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홍상수' 자신조차 모르는 영화란 암호
[Critique] '홍상수' 자신조차 모르는 영화란 암호
  • 이현동
  • 승인 2023.04.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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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통약 불가능한 <탑>의 표면들 사이(로)"

"인생의 마지막이 돼서야, 우린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 홍상수, 제72회 베를린 영화제 中에서

 

<탑>(2022)의 영어 제목이('Top'이 영어임에도 불구하고) 'WALK UP'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감독이 홍상수라는 점에서 의심하게 한다.

'WALK UP'은 크게 두 가지의 뜻이 있다. '고층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사무실·아파트)와 '오르다'(운동성) 이 단어가 명사와 동사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을지언정 <탑>은 이미지와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메시지에는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층계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점차 변용되는 찰나의 순간에도, 우리가 보고 듣는 건 분산된 관계의 파편들을 구조적으로 재조합하는 일뿐이니 말이다.

설사 많은 논평가가 <탑>을―혹은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완벽 해석'이라는 썸네일로 유혹할지언정 홍상수는 그것이 맞는 해석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할 것이다. 이를 탈-영화적이라 해야 할지, 진정 영화적이라 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선 그가 '영화'라는 것을 찍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먼저, 우리는 그가 첫 작품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인터뷰에서 표명했던 아래 문장에서 작품세계를 유추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본질이 있어서 어떤 모습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행동들이 있고 겉으로 나타나는 '표면'이 있는 거로 생각한다. 그 표면을 아주 정밀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굳이 본질부터 설명하지 않더라도 점점 모여서, 보는 이에게 와 닿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촬영하는 동안 난 촬영 현장에서 사람들을 항상 보고 있었다. 배우들, 영화 촬영을 구경 나온 사람들... 현장이 내게 무척 재미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장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남몰래 훔쳐보는 그들의 행동과 대화를 구체적으로 기억해두고 또 그게 종종 콘티가 되었다. 내가 못 본 걸 물어보기도 하면서 그 사람의 행동 표면이 나타나는 그걸로 시작하는 것이다." ―김상현, 「90년대 한국 영화에 나타난 일상생활」 中 감독의 말 중에서,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 석사논문, p.33, p.63, 1999.

 

'표면'이란 단어는, 어떤 사물을 유심히 보도록 유도하는 시선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식과 지각의 내용을 자기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주입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를 정의하거나 주제를 판별해내기 쉽지 않다. 그의 영화에 관한 태도가 감독 중심주의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형식'을 고수하는 감독이다. 그는 대본이나 아웃라인을 이른 아침에 작업하고 보통 아침이나 점심이 되기 전에 배우들에게 전달한다. 어떤 때는 특정한 대본 없이 긴 롱테이크를 소화하라는 주문을 하기도 한다. 배우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현장에 나와 연기를 하고, 그들은 오히려 짧은 시간을 집중하여 연기를 빠르게 마무리한다고 한다. 이러한 표면에서 나오는 역량은 배우에게 발현되는 것이지만, 그렇게 축적된 연기는 편집을 거쳐 홍상수의 주체적인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이를테면 하마구치 류스케가 일련의 반복적인 대본 읽기 훈련을 통해 연기에 대한 강박을 탈각하려는 시도였다면, 홍상수는 특정한 대사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극단에 서 있다. 또한 비전문 배우가 연기하는 류스케의 영화와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 홍상수의 영화에는 기능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연기라는 공통 분모 아래에서 어떠한 차이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표면의 실체는 연기 뒤에 있는 감독의 주체인 셈이다.

 

<인트로덕션>(2021) ⓒ 영화제작전원사

프로덕션의 개입이 없이 전적으로 홍상수가 모든 촬영, 각본, 음악, 편집으로 만들기 시작한 영화가 <인트로덕션>(2021)이었다는 사실은, 주제 의식의 변화를 주는 작품으로 판별할 수 있기에 사뭇 놀랍게 다가온다. 배우 신석호는 스태프보다 연기자가 많았고, 촬영이 없는 연기자 또한 현장에서 스태프 역할을 했다고 소회를 풀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홍상수의 영화는 여전히 형식적으로 큰 변화가 있지는 않다. '에이젠슈타인', '히치콕', '존 포드'와 같은 감독들이 몽타주의 적극적인 활용을 대표하는 창작자라면, 반대의 작업을 수행하는 이들은 '스트로브-위예'나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같은 감독일 것이다. 그렇다면 홍상수는 후자 쪽일까.

형식을 규정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면서도 그 적합한 성찰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과 앙드레 바쟁의 현실 재현에 입각한 '완전 영화'의 리얼리즘, 그리고 고다르가 생각하는 분할되어 있지만 단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될 수 있는 영화 이론을 대입해보기도 한다.

홍상수가 바쟁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바쟁을 소환한다면 홍상수를 긍정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제법 균형적인 접근으로 보이는 프랑스 영화평론가 장 미트리(Jean Mitry)의 말대로 '초월성 너머'에 있는 이미지의 기호, 그 실재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다작을 하는 감독인 홍상수가 주기적으로 배설하는 창작 욕구가 연달아 제시하고 있는 건 현실적이나 비현실, 자연적이나 초자연과 같은 비범한 기호들이다.

   

이때 만약 "영화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현재 홍상수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본질 또한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 나는 단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다."(이 답은 필자가 홍상수의 몇몇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본질인가? 창작자에겐 그럴지 몰라도 관객에겐 본질이라기보다 변용의 대상이다.

 

영화 <소설가의 영화>(2021) ⓒ 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 영화에서 본질이란 잡힐듯하면서도 발견될 수 없는 것처럼 주어진다. 같은 메시지처럼 보이는 이미지와 대사도 시선의 차원에서 본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표면에 달라붙은 무엇인가를 '볼' 뿐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진짜 '영화'라든지 '영화'적이다라는 수식어는 단지 편의적으로 표기하려는 시도로 소모될 뿐이다. 우린 무엇보다 '홍상수의 이미지가 무엇을 규정하는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장 뤽 고다르의 <동풍>(1969)의 대사를 빌려보자면 "이것은 정확한 이미지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

홍상수는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고다르의 말마따나 그보다 더욱 직관적으로 단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사람이긴 하다. 그의 영화가 어떤 영화적 쾌감도 선사하지 못하고 느슨한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부분 관객에게 모호한 인상을 주는 건, 그 단 하나의 이미지의 주체가 무엇인지 쉽사리 정의하지 못하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면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홍상수 영화의 모호하고도 비결정·중립의 방식은 그 의도 자체가 역으로 관객의 몫이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도록 구성된다.

 

영화 <도망친 여자>(2019) ⓒ 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의 영화가 점차 남녀 정사씬의 소거, 로케이션의 축소, 배경 음악과 촬영 방식이 사뭇 단조로워지는 인상을 주는 건, '영화의 힘이 관찰자인 관객에게 있다고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 사실 이 근거는 홍상수 스스로가 요약한 뉘앙스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배우와 장소로 시작된다" 이런 비슷한 말을 페드로 코스타도 한 적이 있다. "배우와 공간이란 표면에는 명증하게도 의미 부여와 연속성 속에서 미묘한 관찰을 촉구한다"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를 장소와 배우로 출발한다고 말한 데에는 여전히 그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실재 현장과 배우의 조건과 긴밀하게 연대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현재 홍상수의 영화가 리얼리즘의 명목 아래 얼마나 실재를 명증하게 재현하고 있는지를 미학적으로 탐구하는 건 이제는 불필요하다. '일상의 사회학'이라 치부한 어느 평론가의 말보다, 우린 앞서 언급한 '모른다'는 홍상수의 말을 유심히 짚어 보아야 한다. 그건 어떤 담론을 유발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가 신봉했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는 말의 결론이다.

영화든 삶이든 쉽게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진짜'라 든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유보적인 성질의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같은 말이 다른 방식의 구도, 배우의 조합으로 매우 불균질하거나 산발적으로 남용되고 있을지라도 우린 오로지 표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홍상수의 개인의 삶과 대비되고 있다는 걸 간파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에 진동하는 모호한 대상의 정체를 확정 짓고 구분하기보다 이 겉면에 접착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탑>의 수직과 선형의 힘을 추적하기

<탑>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는 홍신애 요리 연구가가 운영하는 강남구 학동역 인근의 '홍신애솔트 2호점'이다. 학동역 10번 출구 100미터 거리쯤 되는 이곳은 맛집으로도 소문이 나 있다. 이 장소를 특별히 구상하여 촬영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홍상수와 이웃으로 인연을 맺게 되면서 그저 장소를 임대한 것뿐이다. 보태자면 홍상수 대표로 운영하는 영화제작사인 '전원사'가 같은 건물 4층에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지 촬영을 위해 계획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를 봐온 이들에게 로케이션은 중심적인 요소라기보단 부수적인 쪽에 가깝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가령 <강변호텔>(2018)이 특정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남양주의 한 북한강 변에 있는 장소라는 것과 유사하다. 어쩌면 <탑>에서 장소가 함의하는 기능적인 특권은 앵글의 위치만큼이나 소박한 것이다. 한순간이지만 계단을 다소 급박하게 반복적으로 위아래로 왕복 이동하는 <풀잎들>의 김새벽 배우를 떠올려보자. <탑>에서 계단은 그러한 순환 하고는 조금은 다르다. 이는 촬영 환경과 이동 경로에 관한 의도된 설정으로 <탑>의 성격을 다른 방식의 운동성으로 간직하려는 움직임일 수 있다.

아무튼 영화 속 건물의 4층으로 이루어진 층계는 수직으로 분리된 '방'을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 각각의 층위로서의 이야기로 돌출되게끔 한다. 생각해보면 수평은 한 눈으로 방의 위치와 크기를 상상할 수 있지만 수직의 형태는 계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방의 구조를 쉽게 예상할 수 없다. 이는 결국 다른 차원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설사 홍상수의 영화 중 공간이 단조로운 양상(이동 거리상으로도 그럴 것이다)으로 구현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조합하는 건 눈으론 인식 불가능한 모호하게 설계된 도면이다.

 

카메라는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각각의 층계와 연결되는 문 앞 공간에서 인물과의 거리감만큼이나 미세하게 조율해야 하는 관계의 조건이다. 여기서 한정된 공간 안에서 반복적이지만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건 감독이 아닌 배우다. <탑> 또한 홍상수는 배우들에게 촬영장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모르는 장소에서 대본을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홍상수는 배우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영화를 완성한다.

<탑>은 외부적으론 장소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론 배우의 구애를 받는 영화다. 영화감독인 병수(권해효)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다른 배우들과 매칭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대체되었던 인물상은 질병(<극장전>, <강변호텔> <자유의 언덕>등)과 불륜(<풀잎들> 이전의 영화들)과도 같은 사건을 토대로 파생되었다면 <탑>에는 일말의 어떤 사건도 부각되지 않는다. 많은 이는 아무런 서사의 반동이나 조건도 없이 맺어지는 몇몇 관계를 바라보며 해석에 관한 리뷰를 찾아보며 지적욕구를 해갈한다.

다만, <탑>을 보며 의문 삼을 수밖에 없는 건 홍상수 모든 영화의 기점이 '표면'에 있다는 것에 있다. <탑>을 편의상 몇 부를 나눠서 인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조적으로 영화를 규정하거나 해석하려는 시도는 표면상으로는 의의가 있지만, 이러한 태도는 앞서 미트리의 말처럼 현실이란 암호를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를 관망하는 이들에게 과제로 주어지는 건 시간이 경과하면서 무엇이 변화하고 있는가를 주목한다. 특히나 병수는 이 영화의 중심인물이긴 하지만 과연 주체적인 인물인가라는 의혹이 든다. 그 이유는 그가 시간을 거듭해갈수록 규칙성에 따라 올라가는 기계와 같은 움직임을 하고 있는데에 있다. 물론 상승하는 움직임과는 별개로 병수가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이 수정되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함은 태도의 변화를 설명해주고 있긴 하다. 다만 그것은 홍상수가 의도적으로 주요 주제를 개시하려는 점진성을 지닌 움직임이라는 사실은 그를 생동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하고는 거리가 있다.

유운성 평론가가 <풀잎들>을 논평하며 삶의 긍정보다는 부정 사이에서 김새벽의 순환하는 정신적인 움직임을 펜로즈의 계단으로 표현했다면, <탑>에서의 운동성은 선형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대상과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 <인트로덕션>(2019), <당신얼굴 앞에서>(2021)나 <소설가의 영화>(2022), 그리고 <탑>에서까지 '진짜'라는 단어와 '하나님'이란 단어가 이전에 비해 유독 사용되고 있는 이유와 계기는 적확하게 알 수 없다. 영화에서 단호하고도 담담한 어조가 구현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홍상수는 자기의 진심을 대중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탑>에서 권해효 배우와 부부인 조윤희 배우가 맨 꼭대기 층인 4층에서 이뤄지는 신앙 간증은 영화에 관한 희망을 전망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체현되는 두 종류의 요상한 성질이자 이례적으로 특권적인 요소가 돌출되는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장소적 개념에서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제목이 <탑>이라는 것에서 그렇다. 3층에서 식당주인 송선미와 함께 살아가던 시절보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 둘은 실제 부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최고층인 <탑>에서 궁극적인 애정 관계를 설정하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다음으로 우린 건물 4층이 홍상수 감독의 운영하는 제작사 '전원사'라는 점에서 떠올릴 수 있다. 영화의 희망은 결국 이런 관계의 조항 사이에서 전망되는 것은 아닌가. 그가 4층인 탑에서 내려와 딸과 마주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한다. 초반에 병수와 딸의 거리감이 무색하게 친근하게 대화한다. 희망의 서사, 회복의 서사라고 말하고 싶은 착각 속에서 이 영화는 결국 다시금 탑으로 이동하게 될 병수에 대한, 아니 자신의 영화사 '전원사'로 가게 될 홍상수에 이야기로 지칭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가짜' 이미지가 '진짜'로 돌출되는 자기 반영적 예술이란 그 전 작품인 <소설가의 영화>에서도 이미지로 그려낸 바 있다. 이제는 인위적인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뀌는 인상적인 순간에는 계절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실제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결국, 홍상수 감독은 자기 반영적인 속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간의 경과를 통해 변화하는 병수의 태도와 미장센의 변화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홍상수의 표면 너머에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표면을 '본다'라는 시각적 행위는 물리적인 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와 반복(들뢰즈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자주 홍상수를 설명할 때 인용되기도 하는)의 이미지 너머에 구축된 형식화된 기호를 추적하는 역할을 통해 우리는 홍상수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필자는 오히려 홍상수의 영화에서 탈-시간적 구조를 모색함에 따라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내는데 더욱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환식 구조라는 점에서 시간은 그렇게 중요한 명시적 대상은 아니다. 그렇기에 점점 더 그의 영화는 장소, 연기보다 사용되는 대화의 텍스트가 주요해진다. 이제껏 홍상수가 끊임없이 관찰하고 가공해낸 수많은 표면이 닿은 것이 '감각'이라기보다 '있는 그대로'라는 명제 아래 복기 되었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말이다. '진짜', '하나님' 이후에 어떤 형식을 제시할 수 있을까.

곧 개봉을 앞둔 홍상수의 다음 작품인 <물속에서>(2023)가 <탑>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장소라는 걸 고려한다면, 우린 그가 상정했던 장소를 다시금 감찰하며 어떤 방식이 되었든 이제는 홍상수를 만날 채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해변이든 호텔이든, 주막집이든, 탑이든 하늘이든 말이다. 우린 스크린으로부터 주어지는 영화를 삶으로까지 확대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을 가능케 하는 것이 홍상수의 영화의 묘미라 믿게 된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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