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빛난다
모든 것은 빛난다
  • 배명현
  • 승인 2019.09.10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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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가 왼손잡이에게
사진 ⓒ (주)엣나인필름
사진 ⓒ (주)엣나인필름

 

10센치가 채 되지 않는 몸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존재가 있다. 새 중에서도 가장 작은 새 벌새. 그 작고 가녀린 몸으로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몸보다도 더 작은 날개를 휘젓는다. 그렇게 작고 가벼운 몸이지만 쉽게 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벌새는 초당 80회의 날개짓으로 힘겹게 몸을 띄운다. 그렇게 벌새는 자신의 작은 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영화 '벌새'는 그 작고도 힘겨운 한 명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994년을 중학교 2학년으로 보내는 은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녀는 집과 학교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를 가자고 외치는 선생님과 억압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 그 둘의 뒤에는 사회 시스템과 권력의 답습이란 범인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둘의 잘못이 무마되진 않는다. 그 억압 속에서 은희는 살아야 하니까.

그녀에게 탈출구는 가정과 학교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지숙, 유리, 지환. 하지만 잠시나마 좋아했던 감정을 가졌던 유리나 지환은 은희를 온전히 품어 줄 수 없다. 지숙 또한 친구로서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존재이지 길을 열어주는 메시아 적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은희에게 새로 온 한문 선생인 영지가 찾아온다. 둘은 마치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만 같다. 은희는 자신에게 찾아온 왼손잡이인 그녀에게 강한 끌림을 가진다.

왼손잡이가 쓴 글의 의미는 왼손잡이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의 말('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참 많지'와 같은)은 은희의 세계를 바꾸어 놓는다. 아니, 그동안 보아온 세상에 대한 시점을 변화시킨다. 영지는 은희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버텨야 하는 것, 견뎌야 하는 것들 그리고 저항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격렬하게 지지한다. 왜? 영지는 자신이 실패했으므로. 

그녀가 부르는 '잘린 손가락'과 힘이 들 때는 손가락을 보라는 말은 영지의 상황을 대변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손가락을 본다. 하지만 손가락이 잘리면 손가락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영지는 육체적 손가락이 아닌 마음의 손가락이 잘린 인물이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보았을 때 그녀가 80년대를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잘린 손가락'을 부르는 이들의 이상향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책장에 꽂힌 책 목록 또한(가부장 사회와 페미니즘 관련 서적)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과제로 존재한다. 영지의 소망은 실현에 닿지 못하고 현실에 미끄러진다. 그러다 결국 다리의 붕괴로 실제 손가락까지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진 ⓒ (주)엣나인필름
사진 ⓒ (주)엣나인필름

 

이제 은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녀가 너무 일찍 홀로서기를 배운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모든 사건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오지 않던가. 성수대교의 붕괴는 1994년을 살던 이들 전체가 겪은 이야기이다. 이제 은희가 겪은 상실의 아픔은 이제 은희만의 것이 아니다. 감독은 이 붕괴로 겪은 공동의 아픔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려 한다. 영지에게 닿지 못한 편지 마지막 줄에 쓴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는 이제 주인공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의 아픔으로 확장된다. 영화는 은희가 운동장 가운데서 학교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을 끝이난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세계(운동장)에서는 제아무리 바라보기만 한다고 해서 제 3자가 되는 건 아니다.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 그녀는 세상에 '참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잠시 운동장에 있는 이들의 움직임을, 웃음을, 생기를 바라본다. 동시에 누군가 자신의 새로운 구원자 혹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바라본다'. 세계는 그녀에게 소중한 것을 가져가고 상실을 주기도 했지만 새로운 왼손잡이를 찾아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반복될 것이다. 영지가 은희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세계를 열어 주었듯이 은희는 누군가에게 또 더 나은 세상을 말하게 할 것이다.

 

사진 ⓒ (주)엣나인필름
사진 ⓒ (주)엣나인필름

[코아르CoAR 배명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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