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위태로움을 소비하는 방식 ['클로즈' #2]
아이의 위태로움을 소비하는 방식 ['클로즈' #2]
  • 변해빈
  • 승인 2023.06.09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른의 관점에서 풀어버린 아이의 세계

<클로즈>와 루카스 돈트의 작품 세계에 관해서는 이현동 평론가가 이미 작성한 바 있다(너무나도 가까운, 그리고 닫힌 '클로즈'). 그가 거시적인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적절한 방법을 안내했다면, 나는 영화가 관객의 몫으로 남긴 '열린 문'을 굳이 닫아보고자 이 글을 쓴다.

 

ⓒ 영화 <걸>

<클로즈>를 보고 루카스 돈트의 <걸>(2021)을 다시 봤다. 주인공 '라라'(빅터 폴스터)가 발레를 하던 몸짓의 활력은 생생한데, 영화의 결말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면을 다시 보면서 과거의 인상이 살아났지만 분명 아는 그 내용을 어쩌다 잊게 되었는지, 더군다나 성전환 수술을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던 라라가 스스로 성기를 절단하는 결말은 인물이 갈망하는 요소를 가장 정점으로 육화하는 이미지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흐려진 내 집중력을 탓하면서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을 또 한 가지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걸>의 극적인 결말에 대해, 표현이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잊혀질 수 있는' 무언가라고 내 무의식이 작동한 까닭은, 그 뒤로 맞붙은 진짜 마지막 장면 속 병원에서 깨어난 라라를 둘러싼 어떤 안온함, 열띤 라라의 걸음걸이가 사이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의연하게 통과해 앞의 발레 하는 몸짓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극 내부 몸짓의 활력이 구조적으로 다 채워지지 않은 결말을 압도하고 인물의 열망과 용기를 지지하도록 작용하던 것이 <걸>이었으며, 이 가능성으로서의 모호함은 <클로즈>에선 이야기 전반을 밀고 가는 요소로 더 중시된다.

<걸>의 결말을 되짚은 진짜 이유는 그와 반대로 거대한 상실 이후를 암시하는 <클로즈>의 결말에서 느껴지는 '어떤 위화감'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제목 '클로즈'를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이 영화의 결말이 실은 그렇지 않고, 폐쇄적이기만 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두 소년의 우정과 사랑, 그 사랑의 성질에 대한 정형화된 시선을 확장하려는 돈트의 시도가 무규정성의 가능성을 향해 열리게 만들지 못하고 어설프게 봉합해 버린 쪽 아닐는지 갸우뚱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는 거다. 누군가는 <클로즈>가 두 소년의 성장영화이고, 아예 성정체성에 대한 담론 자체를 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그건 영화 자체를 배제하잔 뜻과 다르지 않으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몇 가지 고정된 단어와 표현을 경유해 이렇게 말하게 된다. <클로즈>는 두 소년의 퀴어함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아니며, 그것을 범주화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돈트가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듯, 이 영화가 성정체성을 전면화하지도 정치적인 맥락으로 다루려 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오류가 있단 말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주된 반응을 보면, 젠더에 관한 정형화된 사회적인 인식과 관점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반대급부로써, 관객에게 모종의 성찰을 일으키고 있는 점도 이 영화의 장점이다.

하지만 나는 <클로즈>가 여기에 강박적으로 묶여버리면서 오히려 너무 느슨한 방식으로 마무리 지어버린 몇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클로즈>가 섬세한 영화는 맞지만, 그건 윤리성과 폭력성에 대한 너무 많은 요소를 고려하려는 안간힘이 겉으로 표출되면서 불러온 반응이지, 섬세함보단 '조심성 있다'는 게 더 적합한 표현 같다. 이건 퀴어함에 관해서만이 아닌데, 이를테면 아이에게 친구의 부고를 알려야 하는 나탈리(레아 드뤼케르)가 어떠한 우회적인 표현으로도 필요한 말을 스스로 꺼내지 못하고, 되려 엄마의 슬픔과 불안을 눈치챈 아이가 던지는 물음이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에 가까워지면서 실질적인 장면의 목적이 달성되는 태도가 이 영화 전반에 걸쳐 지속된다. 예민한 어떤 것을 말하기 우려하는 마음이 사실상 그 마음의 주체가 지닌 태도를 이상하리만치 윤리적으로 만드는 데 비해, 삶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막의 두께나 강도가 아이와 어른은 결코 같을 수 없단 점에서 어른이 우회한 경로를 끝맺음 지어야 하는 막중함이 아이의 몫이 될 때 그 무게가 비대하다.

<클로즈>가 아이의 세계를 확장하는 건 맞지만, 그 동력이 미성숙한 아이의 내적인 불안에 과중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우려 또한 지울 수 없다.

 

위의 우려를 확실시했던 대목은 "너희 둘이 사귀니?"만큼 이 영화에서 중요한 말이지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그 방식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게 넘겨버린 대사'가 나올 때다. 우선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다. 중학교 입학 후 오랜 친구인 레미(구스타브드 와엘)와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하는 학급 아이들의 시선을 받게 된 레오(에덴 담브린)는 서서히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레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두 사람이 어울리는 또래 집단이 달라진 정도로 균열의 강도를 조절해가던 중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을 개입시킨다. 레미가 어떠한 전조증상 없이 자살을 택한 것(우정의 흔들림과 자살 사이엔 현실적인 간극이 거대하단 점을 이용해서 그 충격을 격상하는 영화다). 극 중반부에서 벌어진 이 죽음을 기점으로 영화는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뉜다. 전반부는 레오와 레미의 우정과 관계의 비틀림이 그려지고 후반부는 레미의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이 애도의 길로 이행하는 거시적인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서 레오와 레미의 엄마 소피(에밀리 드켄)는 사실상 그러한 상실의 풍경과 제대로 섞이지 못한다. 남들에게는 없는 결핍과 욕망이 두 사람에겐 하나씩 더 있다. 레오는 레미와의 단절을 자신이 분명히 느꼈지만,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감정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기제로 택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으며, 동시에 이 사실을 소피에게 밝혀야 한다는 유사-자백의 무게감도 있다. 소피는 죽은 레미와의 단절을 수용하기 위해서 즉, 애도하며 살아가려면 아들이 자살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하는 인물이다. 레오는 무언가를 반드시 말해야만 하고, 소피는 무언가를 들어야만 하도록 설정된 셈이다.

그리고 영화는 단계적이고 성실하게 위의 두 목표를 동시적으로 실행하는 숲 시퀀스를 향해 이동한다. 직전까지 두 사람은 몇 차례 말하기(레오)와 듣기(소피)의 기회를 놓친 상태다. 불발된 대화와 사이에 감도는 긴장만으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무언가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 있음을 서로 안다. 그런데 어떤 낌새만으로 앞서 말한 두 목표가 충족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영화는 둘이 반드시 무언가는 말하고 듣게 만든다. 그런데 도로에서 숲 내부로 이어지는 해당 시퀀스에서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나눈 대화는 극 속의 그 어떤 대화보다 함축적이고 생략이 많다. 소피의 일터까지 찾아간 레오는 간청하는 듯이 정적을 견디는 그녀를 향해 겨우 이렇게 말한다. "저 때문이에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걔를 밀어냈어요." 그리고 오랜 침묵이 지속되는 동안 두 사람은 그저 눈물만 흘린다. 인물의 심리를 정확히 알 수 없더라도 극 안에서 눈물은, 앞으로 두 사람이 해당 문제에 관해서 말하거나 묻지 않아도 된다는 마침표의 기능이다.

이에 뒤따르는 숲길에 레오가 내쫓기고 다시 그를 뒤쫓아 끌어안는 소피의 극적인 정념은 사실을 말하고 들은 다음의, 또 다른 목표인 도의적 죄책감의 해소와 그걸 혼자 짊어진 아이에 대한 한 부모의 양가적인 감정의 맥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위의 단 세 줄의 대사가 발언과 수용의 역할을 해냈기에 올 수 있는 장면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첫째, 레오는 하려던 말을 제대로 한 것일까. 영화의 전반부에서 학교 아이들로부터 받은 시선의 문제는 레오와 레미만 알고 있다. 소피뿐 아니라 어른들은 학교에서의 일련의 사건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레미의 자살이 자기 잘못으로 귀결되기까지의 내외부적 원인과 거기서 느낀 불안에 대한 감정이 투명하게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레오는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 학급 아이들이 단체로 상담받던 장면에서 한 말들과 비교하면 그는 자기감정의 회복을 우선시할 만큼도 못 된다. 하지만 레오의 관점에서 이 모호함은 그가 겪은 혼돈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 곧 성장의 맥락에서 감정의 격동의 이유를 스스로 알고 표현하는 방식의 미숙함이지 최소한 의미상으로 흔들림의 요지가 없다. 어쨌건 그는 자기가 먼저 레미와 예전처럼 지내길 두려워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제가 걔를 밀어냈어요"하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소피의 관점에서 레오의 말은 해석의 요지가 너무 포괄적이다. 언급했듯 둘의 세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피는 아들의 '자살의 이유'를 이 모호한 말만으로 어떻게 납득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녀는 형제나 다름없던 둘 사이에 모종의 균열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러니 레오를 계속 찾아가고 은근하게 떠보면서 그 곁에 머문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저 때문이에요. 제 잘못이에요."까지 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역시 둘의 문제가 맞다고 확인받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소피가 가해와 피해의 차원에서 무조건 아이를 추궁하고 질책하려 드는 인물은 아니므로 그녀는 더 듣기 위해 기다린다. 그러자 "제가 걔를 밀어냈어요"가 왔다. 하지만 소피 입장에서도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그녀는 얼마간 이게 무슨 말인지 골몰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녀는 다음 말을 묻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내려"하고 말한다. 그 사이에 소피 안에선 어떤 퍼즐이 맞춰진 게 분명한데 영화는 그걸 생략해버리고 순간적인 원망의 화살을 아이에게 돌린다. 부차적인 대화를 제거해서 마치 "너희 둘이 사귀니?"를 무력화하는 착시를 일으키지만, 소피의 납득을 내가 납득하자면 오히려 그 질문은 강화되는 쪽 같다.

 

이쯤에서 우리는 극의 전반부, 레미가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사용하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던 소피의 모습을 상기해야 한다. 중학생 아들이 화장실 문을 잠그는 게 그렇게 대수인가 싶지만, 여하간 배가 아프다며 아침밥을 먹다 눈물을 흘리는 아들과 그걸 조금은 경직된 상태로 바라보는 레오 사이의 묘한 공기를 소피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다. 무엇보다 그곳이 레미의 자살 장소가 되는 걸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소피가 이전부터 무언가를 불안하게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돈트가 영화의 진실에 다가서기를 억제하고 있으므로, 추측하건대 "제가 걔를 밀어냈어요"에서 소피는 레미의 성정체성에 관한 혼란을 읽어냈으리라 생각된다. 오랜 친구와의 다툼이 깊은 상처를 안긴다고 해서 그것이 아들의 자살 이유를 받아들이고, 애도의 단계로 접속할 만큼의 간단한 문제가 될 순 없었을 것이란 뜻이다.

어쨌건 영화가 퀴어함에 관한 판단을 절제했으니 된 걸까. 아이를 내세워 퀴어함을 떠올려선 안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어른과 양극화된 관계성으로 치밀하게 다뤄졌어야 하는 문제가 느슨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뚜렷한 직면이 요구되는 상실과 애도의 여정을 희박한 거리감만으로 부드럽게 연결 지을 수 있는 이유 또한 퀴어성과 무척 가깝게 붙어있는 죽음(자살) 담론 안에서 손쉽게 성립되는, 좁고 규범적인 사고의 폭을 용인하는 미디어의 재현방식과 접목되어 있다. '소수적' 정체성이 아니라 한들, 잘못된 시선의 폭력성을 가시화하고 (영화 바깥에서) 성찰하고 도덕적으로 전진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결국, 퀴어성에 관한 문제에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수행으로 맞설 수 없으나, 대신 상실의 아픔에는 무방비한 성장기 아이의 위태로움을 소비하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아이가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클로즈>는 정치적인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른의 입지가 커지는 순간 바로 그 어른의 시각과 속도로 성큼 미래로 나아가버린 영화의 끝에서 아이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려"라는 말 뒤로 숲속으로 향한 레오가 소피를 향해 나뭇가지를 무기 삼아 겨눌 때, 아이가 지금의 두려움을 처리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두려움의 생생한 감각보다 소피의 끌어안음, 그러니까 아이를 용서하는 혹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가장 격정적으로 표출하고 치유에 이르는 어른의 모습이 강조되어 보이는 건 왜일까.

 

영화의 마지막, 레오는 레미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화장실)를 비로소 응시한 뒤 두 사람이 함께 달리던 원예 농원 사이를 홀로 달린다. 만개한 꽃도 아름답고 장황하게 흐르는 음악도 감동적이다. 정황을 살피면 모종의 변화를 겪으며 애도의 가능성과 삶의 지속성을 움켜잡는 결말이 와야 할 것이고 대부분의 관객이 그런 이후를 저마다 그려보는 듯하다.

레오가 영화의 마지막, 진짜로 응시한 건 무엇이었을까. 스스로 그곳(죽음의 장소)을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일까. 그의 시선에서 오히려 손잡이를 강제로 뜯어낸 부서진 화장실 문이 더 선명하게 인식되는 건 단지 우연인가. 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담은, 그 화면 안의 인물에게서 관객이 기대하는 이 외부적인 감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한 아주 묘한 기운을 받았다.

달리던 레오의 몸이 힘을 잃고 느릿하게 걷는 그 뒷모습을 따르던 카메라는 기어코 뒤를 돌아 외화면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짓을 남긴다. 그것(곳)을 비추지 않지만 아마 방금 지나쳐 온 레미의 장소거나 그로 통칭되는 어떤 과거라는 해석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문제는 그 모호함과 달리 무언가를 뚫어져라 보는 그의 눈이 어딘가에 꽂히는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해서 '터덜터덜'에 가까운 걸음걸이를 거의 압도해버릴 정도라는 것이다. 슬픔이라기엔 저항적이고, 적극적이라기엔 불가항력적인 죽음에 따른 체념의 정서를 부정할 수 없는, 자기 불안의 원인 자체를 확립하지 못했을 때의 '흔들림'이 있다.

앞서 말한 이 마지막의 위화감은 결국, 영화 전체를 관류하는 감독의 강박이 종언되지 않은 불안, 치유의 불가능성을 가려버리는 모호함에서 온다. 레오의 응시는 타자의 아픔에 뛰어난 감응력을 지닌 아이를 통해 바라본 어른(소피)의 회복에 불과하다.

 

레오가 영화 마지막에서 비친 그 마지막 눈짓은 의도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오지 않는 누군가를 확인하는 이의 멈춤의 제스처 같다. 그동안 레오의 달리기는 레미와 동행하는 무언가였다. 흥분한 채로 숲을 헤집으며 걷던 레오가 뒤를 크게 돌아볼 때는 아직 소피의 존재가 드러나기 이전이었다. 먼 곳에서 울리는 그녀의 부름은 이미 그녀의 뒤쫓음이 예견된 다음이다. 레오는 그걸 예상했던 것 같고, 이 점에서 소피는 아이를 위험하게 방치하지 않을 거란 믿음을 주는 좋은 어른이었을 테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땐, 얼마간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혼자 남는다. 마음의 상태를 가시화하던 부러진 손의 붕대, 곧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아픔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상기해야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그가 어떤 아픔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붕대의 사라짐은 어른의 관점에서 본 일종의 착시다. 이 멈춤은 끊임없는 불안, 상처를 인정받지 못한 소외에 대해, 그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게 될 것인가를 확정하는 이미지 같다.

레오는 자기 고통을 육화하는 방식으로 인정받은 아이(<걸>)도 아니고, 영화는 서툴고 짓궂게 부서진 아이의 세계를, 바로 그 원리로 재건하는 어리숙하지만 분명한 조짐(<톰보이>)도 없으며, 아이의 혼란을 온몸으로 함께 받아들이는 어른(<나의 장밋빛 인생>)도 없고, 실컷 울어버리는 아이(<프리다의 그해 여름>)도, 딛고 성장해야 할 아픔에 대한 깨달음(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아이들)을 얻지도 못했다. 어쨌든 미래는 오겠지만 <클로즈>의 모호한 결말만으론 레오가 과거를 극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치유의 가능성을 말할 자신이 없다. 아무도 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더 이상 달리지 않는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아픔을 홀로 감내하며 살아가게 될지, 나는 그걸 더 선명하게 느낀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클로즈
Close
감독
루카스 돈트
Lukas Dhont

 

출연
에덴 담브린
Eden Dambrine
구스타브 드 와엘Gustav De Waele
에밀리 드켄Emilie Dequenne
레아 드루케Lea Drucker
이고르 반 드셀Igor van Dessel

 

수입|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4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3.05.03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