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가깝고도 먼 미지의 인체 ['인체해부도' #2]
너무나도 가깝고도 먼 미지의 인체 ['인체해부도' #2]
  • 이현동
  • 승인 2023.06.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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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해부를 구조의 해체로 보려는 인류학적 시도"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가장 미지의 세계인 '인체'는 스스로가 다루기엔 너무나 먼 우주이다. 상상만으로 가동될 수 있는 세계란 우주와 같이 멀기도 하지만, 반면 신체 내부와 같이 가깝기도 하다. 지구 너머 우주를 상상하고 가시화하는 사례로 조르주 멜리아스의 <달나라 여행>(1902), 스탠리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알폰소 쿠아론 <그래비티>(2013)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런스를 말할 수 있다면, 인체를 탐험하거나 직접 접근하는 영화는 그리 흔치 않다. 

일찍이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의 합작품인 <안달루시아의 개>(1929)에서 칼날로 눈알을 도려내는 장면이 있긴 했다. 다만, 그것은 실제가 아닌 편집 기술을 도입한 초현실주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신체의 내부는 여전히 영화에서 파편화되거나 불투명한 일부로 기능한다. 특수 분장과 기술력을 동원해 그로테스트하게 인체를 묘사하는 수많은 작품이 있겠지만, <인체해부도>(2022)와 같이 온전히 카메라의 힘을 의지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작품은 찾기 어렵다.

앞서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의 작품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1971)일 것이다. 법의학 병리학자의 부검을 수행하는 이 스탠 브래키지의 영화는 그 과정을 세세하게 드러내고, 시각성의 한계를 초월할 때 기억 이미지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실현에 옮긴 작품이다. 이에 영감을 얻은 작가인 영국-아르헨티나 출신의 영화감독 '제시카 사라 린랜드'는 돌고래를 부검하는 작품인 <Necropsy of a Harbour Porpoise>>(2015)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또한 유기체로 그 유사성을 공유할 수 있음을 첨언하였다.

<인체해부도>는 위 두 작품이 하지 못했던 요소를 포함한다. 초소형 카메라를 활용한 인체 내부 촬영과 병원에서 이뤄지는 대화, 그리고 마지막의 혼란스러운 그림과 함께 선보이는 장면 등의 모든 이미지는 인체 해부뿐만 아니라 그걸 응시하는 의식의 해체를 감행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도전적인 탐구 정신만을 성취의 전부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영화의 모든 몽타주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인체해부도>에서 나오는 질문은 해부에 있지 않고 '해체'에 있다.

 

ⓒ 영화 <인체해부도>

무엇을 해부하고 있는가

<인체해부도>는 프랑스 인류학자이자 예술가, 영화제작자인 '베레나 파라벨'과 하버드 감각민족학 연구소에서 함께 근무하는 '루시엔 카스탱-테일러'가 만든 장편 영화다. 인류학자이자 민족학 연구자답게 그들은 넓은 영역에서 촬영을 시도한다. 어선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바다와 인간' 사이를 긴밀하게 탐구한 <리바이어던>(2012), 미국의 게이 작곡가인 '디온 맥그리거'의 선정적이며 가학적인 꿈을 기묘하게 묘사한 작품인 <솜닐로퀴에스>(2017), 80년대 초 파리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살해하고 먹은 '식인종'의 이야기를 과감하게 추적한 작품 <카니바>(2018)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카메라는 특정 대상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두 감독은 인물과 생활환경이라는 탐구에서 시각성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실제를 재현하고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장르에 있어서, 카메라 구도에 따른 아방가르드적인 변용은, 단순히 장르로 소급되지 않고 '장르의 신화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영화의 제목이 '인체해부도'이지만, 영화에서 인체해부로 파생되는 요소는 단지 내부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주변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부를 감행하고, 구도 자체에서 틈입하는 의미의 변동을 추적할 때 이뤄진다. <인체해부도>는 단순하게 영화가 얼마나 '고어'적인가 혹은 뛰어난 '재현'이라 성찬 하거나 환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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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체해부도>

<인체해부도>를 처음 접한 관객이라면 카메라 구도를 당혹스럽게 여겼을 법하지만, 이전에 <리바이어던>을 접했던 관객이라면 구도의 유사성을 관측했을 것이다. 주로 협소한 수술실과 선박이라는 제한된 환경은 클로즈업 촬영이 강제되었음을 우선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협소하게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저변에는 클로즈업이 지시하는 부분이 전체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리바이어던>이 선박을 해부하는 영화였다면 <인체해부도>는 실은 병원해부도에 가깝다. <리바이어던>의 경우 선박 위에서 바쁘게 활동하는 어부와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이 바둥거리는 모습이나 선박 아래에서 술 한잔을 기울이며 일과를 마무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때 곳곳에 숨어 있는 선박생활의 모든 요소는 근접하여 관찰된다. 이는 <인체해부도>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다양한 수술 장면을 묘사한다. 5년 동안 350시간 분량의 영상을 모아 편집한 감독은 거의 모든 수술에 참여하고 촬영을 시도했다. '립스틱 카메라'로 몸 안과 몸 밖을 탐색하고, 그리고 적나라한 수술 장면이 계속해서 연결된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위해 배를 자르고, 출혈을 막고, 아이를 꺼내기도 하고, 기생충 제거를 위해 살과 살을 금속으로 봉합하는 장면과 손이 아닌 기계가 인체에 진입하여 수술을 감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수술 부위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설명조차 하지 않는 인체 내부는 무작위로 노출된다.

이때 관객인 우리는 '본다'라는 것에 멈추지 않고 영화 전체 몽타주가 어떠한 의미 작용을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인체해부도>는 단순히 인체를 다루는 시각뿐만 아니라 사회와 구조에 대해 어떤 논의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수술할 때 우리는 내부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의사 목소리를 자막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절단되어 있는 목소리는 생명의 존엄성과는 무관하게 구조에서 배제된 목소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몸 안에 꿀렁거리는 소리만이 디제시스 사운드로 작동한다. 또 수술 중 의사가 "악몽이야"라고 말한다거나, 간호사들이 자원 부족에 대한 불평이 들릴 때 이는 프랑스 의료계의 간호사 부족, 저임금, 과로 등으로 힘겨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 영화 <인체해부도>

감독인 파라벨은 "병원도 하나의 신체처럼 작동한다"(A hospital works as a body, too)고 말하기도 했다. 환자가 지나다니는 병원의 통로는 마치 동맥처럼 연결된 것처럼 보이고, 정신없는 낙서로 뒤덮인 지하 복도를 돌아다니는 경비원의 모습은 마치 병들어 있는 환자의 인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영화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는 장면이 있는데, 두 명의 노인이 정신 병동의 복도를 걸어가며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비극적인 시스템의 반복은 사람들의 말과 해부 장면으로 중첩된다. 이러한 혼란을 가중하는 외부와 내부 장면은 인체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반에 구조적 문제를 은연중에 드러냄으로, (인체)해부가 아닌 (병원 혹은 범국가적)해체를 전망한다. 이를 시사하듯 영화는 끝날 무렵 영안실에 누워있는 시체의 모습을 통해 해부의 결말을 선언한다.

이후 괴멸스럽지만 이를 더욱 묘연하게 만드는 건 바로 마지막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서 영화는 인체와 수술실과 병동을 하강하여 병원 밑바닥에 있는 '카페테리아'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현재 프랑스 대부분의 공립병원에 있는 이 공간은 식당으로 주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여기서 즐비한 에로틱한 프레스코화는 인류가 시작하고 나서부터 존재했던 번영과 존영의 방식이었던 섹스와 죽음이 양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과 환호 소리, 번쩍이는 조명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이 프레임에서 그들의 유일한 희락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인체해부도>가 결국 도달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후의 만찬을 외설적으로 패러디한 그림이 있는 장소이다.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1961)가 연상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모종의 풍자를 발견한다.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라는 신성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모든 행위는 어쩌면 신화화된 장소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아닐지. 더 나아가 인체를 해부하면서 발생하는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구조의 모순을 타계할 수 없는 어떤 절망감을 위안 삼기 위한 행위가 아닐지. 이 영화는 인체 해부를 '구조의 해체'로 보려는 인류학적 시도에 닿아 있다. 어쩌면 인체해부도의 도면은 해체의 가능성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의식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인체해부도
The Fabric of the Human Body
감독
루시엔 카스탱-타일러
Lucien Castaing-Taylor
베레나 파라벨Verena Paravel

 

공개 MUBI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5분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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