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 인위, 숨김과 드러냄, 고요와 소요, 뭉개짐과 정확함… '아피찻퐁의 세계'에서 꾸준히 발견되어온 기현상에 접근하는 일차적 경로다. 그의 비디오아트 작업물에선 빈번히 대극적 현상과 상태들이 영화 말미까지 상보적인 관계성 안에서 유지되곤 한다. 예컨대 무성영화에서 발견되는 닫힌 사운드와 열린 이미지가 만들어낸 부조화의 조화. 해당 요소들은 접촉과 접신, 시청각적 데이터의 겹침을 통해서 '중간 상태'의 다중성을 지닌 채 스크린에 집합되는바 그의 영화들은 두 요소가 모두 넘쳐흐르거나 모두 충족되지 못한, 마치 이승과 저승 사이 중간 지대의 조건을 갖춘 세계로 파악되곤 한다. <제3세계>(1997), <블루>(2018)처럼 반 현실과 반 몽상의 집결지로서 육신이라는 장소가 있고, 영적인 신비주의와 제의적 행위를 포함하여 <세개의 욕망>(2005), <빛을 찾는 사람들>(2007), <메콩 호텔>(2012) 등과 같이 환생의 초현실을 일상적 풍경 안에 담아내는 시도들이 그러하다. <니미트>(2007)의 무너진 화면이나 오히려 시야각이 미치는 범주를 초과하는 <우리 어머니의 정원>(2007)의 근거리 촬영법, 혹은 <에메랄드>(2007), <불꽃>(2016)의 정처 없는 목소리와 장면 속 이미지를 읽어내는 작업 역시 오컬티즘적 접근을 요한다. 이 경우 기계-기술-사물의 개입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편이지만 사실상 아피찻퐁의 세계는 심안으로 꿰뚫어지는, 투시라는 상당히 은유적인 맥락으로 지탱되는 곳이다.
올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3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인디비주얼⟫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된 아피찻퐁의 단편영화들은 그러한 기현상이 더 과감하게 홰를 치는 현장이다. 그것은 단지 환각 증세가 만연한 그의 세계 내 존재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스크린 너머 세계 바깥으로 확산된다.
일례로 <노키아 단편>(2003), <그리고 백만 개의 불>(2003)과 같이 서사적으로도, 도상적으로도 무언가의 전신을 조립해놓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기억의 매혹 아래 감독이 너그럽게 수용해버리고 마는 이미지의 사각지대, 이어짐 없는 컷들의 연속적 배치로 생겨난 '영화의 진행'에 대한 인식이 '작중 상황의 진행'으로 출력되는 오차가 동반된다. 우리는 감각성 착각에 모든 인식적 반응을 내맡겨 버림으로써 무너진 질서를 또 다른 질서로 치환해 받아들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감각의 기만을 겨냥하던 그의 영화적 실험은 특정 울림과 움직임을 구별하는 총체적 인식론에서 이탈할 때 풍부해진다. 기존 이해를 벗어나는 관객의 사적인 감각 그리고 특정 장소(극장) 안에 들어간 육체의 동시성이 지닌 선험적인 힘을 우선시함으로써 그 자체를 엄연한 존재 양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아피찻퐁의 터전으로 알려진 퉁하 마을을 배경으로 한 <증발>(2015)은 21분간 들음과 봄, 식별의 (기존의 틀에 맞춘) 감각이 제한되는 흑백 무성영화다. 그는 집과 숲, 토지 전반 등 장소를 옮겨가며 그곳을 집어삼키는 의문의 기체, 덮치고 걷히는 그 움직임을 포착한다. 스크린 내부에선 이따금 인간들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들의 행위를 또렷이 헤아릴 수 없고, 사실상 엔딩크레딧과 배치된 두 컷의 컬러사진이 등장할 때라야 장소성이 내포한 사유가 열릴 따름이다. 때로 인간의 신체에 "사나운 멧돼지"라고 실시간으로 새겨넣는 언어처럼 어처구니없을 만큼 노골적인 이미지가 등장하곤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명백한 풍경이 어딘지 더 기만적인 태도를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스크린에 담긴 물질들의 실체를 구별하는 작업을 압도하는, 우리의 감각기관의 작동이 예민하게 날을 세우게 된다.
도무지 느껴지지 않은 응결의 온도, 질식 직전으로 치닫는 말 없는 이미지의 자극, 극장 환경 내에서 결국 깨져버리고 마는 숨죽임의 조건과 함께 증식되는 불안을 견디기. 아피찻퐁의 영화에선 풍경과 맞닿은, 전경화된 심상이 부피와 무게와 질감을 지니는 중요한 요소로 위치한다. 장소에 베여있는 슬픔이라든지, 팽창하지만 흩어지는 종류의 욕망 같은 것. <증발>에서 증기가 흰 스크린의 몸체와 하나가 되며 순수와 탐욕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무의 원초적 형상을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이다. 바람과 입자, 광선의 한없이 가벼운 질량으로 채워진 그의 영화와 접촉한 뒤, 알 수 없는 피로와 우울감에 휩싸이게 된다면 이 때문일 터이다.
어긋난 리듬의 반동을 거치며 인습적 영화의 조건에 일으켜 온 균열들. 아피찻퐁의 작업물은 그런 균열을 통해 우리가 근접할 수 없던 영역에 숨겨진 무언가를 감각기관 산하로 끄집어낸다.
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물질을,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가시적인 형태의 정신을 탐색하며 감각의 자장 안으로 들여온다. 후미진 세계의 구석에서 죽어있거나 과거적인 것으로 밀려난 초상들이 오컬트적 변주를 거치며 당도해 있다. <불꽃>(2016)에서 화면을 등진 남자의 손짓은 주시 단계에 머무른 여자의 (간이 프레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착각했지만, 감독의 말대로라면) 시야를 트이는 게 아니라 닫아버리는 쪽이다. 그들 앞에선 몇 개의 차원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광선의 폭발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주시하기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이라고 할 때, 그 행위는 어떤 의미를 생산하기보다 이미지 자체로 버틴다. 버팀의 경직성 안에서 유동적인 움직임을 지속하는 건 경직성에서 벗어나려는 빛의 전율이다. 미지의 먼 과거에서 우리의 현재를 가로질러 미래로 운반되는 빛의 진행. 밀려났던 과거의 선형적 리듬의 복원이 여기 있다.
아피찻퐁은 대체물 없는 존재의 사라짐과 그렇게 상실해간 과거의 외상들에 대한 대항으로서 무언가의 '나타남'이 요청되는 삶의 문제에 집중한다. 위령 편지가 부유하는 <엉클 분미에게 보내는 편지>(2009), 몽상의 붕 뜬 정신력에 끌려오는 것들을 회억하고(<제3세계>, <블루> 등), 촬상면 등 특정 매개물을 동반하여 바라보고 듣기의 인식 행위 자체를 자각하게 만드는 시도들(<말리와 소년>(1999), <증발>, <불꽃> 등)로 하여금 계속해서 무언가 '나타나는' 현상을 의식적으로 마주치게 한다. 가장 적극적인 건 공간-장소-시간의 '있음'이다. 그의 작업물에서 파괴된 인간적 삶 아래, 감추어져 있었지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공간-장소-시간은 중요하다. 전쟁터이거나 버려진 땅, '내'가 살았던 흔적을 그대로 탄 집, 제의의 장소거나 재난의 역사를 품은 강. 물론 영화의 근간을 이해하는 데 빼놓아져선 안 되는 국가적 절망이나 전쟁과 파괴의 고통을 비롯한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기억의 뿌리를 더듬으며 죽은 과거의 맥을 다시 날뛰게 하는 시도에 의미가 있고, 그 시공을 채워내는 심상의 발현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그의 영화가 감상이 과잉된 세계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감정의 엄폐와 퇴행, 그것이 도리어 고통의 가장 큰 본질인 것을.
그렇다면 아피찻퐁이 좀처럼 인간을 인간 자체로 두지 않고, 각성하는 존재의 총칭으로 변주시킨 채 등장시키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기억은 "어떤 나뭇잎들은 모양을 바꾼다"라던 <메콩 호텔>의 한 대사처럼 모양이 변한다. 유령은 모양이 변한 기억의 초상이다. 비유하자면 유령은 자기 존재로 기억을 발굴하는 이들이다. 죽고 살아나길 거듭하고 배회한 뒤 스크린 속에서 정착을 흉내 내는 유령들, 그 유령들의 기진한 걸음이 흩뿌려둔 취기와 비감이 한 세계의 공간을 부조하고 시간의 진행을 잡아끈다. 이 측면에서 아피찻퐁의 유령은 행색이나 나타남의 목적 면에서 공식을 벗어난다.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지도, 좌절된 무언가를 회복하거나 바로잡겠다는 강렬한 의지도 없다. 차라리 그의 유령들은 소위 먹고, 자고, 싸는 <아시아의 유령>의 조촐한 일상의 전경이거나 <메콩 호텔>의 폽 귀신처럼 야만적인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내' 맨얼굴을 알아버린 사랑하는 누군가와 계속해서 연결되어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모녀 사이였던 폽 귀신과 딸은 서로를 붙잡기 위해서 유령 됨의 한 조건으로써 자기 모습을 바꿔가며 영화 안을 전전한다. 아피찻퐁은 그런 내면의 문제를 견디기 위한 물신으로서 영화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삶이라는 문제 앞에서 '나'의 맨정신에서 벗어나기, 인간으로서의 '나'와 잠시 멀어지기 위한 도피의 걸음을 통해서 말이다.
더욱이 아피찻퐁이 잠과 죽음, 명상의 외적 부동성에 빠진 몸짓을 응시하는 이유는 거기에 빠진 이들을 깨워내기 위한 것이다. <빛을 찾는 사람들>에서 장례를 마친 사람들은 연달아 잠든 얼굴을 내비친다. 인물들은 자기 내면과 마주하는 슬픔에 지쳐 잠으로 도피한다. 그런데 <빛을 찾는 사람들> 속 잠든 사람들을 담은 프레임에는 기어이 그들을 깨워내려는 손이 침투하며 그 잠을 밀어낸다. <블루>는 얕은 수면의 아래로 침잠하지 못하는 한 여인의 긴긴밤의 기록이다. 그는 연신 몸을 뒤척이며 불면을 앓는다. 근방에서 절로 오르내리는 무대 막의 움직임은 그녀가 무언가의 경계에 걸쳐 있음을 뒷받침하는 추상적 풍경이다. 영화 전반은 잠이라는 행위에 느슨하게 걸쳐진 뒤 현실과 무의식으로의 각성을 번갈아 담아낸다. 잠으로부터의 깨어남은 죽음의 길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몸짓이다. 다시 한번 생의 활력과 연결되려는 의지이다. 죽음의 완결 없이 지속되는 각성의 난맥을 그려내는 그의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 중 하나다. <메콩 호텔>에서 딸은 제 처지를 서글퍼하며 우는 폽 귀신을 달래면서 잠에 들라고 말했지만 얼마 뒤 (빙의 된 인간의 몸에서) 깨어 나오라고 말한다. <메콩 호텔>을 한 축에서 말하자면 육백 년 살이 폽 귀신이 딸, 딸의 연인, 강아지를 잡아먹은 뒤, 영혼으로 다시 깨어난 그들과 살아가는 영화다. 폽 귀신 또한 인간의 몸을 입은 채 혼절하고 깨어나는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폽이 딸의 내장을 뜯어먹는 그 섬뜩한 장면마저 서글픈 기운이 공간을 맴돌고 있다. 이 인상의 근거는 결국 이 영화가 강조하는 것이 누군가와의 교감을 원하던 폽의 애원과 그에 호응하듯 지속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지려던) 누군가를 깨워내는 목소리의 힘에 있다.
잠은 꿈을 동반한, 기억과 연결되는 몸짓이다. 우리는 아피찻퐁의 영화를 보며, 그의 기억을 우리의 기억으로 얻어가는 것 같다. 그의 영화에서 대개 꿈은 어떤 이의 목소리, 정확히는 얼마간의 시간을 거친 뒤 기억의 형태로 구술된다.
<제3세계>의 오프닝에선 사지가 으깨어져 죽은 어린 조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누구의 조카인지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전후 사정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듣는다. 이 불길하고 슬픈 괴담 뒤로, 한 남자가 간밤에 찾아온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구술한다. 대화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동일인물인지 알 길 없는 이 영화의 터전에서 남자는 덤덤한 말투로 "슬펐어요", "이제 비참했어요"하는 감응을 덧붙여 어머니를 기억한다. 아피찻퐁의 슬픈 꿈이거나 괴담은 그 내용물의 자극성에 비해 죽음을 초연하게 버티는 멜로디, 이를테면 <몬순>의 자장가나 <메콩 호텔>의 기타 반주음과 유사하게 흘러나오는 성질이다. 물론 그것은 반복되는 실험적 구조 안에서 덤덤한 풍경으로 변주된 안간힘이다. 닭의 울음이 우는 시간과 정전이 인식되는 어둠이 뒤섞인 시간, 그 위로 흑백 안에 고정된 생기 없는 이미지가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을 찾는 사람들>에서 죽은 아버지와 만난 꿈 이야기는 행복한 꿈이었지만, 꿈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한쪽 감각을 잃은(사람들이 내는 현장음은 제거되어 있다) 제의의 풍경 안에서 그 시간을 견디는 물질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가 해체된 아피찻퐁의 기현상에 관해 논리를 덧붙이는 시도에선 한계와 마주친다고 해도, 가장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 영화적인 무엇이 있다면 바로 추상과 은유가 초연하게 달라붙은 이 애달픈 삶의 문제를 덤덤하게 대하는 일이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