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케이이치] 모두를 보듬는 다정한 격려
[하라 케이이치] 모두를 보듬는 다정한 격려
  • 김경수
  • 승인 2023.05.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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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과 <거울 속의 외딴 성>이 보여준 스토리텔링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 © Usui Yoshito

'하라 케이이치'의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2001)의 명장면은 '히로시(신형만)의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짱구의 아빠 '신형만'은 세계를 20세기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악당 켄이 건설한 20세기 박물관에 갇혀 있다. 그곳에는 추억의 냄새가 흐른다. 어른을 과거에 흠뻑 빠져들게끔 만들고 심지어 어린애로 만들기까지 한다. 짱구와 그 또래는 그 냄새에 반응할 리가 없다. 짱구는 아이가 되어버린 신형만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충격받는다. 짱구는 그 냄새를 없애려 신형만의 신발을 벗겨서 발냄새를 맡게 한다. 신형만은 그때 일생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이 설정은 화자인 '마르셀'이 홍차와 마들렌을 먹다가 그 향기로 인해서 급작스레 평생을 회상하는 것으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여기서 비롯된 '마들렌 증후군'을 생각나게 만든다.

하지만 하라 케이이치는 의식의 흐름대로 기억을 서술하는 프루스트와 다르다. 그는 신형만의 일생을 나열하듯 그려낸다. 우리가 보는 것은 아무런 대사도 삽입하지 않은 이미지뿐이다. 회상이 시작하자마자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유년기의 신형만이 등장한다. 그가 동경으로 상경하고, 봉미선과 결혼해 한 가족을 이루는 과정이 무덤덤하게 그려진다. 신형만과 그의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신형만이 그의 가족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면서 회상이 끝난다. 논밭 한가운데에서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이미지의 원심력이 이 긴 시간을 한 데에 뭉친다. 자전거처럼 삶이 순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두 이미지가 맞물린다. 인생은 세대는 달라도 하나의 모습으로 순환될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왜 그리도 많은 이를 울린 것일까. 지금 이 서사는 제법 낡은 것으로도 보인다. 가족주의의 한계에 갇혀 있는 데다가 감정이 격렬히 들끓는 신파만 제거했을 뿐 이 모든 장면이 전형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런데도 볼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흐른다. 이 회상은 결국 신형만의 삶에 불과하다. 하라 케이이치는 앞으로 짱구가 살아갈 인생을 일부러 그리지 않고 괄호를 쳐두었다. 이 괄호야말로 이 감독이 지키려는 세계다. 신형만과 봉미선이 안간힘으로 짱구를 도와서 세계가 20세기로 퇴행하는 것을 막듯이 하라 케이이치도 똑같은 심정으로 짱구를 보았을 것이다. 미래가 도저히 보이지 않기에 버블경제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커플로 남아 있는 '사토리 세대'를 상징하는 악당도 격려하면서 말이다.

하라 케이이치의 세계는 모든 이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각 인물을 처단하지 않고 이해하고 끌어안으려고 한다. 하라 케이이치의 윤리는 낡아서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 © Usui Yoshito

하라 케이이치는 TV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와 극장판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연출과 각본을 담당한 짱구 극장판 여섯 편은 짱구 극장판 중에서도 걸작으로 논의된다. 짱구 극장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는 신형만이다. 그야말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라 케이이치의 페르소나에 가까운 캐릭터다. TV 애니메이션에서는 원작에 따라서 여성을 밝히는 데다가 항상 사고를 치기 일쑤다. 극장판에서 신형만은 짱구를 구하려 안간힘을 쓰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무술로 상대를 무찌른다든지, 자동차 운전으로 사무라이를 무찌른다든지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스턴트를 소화한다. 하라 케이이치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지 않다. 되려 아이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히어로에 더 가깝다.

   

짱구가 버스터 키튼의 몸짓을 따라서 무한히 달리듯, 신형만도 각 세대의 액션 스타를 아우르며 달린다. 이는 오로지 픽션에서만 가능한 위로이다.

<갓파 쿠와 여름 방학을>에서도 이러한 위로가 선명히 드러난다. 어린아이인 물의 요정 갓파 쿠를 지키는 것은 같은 집에 살던 어른인 개 아찌다. 아찌는 갓파 쿠를 등에 태우고 초인적인 체력으로 인간에게서 도망간다. 어른은 어떤 수로든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 이를 드러내는 것이 문 이미지다. 하라 케이이치의 세계는 미래로 가는 문을 지키고자 하는 투쟁이 언제나 끼어들어 있다.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신형만이 엘리베이터 문을 지키는 것이 그러하다. 미래로 가는 문이 닫힐까 그는 온 힘을 다해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으려 애쓴다. <갓파 쿠와 여름 방학을>에서도 기자가 집에 못 들어오도록 문을 지킨다. 이처럼 하라 케이이치는 미래로 가는 문을 지키려는 안간힘으로 그림을 그린다.

 

하라 케이이치는 영화 문법에 기반한 작가이다.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짱구는 계속 버스터 키튼의 스턴트를 하고 있다. 짱구와 그 친구가 어른을 피해 백화점에 숨는 장면은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1978)을 오마주하고 있다. 어른이 20세기 박물관으로 가는 트럭에 실려 가는 장면은 돈 시겔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6)의 오마주다. 역시나 20세기 박물관은 <메트로폴리스>(1927)의 오마주다. 이처럼 하라 케이이치는 영화의 문법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고, 곳곳에다가 영화의 오마주를 삽입하면서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연출한다.

한편으로 하라 케이이치는 애니메이션을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묘사를 위해서 그려내는 작가로도 보인다. 신형만이라는 보통 사람이 영웅이 되려면, 미래로 달려 나가는 아이가 버스터 키튼처럼 미래로 달려가려면, 애니메이션의 힘을 빌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갓파 쿠와 여름 방학을>(2007)에서 쿠는 <킹콩>(1933)의 킹콩처럼 탑으로 도망친다. 갓파 쿠의 경우도 갓파가 결말에 이르러 인간으로 둔갑한 신령을 만난다. 동물 간의 연대로 인간으로 둔갑한 또 다른 신령을 만나러 가는 미래가 열리는 것은 영화적 상상력만이 줄 수 있는 위로다. 심지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클로즈업과 다다미 숏은 '오즈 야스지로'의 스타일의 영향으로 보이며,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향도 간혹 엿볼 수 있다.

 

영화 <갓파 쿠와 여름 방학을> ⓒ 엔케이컨텐츠

하라 케이이치의 영화는 여러모로 아이가 저만의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격려로 가득하다. 물론, 격려가 정확하고 엄밀하지 않더라도 그 격려에 담긴 따스한 에너지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되려 그의 세계가 다정히 느껴지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격려로 인해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후 일본과 파시즘을 다루듯, 혹은 신카이 마코토가 3.11 동일본 대지진을 다루듯이 하라 케이이치는 일본을 아우르는 정치적인 문제에 치중하지 않는 듯하다. 세카이계나 러브 코미디나 하렘 등 일본 서브컬처 문법의 영향도 발견하기 힘들다. 그는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기도, 오타쿠에게 사랑받기에도 모호한 위치에 있는 감독이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회적 문제에 집중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버블경제로 인한 기성세대의 절망과 세대 간 단절(<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 환경 파괴 문제와 이지메(<갓파 쿠와 여름 방학을>), 학교폭력과 등교 거부(<거울 속의 외딴 성>) 등 일상과 밀접한 문제다.

하라 케이이치는 다루기 꺼려하는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면서 피해자를 격려한다. 그는 사회적인 문제를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되려 아이의 시선에 서서, 아이가 해명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문제까지만 드러낸다. 어른이 보기에 허술하고 텅 빈 위로로 느껴지는 것이 어쩌면 그의 영화를 보는 아이의 시점에서는 가장 최선의 이해일 수도 있는 셈이다. 이 정확하고 날카롭지 않음이야말로 아이를 가르치지 않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 적당히 발을 디디고 있는 선에서만 환상과 현실을 공존하게 한다. 환상과 현실 사이의 가까운 거리감이야말로 그의 동화적 스토리텔링이 지니는 힘이다.

 

<거울 속의 외딴 성> ⓒ 워터홀컴퍼니

학교폭력을 감싸 안으려는 최선의 위로

하라 케이이치의 신작 <거울 속의 외딴 성>은 학교폭력과 등교 거부를 전면에 드러낸다. 이 영화는 등교 거부를 하는 일곱 아이가 늑대라는 의문의 소녀가 만든 성에 초대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다룬다. 중심인물인 '코코로'는 사나다에게 학교폭력을 당한 히키코모리다. 마사무네는 유명 게임 제작자와 아는 사이라고 허풍을 떨었다가 왕따를 당했고, 후카는 피아노 연습에만 집중하다가 아무런 친구도 못 사귀었다. 우레시노도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스바루는 가정 문제로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리온은 누나인 미오가 죽고 하와이로 와 있다. 나중에야 드러나지만 아키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으며 할머니까지 돌아간 벼랑 끝에 몰린 신세이다.

나이마저 각기 다른 소년과 소녀는 저마다의 사연을 서서히 알아간다. 자신을 늑대님이라고 부르라는 늑대는 여섯 달 안에 성에서 열쇠를 발견하는 아이에게 그 아이가 진심으로 바라는 소원 하나를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들은 열쇠를 발견하려 애를 썼지만 실패한다. 이들은 이 성을 도피처로 삼아서 우정을 이어간다. 그러나 여섯 달이 지나면 그들은 서로의 기억을 잊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를 만나려 애쓰지만 모종의 이유로 만나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에 아키가 규칙을 어겨서 모든 아이가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 그 시간에 친구 모에를 만나러 성 바깥에 있던 코코로만이 살아서 단서를 푼다.

결말에 이르러서 영화의 미스터리가 드러난다. 성을 만든 것은 리온에게 친구를 선물해주고 싶은 누나 미오이다. 이 성에 모인 아이들은 모두 7살 차이가 나서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 것이다. 리온을 제외한 모든 이가 성에서의 기억을 망각하고 현실로 돌아갔지만 이들은 사실 하나로 이어져 있던 셈이었다. 코코로를 돌보던 방과 후 교사가 아키라는 것이 드러나면서다. 리온은 일본으로 되돌아와서 코코로와 재회하는 데에 성공한다. 방대한 세계관으로 지레짐작할 수 있듯이 <거울 속의 외딴 성>은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 츠지무라 미즈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 미스터리와 판타지를 둘 다 지니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판타지에 중점을 둔다. 인물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판타지가 이들을 어떻게 위로하는가'에 초점을 둔 것이다.

 

<거울 속의 외딴 성> ⓒ 워터홀컴퍼니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 등으로 최근에 점화된 학교폭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거울 속의 외딴 성>은 줏대를 잃지 않는다. 학교폭력이 사적 복수라는 판타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당장은 그 아이를 보아야 한다는 듯한 태도를 드러낸다. 감독은 이 설정으로 49년이 지나더라도 학교폭력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을지언정 피해자끼리의 연대는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영화는 아이에게 닥치는 여러 폭력을 다루는 데에 윤리적으로 재현하려고 애쓴다. 특히, 사나다 일행이 코코로의 집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리는 장면에서 사나다는 실루엣과 소리로만 등장한다. 한편으로 아키의 성폭행을 다룰 때도 계부의 얼굴을 재현할 때 낙서가 그려진 듯한 모습으로만 재현한다.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의 얼굴을 악마적으로 그리는 것이야말로 누군가가 감정을 이입할 만한 여지를 주기에 이 감독은 재현을 금지한 것이다.

또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학교폭력을 당하는 순간의 리얼리티에 더 가깝다. 이같은 여러 태도는 학교폭력을 단순화하면서 판타지로 은폐하려는 지금의 여러 콘텐츠에 대항하는 동력이 된다. 감독은 학교폭력의 문제에 어른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이전까지의 영화에서 어른이 아이의 문을 열려 했다면 이 영화에서 서로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아이이다. 코코로를 위로해주는 것이 결국 아키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같은 메시지는 더 두드러진다. 이는 <거울 속의 외딴 성>의 거울은 이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미래를 온전히 아이에게 맡기려는 감독의 따스한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는 메시지를 성급히 전달하려 한 듯하다. 자연스러운 작화에 아름다운 미장센이 있는데도 이 영화가 안타까운 이유는 성급한 전개와 다소 서투른 연출로 인해서다. 사실 영화는 2시간 30분에 다루어야 할 작품이었다. 영화의 후반부가 특히 그러하다. 단서가 대사로만 풀린다거나, 관객이 이입할 틈도 없이 과잉된 음악을 삽입하며 상황을 고조하는 등이 이 영화의 커다란 흠이다. 이 흠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의 외딴 성>은 고딕적인 이미지 등 여러 매혹적인 이미지로 인해서, 또 감독의 선한 태도로 인해서 눈물이 나게끔 했다. 신형만의 회상 장면을 처음으로 본 순간처럼 말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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