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토막 난 타자의 욕망을 마주하는 방식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토막 난 타자의 욕망을 마주하는 방식들
  • 이현동
  • 승인 2024.03.25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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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표하는 란티모스 타자론"

'요르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가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에 뛰어들었던 건 다름 아닌 TV 광고, 뮤직비디오, 댄스 영화 촬영이었다. 현재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몇몇 전형적인 뮤직비디오는 초기 란티모스의 작업과는 꽤 동떨어진 성향의 작품이다. 이 작업은 순전히 자본의 산물로서 그 목적성이 숨 가쁘게 돌아가야만 하는 그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당시에는 영화 제작자와 영화 산업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그리스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광고를 제작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영화 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적은 비용에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카메라, 필름, 촬영 장소, 비전문 배우를 섭외해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처음 찍은 영화 <내 가장 친한 친구>(2001)는 무난한 범작으로, 지금에서야 보면 기존 란티모스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물과 공간의 쌍수(雙數)성인 반영의 이미지를 통해 그가 매설해 놓은 주제 의식을 발굴할 수 있다. 또한, <더 페어버릿: 여왕의 여자>(2018)에서부터 자주 드러나는 어안 렌즈(Fish-eye lens) 사용을 예언하는 어항을 들여다보는 등장인물의 왜곡된 시선은 그가 시도하려는 영화에 대해 짐작해 보게 된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이후 그리스 영화계에서 주요한 신성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건, 다름아닌 <송곳니>(2009)가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으면서였다. 일종의 가부장 구조, 언어와 지식의 박탈, 폭력의 재생산 등의 사회 실험을 연상케 하는 <송곳니>의 파급력은 란티모스를 재고하게 만든 영화 중 하나였다. 한편으로 란티모스가 제작에 참여한 아티나라켈 창가리의 영화 <아텐버그>(2010)도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그리스 사회의 내부를 급진적으로 조명하면서 점차 확장되는 그의 세계관을 다시금 짚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에서 촬영했던 3부작 <키네타>(2005), <송곳니>, <알프스>(2011) 이후, 란티모스는 런던으로 이동하면서 그간 건조하고 절제된 기법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촬영 기술, 사운드트랙의 삽입, 유명 배우 캐스팅, 로케이션의 변화 등을 통해 제2막을 열었다. <더 랍스타>(2015), <킬링 디어>(2017), <더 페어버릿: 여왕의 여자>, <가여운 것들>(2023)로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뿐만 아니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크리틱스 초이스, 골든글로브 시상식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거머쥐면서 거장 반열에 올라섰다.

란티모스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묘한 지점 중 하나는 인물뿐만 아니라 이미지 또한 자아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일정하게 산포되고 있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구조다. '로베르 브레송'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공연히 언급하는 란티모스가 그를 경유하면서 생산하는 의미에는 건조한 톤과 타자의 욕망이 있다.

 

ⓒ 영화 <송곳니>(2009)

권력과 통제

최근 개봉한 <가여운 것들>(2023)을 제외하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에는 '주체'가 드러나는 법이 없다. 이 주체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명제에 근원하고 있는 것으로 사유하는 자아, 즉 '의식'을 나타낸다. 이 명제는 근대적 인간을 갱신하는데 기여했으며 결과적으로 신으로부터 매개된 자아가 아니라 개인으로부터 그 목적지를 찾는데 그 좌표가 있었다. 시대가 흘러 이런 데카르트의 근대적 주체에 관하여 프로이트는 꿈에 근거하여 '사유하지 않음'인 무의식의 주체를 역설했으며, 푸코는 이전 주체가 진리, 역사의 문제가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점을 규명함으로 근대적 주체라는 유령을 퇴치하기 시작했다. 주체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주체는 의식적 주체가 아니라 구조화된 주체라 정의할 수 있다.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메타적으로 다룬 자크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개념은 란티모스의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 짧게 설명하자면, '상상계'는 거울단계로서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하는 단계다. 이는 과도한 욕망으로 자신의 이상향을 거울에 투영하는 단계이다. 상징계는 최초의 (대)타자인 부모로부터 언어를 교육받으면서 권력과 배후의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실재계는 이 두 종류를 비롯한 타자에게 얻는 외부의 사건을 받아들이는 여러 표상들이 뒤섞인 미지의 영역이라 설명한다. 영화를 라캉식으로 적용한다면, 상상계는 프레임(인물, 배경), 상징계는 서사와 대사, 실재계는 몽타주일 것이다. 영화의 기본적인 단위인 프레임은 설명되지 않은 공백을 통해 자기 반영성이 지시되며(그런 측면에서 '미술'과 '사진'은 부단히 관찰자의 욕망이 다채롭게 기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서사와 대사는 감독의 의식을 개방하여 의미가 분화하는 과정을 추리할 수 있다. 이를 조립하는 몽타주는 영화가 구성하는 주제 의식을 구체화함으로 표상의 얽힘을 깊이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분류와 대입은 구조가 갖고 있는 여러 관계망과 일정한 패턴을 파악할 수 있는 지점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란티모스는 무엇을 강조하고 심지어 생략하거나 절단함으로써 얻는 영화적 주체는 무엇일까. 주체는 모호해진다. 가령 서사와 대사의 불균질함 때문에 프레임에만 머물러 있는 영화가 되거나 내용 면에서는 부모와 같은 존재에게 받은 폭력과 통제로 인해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를 유독 잘 드러내는 초기 작품 <키네타>, <송곳니>, <알프스>를 관통하는 주제인 '통제'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재현'은 영화적 주체를 찾기 위한 돌파를 강행한다는 측면에서 그의 영화는 의도적으로 결핍되고 부재한 것으로 남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키네타>(2005)

란티모스의 첫 번째 작품인 <키네타>는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전무한 아트하우스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잔류하고 있는 구조는 란티모스 영화의 기원을 관측하기에 무리가 없다. 그리스어 단어 '키네타'는 주로 활력, 활동성 등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는 활력적인가? 활력을 과시하는 핸드헬드와 주제와 형식을 통합하는 롱 숏은, 이 영화의 톤을 활력 있고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화하게 만든다. 핸드헬드가 캐릭터의 특성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숏이라면, 반대로 롱 숏은 자유를 박탈당한 캐릭터가 통제당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키네타>는 전복된 차를 지켜보는 사진사가 그 안에서 찾아낸 테이프를 듣는 첫 장면을 시작으로, 호텔 객실 청소부 또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장면을 연결한다. 여기서 이어폰을 착용하는 여성은 자기 손을 묶고 목을 조르는 연기를 하다가도 이어폰이 귀에서 빠지면 다시 집어넣고 연기를 지속한다. 곧이어 자동차 운전사는 멈춘 차를 이리저리 훑어보는 숏 이후에 세 명이 모여 범죄 현장을 재현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롱 숏은 캐릭터의 표정과 프레임을 제한함으로써 공간의 통제를 경험하게 하고, 운전사의 말은 여성의 행위를 통제하며 기계와 같이 절제된 연기를 선보인다. 우리는 이를 근접해서 촬영하는 사진사의 앵글이 아닌 그 밖에 자리한 카메라의 촬영이 반복되면서 통제는 점차 강화된다. 어떠한 적확한 동기도 설명하지 않는 이 영화는 넓게 보면 부모 역할을 하는 운전사로부터 여성이 통제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며, 영화가 주체로 자리하기 위한 과정을 타자로부터 그려낸다.

특히, 자살을 시도하는 여성을 구조하는 것이 사진사라는 점에서 이는 여러 각도로 촬영한 타자의 이미지로서 영화의 구조를 생각하게 한다. 그다음 영화인 <송곳니>와 <알프스>도 배경은 다르지만, 그 경우에 있어선 이 구조에 충실히 부합하는 영화들이다. <송곳니>는 언어와 권력을 가진 대타자인 부모가 아이들을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체현하는 감정 혹은 감각을 통해 자신이 가정에서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러한 권력관계에 종속된 아이는 일률적인 행동 패턴으로 습득하게 되고, 이에 장악된 아이는 온전히 대타자인 부모로부터 주체로 전진할 수 있는 길을 차단당한다.

<송곳니>는 테이프에서 나오는 언어의 개념을 자녀들에게 주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행'은 바닥을 만들 때 쓰이는 매우 단단한 재료라든지, '카빈총'은 아름다운 하얀 새라든지 하는 부정확한 개념은 언어적인 권력이 최초로 행사되는 부모라는 점에서 영화는 적확하게 라캉 적이다. 더욱이 라캉의 상징계가 완전히 인간을 장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지점에서도 이 영화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의 성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회사 여직원을 집으로 끌어들여 성관계를 맺게 하는 이 커뮤니티는 가부장제도, 자본주의, 기계적 유토피아를 그리며 통제성을 프레임에 담는다. 집 말고 외부로 출입이 불가능한 자녀 셋은 그 안에서 놀이를 하기도 하고, 그 밖으로 물건을 던지며 은연중에 자유를 호흡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외출할 수 있는 아버지는 개 훈련소에 맡긴 개를 찾으러 방문한다. 아직 훈련 단계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주인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경비견을 원하냐"는 말에 아버지는 "그렇다"고 답한다. 영화는 이처럼 집 밖을 나갈 수 없는 경비견처럼 완전한 훈육이라는 이상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이어서 아버지의 방침이 가장 큰 의문을 제기하는 건 물리적인 신체의 반응으로부터 일어난다.

아들이 정기적으로 맺는 성관계와 자매가 서로의 신체를 핥고 고용한 직원의 음부를 탐닉하는 데서 비롯한 야릇한 감정은 아버지가 교육하지 않은 것들이다. 여기서 음부를 핥은 행위는 자궁으로부터 탄생한 인간이 다시금 회귀하고 싶은 유아기적 욕망을 반영하는 상상계의 영역이자 반대로 주체로 진입하는 입구이기도 하다. 그것이 타자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아버지는 자식이 집을 떠나기 위해선 '송곳니'가 빠져야 한다고 말한다.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송곳니'를 제거한다는 건 집을 떠나는 동시에 대타자로부터 다른 타자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송곳니를 제거하고 차 트렁크에 숨은 딸을 찾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스탠리 큐브릭 <샤이닝>에서 잭 토렌스(잭 니콜슨)의 광기를 닮았다. 어쩌면 현대판 샤이닝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가 구현하고 있는 폐쇄적 장소 배치와 편집증적 강박은 초현실적인 큐브릭의 거대한 장소와는 다르게 너무도 현실적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밖으로 이동은 했지만, 트렁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을 조명하는 이 영화는 결국 통제당한 인간을 그린다. 그녀는 결국 나갔을까. 흥미롭게도 다음 영화에서 그녀는 다시 또 등장한다. 세계관이 연결된 것처럼. 트렁크 밖으로 나온 것처럼.

 

ⓒ <알프스>(2011)

통제 3부작인 마지막 편 <알프스>에선 '역할극'이라는 장치를 이용한 상징계의 자리, 곧 부모로부터 얻은 다양한 정보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여성이 도리어 통제당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치료자를 자청하는 그룹 '알프스'는 유족에게 위안을 가져다주기 죽은 사람을 사칭한다. 일주일에 몇 시간씩 유족이 제공한 대사를 암기하면서 유족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알프스의 팀 리더는 팀명을 정하게 된 동기에 대해 첫 번째는 뭘 하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것은 상징이며 알프스산맥보다 높은 산이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알프스 산맥은 다른 산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나라에 걸쳐있는 산맥이다. 곧 팀을 주도하는 리더는 언어를 이용하여 역할극을 주문하며 인물을 통제하는 또 다른 부모의 형상으로 점철된다.

이 팀은 <키네타>의 재현을 소환하는 역할극을 펼치면서 자녀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서 감정의 통로를 출입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연민에 따른 행위일지 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일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 또한 상상계의 영화적 언어를 무산시키고, 오로지 권력의 발화인 상징계로만 영화를 규정한다. 또한 <송곳니>에서 첫째 딸을 연기한 아게리키 파루리아가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와 의뢰를 받아 역할극을 하는 가짜 아버지의 관계는 동시에 화목한 가정을 연기한다는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키네타>의 호텔 객실 청소원과 <알프스>의 간호사가 갖고 있는 정체성이 점차 미끄러져 또 다른 정체성으로 변환하는 과정은 이와 동일하다. 그것이 본래의 자신인지 연기를 하는 자신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린 마지막 장면은 동시에 란티모스 영화의 구조와 영화의 주제의식에 대한 적극적인 실마리를 제시한다. 그녀는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는 동시에 집에서 쫓겨난 희생자로 변모한다. 이때 희생을 감수하면서 얻는 효과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체조선수의 코치 사이의 관계다. 설령 그것이 표면적인 관계처럼 보일지라도 신뢰가 회복된다는 점에서 이 간호사의 희생은 란티모스 영화의 제2막을 개방한다. 그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그리스에서 런던을 향해 차츰 다른 길을 나선다.

 

불온한 타자와 공존하기 위해

이제까지 라캉의 논의를 살펴보았지만, 결국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에서 머무르는 건 이미지에 부표하고 있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주체다. 물론, 그가 매번 의도한 결말에서의 '개방'은 부재를 통해 얻는 불명확한 주제의식 같은 것이었지만(개인적으로 <키네타>, <알프스> 같은 작품에서는 아피찻퐁 위라세라쿤의 <징후와 세기>(2006) 같은 작품이 떠오른다), <더 랍스터>(2015)를 시작으로 그는 조금 더 명확한 주제와 배경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전에 90초의 아주 짧은 단편 영화 <넥타이>(2013)가 있었는데, 이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 70주년을 기념해 70명이 만든 초단편 70편을 엮은 '베네치아 70-퓨처 리로디드 프로젝트'(Venice 70-Future Reloaded Project) 중 하나다. 총을 겨누는 두 명의 아이가 있다. 동일한 교복을 착용한 아이들은 이를 지켜보고 한 아이는 카우보이 대결처럼 심판을 본다. 총에 맞은 한 아이가 누워 이런 대사를 한다. "I have more memories than if I were a thousand years old"(나는 천 살이 된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갖고 있다) 이 말은 축적된 여러 영화적 기억에 대한 암시를 나타내는 동시에 어느 한쪽이 희생되거나 혹은 희생당할 때 끝나는 서술 관계를 이미지로 표현한다. 대표적으로 <더 랍스타>(2015)나 <킬링 디어>(2018)에서 시각을 잃게 되는 과정이나 아들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은 <넥타이>가 드러내고 있는 구조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셈이다.

 

ⓒ 영화 <더 랍스터>(2015)

통제의 이미지를 미학적으로 배열한 <더 랍스타>는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화한다는 설정을 통해 초현실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주제를 명료화한다. 45일 이내에 호텔 안에서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이 된다는 이 영화의 설정은 제한된 공간, 설령 그 공간을 벗어난 숲에서도 연기를 해야만 하는 통제를 다시금 모방한다.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인물들은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데이비드(콜린 패럴)는 호텔로 이동하면서도 울음을 참는다. 혼자가 된 그가 감정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건 이것이 그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연기이기 때문이다. 호텔에선 혼자선 성욕을 풀 수 없도록 자위를 통제하며, 사정을 하기 직전까지 성적인 자극을 주어 커플의 유용성에 대해 자각하게 한다. 심지어는 커플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아이 서비스도 제공한다. 그러나 커플을 유지하는 장치는 불온하다. 커플이 되지 못한 이들은 호텔 밖을 도망쳐 나온 숲에 거주하는 이들을 사냥해서 기간을 연장하는 방법밖에 없다. 호텔 밖인 숲에서도 구축되고 있었던 '외톨이'라는 그룹이 제시하는 또 다른 통제는 재현의 법칙이 무너진 사회, 곧 어디서든 연기를 해야만 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넥타이>에서 총을 겨누는 장면에서 죽음 혹은 상실이나 부재라는 대조된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더 랍스타>의 첫 장면에서 한 여성이 두 당나귀 중 한 마리를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유념한다면, 이것은 란티모스 영화를 구성하는 일종의 규율이자 구조의 모티브가 된다. 외톨이 그룹의 리더(레아 세두)가 호텔 지배인 부부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남편에게 총을 건네주며 당신과 아내 둘 중에 한 사람을 쏘면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자신이 살고자 아내에게 총을 쏜다. 비록 빈총이었지만, 이 장면에서 보이는 위선은 명백한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준다. 또 데이비드와 근시로 살아가던 여자 동료(레이첼 바이스)는 외톨이 그룹이 가장 삼가야 할 조항인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이 플롯은 복제된다. 리더는 여자를 장님으로 만들고,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칼을 휘두르다 메이드를 죽이는 댓가 지불의 형태가 계속된다. 란티모스는 이 플롯을 마지막 시퀀스에서 동일하게 다룬다. 외톨이 그룹에서 도망쳐 나와 그녀와의 공통점을 만들기 위해 데이비드는 칼을 들고 화장실에 간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눈을 찔렀는지 알 수 없다. 근시 여자가 그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그 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인물의 행방을 드러내지 않는다. 총이든 칼이든 영화의 선택은 상실과 부재로의 현실을 재현하려는 것 아닐까.

<더 랍스터>가 가장 뚜렷하긴 하지만, 그의 몇몇 영화에서 관측되는 눈을 가리는 안대는 의문을 양산한다. 란티모스 영화의 '기호'처럼 각인된 장면이 있다면 '시각'의 통제다. '보기'에 대한 상실은 그가 애용하는 장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완전한 통제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로서 이를 이곳저곳에 분사한다. 예를 들어 <송곳니>에서 눈을 가리고 자녀들이 술래잡기하는 장면에서 그들이 종착지는 결국 부모이며, <킬링 디어>에서는 눈을 가리고 회전하며 총을 들고 죽음을 선택하는 자도 부모이다. <가여운 것>에선 그런 장면이 없지만, 조금은 다른 경우일지라도 아버지 격인 고드윈 박사(윌렘 데포)에게 돌아가는 것도 이를 연상시킨다. 중복되고 있는 이 장치는 가장 원초적인 대타자인 부모와 사회가 설정해 놓은 규범과 법을 영화에 투영시킨다. 이 문제에 관해 란티모스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희망적으로 낙관하기보다 건조한 태도로 관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 <킬링 디어>(2017)
ⓒ <더 페어버릿: 여왕의 여자>(2018)

이후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 등장하는데, <킬링 디어>와 <더 페어버릿: 여왕의 여자>다. 그리스 로마 신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오브제로 한 <킬링 디어>에서는 가시적으로 등가 교환의 법칙, 그리고 모방의 법칙을 영화에 활용한다. 신화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아르테미스의 성스러운 사슴을 사냥한 아가멤논이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데, 이를 알게 된 아르테미스가 사슴을 대신 제물로 바치고 그녀를 구원한다. 이 이야기는 마치 성서에 등장하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을 형상화한다. 이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유지하던 법칙인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보여주는 반영의 이미지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다. <킬링 디어>에서 사건의 원흉을 제공하는 수술 실패 장면은 그간 란티모스가 지시하던 교환의 법칙을 가동한다. 이를 집도했던 외과 의사 스티븐(콜린 패럴)은 성공한 의사로 승승장구하지만, 수술 실패의 당사자 가족인 마틴(배리 키오건)은 그 집안에 저주를 내린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1단계 하반신 마비에서부터 4단계인 사망까지 가지 전에 가족 중 누굴 죽일지 빨리 선택하라고 말한다. 마틴의 예언이 점차 적중하여 단계별로 고통을 겪는 자녀들의 모습과 살기 위해 가족들은 연기를 한다. 아가멤논인 아버지의 권력,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신적 권력을 상징하는 아르테미스인 마틴은 그들의 주체를 강탈한다. 보편성을 지닌 이 권력은 가장 원초적인 규범인 생존을 인질로 삼아 과거의 신화를 지금의 세계로 끄집어낸다.

다음 작품 <더 페어버릿: 여왕의 여자>과 <가여운 것들>은 권력을 사용하는 대상을 온전히 여성으로 변용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에 있는 작품이다. 그 전의 영화가 대타자에 의해 주체가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이었다면 두 영화는 적극적으로 존재 방식을 구현하고 심지어는 권력을 행사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동시에 엠마 스톤의 활력적인 연기 톤은 <가여운 것들>까지 연결되는데 큰 접점을 내포한다. 영국 왕실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과 그를 보좌하고 있었던 공작부인 사라 처칠(레이첼 와이즈)의 관계를 비틀고 들어가는 아비게일 힐(엠마 스톤)의 이야기다.

초반에 아비게일은 몰락한 귀족 가문 하녀로 일을 하며 수모를 겪는다. 몸이 벗겨진 채 강제로 샤워를 당하기도 하고, 마루를 닦는 용액 성분을 잘 몰라 손을 다치기도 한다. 그녀가 겪는 통제는 궁궐 안에서 오리를 이용해 우스꽝스러운 경주 게임을 하는 귀족들의 전유물로서 은유된다. 여기서 사라는 앤 여왕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반대 세력에 의해 압박을 받는다. 아비게일은 이 혼란한 정세를 파고들어 여왕의 통풍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를 구해 발라준다. 이 사건을 통해 여왕과 아비게일은 점차 친밀해진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사라는 둘이 함께 잠을 자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 장면은 란티모스의 몇몇 작품하고도 연결되는데, 타자와 잠을 청하는 행동 혹은 성관계는 란티모스 영화에서 기계적인 스킨쉽일 경우가 대다수다. <송곳니>에서도 아들이 침실로 들어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갈라놓고 잠을 청하는 장면은 권력을 통제하거나 장악하려는 습성을 표출한다. 이것은 유일하게 권력으로 포박된 관계를 해체할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나아가 아비게일이 점차 왕궁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토끼를 밟는 장면이 포착되는데, 이것은 <송곳니>에서 고양이를 잡는 아들이나 <가여운 것들>에서 개구리를 죽이는 것과도 오버랩 된다. 이것은 특별히 교육하지 않아도 권력을 숭상하거나 표출하려는 본능과도 관계한다.

처음 상술했듯이 <더 페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는 돌출되는 어안렌즈는 단편 <니믹>(2019)과 <가여운 것들>까지 연결된다. 이는 주체를 왜곡과 반영이라는 뒤틀린 시선으로 보려는 탐구이자 세계관을 통합하려는 시도다.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이 굴절은 그런 의미에서 형식과 주제적 변용을 충실히 이행한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누구나가 통제자로 군림할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가여운 것들>까지 그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시한다.

 

영화 <가여운 것들>(2023) ⓒ 월트디즈니 컴퍼니

 

낯선 욕망의 희망 서사

사실 <가여운 것들>에서 보게 되는 건 대타자로부터 오는 통제, 그것이 부모, 시스템, 체계로부터 상실과 부재를 경험하는 수동적인 양상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타자를 욕동한다는 지점에서 지극히 '희망적'이다.

<가여운 것들>이 보여주는 주체가 형성되는 투명한 과정을 두고, 누군가는 과잉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별 무리가 없다. 수많은 감독이 제작비를 갖추었을 때, 방대해지는 기술력과 주제의 변형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불만과 비판을 쏟아낼 여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불어 할리우드 스타인 엠마 스톤이 <더 페어버릿: 여왕의 여자>와 단편 <블릿>(2022)을 함께 하면서 란티모스 영화 톤이 변형된 것 또한 지적할 수 있는 요소다. 이 영화는 여러 레퍼런스를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필자가 상기했던 작품은 베르너 헤어조크의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와 기예르모 델 토르의 <피노키오>(2022)이다. 권력을 주창한 상징계의 힘을 가진 특정 대타자가 주어지지 않는 이 영화에서 교육, 물성, 종교, 물리적인 힘이 구축한 권력의 방지턱에 넘어가지 않는 자가 직관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상찬, 어린아이가 순수하게 가질 수 있는 타자를 향한 따뜻한 애정은 <가여운 것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여운 것들>은 한 여성이 회의를 느껴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을 우연히 발견한 과학자이자 의사인 고드윈 벡스터 박사(윌렘 데포)로부터 시작한다. 뱃속에서 살아남았던 아이의 뇌를 엄마 몸에 이식하여 성인 여성의 몸을 얻은 아이는 걷는 법과 언어, 먹는 법, 예절을 배운다. 이것만 본다면 <송곳니>를 떠올리겠지만, 이 영화에서 하나님이자 아버지 역할을 하는 벡스터 박사는 딸이 된 벨라(엠마 스톤)를 무조건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을 용납하고, 우연히 발견한 성욕을 통제하기보다 그녀를 관찰하기 위해 고용된 맥스 (라미 유세프)에게 성욕을 위해 결혼을 권유하기도 한다. 여기서 성욕을 욕망하는 자위행위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사과'라는 점에서 우린 성서의 창세기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불순종의 행위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초래하지만, 영화에선 카사노바이자 변호사인 매력적인 남성 던컨(마크 러팔로)에게 설득당해 스스로 집을 나선다.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녀의 자유분방함을 납득하지 못한 던컨은 그녀를 떠나 도박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벨라는 불우한 이들을 바라보며 도박으로 던컨이 모았던 돈을 순수하게 전달하려는 연민을 보이기도 하고, 우선 돈을 모아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몸을 파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다채로운 체위와 여러 타입의 남성을 만나는 숏은 물성을 기반으로 한 권력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로 점철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순수하지만, 란티모스의 영화를 통틀어 봤을 때 진실로 이질적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고드윈의 편지를 받게 된 벨라는 고향인 런던으로 향한다. 그리고 고드윈은 어떻게 벨라가 탄생했는지를 기록한 책을 보여준다. 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벨라가 지적인 어른이 되어 그 내용을 수긍하는 이 장면은 지나치게 동화적일뿐더러 교훈적이다.

벨라의 외형을 보며 실종된 아내라며 자신의 궁으로 데려온 장군이 하인을 다루는 방식 또한 권력이 부패되어 있다는 쇠잔한 이야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벨라는 몸을 판 기억을 지우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장군에게 총을 쏘고 그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를 죽이지 않고 동물의 뇌를 이식하여 정원을 떠돌아다니는 장면과 의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하는 벨라의 모습에는 란티모스가 갖고 있던 특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줄곧 상징계의 통제를 통해 그 적막과 공백 속에서 그 나름의 구조와 코드를 전달해 왔던 그의 특성은 <가여운 것들>에서 소거되어 있다. 특히, 이 영화는 많은 욕망을 쉽게 나열함으로 도리어 이곳저곳 토막 나 있는 주체를 하나의 주체로 물렁물렁하게 묶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툭 튀어나온 이 영화가 주는 감응은 뭐랄까. 최근 데이미언 셔젤의 <바빌론>(2023)이나 드니 빌뇌브의 <듄> 시리즈(2023~24)와 유사한 느낌이다.)

 

영화 <가여운 것들>(2023) ⓒ 월트디즈니 컴퍼니

끝으로, 의문이 하나 있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콜린 퍼렐에게 브레송의 명언을 전송했다는 란티모스는 과연 엠마 스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송했을까. 가령 "자신만의 방법을 구사하는 능력은 그 방법의 수를 번잡하게 늘릴수록 오히려 떨어진다."는 브레송의 메시지는 현재 란티모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가여운 것들>이 보여준 세상이 란티모스 영화의 종착지라면 이후 작품은 평평한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그의 일탈이라 믿어 보고 싶다. 이번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주제 의식이 스크린 이곳저곳을 서성거리는 동시에 진보하겠다는 그의 결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했다는 점은 분명하니깐.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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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열 2024-03-27 10:57:08
가여운 것들을 보며 느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이전 작품들과의 설명할 수 없던 괴리감이 어떤 것이었는 지 선명해진 기분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