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말 없는 소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말 없는 소녀'
  • 박정수
  • 승인 2023.06.0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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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이 바라는 이데아를 상상하며"

잉글랜드는 오랜 시간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착취했다.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고자 오랜 시간 핍박해왔지만, 아일랜드인들은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다. 이는 영화에도 이어진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화감독들은 잉글랜드로부터 지켜낸 아일랜드만의 언어, 문화, 역사 등 고유의 것을 자신들의 작품에 반영한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말없는 소녀>로 각색하며 데뷔한 아일랜드 영화감독 '콤 베어리드'가 한 예이다. 

콤 베어리드는 이전 단편 작업을 통해 '아일랜드-잉글랜드'의 관계를 묘사해왔다. 그는 '가족의 일상'을 주로 포착하는데, 일상 속엔 '잉글랜드의 영향'이 스며있고 이에 따라 가족은 '세대 별로 분열'된다. 아일랜드의 기성세대는 잉글랜드에게 맞선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권리 투쟁하는 그들에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굴욕시킨다. 이와 반대로 이들의 수난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자랐음에도 자녀 세대는 영어를 사용하며, 잉글랜드 체계 내로 편입을 원한다. 베어리드는 이러한 잉글랜드에 의한 아일랜드의 이러한 분열과 상처가 봉합되기를 희망하는 듯하다. 그는 본래 정치적인 색채가 거의 드러나지 않던 『맡겨진 소녀』에 정치성을 가미한 각색으로 아일랜드인의 일상에서 스며들어있는 잉글랜드의 만행을 그려낸다.

 

ⓒ 슈아픽처스

<말없는 소녀>의 주인공 '코오트'는 혼혈이다. 코오트의 어머니 '메리'는 아일랜드인이지만, 영어를 쓰는 아버지 '댄'은 잉글랜드인으로 추정된다. 각기 다른 두 민족의 결합은 자의였을까. 베어리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결합이 강제였다고, 잉글랜드에 의해서 아일랜드가 혼혈로 '전락'했을 거라고 암시한다.

코오트는 자매가 많다. 댄과 메리는 이들을 다 건사하기 벅차서 코오트를 아일린의 집에 보낸다. 가장 댄은 가정을 책임지지 않는다. 번 돈을 경마나 도박, 유흥에 모조리 탕진하여 생활비가 모자람에, 코오트는 학교에서 타 학생의 우유를 훔쳐 마실 정도다. 빈궁한 집안을 나 몰라라 하는 댄에게 메리가 항의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사와 양육이 벅차서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잊을 정도인데도 그녀는 또다시 임신했다. 그녀는 임신을 선택할 수 없는 것 같다. 오직 댄에 의해서 그녀의 임신이 결정된다. 코오트의 남매들이 송아지의 임신을 논의하는 대화에서도 임신과 출산, 탄생의 '강제성'이 암시된다. 부푼 메리의 배는 자신의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아기가 계속 울어댐에 시간조차 그녀의 것이 아니다. 돌보기 벅찬데도 불구하고 메리를 계속 임신시키는 이유는 댄에게 자녀는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식비를 쓴 만큼 노동으로 돌려받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베어리드는 잉글랜드의 오랜 아일랜드 지배와 착취가 미시적인 영역에 미친 여파를 보여준다. 잉글랜드가 남성 가장이라면 여성인 아일랜드는 그들의 지배하에 놓였고, 아일랜드는 영어를 쓰는 '일꾼'들을 더 많이 양성하는 역할이 강제되었다. 그 와중에 잉글랜드 남성은 젊은 잉글랜드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 잉글랜드의 야욕과 재미를 위해서 희생되는 아일랜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된다.

 

ⓒ 슈아픽처스

코오트는 '보이지' 않는다. 도입부,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맑고 청아하게 울어대는 새는 시야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존재감은 명확하다. 새는 자신의 존재를 진실하고도 우렁차게 노래한다. 이윽고 새소리 사이에 '코오트'를 부르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이는 새소리와 상반된다. '코오트'라 외치는 아이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코오트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코오트를 찾는 이유 또한 부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다. 새와 달리 아이들의 입은 제 것이 아니라 부모를 대리한다. 그래서 코오트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드러나지도 않거니와, 코오트를 호출하는 아이들을 청각으로 유추하기 어렵다. 대신 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부모의 '불호령'이다.

그런데 코오트 또한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찾아 헤매는 코오트는 '부모에 의한 코오트'다. 코오트는 부모의 호명을 고분고분 따르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는 것처럼 부모의 호령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출에 응하지 않고 숨는다. 그렇게 숨어서 보호하는 것은 가족의 기대와 요구를 거부하는 '코오트 자신'이다. 그런데 이 또한 보여서는 안 된다. 눈에 띄면 제재를 당해, 주체적인 자신이 아닌 가족에 의한 코오트가 되기 때문이다.

이후 코오트가 침대에 용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깨어있는 동안 의식이 봉인한 본능과 감정을, 잠든 동안 이완된 무의식이 해방시킨다. 코오트의 무의식은 깨어있는 동안 내색할 수 없었던 '두려움'과 '공포'를 악몽으로 현현한다. 깨어 있는 동안의 코오트는 댄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폭압적으로 태워져 끌려다니고, 이후에는 동의 없이 아일린과 숀의 집으로 보내진다. 폭력적인 댄이 식구들의 행동과 표정을 모두 '얼어붙게' 만든다. 코오트는 댄의 외도를 목격했음에도 '침묵'해야 한다. 댄에 의해서 코오트는 영화 내내 두렵다. 그런 와중에 코오트의 무의식은 용변실수로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코오트를 호명하는 주체들은 솔직한 코오트를 바라지 않고, 용변실수하지 않는 코오트, 곧 두려움을 비밀로 숨기는 코오트를 바란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형식은, 양옆이 잘려 있어서 대체로 피사체가 중앙에서 '항상 잘 보일 수밖에 없는' 좁은 4:3 화면비다. 베어리드는 본 화면비에 코오트가 처한 환경을 반영한다. 일단 가족에게서 도망치는 코오트는 좁은 만큼 쉽게 꽉 채울 수 있는 화면비를 온전히 점유하지 못한다. 코오트의 얼굴이 하단, 모서리로 밀려나면서 롱숏이 되고 '헤드룸'이 부각된다. 코오트를 존중하지 않는 식구들에 의해서 소녀는 중앙에서 밀려나 '소외'된다. 설령 상체를 온전히 포착했다 한들, 코오트는 카메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또 영화 초반의 편집은 아주 재빨라서, 그녀의 신체나 얼굴을 포착했다한들, 빠르게 잘라내고 다른 숏을 이어 붙인다. 이로써 코오트는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코오트가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댄에게 '붙잡혀' 있다. 4:3 화면비는 1.88:1이나 2.39:1 화면비에 비해서 '움직일 틈'이 없다. 피사체가 들어차면 '여백'이 남지 않는다. 코오트가 댄에 의해 차에 실려 갈 때, 베어리드는 그녀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하여 4:3 화면비의 폐쇄성을 부각한다. 마치 그녀가 댄에 의해서 달아날 틈도 없다는 듯이, 댄의 환경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듯. 결말에서 숀에게 달려가는 코오트를 잡으려고 댄이 쫓아오는 장면에서 그녀가 처한 환경의 폐쇄성을 직감할 수 있다. 설령 익스트림 클로즈업보다는 조금 먼 클로즈업, 미디엄 숏으로 코오트를 포착한다 한들, 그녀가 놓인 환경은 아침임에도 아주 거무튀튀하고 어둡다. 댄이 불러온 심연이 그녀를 에워싸 도망칠 곳은 없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코오트는 '말없는 소녀'로서 침묵함에,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다. 영화에선 영어와 아일랜드어가 교차된다. 메리와 코오트의 자매들은 아일랜드어가 더 편하지만, 아일랜드어를 쓸 수 없다. 댄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아일랜드어로 대화하다가도, 가장이 깨어나니 입을 꾹 닫는다. 메리도 댄과는 영어로 소통한다. 잉글랜드에 의해서 아일랜드어를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이 다수인 환경에서 댄이 주문하는 영어를 제대로 익히고 구사할 수도 없다.

 

ⓒ 슈아픽처스

이후 코오트는 등교하여 학교에 간다. 집에서 내내 닫혀 있던 입은 학교에서 겨우 열리지만, 집에서 영어를 강요받기에 아일랜드어가 영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 아일랜드어를 서투르게 구사하는 코오트는 학교에서 소외되고 괴짜 취급당한다. 이렇게 영어와 아일랜드어 둘 중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구사할 수 없는 코오트는 입을 닫아 자신을 표현하거나 구술하지 않는다. 코오트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왜 코오트는 들리거나 보일 수 없는가, 심지어 잉글랜드의 손아귀를 벗어나서도 왜 그녀는 존재감을 내비쳐선 안 되는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모두 다 '이단'을 허용하지 않는 '일신교' 성공회와 가톨릭을 각기 믿는다. 또한 아일랜드는 민족주의가 거센 나라이며, 역사적으로 반잉글랜드 감정이 거세기에 더더욱 잉글랜드를 적대시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잉글랜드에 의해 혼혈로 전락한 오늘날 아일랜드인들은 그 어디서도 존재할 수 없는 '망명자'다. 잉글랜드를 축소한 댄의 '집'에서 아일랜드계는 '2등 시민'이다. 그렇다면 아일랜드를 압축한 '학교'로 가야겠지만, 잉글랜드계가 섞인 아일랜드인은 아일랜드만의 세계에 녹아들지 못한다. '잉글랜드에 의한 아일랜드 혼혈'은 양 세계에서 박해받는 '이중적인 이단성'을 가진다. 코오트는 학교든 집이든 타인이 입실할 때, 반대로 퇴실해야지만, 이후 인적이 드물어 박해받지 않는 숲으로 도주해야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직 '하나'만을 강요하는 편협하고도 교조적인 사회를 반영하기 위해서 베어리드가 4:3 화면비를 선택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통용된 역사적인 매체가 4:3 화면비이기에, 1980년대가 배경인 본 작품의 '시대상'을 지칭하기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3 화면비가 낼 수 있는 다른 효과에 주목한 것인데, 그 효과가 4:3 화면비가 자아내는 갑갑함, 더 나아가 영화의 사회적 분위기와 조응한다. 혼혈 코오트는 단일한 민족보다 가능성이 더 많기에, 화면비로 비유한다면 더 '넓어야' 지당할 것이다. 그러나 코오트의 가능성을 양옆을 잘라먹은 폐쇄적인 4:3 화면비로 차단한다. 오직 '하나의 피사체'만 중앙에 놓을 수밖에 없는 일원론적 화면비로 혼혈의 이중적 정체성 중 어느 하나만을 강요하는 사회를 반영한다.

 

ⓒ 슈아픽처스

그 숨 막힐 것만 같은 화면비는 아일린의 집에서 조금 여유가 생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소녀의 얼굴은 잘 보이거니와,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하는 '여백'이 함께 포착된다. 또 소녀의 얼굴을 비교적 긴 호흡으로 포착한다. 비로소 코오트의 삶이 보존되기 시작한다. 그간 코오트는 부모에 의해서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고 침묵했다. 또 오직 부모의 질문에 '답변'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일린과 숀은 코오트가 자신들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또 능동적인 아일랜드어로 발화할 수 있게끔 다정한 환경을 조성한다. 영어 또한 가르치며 풍부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든다.

코오트는 집을 떠나서도 댄이나 아일린의 '지시 사항'을 의식한다. 그들의 교육은 '부모에 의한 수동적인 자식' 곧 '잉글랜드에 의한 아일랜드인'을 '세뇌'한다. 반면 숀과 아일린은 코오트에게 주체성을 교육한다. 독립했을 때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할 요리, 다림질, 머리 따는 법 등을 가르쳐준다. 또 코오트가 침대에 용변 실수를 하더라도 조급하게 다그치지 않는다. 아직까지 불안해하는 코오트 무의식의 발로가 용변 실수라면, 그 무의식이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게끔 좋은 환경을 조성한다. 이렇게 베어리드는 아일린과 숀의 집을 비추며, '아일랜드인을 박해하는 잉글랜드인의 집', '잉글랜드 혼혈을 배제하는 아일랜드 학교'를 반성한다. 지배와 아집으로 얼룩진 아일랜드를 그 누구도 독립적일 수 있는 환경으로 조심스레 정화해본다.

이렇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환경은 아일랜드인이 몸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댄은 집안의 '더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은 비밀이라고 아이들에게 다그친다. 잉글랜드인의 착취와 야만은 비밀이 되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한다. 반면 숀과 아일린은 아이를 잃었고, 또 코오트가 댄의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엔 우물에 빠져 감기에 걸렸다. 그 사실을 비밀로 숨기지 않는 숀과 아일린에게 댄은 '전적'이 있는 그들은 부모 자격이 없다며 도발한다. 그렇게 아일랜드인의 부모 자격을 무시하고, 자신의 치부는 숨기는 잉글랜드인 댄은 코오트의 아버지는 자신이라 자처하고 강제한다. 그러나 코오트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숀에게 '아빠'라 부르고 싶다. 그렇게 잉글랜드의 식민사관을 뒤집고, 아일랜드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 순간 아일랜드의 삶은 진정 자유롭고 아름다워질 것임을 베어리드는 역설한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 슈아픽처스

말없는 소녀
The Quiet Girl
감독
콤 바이레아드
Colm Bairéad

 

출연
캐서린 클린치
Catherine Clinch
캐리 크로울리Carrie Crowley
앤드류 베넷Andrew Bennett
마이클 패트릭Michael Patric

 

배급|수입 슈아픽처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5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05.31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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