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란 무엇인가. 언데드(Undead)의 한 종(?)으로써 시체가 되지 못 한 자다. 죽었지만 죽지 못한 자. 이 형용 모순은 좀비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일 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신체 강탈자로서 끈질긴 자기유지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죽이는 것보다 이들에게서 도망치는 게 빠르다.
그렇기에 좀비를 다룬 영화에서는 법칙이 존재한다. 생존자들은 좀비에게서부터 도망을 쳐야 한다. 장르 성립의 법칙 중 제1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물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동한다. 이 이동은 부조리하다. 먼저 목적지가 부재하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모르지만, 일단은 뛰어야 한다. 설사 안전한 공간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 공간에는 새로운 위험이 발생한다. 그 불화는 대부분, 인간의 심적 동요를 통한 감정적 불화일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좀비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극단적 상황을 관찰하기 위한 장르물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통해 인간 기저의 비인간성을 확인한다. 이 위험한 견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험을 느끼게 한다. 진짜 위험한 건 좀비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인간이구나라는 사실.
여기서 우리는 연상호의 <서울역>(2016)을 생각해보자. 이 영화는 좀비물의 법칙을 잘 이해한 동시에 연상호 특유의 암울한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서울역>에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좀비가 발생한다. 우리가 보게 되는 첫 희생자는 노숙자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자. 영화 초반 ‘보편적 복지’를 이야기하던 두 청년의 대화 이후, 노숙자를 돕지 않는 것으로 감독은 이 점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우리 사회 안에 속해있는 동시에 배제되어 있다.
이 배제를 시작으로 그들은 증식한다. 노숙자를 중심으로 시작된 증식은 경찰서로 이동한다. 좀비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경찰(이 또한 장르의 법칙 중 하나)은 노숙자들의 폭동이라고 상부에 보고한다. 사회 유지에 목적이 있는 경찰은 이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후 좀비 영화의 문법대로 대규모 좀비가 출현하고 군상극의 형태로 변환된다. 경찰과 군대가 그 규모에 맞게 출동하지만, 이들 또한 무능하다. 연상호가 겨냥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서울역>은 5.18과 08년의 촛불시위를 경유한다. 계엄령과 살수차를 동원한 명박산성의 등장은 명백하게 한국의 근현대사를 명시한다. 때문에 <서울역>은 정치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소통 불가능과 경청의 부재를 명확하게 꼬집는다. 영화 초반 언어 전달력이 부족한 노숙자의 이야기를 잘 듣기만 했더라면, 하다못해 경찰서 안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인간들을 구출했더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영화 안에서 북한 빨갱이의 짓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판단의 부재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부산행>(2016)에서 실시간 검색으로 다시 한번 북한의 소행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좀비물은 사실상 인간의 폭력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다. 연상호는 여기에 한국의 이야기를 첨가한 것이다. 가장 소외된 곳에서 발생한 절망이 확대된다. 이 확대는 정치적 무능을 일삼는 상위 계급으로 전염된다. 결국 이 전염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단 한 명만이 좀비화를 피했다. 인간으로 죽는 존재는 기웅 밖에 없다. 석규에게 칼로 목이 베인 기웅은 영화 내에서 좀비가 아닌 인간으로 죽는다. 그동안 보지 못한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기웅에게 인간사라는 축복(?)을 준 것일까. 유일한 죽음은 영화 속 수많은 언데드(Undead)들 중에서 가장 편안한 최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지 못해 귀천을 떠도는 시체들은 계속 인간을 찾아 움직일 것이다. 복수와 복수와 복수를 하기 위해. 연상호의 니힐리즘에서 죽음은 오히려 속 편한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서울역
Seoul Station
감독
연상호
출연(목소리)
류승룡
심은경
이준
김재록
장혁진
김종수
한성수
명승훈
제작 스튜디오 다다쇼
배급 NEW
제작연도 2016
상영시간 9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6.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