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모종의 형식을 관객에게 구애하고 있지 않더라도, 분명 그를 떠올릴 때 막연하게 감지되는 형식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벌써,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29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물안에서>(2023)는 30번째 작품이 되기 전 도전적인 시도를 하고 싶은 '창작자의 욕망'처럼 느껴진다. 흑백과 컬러라는 기본값에서 벗어나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아웃 포커싱'이란 기법은 제법 참신하지만, '홍상수답다'고 하기엔 다소 멋쩍은 구석도 있다. 최근 오로지 대화를 기반으로 한 탈서사적 양식이 홍상수 영화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촬영기법의 변화가 얼마나 작품에 큰 변화를 촉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홍상수를 리얼리즘의 진정한 수사라고 성찬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인식하는 리얼리즘이란 단어에는 함정이 있다. 이를 편집이 덜 들어간 롱 테이크 촬영을 지목한다면, 편의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여기서 문제는 설사 다큐멘터리(영화)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의 시선에는 '리얼리즘'이라 분류할 수 있는 감식안이 각각의 기준에 따라 설정된다는 것에 있다. 결국엔 영화란 매체는 장르의 구별 없이 얼마나 더 '리얼'하게 구현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은 이미지의 변화에는 민감하지만, 연출 의도나 작품의 동태를 파악하는 정보량에 있어서 한정적이다. 이때 파생되는 문제는 일종의 선입견을 주지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안에서>는 마치 갑작스레 리얼리즘을 해제한 도전적인 작품처럼 보이지만, 이미지의 둔갑만으로는 이 영화를 그렇게 단정 짓기엔 꽤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됐든 홍상수의 관심사는 여전히 관찰하는 입장에 서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필자는 이전에 글 「'홍상수' 자신조차 모르는 영화란 암호」에서 그의 영화의 힘이 "관찰자인 관객에게 있다고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썼다.
홍상수의 영화는 일상의 표층에 중첩된 사건들로 하여금 자그마한 균열을 유도한다. 어떤 영화는 장소와 시간이기도 하고, 인물이기도 하다. 전작 <탑>이 모든 특성을 가미하여 수직으로 배열된 공간의 이미지가 통념이라 부를 수 있는 내러티브 혹은 인물의 일관성을 위반하는 방식이라면, <물안에서>는 수평 혹은 평면이라 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홍상수는 제목을 통해 의구심을 자아내면서 그가 가늠하고 있는 의미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도록 단서를 심어놓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먼저 선행해야 할 관찰은 <물안에서>라는 제목에 접착하고 있는 '물'이란 속성과 '안'이란 장소성에 관한 탐구다. 물의 속성이란 무정형(無定形)이다. 일정한 형식이나 모양도 없고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지 못하며 심지어 무질서하기까지 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해변이나 바다를 배경으로 삼았던 몇몇 작품이 있지만, 유독 이 영화가 '물'을 토대로 하는 것은 어떠한 형식이든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영화의 지표로 활용하고 있음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물안에서>의 맨 처음, 누가 들어도 홍상수 영화임을 강조하는 사운드트랙의 음조는 풍성하기보단 단조롭고 부드럽다기보단 둔탁하다. 이는 어떤 사건도 전조도 극적으로 예고하지 않는 무감각한 사운드다. 그리고 제주도의 어느 마을에 단편 영화를 찍기 위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마스크를 쓰고 여기저기 공간을 둘러보며 어디에서 촬영하면 좋을지 궁리한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 그동안 홍상수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이질적인 사물인 피자와 콜라를 먹고 마시는 이들을 보게 된다. 이때, 필자는 이를 보며 왜인지 모를 무질서함을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의 몇몇 시퀀스는 이런 어긋남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장소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감독인 성모(신석호)가 배우 남희(김승윤)에게 특정 장소에서 왔다 갔다 해보라고 말하거나 남희가 유채꽃을 바라보며 이쁘다고 말하고 상대 배우가 두, 세 번 반복하여 응답하는 등 말의 반복은 유난히 호소력이 없다. 굉장히 많은 부분 이러한 반복된 대사와 장소가 나오는데, 이것은 영화의 길이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물안에서>에서 의도적으로 도드라져 보이게끔 하는 부분으로 보기에도 별 무리가 없다.
우린 '안'이라는 이 '밖'의 반대 개념의 대비에 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물안에서>가 '안'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아웃 포커싱'을 활용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뭇 상투적이지만, 그의 관심이 표면에 있다는 것(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에게 본질이 있어서 어떤 모습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행동들이 있고 겉으로 나타나는 '표면'이 있는 거로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을 보면, 이 영화가 '안'이라기보다 '밖'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아웃 포커싱'의 용례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물 안에서 밖을 볼 때 사용된다. 이것은 인물의 상황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물안에서>에는 안에서 밖을 보는 장면이 전혀 없다. 오히려 물고기를 관찰하는 장면에서 우린 안이 아니라 밖의 시점에서 이를 본다. 직관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물 안에서' 보는 영화가 아니라 '물 밖에서' 보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물 안에서'라는 카메라의 초월적인 힘을 빌린다면 <물안에서>는 그 안과 밖이 불투명한 오로지 표면만을 관찰하는 영화가 된다. 내밀하게 보자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탐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진술함으로 이 영화는 그 안과 밖이 규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게 된다. 이는 홍상수가 바라보고 있는 실존적 세계관과 맞물린 양식이다. 더 나아가 우린 영화의 제작 동기가 먼저 '아웃 포커싱'으로부터 선행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장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물 안에서' 본다는 건 그만큼이나 알 수 없는 우연적인 지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콘트라스트(contrast)의 기법은 영화의 중추적인 장치 중 하나다. 밝고 어두움의 차이라는 뜻을 가진 이 개념은 이미지의 톤을 계속해서 변용시키지만, 그건 일말의 해명할 수도 없는 비일관성을 갖고 다가온다. 왜 식사 장면과 아주머니와의 대화 장면은 명료하게 보이며, 해변을 내려가는 너무도 흐릿하게 보이는가. 우린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물 안에서의 어떤 영향으로 퍼지는 파동의 주기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영이 적극적으로 이미지에까지 침투되는 건 홍상수에게 이례적이기도 한 게 사실이다.
또 <물안에서>의 포맷이 온전한 파일이라 보기 힘든 'QuickTime ProRes'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여기서 ProRes는 감상용이라기보다 영상 편집 중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실험적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든 측면도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포맷은 아까 언급했듯이 29번째 영화다. 그의 영화에서 전환점이 될 만한 시기로 본다면, 이번 시도가 완전히 형식을 뒤바꾸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어떤 의도'가 있다는 것만은 추정이 가능하다.
더욱이 이미지뿐만은 아니다. 수많은 작품에 있던 코드이기도 했지만, 매번 홍상수 자신을 메타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건 감독을 주연으로 대동하기 때문이다. 그의 대본도 대사도 지정하지 않는 즉흥적인 연출 방식과 롱 테이크가 주지시키는 건 연극적인 것도 있지만, 그의 집요한 관찰이 만들어 내는 '자기 반영성'에 있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관찰과 관찰이 서로 중첩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성모는 영화를 찍을 장소를 탐색하다가 돌 틈 사이에 있는 쓰레기를 줍는 여인을 만난다. 둘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쓰레기를 왜 치우냐, 얼마나 자주 하냐, 대단하다는 성모의 말에 동네 주민이기 때문이라는 그녀의 소탈한 말과 동시에 영화는 이 장면을 복기할 준비를 한다. 성모는 남희를 그 여인으로 설정하고 그 장면을 동일한 대사와 동일한 구도로 다시 찍는다. 그 프레임의 원근감은 성모는 알 수 없지만 카메라인 홍상수는 알고 있다.
이는 굉장히 기묘하다. 홍상수는 단 한 번도 주인공인 감독이 영화 일을 하는 것을 이렇게 직관적으로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린 이 장면에서 공허하지만 불화하고 있는 이질적인 형태인 영화란 세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다시금 반복되고 재현되고 있는 중첩된 세계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몇몇 영화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물안에서>는 관객인 우리가 어디까지 인식해야 하고, 그 인식이 과연 정당할지 자문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유를 요청하게끔 만드는 이번 영화가 분명 누군가에게는 큰 반향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필자는 그러했다.
영화 안에서 또 다른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인식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물안에서>는 점점 분명해지기도 하고 흐릿해지기도 한다.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인 성모가 영화 안에서, 그리고 카메라 안에서, '물' 안으로 들어가 찍힘을 당하는 장면은 홍상수가 나아가는 궁극적인 영화적 방향으로 여겨진다.
<물안에서>를 통해 홍상수 영화가 소멸할 것에 관한 예언을 본다. 이는 선입견에 관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에게 신화화되어 있는 듯한 홍상수 영화를 향한 선입견이 이 영화로 인해 소멸하고, 재정의될 수 있다면 그의 영화는 얼마든지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물 안에서>는 반드시 소멸하고 부활하는 그런 영화가 될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물안에서
in water
감독
홍상수
출연
신석호
하성국
김승윤
김민희
김소령
제작|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6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