렇게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담은 영상 에세이'는 '극장'이라는 영화 보기의 전통에 작별을 고하는 편지가 된다. 그러니 마지막 에피소드의 대사를 빌려와 <영화, 보기의 미학>을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이는 어쩌면 훌륭한 넷플릭스식 비극인지도 모르겠다고.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 넷플릭스

영화, 보기의 미학
Voir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6부작
공개 2021.12.06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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