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침묵의 시간, 비밀의 시선
[Critique] 침묵의 시간, 비밀의 시선
  • 이상용
  • 승인 2023.06.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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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혹은 <말없는 소녀>

콤 바이레드 감독의 <말없는 소녀>(2022)는 장편 데뷔작이자 202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제너레이션 k플러스 섹션에 소개되어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여러 부문 중에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살폈던 프로그램 중 하나가 제너레이션 부문이다. 다수의 작품이 성장기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다 보니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영화들이 선택될 때가 많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제너레이션'은 현재 '제너레이션 k플러스'와 '제너레이션 14플러스'로 나뉘어져 있다. 이 구별은 관람 등급(전체 관람가, 14세 이상 관람가인)을 토대로 관객과 심사위원 구성을 위한 기준이 된다. 각 부문에는 해당 나이의 심사위원들이 '수정곰상'을 선정한다. k플러스는 만 11세에서 14세의 심사위원이 수정곰상을 선정하며, 만 14세에서 18세의 청소년 심사위원은 '14플러스' 부문의 수정곰상을 선정한다. 단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편 수정곰상도 선정한다. 이러한 방식은 유럽의 여러 어린이 영화제가 운영하는 '어린이 심사위원'과 유사하다.

성인으로 구성된 '인터내셔널 심사위원'은 별도로 마련되어 '대상'을 선정한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9)는 '14 플러스' 부문에서 상영이 되었고, 인터내셔널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대상 수상작이었다. <말없는 소녀>는 'k플러스' 부문의 상영작이었다. 어린이 심사위원들이 수정곰상을 주는 대신 '특별언급'을 수여하였고, 인터내셔널 심사위원들이 대상을 수여하였다. <말없는 소녀>에 관한 국내의 기사들(대부분 홍보자료를 재인용한 것에 불과하겠지만)은 베를린 국제영화제 2관왕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이 말만으로는 애매할 때가 있다.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문에 상영이 되었고, 어떤 심사위원들이 선정했는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영화의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제너레이션 섹션에 상영되는 영화를 두고 어린이 심사위원단과 인터네셔널 심사위원단의 선택은 종종 갈리는데, <말없는 소녀>는 두 진영 모두가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작품의 수용폭을 짐작하게 한다.

k플러스 부문에서 소개되었던 대표적인 한국영화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6)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제너레이션 부문에 한국독립영화들의 상당수가 초청을 받아왔는데, 윤가은 감독의 경우 단편 <콩나물>(2014)로 'k플러스' 부문에서 상영한 바 있다. 심지어 이 단편으로 수정곰상을 받기까지 했으니 윤가은 감독이 매혹되어 있는 아이들의 세계를 감안하면 베를린 제너레이션 프로그램과의 인연은 특별해 보인다.

 

ⓒ 슈아픽처스

<말없는 소녀>의 주인공은 9살의 소녀 코오트다. 소녀는 새로 태어날 아이로 인해 집 안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엄마의 선택에 따라 친척 집에 보내진다. 그런데 클레어 키건이 쓴 원작 소설의 제목 그대로 코오트가 맡겨지는(foster) 상황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데, 코오트는 숀과 아일린 부부의 보살핌 아래 집안일과 농장일을 배우며 여름 한때를 보낸다. 그것은 여태껏 부모에게서 받은 것보다 더 깊은 사랑과 신뢰를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또한, 코오트에게는 말하지 않음에 대한 다른 의미를 배우는 계기가 된다. 

 

침묵의 가치와 의미

<말없는 소녀>에 대한 많은 리뷰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돌봄'이다. 학교에서도 외톨이로 지내거나 누나의 친구들에게 '괴짜'라고 불리는 소녀의 모습은 영화 초반부터 강조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벌판에 누워있는 코오트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언니들이 코오트의 이름을 부르지만 반응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서야 일어나는 소녀가 보인다. 하지만 조용히 집으로 들어왔다가 인기척을 느끼자, 소녀는 침대 아래 숨어든다. 방으로 들어온 엄마가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 "너 신발에 흙 묻었어." 하지만 코오트를 보거나 끌어내는 일없이 엄마는 나가버린다. 코오트는 말없이 누운 채로 있다. 영화의 제목이 뜬다. "말없는 소녀"

이어지는 장면들은 등교를 준비하는 집 안의 아이들, 학교에서의 생활하는 코오트의 모습 등이다. 수업 시간에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코오트, 점심시간에 옆자리에 두고 간 우유를 훔쳐먹다가 아이들이 책상을 치는 바람에 쏟아진 우유가 옷에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치마를 움켜쥔 채 복도를 지나 학교의 담을 넘어 홀로 들판을 걷는 코오트가 보여진다. 아빠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도 있다. 아빠는 펍에 들러 술을 한잔한다. 코오트는 말없이 한쪽 테이블에 앉아 있다.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도중에 아빠가 걸어가던 여자를 태운다. 아빠와 여자 사이에 대화가 오간다. 두 사람은 아는 사이다. 그런데 대화가 뭔가 미묘하다. 하지만 코오트는 여자를 흘깃 바라볼 뿐 침묵을 유지한다. 한밤중에 깨어난 코오트는 화장실을 가려다가 부모의 대화를 엿듣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가 대화 속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코오트를 맡겨 두기 위해 차로 세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친척집으로 출발한다. 운전하던 아빠는 축구 경기 라디오를 들으며 '워터퍼드'를 언급한다. 아빠는 이 경기에 도박을 한 모양이다. 코오트가 가는 곳도 이 지역이다.

원작 소설에서 코오트가 가는 곳은 '웩스퍼드'다. 이름이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두 지역(Waterford, wexford)은 다른 곳이다. 자동차로 한 시간이 안 되게 떨어져 있다. 각색의 연유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장소 헌팅의 문제때문인지,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해변이 워터퍼드에 있는 탓인지 등), 여름방학 동안 코오트가 맡겨지는 지역이 아일랜드 남동부에 위치한 해안가 마을이라는 점은 중요해 보인다. 'ford'는 작은 항구에 해당하는 '나루'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루는 '강이나 좁은 바다에서 배가 닿고 출발하는 얕은 곳'을 가리킨다. 영화 중반 이후 코오트가 해안가에서 숀과 나누는 대화의 깊이와 풍경을 생각하면 아일랜드의 시골 해변가라는 장소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슈아픽처스

농가에 도착하자 숀과 아일린 부부가 코오트를 맞이한다. 세 명의 언니들과 태어날 동생 사이에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던 코오트는 아일린의 따뜻한 안내를 받는다. 아일린은 코오트에게 방을 안내해 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며, 우물을 알려준다. 상대적으로 숀은 코오트를 살갑게 대하지는 않는다. 첫날 코오트가 잠을 자러 간다는 아일린의 말에 등을 돌린 채 "잘 자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일린과 숀의 위치가 서서히 변화를 일으킨다. 숀은 코오트에게 몰래 쿠키(마카롱처럼 보인다)를 건네주기도 하고, 새 옷을 사줘야 한다며 시내에 데리고 가기도 한다. 결정적인 변화는 코오트기 노부부를 따라 생애 처음으로 장례식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이다. 장례식장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코오트는 '우나'의 제안으로 장례식장을 나와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우나는 코오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일린의 집에서 무엇을 먹는지, 마가린을 쓰는지 버터를 쓰는지, 아일린이 어떤지 등을 상세하게 묻는다. 코오트는 최대한 단순하고 조심스럽게 답을 한다. 그런데 코오트의 말이 답답하다는 듯 우나가 이 집의 비밀을 폭로한다. 그 말을 들은 코오트는 특별히 놀란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나의 집에 도착한 직후 숀이 바로 나타난다. 황급히 온 느낌이다. 황급히 들어온 숀에게 우나는 자신들도 지금 막 도착했다며 "애가 영 말이 없더라(A quiet girl, this one)."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화의 제목을 담고 있는 말이다. '콰이어트 걸.' 이 지적은 소녀의 말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나의 말을 들은 숀이 바로 대꾸한다. 하지만 "할 말은 하는 아이지(She says as much as she needs to say)." 이 번역은 다음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필요한 만큼만 말하는 아이지."

<말없는 소녀>는 노부부를 만나 제대로 된 돌봄을 받는 것이 전체인 영화가 아니다. 친부모 밑에서 말하지 못하던 소녀가 노부부의 집에 와서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억압'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  불과하다. 오히려 중요한 한 것은  우나가 코오트를 두고 "말없는 소녀"라고 부르는 데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숀은 필요한 말만 하는 아이라고 항변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없는 소녀'를 추궁하는 것은 숀과 아일린이다. 우나의 집을 나와 차로 온 코오트에게 두 사람은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캐묻기 시작한다. 코오트는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우나를 나쁘게 말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아주 많이는 아니고요, 조금요". 하지만 계속되는 질문에(최소한 이 장면에서 아일린은 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들었던 이 집의 비밀을 말한다. "두 분께 아들이 있었는데, 개를 따라 수렁에 들어갔다가 죽었다고 했어요. 지난 한달간 제가 그 애 옷을 입었고요." 그 말에 아일린은 충격을 받는다.

 

ⓒ 슈아픽처스

<말없는 소녀>는 '말'의 충격에 관한 영화다. 그 말은 침묵하던 비밀과 관련되어 있고, 이 집안에서 아들의 사고는 말할 수 없던 것이었다.

아일린은 코오트가 도착한 첫날 우물에 가자고 한다. 코오트는 거기에 가는 것이 '비밀'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일린은 "집에 비밀이 있다는 건 부끄러운 게 있다는 건데"라면서 자신의 집에는 비밀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노부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침묵해야만 했고,  코오트의 옷이 든 가방을 아빠 존이 도로 가져가 버렸음을 알고는 옷장에서 꺼낸 죽은 아들의 옷을 입혀왔다.

우나는 수다쟁이 이웃일 수는 있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아들의 죽음은 이 집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의 원인이었다. 숀이 처음에는 코오트와 거리를 두며 대한 것도, 숀이 코오트의 옷을 새로 사주자고 했을 때 아일린이 이층에 올라가 눈물을 닦아낸 것도, 우나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코오트가 말할 때 아일린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도 모두가 '비밀'을 담아 둔 채 침묵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말없는 존재는 코오트가 아니라 노부부다.

그런데 침묵하며 살아온 노부부 앞에 코오트가 나타난다. 이들에게 코오트는 죽은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며, 자신들의 입을 열게 하는 존재가 된다. 코오트를 통해 아이가 자는 법, 아이가 먹는 법, 아이가 살아가는 법에 대한 말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코오트를 통해 아들의 죽음이라는 침묵의 문이 열린다. 이웃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내에서 코오트의 새 옷을 살 때 상점 직원은 "좋은 엄마를 뒀구나."라며 코오트에게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코오트가 아일린을 바라본다. 아일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약간 미묘한 몸짓으로 코오트를 바라본다.

시내의 거리에서 나누는 대화들도 모두 아이 혹은 코오트에 관한 것이다. 유모차에 있는 아이를 보며 아일린과 젊은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여성이 코오트가 누구인지를 묻는 장면이 지나간다. 영화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여인은, 원작 소설에서는 눈이 송곳 같은 여자로 묘사된다.

"우리는 눈이 송곳 같은 여자도 만난다. 그녀는 내가 누구 아이냐고, 어느 집 아이냐고 묻는다." 대답을 듣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 그래도 말동무가 되잖아요.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는 거에요." 

이 대사는 꽤 의미심장한데 자막은 "적적하지 않을 테니 얼마나 좋아"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뒷말은 생략한 것이다. 영어 자막은 "Well, isn't company for you all the same, God help you."다. 삭제된 "신이 도와주는 거에요."는 의례적인 인사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 말의 등장과 의미는 사소하지 않다. 코오트의 등장으로 노부부는 자신들이 닫고 있던 문을 열고 나오는 계기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

무엇보다 "God help you."는 눈이 송곳 같은 여자의 입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이 아니었다. 코오트가 도착한 첫날 밤 잠자리를 봐주며 아일린은 잠든 소녀를 보며 나지막이 탄식한다. "God help you." 코오트는 (신의) 돌봄을 필요로 하고, 그 (신의) 돌봄은 노부부에게도 마찬가지다. 

코오트는 돌봄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이 인간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가 된다.  그 결정판이 장례식에서 만난 이웃 아주머니 '우나'와 그녀가 한 말들이었다. 우나의 집으로부터 돌아온 직후 아일린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간다. 이 모습을 지켜본 숀은 코오트에게 코트를 건네주며 밤 산책을 가자고 제안한다. 바닷가에 밀려온 잔해들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숀은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끔은 이상한 일이 생기기도 하잖니. 오늘 밤 네가 이상한 일을 겪은 것처럼. 아일린한테 악의가 없었던 것은 확실해. 아일린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으려 하고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가끔은 실망하기도 하지. 아무말 안 해도 돼. 언제나 그걸 기억하렴.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었단다."

숀의 말에 대해 코오트트는 침묵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다와 바다 위에 반짝이는 배들의 불빛을 바라본다. 숀은 침묵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코오트에게도 오늘 겪은 일에 대해, 아일린의 실망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말하지 않을 권리와 자유가 중요하다고 일러준다. 말없음의 권리는 단순히 억압받은 개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친밀한 인간들 사이의 이해와 배려의 키워드로 변환이 되고, 코오트는 우나와의 대화에서, 노부부와의 대화에서 이를 보여줌으로써 말하지 않음의 의미를 보여준다. 자신의 집에서 코오트는 신경질적인 부모 아래에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던 소녀였지만,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보여주는 것이다. 

 

ⓒ 슈아픽처스

그것은 코오트만이 보여준 것이 아니다. 소녀 또한 말없음의 의미를 배운 것이다. 농장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코오트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이동의 피로 때문인지 낯선 곳에 온 탓인지 이불에 오줌을 쌌다. 코오트는 자신의 집에서 그러했듯이 혼날까봐 두렵다. 코오트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일린은 "이것 좀 봐. 매트리스가 오래되어 푹 꺼져 버렸네. 너를 왜 여기에 재웠을까."라며 재빨리 이불을 정리한다. 혼날 줄 알았던 코오트가 고개를 돌려 아일린을 바라본다. 실수를 혼내거나 꼬집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 상대를 향한 애정과 신뢰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아일린은 그러한 모습을 지닌 어른이다. 하지만 아일린이 보여준 침묵의 이해와는 달리 이 집에는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침묵이 있다. 침묵의 이중성 속에서 코오트는 숀의 친절한 말을 통해, 비록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말 혹은 침묵의 새로운 가치를 배운다. 침묵은 단지 억압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배려와 인내심 그리고 사랑과도 관련을 맺음을 보여준다. 클레어 키건이 쓴 원작의 문장을 빌리자면,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않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맡겨진 소녀』, 다산책방, 28쪽)

영화가 나아가며 보여주는 것은 침묵이 주는 배려와 가치다. 그리고 이러한 말없음은 영원한 침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소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욕망을 보여주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집으로 돌아온 코오트는 부모와의 대화를 들으며 또다시 침묵한다. 잠시 후 돌아가는 아일린과 숀을 보게 된다. 코오트가 일어난다. 그리고 농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이제 코오트는 말없는 소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길로 향한다. 영화와 원작 소설에 동일하게 쓰인 외침은 "아빠! 아빠!"다. 아빠는, 정확히 두 번 반복된다. 이것은 영화의 장면과 컷의 나눔을 통해서도 전달되지만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원작 소설의 문장들이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맡겨진 소녀』, 98쪽)

영화를 본 이들은 짐작할 수 있듯이 경고를 보내는 아빠와 나중에 부른 아빠는 다른 아빠다. 같은 말이지만, 같은 침묵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두 아빠도, 두 침묵도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그저 말할 수 없었던 개인(소녀)을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가 아니라 말하지 않음으로써 개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물에 빠진 탓에 감기 증세를 보이는 코오트에게 부모는 그녀가 "아무일도 없었어요."라고 말하자 집요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지만, 코오트는 철저히 우믈에 빠졌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한다. 그 말이 불러일으킬 오해와 분란을 일으키기 않기 위해서다. 침묵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있음을 여름 방학 동안 배우게 된 탓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말없는 소녀>는 단지 억압의 침묵이 아니라 '침묵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영화로 나아간다.

 

ⓒ 슈아픽처스

두 번(반복)의 형식

콤 바이레드 감독의 <말없는 소녀>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의 내용 대부분을 따라가지만, 초반 20분가량 코오트의 집과 학교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영화를 위해 새롭게 부가하였다. 이러한 각색을 통해 영화는 소녀가 경험하는 반복적인 상황과 변화를 자연스럽게 담아내고자 한다. 전체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두 번의 반복은 앞서 언급한 '아빠'를 부르는 장면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뿐만 아니라 카메라에 의해서도 두 번의 아빠를 부르는 장면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는데, 존과 숀이라는 두 아빠의 차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전체의 반복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온전히 영화에만 등장하는 장면 중의 하나는 코오트가 학교에서 책을 읽는 장면과 노부부의 집에서 숀의 도움 아래 책을 읽는 장면이다. 코오트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애초부터 책을 읽지 못하는 소녀이니 농장에 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앞에서 읽는 책과 뒤에서 읽는 책의 종류가 다르다. 그것은 교과서인가 『하이디』인가 하는 종류에 따른 차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에 있다. 앞에서 읽는 책은 아일랜드어(게일어)를 읽는 장면이고, 『하이디』는 영어로 쓰여진 책을 읽는 장면이다. 본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가 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말없는 소녀'」에 설명되어 있듯이, 코오트의 어머니가 쓰는 언어는 '아일랜드어'이고, 아버지가 쓰는 언어는 영어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코오트는 영국인 아버지와 아일랜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라는 사실을. 영화를 본 관객들은 알 수 있겠지만, 영어 자막이 나오는 부분들은 인물들이 게일어로 말하는 장면이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설정을 한 것은 콤 바이레드 감독의 분명한 선택이다. 영화 초반 아빠가 걸어가던 여자를 태울 때 두 사람이 쓰는 언어는 모두 '영어'다. 코오트의 입장에서 낯선 여자와 아빠의 대화는 어딘가 비밀스러우며, 남녀 사이의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남녀의 은밀함 이상으로 강조되는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언어로 대화한다는 사실이다.

두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코오트는 게일어도, 영어도 익숙하지 않은 혼란스러운 존재이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빠를 따라 세 시간에 걸쳐 남아일랜드의 나루터(ford)가 있는 지역으로 온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일랜드어만 쓰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장소로 이동해 왔음을 지시하기도 한다. 지난번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를 다루면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아일랜드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한 바(「내전은 어떻게 이야기의 내면이 되는가」) 있는데, 북아일랜드는 영국이 물러나자마자 일찌감치 영국령을 선택했다. 이와 달리 남아일랜드는 영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항의 역사를 펼쳐왔다. 영국인 아빠와 아일랜드 엄마의 이야기라면, 그사이에 태어난 한 소녀가 아일랜드어도, 영어도 능숙하게 읽지 못하는 이야기라면, <말없는 소녀>가 은밀하게 건드리고 있는 것이 역사와 언어의 문제임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소녀가 말없는 것은 영어도, 아일랜드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모두가 게일어를 쓰는 남아일랜드의 농장 지역에서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다. 

원작 소설에 설정된 1981년은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꽤 중요한 해였다. 1981년 3월부터 IRA 재소자들은 당시 영국을 이끌던 마거릿 대처에게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 사건은 같은 해 10월 3일이 되서야 끝이 났다. 소녀 코오트가 여름 한때를 보냈던 시기는 단식 투쟁이 한참이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리고 이 소재는 여러 영화로 다뤄지는데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노예 12년>으로 잘 알려진 스티브 맥퀸의 데뷔작 <헝거>(2008)다. 단식투쟁을 주도한 보비 샌즈는 단식을 시작한지 66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7개월 후 단식투쟁이 중단될 때까지 9명이 사망을 한다.

<말없는 소녀>가 내건 말없음의 문제는 단식 투쟁과도 연결된다. 스티븐 맥퀸의 영화에서 단식 투쟁에 선 인물은 말이 없거나 말할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침묵은 비폭력적인 저항의 역사가 된다. <말없는 소녀>가 이러한 분석을 가능하게 할 만큼, 정치와 역사를 밀고가는 영화는 아니지만 한 소녀가 경험하는 두 세계, 두 아빠(정치적 의미에서 두 아빠이기도 하다)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는 아일랜드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셈이다.

 

ⓒ 슈아픽처스

물론, 더 많은 반복은 소녀 개인을 둘러싼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다. 농장에서 첫날 밤을 보낸 후 오줌을 싼 코오트에 대해 아일린이 침묵하는 장면과 대비되는 것은 영화 초반 교실 장면에서 등장한다. 옆자리에 놓고 간 우유를 몰래 따라 마시던 코오트는 남자아이들이 책상을 치는 바람에 옷에 우유가 흘러버린다. 이러한 두 장면의 대비(반복)는 분명히 의도된 연출이다. 그것은 개인의  죄의식 문제와 관련을 맺는데 '훔친 우유 대 야뇨'를 대비시키면서 코오트의 두려움(죄의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옷에 우유가 묻은 채 복도를 걸어가는 코오트를 향해 코오트의 친언니와 친구들은 '괴짜' 운운하며 키득거린다. 하지만 아일린은 오줌을 싼 코오트의 일을 덮어주며 침묵한다.

부정적인 반복도 있다. 그것은 강박적이거나 압박적인 세간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 집의 비밀을 폭로한 우나 아주머니의 진술은, 영화 말미에 코오트가 집으로 귀가하였을 때 아빠를 통해 또다시 반복된다. 코오트가 감기에 걸려 몇 일 누워있었다고 숀이 말하자 "애 제대로 봐야죠. 전적도 있으면서."라고 아빠는 말한다. 본인들이 농장에 보낸 것은 돌볼 수 없기에 한 선택이면서도, 그들은 노부부의 돌봄을 보지 않은 채 재채기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세간의 반응이다.

코오트가 걷거나 뛰는 장면들도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우유가 묻은 채로 집으로 향할 때 코오트는 홀로 걷는다. 집에서 걷는 장면의 대부분은 혼자다. 그런데 노부부의 집에서 우물을 향해 걸을 때 손을 잡는 모습이 보여지고, 아일린과 나란히 걷는 장면이 등장한다. 농장의 청소를 도우며 숀과 친밀해지자 숀은 코오트에게 대문이 있는 집 앞 우체통까지 달려보라고 한다. 기록을 재는 숀의 모습과 기쁘게 달리는 코오트의 모습이 반복된다. 홀로 걷던 코오트가 어느덧 에일린과 함께, 숀의 지켜보는 가운데 달린다. 같은 걷기와 달리기여도 그 차이는 크다. 그리고 이것은 끝내 코오트가 단독적으로 노부부를 향해 달리게 만든다. 혼자 달리는 것이기는 하지만 숀과 함께 했던 속도 그대로, 숀과 에일린을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면서 달려가는 향해 코오트의 모습에는 간절함과 소망이 있다. 그것은 "아빠, 아빠"라는 두 번의 아빠와 함께 이뤄진 코오트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대목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반복은 우물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우물로 향하는 장면은, 아일린이 코오트의 머리를 빗겨주며 숫자를 세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면서 손을 잡고 우물로 가는 장면으로 확장되고 연결되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마치 우물로 향하는 것이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행보인 것처럼. 하지만 이 반복은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물이라는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집안에서 반복된다.

개학을 맞이하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코오트가 잠시 동안 홀로 남겨졌을 때, 급작스러운 이웃 송아지의 출생으로 아일린과 숀은 도움을 주기 위해 집을 나선다. 홀로 남겨진 코오트는 아일린이 돌아오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그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우물로 향한다. 아일린이 그랬듯이 양동이로 가득 물을 퍼올리는 순간 불길한 이미지가 화면 가득 채워진다.

이 영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코오트가 물을 긷는 장면은 이미지의 단순한 반복인 동시에 이 집에 깔려 있는 역사의 반복이고,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자면 '죽음 충동(death drive)'이라고 부를만한 강박의 반복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비밀 운운하며 처음으로 우물에 도착했을 때, 아일린은 우물을 보며 코오트를 향해 "조심해야 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느새 현실이 되고, 영화의 절정에 이르러 코오트 홀로 우물로 향하는 상황에 처한다. 위기는 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집에서 반복되는 역사와 강박적인 죽음의 충동에 있다. 평온한 일상 가운데에도 언제든 죽음의 강박이 끼어든다. 그것은 섬뜩하다. 단지 죽음을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라 이토록 평화로운 오후를 언제든 뒤바꿀 수 있는 거대한 충동이 일상과 자연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죽음의 강박에 대해 좀 더 내밀한 역사적인 독해도 가능할 것이다. 1980년대 초반을 지배하고 있던 아일랜드의 일상성에 관하여. 그것이 정치와 저 멀리 떨어진 시골 농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일상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던 죽음의 공기에 관하여. 

영화 전체의 반복들은 소녀의 일상을 보여준다. 식사 장면의 반복, 농장을 청소하는 장면의 반복, 편지를 받는 장면 등. 그런데 이러한 반복은 단지 어제와 같은 오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안을 동반한다. 대표적인 예가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봉투를 발견하는 코오트의 모습이다. 최소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다소 강박적인 반복(요즘은 루틴이라고 말해지는) 속에 놓여져 있고, 그것이 깨어질 때 종종 불안을 경험한다. 이야기는 이러한 균열을 따라가는 영역이다. 코오트의 일상이 평온해질수록 관객들이 긴장하게 되는 것은 여름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코오트가 달리기 시작할 때 뭔가 벅차오름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소녀의 걸음이 불안을 메우고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코오트가 숀의 품에 안기는 순간, 엄습한 불안은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숀은 코오트를 끌어안고, 차 안에서는 아일린이 울고 있다. 그들 사이에는 말이 없다. 침묵 속에 밀려와버린 행복감을 영원히 봉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말없는 소녀>는 이 침묵을 향해 달려간다. 

 

ⓒ 슈아픽처스

새로운 소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 침묵과 관련하여 소녀의 이해 정도를 보여주는 문장은 해변가에서 숀과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이다.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던 바다로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두려워하고,아저씨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말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알아내려고 사람을 믿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 맡겨진 소녀』, 73쪽) 

코오트는 우나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노부부와 대화를 나눴던 일을, 숀이 말한 침묵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밤의 여러 상황과 말은 코오트를 성장시킨다.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코오트에게 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를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에 대해, 서로에 대해, 침묵에 대해, 이상한 밤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새로운 불빛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말한다. "저기 보여요."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맡겨진 소녀』, 75쪽)

영화에서 두 불빛 사이에 새로운 불빛을 발견하는 것은 아저씨가 아니라 코오트다. 소설처럼 코오트를 끌어안아주는 장면은 없지만(대신 코트의 단추를 다시 채워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코오트를 적극적으로 안아 준다.), 보다 적극적으로 소녀의 발견과 변화를 강조하여 각색했다. 원작의 제목인 '맡겨진 소녀'가 다분히 수동적인 소녀의 위치를 드러낸다면 '말없는 소녀'는 소녀의 존재성을 보다 더 강조하는 느낌이다. 심지어 소설에서는 소녀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재하는 이름으로 어른들 사이를 누빈다.

그에 반해, 영화는 '코오트'라는 이름을 어찌나 반복하는지 놀라울 정도다. 영화 전체를 구성하는 일상의 반복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제와 달라진 코오트 혹은 세계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숨겨진 제목을 한 번 더 상상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제목은 『맡겨진 소녀』도, <말없는 소녀>도 아닐지 모른다. 최소한 우리가 마지막에 보게 되는 것은 '달리는' 혹은 '달라진' 소녀다. 그것은 1980년대의 이야기도, 아일랜드의 해안마을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삶의 보편성과 변화를 갈망하기 시작한 한 소녀의 성장담이다.

 

※ 추신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은 6월 3일(토요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 '이상용의 씨네모어' 강연을 토대로 삼았습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슈아픽처스

말없는 소녀
The Quiet Girl
감독
콤 바이레아드
Colm Bairéad

 

출연
캐서린 클린치
Catherine Clinch
캐리 크로울리Carrie Crowley
앤드류 베넷Andrew Bennett
마이클 패트릭Michael Patric

 

배급|수입 슈아픽처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5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05.31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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