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JIFF] '따로 또 같이' 언젠간 문은 열린다
[24th JIFF] '따로 또 같이' 언젠간 문은 열린다
  • 김민세
  • 승인 2023.05.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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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의 세계, 그리고 재즈에 대한 단상"
ⓒ 전주국제영화제

재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따로 또 같이>의 영문 제목 'Alone Together'를 보고 동명의 스탠다드 재즈곡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가 노래한 버전이다. 엘라는 희망찬 가사를 리듬감 있는 반주에 맞춰 경쾌하게 노래한다. 가사를 보면 이러하다. "Alone together, beyond the crowd(혼자서, 군중 너머에서), Above the world, we`re not too proud(세상 위에서, 우리는 너무 자랑스럽지 않아), To cling together, we`re strong(서로가 붙으면 우리는 강해), As long as we`re together(우리가 함께라면)." 그리고 (또 다른 예시라고 하기 미안할 정도로) 익히 잘 알려진 쳇 베이커(Chet Baker)의 트럼펫 연주곡이다. 쳇의 연주에서 엘라의 희망찬 목소리와 멜로디는 찾을 수 없다. 그의 연주는 오히려 고독하고 구슬프며 외롭다.

이렇듯 뮤지션마다 스탠다드 곡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연주하는 것이 재즈의 매력 자체이겠지만, 앞서 말한 두 버전 사이의 간극은 지금 와서 왠지 모르게 모순에 가깝게까지 느껴진다. 'Alone Together'라는 제목을 물끄러미 들여다봐도 그러하다. 이 관용어구는 '단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동시에 '따로 또 같이'라고 읽힐 수도 있다. 두 단어를 떼어놓았을 때, 쳇의 연주는 'Alone'에 엘라의 노래는 'Together'에 방점이 찍힌다. 즉, 재즈에서는 'alone'과 'together'라는 서로 붙여놓기 이상한 단어가, '따로(외로움)'와 '같이(함께)'라는 모순적인 상태와 정서가 하나의 곡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올 수 있으며 동시에 이야기될 수 있다. (다만, 미시마 유키코가 해당 재즈곡의 제목을 영화의 레퍼런스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없다)

 

ⓒ 전주국제영화제

한 사람: Alone의 이미지

앞선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는, 어쩌면 이 가정이 미시마 유키코의 <따로 또 같이>가 만들어내고 있는 이미지와 구조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중심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정부의 거리두기 명령으로 인해 각종 공연과 촬영이 잇달아 취소되면서 직장을 잃은 연기자들의 소박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각 단편은 대부분 2분에서 10분가량의 짧은 클립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수한 상황 속의 개인적인 기록으로써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따로 또 같이>의 독특한 점은 감독인 미시마 유키코가 감독으로서 카메라를 들고 인물들을 프레이밍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출연자들이 직접 카메라를 세워두고 카메라 앞에 서는 촬영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미시마의 실질적인 역할은 영화의 컨셉을 출연자들에게 설명하고, 출연자들로부터 받은 영상들을 일련의 통일성을 기준으로 편집하는 것이 되며, 그녀는 촬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제작 방식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가 곧 카메라 앞에 선 자가 된다는 점에서 유튜브 플랫폼으로 소비되고 있는 일상 브이로그와 유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또 감독의 카메라로 촬영되지 않은 '촬영의 개입이 부재한' 영화라는 부분은 주성져의 <프레젠트.퍼펙트>(2019)에서 실험된 바 있으며, 팬데믹의 한가운데 '만남이 실패한 시대'를 아카이브 하는 형식을 고민한다는 점은 쿠도 마사아키의 <미증유>(2021)에서 볼 수 있던 것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따로 또 같이>의 각 단편 속 인물들은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 아래 삶의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 삶을 견딘다. 누구는 혼자서 요리를 해 먹고, 집세를 아끼기 위해 친구와 동거를 하며, 무뚝뚝한 메일과 팩스 내요에 따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교열 작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하러 다닌다. (모든 단편이 그러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각 단편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이미지' 아래에 있다. 프레임이라는 형식과 팬데믹이라는 사회 맥락 속에 타자와의 접촉 없이 이미지 안에 홀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며, 한 편의 영화(프레임 속 존재와 스크린 앞의 관객 만나는 순간)라는 틀이 발생하기 전 이미지의 생성과정(촬영)에서 잠정적이고 임의적인 수신자로 존재하는 카메라 뒤의 존재(감독과 스태프)가 부재한다는 점에서의 '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카메라 앞에 선 '한 사람'은 프레임 내외부의 맥락에서 부재한 수신자, 또는 불명확한 수신자에게 몸을 드러내고 발화(송신)하는 자가 된다. 가량 남편과 아이들이 나가고 홀로 남은 집에서 노래에 맞춰 한바탕 춤을 추다가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의 단편이 적절한 예다. 이때 '한 사람'의 송신은 수신자의 부재라는 벽에 부딪힌 뒤 뒤늦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한 사람'의 몸과 발화는 시차를 거쳐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한 사람'의 존재 안에서 송신과 동시에 수신되며 하나의 개인 안에서 진동하는 성찰로서 기능한다.

 

문과 발코니: Together의 구조

<따로 또 같이>의 가장 인상적인 단편 중 하나는 도쿄로 상경해 자가격리 기간을 겪는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부모와 함께 지내기 위해 도쿄의 본가에 온 그녀는 정부령에 따라 (아마도 거실로 통하는) 문 하나와 작은 발코니로 이어지는 창문 하나가 있는 좁은 방에서 2부 간의 자가격리를 시작한다. 이 기간에 그녀는 반려묘와 함께 놀거나, 발코니에 앉아서 집 밖을 구경하고, 매일 일기를 쓰다. 그녀가 집에 들어올 때부터 격리 생활을 하기까지의 모습들, 이를테면 현관에서부터 입고 온 옷과 신발 갖가지들을 모두 벗고 봉투 안에 담는 모습, 어머니가 문 사이로 식사를 전해주는 잠깐의 시간 동안 마스크를 끼고 온갖 신경을 기울여 어머니와의 접촉을 주의하는 모습, 격리해제를 일주일 남기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문 뒤의 어머니를 두고 흐느끼며 대화하는 모습은 소름 끼치는 디테일 하나하나에 우리를 팬데믹의 중심에서 느꼈던 무한한 공포와 막연한 절망감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 전주국제영화제

더욱 처절해지는 것은 여자가 가진 치열한 딜레마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일주일 때 격리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는 사회와 가족과 단절되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카메라는 여자와 문을 동등한 관계에 놓인 투숏처럼 담아낸다. 즉, 여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문을 닫고 방에 남아있는 것과 문을 열고 방을 나가는 것이다. 문 뒤의 어머니는 병 관련 증상이 없으니 이제 나와도 괜찮을거라 그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며, 우리 모두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자의 이 말과 선택은 '자신의' 가족을 위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이다. 그리고 '모두의' 노력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이다. 한 개인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 아래의 선택. 이 고통스러운 가운데의 선택에서는 어떠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그 순간 지금까지 봐왔던 수많은 얼굴들을 돌아보게 된다. 혼자의 삶을 홀로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외로운 '한 사람'의 얼굴들. 아니, 모두의 삶을 위해 나의 작은 행동과 고통이 모두의 희망으로 이어지리라 기도하는 '모두'의 얼굴들. 미사미 유키코는 영화의 말미에 뻔해보일 수 있지만 그 투박함과 생경함으로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편집적 개입을 한다. '한사람'들의 얼굴들(단일숏)에서 '모두'의 얼굴들로(몽타주). 문밖을 나갈 수 없는 자들의 발코니. 그 변두리에서 그들은 따로, 또 같이 기도한다. 이 개인적 기록들이 모두의 기록이 될 수 있기를. '한 사람' 안에서 진동하던 몸과 발화는 이제 모두를 향한다. 문밖의 자유를 두고 방 안의 현실을 선택한 그들에게 발코니는 서로의 몸과 발화가 만나는 변두리이자 세계의 틈, 영화라는 장소가 된다.

   

<따로 또 같이>의 이미지는 거리두기의 풍경, 즉 만남이 실패하고 삶을 온전히 홀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드러내는 '한 사람의 이미지'이며 'Alone의 이미지'다. 동시에 그 이미지는 그것들을 하나의 영화 안에서 일련적으로 붙여 놓으며 공동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구조'이며, 'Together의 구조' 아래에 놓일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즉흥적이고 조화로운 영화들은 재즈와 같다. 중요한 것은 'Alone의 정서'와 'Together의 희망'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속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문득 작년 이맘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온종일 좁은 바닥에 누워 무언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던 날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Blue in Green'을 수없이 돌려 들으면서. 여러 번의 테이크(Take)와 그 사이 연주자들의 대화 소리, 녹음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11분가량의 풀버전 녹음본은 우리가 들을 수 없던 또 다른 세계의 'Blue in Green'을 들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5분 40초 즈음, 네 번째 테이크에서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빌 에반스(Bill Evans)의 연주가 나지막이 시작될 때 예상치 못한 깊은 울림을 준다. 모든 악기들이 박자와 음정을 맞추며 함께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따로 또 같이>를 보자마자 그 음악을 다시 들을 수밖에 없었다. ('Alone Together'라는 영어 제목이 주는 재즈곡의 연상에서 비롯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길, 그리고 나의 마음이 모두의 마음 중 하나가 될 수 있길 기도했다. 언젠간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발코니의 재즈를 즐기면서.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따로 또 같이 
Alone Together
감독
미시마 유키코
MISHIMA Yukiko

 

출연
IKEDA Ryo
OOTAKA Yoko 
KAMO Mihoko
KONISHI Takahiro 
SASAKI Shiho 
IMAI Yukihiro 
YAMAGUCHI Kai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5분
공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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