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차퐁 위라세타쿤 #1] '전생 여행'의 로드맵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1] '전생 여행'의 로드맵
  • 박정수
  • 승인 2023.08.0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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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전생과 조우하는가"

지난해 12월, 국내 관객들은 '콜롬비아'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바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신작 <메모리아>(2021)를 경유해서 말이다. 콜롬비아의 이국적인 풍경과 그 안을 누비는 유럽권 배우들의 부조화가 인상적이었지만, 위라세타쿤이 촬영한 피사체는 사실 단조롭고 평범했다. 이 영화의 촬영이 강렬하게 느껴진 건, 그가 익히 머물던 '태국'을 떠났기 때문이다. 또 그간 영화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콜롬비아의 풍광이 희소했기 때문이다. 이 콜롬비아라는 피사체의 특유성을 떼고 보면, 사실 위라세타쿤이 숏에 담아낸 것들은 아주 일상적이었다.

물론, 위라세타쿤의 숏들은 마냥 진부하지 않다. 그는 촬영한 피사체가 잠재하고 있는 '전생'을 실험적인 연출로 가시화한다. 이에 따라 밋밋하던 숏들은 입체적으로 변한다. 이때, 우리가 익히 생각하는 전생이란 '과거'이기 때문에 그가 '회고용 연출'인 '플래시백'이나 '플래시 포워드'를 즐겨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다. 위라세타쿤이 믿는 불교의 윤회-전생은 시간관이 조금 다르다. 불교의 시간관을 용이하게 이해하기 위한 한 예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2014)가 있다. 이 영화는 불교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시간이 3차원으로 수납되어 있어서 과거-현재-미래를 마음대로 꺼내서 나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불교의 전쟁은 과거에도 있을 수 있지만, 현재의 누군가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다. 위라세타쿤은 이를 <메모리아>의 편집에 반영했었는데, 그의 '전생 여행'을 이번 여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올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3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인디비주얼⟫은 위라세타쿤의 단편을 한데 모아 소개한다. 이 글에서 해당 기획전 중 '프로그램 1'과 위라세타쿤의 그간 장편을 바탕으로 전생 여행의 '로드맵'을 소개한다.

 

ⓒ 영화 <찬가>(2006)

위라세타쿤의 최근 작업은 '픽션'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그의 장편 데뷔작 <정오의 낯선 물체>(2000)가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를 오가는 것과 같이 그의 몇몇 영화는 온전한 가상이 아니다. 가령 단편 <찬가>(2006), <달리는 남자들>(2008), <M 호텔>(2011), <선인장 강>(2012), <시네트랙트>(2020) 또한 현실을 기록한 것인지, 픽션을 위해서 디렉팅된 것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심지어 <달리는 남자들>에는 피사체를 촬영하는 위라세타쿤 본인의 얼굴이 짤막하게 노출된다. 픽션임이 확연한 작품들 또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위라세타쿤은 <메모리아>를 제외하곤 거의 언제나 비전문배우를 섭외해왔고, 그들의 연기는 기교 없이 매우 평범하다. 연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그들이 표현하는 것이 배역인지, 아니면 실제 배우의 습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물론 그가 비전문배우만을 항상 섭외하진 않는다. 서구권에서 이름값 있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메모리아>도 있고, 위라세타쿤의 뮤즈인 '젠지라 퐁파스'는 그의 작품에 매번 출연하여 이젠 '배우'임이 확연해졌다. 그렇다고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 한들, 그들이 누비는 풍광은 인위적인 세트장이나 무대가 아니다. <발자국>(2014)이나 <찬란함의 무덤>(2015)처럼 일상이자 현실이다.

'현실을 기록하는 방식', '현실의 인물들', '현실의 공간'을 영화의 질료로 삼는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언뜻 일상을 반복하듯 보인다. 태국의 풍광과 생활사를 처음 맞닥뜨려서 생경하게 느껴지더라도, 곧 다른 나라에서도 통용되는 일상이 반복되기에 따분해진다. 하지만 그 풍경은 이내 특별해진다.

가장 먼저 '편집'이 단조로운 숏들을 특별한 맥락에 위치시켜, 낯설고 새롭게 만든다. 위라세타쿤이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도발적이고 과감한 편집에 있다. 두 개의 숏으로 구성된 단편 <찬가>의 시작은 중년 여성의 모임을 포착한다. 이후 중년 여성의 대화에 조금도 잠재되어 있지 않던, '체육관'을 촬영한 숏이 연결된다. 그의 장편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연결이 이어진다. 1장과 전혀 다른 2장이 '불연속적으로 연결'되는 <열대병>(2004)이 대표적이다. 거기다 <징후와 세기>(2006)와 <열대병>은 각각 별개의 영화지만, <징후와 세기>의 말미를 <열대병>의 도입에 연결한다. 분명, 두 영화가 이어져야 할 마땅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또 <메모리아>에는 인간의 의식이 느끼는 현재에 과거, 미래가 대뜸 끼어든다. 연결은 된다. 그러나 아무 연관이 없는 것만 같은 낯선 두 숏이 맞부딪힌다. 낯설긴 한데 분명 두 숏, 두 장은 '하나의 영화', 곧 하나의 존재다. 그것이 바로 윤회-전생이다.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무 연관도 없다. 서로 낯설지만, 분명한 것은 양자 모두 다 '나 자신'으로서 연속한다. 불연속적으로 연결되는 윤회를 위라세타쿤은 편집으로 보여준다.

 

ⓒ 영화 <에메랄드>(2007)

특히나 위라세타쿤은 단조로운 숏을 '입체적'으로 부풀린다. 가장 먼저 '청각'을 이용한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거기엔 보이진 않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무수한 전생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인 청각을 덧댄다. <메모리아>에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폭발성머리증후군'을 소재로 삼았고, <M 호텔>에는 단조로운 호텔 풍경에 '수중에 잠긴 듯한 음향'을 결합하였으며, <에메랄드>(2007)에는 인간이 부재한 텅 빈 공간에 사람들의 대화를 덧입힌다. 여기에 위라세타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추상적인 시각을 납작한 시각에 '디졸브'한다. <친애하는 당신>(2002)의 '드로잉 기법', <에메랄드>의 '먼지 이미지' 등 그림이나 미디어 아트는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을 지금 여기밖에 바라볼 수 없는 카메라가 촬영한 것들에 덧댄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 잠재된 무수한 전생을 암시한다.

반대로 한때 확고했던 지금 여기가 시간이 흘러 전생으로 전락한다면, 과거-미래에 내재한 다른 삶으로 변할 수 있게끔 추상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선인장 강>이 대표적이다. 위라세타쿤은 중국과 라오스의 상류 댐 건설로 변화하게 될 선인장 강을 추상적으로 왜곡한다. 한때 단단했던 선인장 강의 풍경과 일상을 다른 색채가 덧입혀질 수 있는 '흑백' 처리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프레임을 빠르거나 느리게 조절하여 낯설게 파편화하며, 어떤 행동으로든 이어질 수 있는 질료 상태로 뒤바꾼다. 망자가 투명한 유령 상태로 나타나는 <엉클 분미>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여기를 끝마친 삶은 투명해져서 무수한 윤회의 가능성이 그 안에 비치고 투사될 수 있다.

 

ⓒ 영화 <라 푼타>(2013)
ⓒ 영화 <열대병>(2004)

위라세타쿤은 이 시간-저 시간, 이 삶-저 삶으로 이동한다. 그렇기에 그가 프레임 내에서 포착하는 피사체도 이동이 잦다. <달리는 남자들>, <열대병>, <징후와 세기>, <메모리아> 등 장편과 단편을 나눌 것 없는 그의 무수한 작품에서 '드라이브'가 꼭 등장한다. 편집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낯선 삶을 이어내는 것처럼, 인물이 운전해서 향하는 곳 또한 예상치 못한 조우로 가득하다. 이 만남은 윤회가 발생할 법한 유동적이고도 추상적인 공간을 '통과'하며 성사된다. <열대병>에는 '밤길', <라 푼타>에는 '빗길'을 지난다. 해당 공간들은 추상적이어서 이것저것 상상할 수 있거나, 말랑말랑하고 질척거려서 여러 갈래로 조각해 볼 수 있는 '반죽'과 같다. 환생을 재조직할 수 있는 공간에서 인물들은 현세와 전혀 다른 전생, 내세와 맞닥뜨린다.

그 추상적인 통로를 거친 인물들이 도착한 장소는 주로 '정글'이다. <열대병>, <징후와 세기>, <엉클 분미>(2010), <세계의 욕망>(2005) 등 그의 무수한 작품에서 축축한 습기를 흠뻑 머금고, 겹겹이 쌓인 식물들이 무수한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정글의 장소성이 부각된다. <메모리아>에는 과거가 퇴적된 '동굴'이 정글을 대신하기도 한다. 정글에서 인물들은 도망치거나, '문명인'의 탈을 벗어던지고 동물과 구분키 어려운 '야만인'이 된다. 정글에 자욱한 습기, 곧 물은 고체·액체·기체 등 여러 상태로 변화할 수 있다. 이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정글에서 인물들은 액체처럼 변화한다. 또 인물들을 두터운 나무줄기와 빽빽한 나뭇잎이 가려준다. 정글로 가기 전, 인간은 변신할 수 없었다. 무수한 시선이 "너는 군인이고, 이성애자여야 한다"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런데 정글은 도시의 검열을 차단하며 자유로운 인간을 허용한다. 이로써 문명에서 전생으로 전락한 솔직한 자신과 동물이었을 수 있고 동물이 될 수 있는 인류와 조우한다.

차를 타고 정글로 이동하는 물리적인 이동, 그러나 위라세타쿤의 여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무제한적인 관념 여행까지도 포함한다. <시네트랙트>, <찬란함의 무덤>, <에메랄드>, <발자국>, <메모리아> 등 그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꿈나라 여행'을 떠나거나, 단순히 잠든 수준에 그치지 않고 '식물인간'이 된 사람들도 등장한다. 우리는 그 대상들이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 꿈 내용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할 수 있는 청각으로만 가리켜진다. 그 소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에겐 '헛소리'로 들리지만, 꿈으로써 다른 차원에 속한 이들에겐 헛소리가 진리요 참이다. 잠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현실이 아무리 건드리고 방해해도 옴짝달싹 않고 전생에 침잠한다. 즉 자신의 또 다른 진실로서 전생을 보기 위해 잠을 잔다. 이렇게 잠드는 인물들은 '아이'이거나 '군인'이다. 일단 아이는 지금 여기의 삶보다 전생이 더 익숙하고 길었을 존재로서 그들은 꿈에서 친숙한 자신과 조우한다. 군인으로 전락한 남성은, 군사화 이전의 자신이 흡사 전생과도 같다. 특히나 위라세타쿤은 '게이'인 자신의 성 지향성을 남성 군인에게 투영하는데, 군인인 그들은 전생의 동성애와 우애를 더는 펼칠 수 없다. 남성 군인에게 가능한 동성 간 관계란 오직 전우이거나 무찔러야 할 적이다. 그래서 전생, 곧 사랑을 회복하고자 군인들은 깊고 긴 잠에 빠진다.

 

ⓒ 영화 <발자국>(2014)
ⓒ 영화 <메모리아>(2021)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전생과 조우하는가. 거듭 윤회를 거친 '나'(인간)의 파편들은 여러 시공간에 흩뿌려져 있다. 그렇기에 매우 불완전해진 나는 완전해지고자 전생의 조각들을 되찾길 원한다. 그야말로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가령 <사크다>(2012)에서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이름'이 다르고, 그 오늘의 나조차 다른 공간에서는 청각으로, 즉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 아핏차퐁의 세계에서 윤회를 거듭하는 인간은 어제를 손아귀에서 놓치고 오늘만을 붙잡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의 작품에서는 '아픈'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다리에 장애가 있는 젠지라, <찬란함의 무덤>과 <발자국>에서 식물인간이 된 군인들, <메모리아>의 환자 및 폭발성머리증후군 등이다. 전생의 조각들을 찾지 못한 이들은 불완전하기에 고통스럽다. 항상 불완전한 이들은 '병원'을 반복하여 방문하지만, 의학은 이들을 불완전하게 만든 원인인 전생을 규명하지 못하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만약 이들의 병이 낫는다면 곤히 잠들 때, 즉 전쟁을 조우할 수 있는 깊은 수면을 제공할 때뿐일 것이다.

전생과 조우하기 위한 방법이자, 전생에 준하는 철학은 우정과 사랑이다. 현재 내가 만나는 타인은 나의 전생을 알고 있는 인연이거나, 심지어 나의 전생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내면·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야외 및 타인에게 카메라를 열심히 들이민다. 그 존재를 객관적이고도 조심스럽게 관찰하기에 그의 촬영은 다큐멘터리와 같아진다. 또 인간은 인간으로만 윤회하지 아니하고 동물이자 식물도 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선 '떠돌이 개'들이 항상 포착되며, 식물로 가득한 정글 또한 내가 가능했거나 가능한 공간이다. 그리고 <메모리아>에서 저장장치-안테나의 관계를 사랑에 빗대고, <찬란함의 무덤>에선 젠지라가 식물인간이 된 군인을 발기시키거나, 젠지라 주변인들이 그녀의 걸음걸이를 용이하게 도와주는 것처럼, 불완전한 현재의 삶을 '부모처럼 아껴주는 사랑'으로 보완한다.

그 사랑이 동성애자 위라세타쿤에겐 결코 쉽지 않았기에, 또 다양한 시공간으로 자유로이 떠날 수 있어야 하는 전생 여행이 독재가 심해지는 태국에서는 차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위라세타쿤은 사랑과 여행이 가능한 이곳저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추세다. 그는 거기서 현세의 불완전함을 보완해 줄 사랑을 만나고, 잠재된 자신이자 전생인 타인들과 조우한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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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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