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와 지배 사이에서 ['인체해부도' #1]
치료와 지배 사이에서 ['인체해부도' #1]
  • 박정수
  • 승인 2023.06.1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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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서 인류의 살덩이는 도마 위에 오르는가"

'숭고'와 '불가항력', '루시앵 캐스팅-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 콤비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때 떠오르는 두 개의 단어다. 21세기에 가장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다큐멘터리를 연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항상 '무시무시한 대상'들을 영화로써 탐구한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리바이어던>(2012)은 거대한 괴물 그 자체로서의 '바다'를, <카니바>(2017)에서는 일본의 악질 식인마 '이세이 사가와'와 그의 쌍둥이 형제 '준 사가와'를 기록한다. 해당 작품들에서 테일러와 파라벨은 무한 순환하는 생태계와 인류의 거역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불가항력', 그 무시무시한 '숭고'를 포착했으며, 이를 가시화하는 형식을 골똘히 탐구한다. <리바이어던>에서는 인간의 개입 없는 순수한 바다의 역학을 불가항력적으로 반영하는 '고프로 카메라'를 이용했고, <카니바>에선 사악한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을 '아웃 포커싱'으로, 인간이 품고 있는 무시무시한 위해는 대상을 '거인'처럼 위압적으로 포착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반영했다.

이렇게 피사체와 카메라를 좌우하는 불가항력에 주목하는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오늘날 인류의 '의료 기술'이 가진 숭고한 힘을 분석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진보한 의료 기술은 인류의 '자유'를 위협한다. <인체해부도>에서 반복 포착되는 환자는 치매나 노환을 앓고 있는 노인들이나 정신병에 걸린 남자다. 이들은 '현재'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환자들은 소위 일반인들이 객관적으로 참여하는 외부 세계를 '이탈'한다. 이들은 물리적인 제약을 무시하고 현재와 현실의 '출구'를 찾아서 자신들이 '가고 싶은 시공간'이나 '되고 싶은 상태'로 빠져나간다. 즉, 현재나 현실이 부여하는 구체성에 얽매이지 않는 환자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환자들은 그 자유를 몸소 감당하기에는 유약한 노인들이다. 또 정신병 환자는 외부에서 무슨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그래서 노인들의 건강을 위해서, 환자가 일으킬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 안전과 건강을 명목으로 그들을 붙잡아둔다.

 

ⓒ 영화 <인체해부도>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그 명목을 의심한다. 의료를 명목으로 '자유 포기 각서'에 서명을 시키는 것이 아니냐며 말이다. 영화의 결말, 의료인들이 파티를 즐기는 장소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외설적으로 패러디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 그림에는 사람들의 나체가 묘사되었고, 남근이나 음부가 적나라하게 과장되었다. 성기를 과시하며 헐벗은 사람들은 '쾌락'을 즐기며 죄다 '미소'를 짓고 있다. 이들은 즐겁다. 이와 동시에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 이들의 쾌락 근처에는 항상 '해골'이 함께 그려져 죽음이 득실거린다. 당연하다, 쾌락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소모한다. 그만큼 미래로 이어질 생의 동력을 낭비하고, 즐거움을 대가로 죽음을 앞당긴다.

의료인들은 해당 벽화처럼 파티를 즐긴다. 의료인들은 분명 죽음을 유예하고 삶을 연장하는 직책을 몸소 맡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생을 길게 늘이는 의료인들이 죽음에 다가서는 쾌락을 즐긴다. 의료인들이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의료인들은 영화 내내 투덜거리고 불만이 많다. 일이 너무 많아서 지치고 피곤하다고, 미래를 염두 하면서 에너지를 비축만 하려니 삶은 불만족스럽다. 그 불만족스러웠던 삶이 비로소 에너지를 소모하고 현재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이로써 기쁨을 누리며 충만해진다. 물론 미래로의 연장을 거부하는 즐거움, 자유의 대가는 죽음을 앞당기지만, 어차피 삶은 피할 수 없는 죽음까지도 긍정해야 한다. 자유와 죽음 모두 다 누리고 긍정하는 것이 삶이다.

그런데 죽음까지 짊어지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환자들이다. 이들은 죽음을 짊어지기보다는 죽음을 밀어내야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와 쾌락을 유예한다. 분명 현대인들은 진보된 의료 기술의 수혜를 받으며 죽음을 유예하고, 더 긴 삶을 누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람을 구하고 살려야만 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노예가 됨으로써 죽지 못하는 존재, 건강을 위해서 쾌락을 누리지 못하는 '의료 기술의 도구'로 전락했다.

스페인 섹슈얼리티 철학자 폴 B. 프레시아도는 현대의 '의료 테크놀로지'가 '이분법적인 성 구분', '자본주의', '노동' 등 권력의 목적에 적합한 몸을 재생산한다고 지적하였다. 해당 주장처럼 <인체해부도>에서도 사회의 정상적인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환자가 되고, 이들은 정상인이 되고자 수술을 받거나, 이에 실패한다면 영화 내내 격리된다.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현대인들이 능동적으로 의료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고, 반대로 의료계에 붙잡혀서 지배를 당하는, 그럼으로써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의료 현장의 이면을 까발린다. 이로써 의료 기술과 인류의 관계를 재고한다. 그렇다면 의료 기술이 인류를 지배하는 여파는 무엇이고, 또 그들은 지배할 자격이 있는가.

 

ⓒ 영화 <인체해부도>

<인체해부도>에서는 의료인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기록한다.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가 의료인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본 작품에서 '감춰져' 있다. 의료인들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구도에서 몰래 그들의 수다를 엿듣는다. 설령 정면을 포착한다고 한들 이들의 얼굴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거나,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익명적'이다. 익명이 되어 본인에게 가해질 책임이 줄어드니 발화는 솔직하고 노골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촬영된 의료인들은 감상자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다. 물론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의료인들을 '악마화'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이들은 주어진 업무에 대해 투덜거리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묵묵히 수행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의료인의 집도 도중 예상치 못한 '출혈'이 발생하고, 이를 두고 '나이아가라 폭포'라며 농담을 한다. 또 환자를 위한 발화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한 발화를 내뱉고, 의식을 잃은 환자 앞에서 쑥덕거리기도 하며, 의사와 간호사는 이권을 두고 다투기도 한다. 그래서 환자를 기준으로 의료인들은 선과 악, 전문성과 허술함 모두 뒤섞인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진다. 수술대 위에 올라간 우리는 의료인에게 몸과 정신 모두 다 맡길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도 내 몸은 무사할 수 있을까? 그들 또한 온전히 타인을 보살피기엔 필연적으로 이기적이고 불안정한 인간이 아닌가?

더욱이 시술이나 수술 등 행위의 주체는 분명 의료인이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와 책임을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 쪽은 '환자의 육체'다.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가 의료인들을 '익명적'으로 처리하며 발생하는 여러 효과 중 하나는 신원이 노출되지 않는 그들이 책임에서 유리된다는 것, 행위에 따라 출혈이 발생하는 곳은 의료인의 '손'이나 그것이 잡고 있는 '기계'가 아니라, 행위가 닿은 환자의 속살임을 환기한다. 청각은 의료인의 발화로 가득하나, 시각은 환자의 체내를 포착한 영화의 숏도 행위와 책임의 이중적인 결합을 가시화한다. 즉 의료 행위의 책임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에 전가된다.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데, 행위자의 책임마저 전가되니 그들에게 자유는 허락되는가.

 

ⓒ 영화 <인체해부도>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에 더해서, 기계와 환자의 관계 또한 탐구한다. 영화에서 포착되는 인류의 신체는 '불순'하다. 체내 그 자체만을 순수하게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독립적인 신체가 아니라, '기계에 의한 체내'만 볼 수 있다. 체내는 MRI, X-레이, 초음파 촬영, 의료용 카메라 및 모니터 등 기계를 거쳐야만 포착된다. 해당 기기의 화질이나 촬영에 문제가 생겼을 시에는 포착된 체내 이미지도 변한다. 우리는 사실상 '기술'을 감상한다. 기술 없는 체내, 곧 순수한 인체의 속내는 볼 수 없다. 인체는 기술 선전의 수단이다.

해당 기계들은 본래 신체 기관의 용도나 목적을 뒤집는다. 일례로 '침전'되고 '퇴적'되는 신체 기관을 기계는 '갉아'낸다. '배출'하는 '장'에서 기계는 '삽입'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기관인 '동공', 그러나 기계에 의해서 동공은 '바라봐진다.' 사정하며 정액을 배출하는 남근, 그러나 남근은 무기력하게 기계가 삽입되기를 기다리고, 기계에 의해서 정액 대신 피를 쏟으며 축 처진다. 이렇게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신체 기관들의 본래 운동과 정반대인, 기계에 지배되어 역전된 무시무시한 운동을 영화 내내 부각한다. 건강을 위해서 기관들의 본래 용도가 뒤집힌다. 그럼으로써 삶의 역전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죽음을 긍정해야 하는 삶으로부터, 죽음을 부정하는 삶이자 생존이 목적이 된 삶으로, 이로써 그 삶을 가능케 하는 '의료 기술에 의한 삶'으로의 역전이 말이다.

 

ⓒ 영화 <인체해부도>

이렇게 의료 기술이 인류를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지위 역전을 고찰하는 <인체해부도>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주장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구성하겠다는 미명 하에, 자연과 분리된 문명을 세웠다. 그 시작은 자연의 양면적인 얼굴 중 잔혹함과 지배를 반성하며 주체적인 인류로 우뚝 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고 도구화하면서 자연의 '지배'를 고스란히 답습했고, 인간의 목적과 야욕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던 태도가 인간한테까지 이어져, '인류가 타 인류를 지배'하는 '야만'에 이르렀다. 특히 거룩한 문명의 업적으로서 인류의 삶에 빛을 밝힌다고 알려진 '계몽'을, 아도르노는 '폭력적'이라며 반박한다. 계몽은 인간을 밝히기는커녕, 인간을 계몽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로써 인간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문명과 계몽의 야만으로 점철된 인류사에서 본래 도마 위에 올라 칼로 잘리는 것은 '동물 고기'였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는 태반이나 탯줄, 절단된 유방 등 인간의 일부가 흡사 고깃덩이처럼 도마에 오른다. 물론 그 희생은 연구를 위해, 이로써 인류 삶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영화 속 환자들의 삶은 개선이나 진보와 거리가 멀다. 삶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자유롭게 스스로 자유와 죽음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환자들은 바로 그 삶을 누리지 못한다. 탈출한 환자는 다시 붙잡혀서 방에 갇힌다. 치매에 걸린 환자들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관리하는 말로 추정되는 '착하다'라는 자기 검열을 반복한다. 그렇게 자유를 빼앗긴 환자들은 수술대나 병실에 붙잡힌다. 수감된 인류 대신 움직이는 것은 그들을 연구하거나 치료한 바를 기록한 '보고서'로서, 인류를 반영한 '사물'이 인간 대신 움직인다. 또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땅을 뚫고 무언가를 건설하거나 캐내듯, 연구와 보고서를 위해서 인류의 몸은 착취당하던 대지로 전락해 '뼈'는 깎이고 진보한 기술은 그 자리에 '기념비'를 건립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인류의 살덩이는 도마 위에 오르는가.

그래서 영화에서는 '망자'가 '산자'와 구분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죽음이 가까워진 환자들을 다시 삶으로 인도하고, 망자를 산자처럼 가꿔주기에 망자가 산자처럼 보인다. 이와 동시에 사후경직된 망자의 모습과 무기력하게 축 늘어진 환자의 모습이 영화 내내 구분되지 않는다. 의료 기술에 저당 잡힌 환자들의 목숨은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다. 의료 기술의 목표를 위해 건강을 유지하고 죽음과 유리되어 관리되므로, 그 과정에서 죽음과 밀착한 쾌락을 즐기는 의료인들과 달리 자유를 누릴 수가 없으므로.

 

필모그래피 내내 '거대한 것'들을 기록한 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오늘날 불가항력적인 의료 기술의 막대하고도 음험한 힘을 <인체해부도>에서 포착한다. 이는 아주 무시무시하고도 으스스하여 감상자를 공포에 빠트린다. 공포는 분명 육중하고도 음험한 미의식에 상응하는 숭고의 근원이나, 이번 작품만큼은 공포가 숭고로 승화되지 않는다.

공포의 피해가 감상자에게 직접 미치지 않을 때, 파괴적인 에너지를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숭고로 승화되는데, <인체해부도>의 공포와 불안은 감상자와 유리되어 있지 않은, 잠재된 미래에서 비롯하기에 현실과 별개로 여기기가 어렵다. 그 에너지를 직접 맞닥뜨려야 할 것 같은 공포에 자꾸 몸이 찌릿찌릿하고 오금이 저린다. 이렇게 생생하고 밀접한 공포는 내가 직접 처해야 하는 의료 기술을 향한 실제적인 의심과 반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류가 의료 기술에 불가항력적으로 지배되지 않고,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영화 <인체해부도>

인체해부도
The Fabric of the Human Body
감독
루시엔 카스탱-타일러
Lucien Castaing-Taylor
베레나 파라벨Verena Paravel

 

공개 MUBI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5분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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