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그 이상한 여정 [바튼 아카데미 #2]
로드무비, 그 이상한 여정 [바튼 아카데미 #2]
  • 김민세
  • 승인 2024.03.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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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늘어지고 뒤척이는 남겨진 사람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는 흡사 로드무비의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시기의 전환점이자 끝자락에서 인물들은 자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탈것에 몸을 싣고 어딘가로 떠난다. <어바웃 슈미트>(2003)의 워렌은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을 겪고,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내자고 약속했던 캠핑카를 타고 떠돌 듯이 여행한다. <사이드웨이>(2005)의 마일즈는 부인과 이혼한 지 2년이 지난 상황에서 결혼을 앞둔 잭과 와인 농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다운사이징>(2018)의 폴이 소인이 되어 소인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과정은 새로운 세계로 이입하는 공상과학적인 여정과 같이 그려지는데, 그곳에서 그는 갑작스레 노르웨이로 떠나게 되면서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앞서 박정수 평론가는<바튼 아카데미>을 다룬 글(「귀와 다리가 내려준 기적 ['바튼 아카데미' #1]」)에서 페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상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현실에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이동(권)'을 상실하고 놓여 있는 부동의 상태와 타인과 소통하며 '이동(권)'을 부여받을 때의 반짝이는 순간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이때 앞서 말한 듯이, <바튼 아카데미>의 '이동(권)'에 관한 박정수 평론가의 논의는 페인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로드무비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논의가 '남겨진 사람들'의 '이동(권)'에 대한 행동의 양상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면, 본 글은 <바튼 아카데미>를 포함한 그의 영화가 로드무비라는 서사의 형식을 어떻게 영화 안으로 불러들이고 비트는지에 대한 작가론적 해석에 가까울 것이다.

 

ⓒ 유니버설 픽쳐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만큼, 한자리에서 계속해서 머물거나 같은 곳을 맴도는 것만 같은 움직임을 보여준다. 로드무비라는 장르 자체가 그러하거니와, 인물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부동의 상태라는 서사 상의 전제가 필요한데, 페인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전제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로드무비의 형식을 계속해서 가로막고 멈춰 세우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그의 초기작인 <어바웃 슈미트>는 보험사 직원이었던 워렌 슈미트가 임원직을 관두고 아내와 함께할 노년만이 남은 시기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이고 여행을 위해 구매한 캠핑카에서 하는 것은 그것을 이동시키는 일이 아니라 부동의 상태에서 아내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뿐이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 뒤에야 워렌은 캠핑카를 움직인다.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떠돌며 여행하는 일련의 시퀀스들에서 카메라는 종종 캠핑카의 넓은 창 너머 지나가는 도로를 조수석의 자리에서 비추다가 패닝 하여 운전석에 놓인 워렌에게로 돌아가는 반복적인 숏과 무빙을 보여주는데, 이는 로드무비가 갖는 여정의 감각을 온전히 되살리는 시선과 움직임이다. 이러한 여정의 이미지는 와인 농장과 골프 라운지, 술집과 모텔을 오가는 것이 영화의 대부분인 <사이드웨이>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다운사이징>에서는 소인들에게 맞추어진 새로운 버스 좌석과 유리병만큼 작은 보트의 유영으로 변주된다.

하지만 이 여정은 멈춤의 기로 앞에 놓인다. <어바웃 슈미트>의 워렌 여정 끝에 사돈의 집에 도착하고, <사이드웨이>의 동선은 같은 곳을 맴도는 폐쇄적인 경로 안에 갇히며 이들의 여정을 가능하게 했던 차는 (이상하게나마 자의적으로) 나무와 구덩이에 처박힌다. 이 멈춤의 순간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술에 취한 듯이) '한없이 늘어지는 몸'은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가 갖는 독특한 유머 또는 페이소스를 내뿜는다. 워렌이 사돈의 집에 도착해서 몸을 누이는 물침대는 몸을 가만히 누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거리고, 마일스와 잭은 여행을 하기 보다는 각자 다른 의미로 침대에 눕기를 집착한다. 그렇기에 <사이드웨이>에서 와인을 들이키며 침대에 누웠던 폴 지아마티가 <바튼 아카데미>에서 짐빔 버번위스키를 홀짝이며 침대에 누워 뒤척이는 모습은 해당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 중 하나다. 그 이미지는 페인의 '남겨진 사람들'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미지이며, 그의 영화에서 그 반복되는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엉뚱하고 소소한 유머가 전작을 거치며 짙은 페이소스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 유니버설 픽쳐스

지금까지의 페인의 영화와는 달리, <바튼 아카데미>가 여정으로 시작하는 것을 유보하고 겨울 방학과 크리스마스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하는 외로운 사람들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리고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훈훈한 소동극으로 진행될 것 같았던 영화가 굳이 다른 학생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교사 폴과 학생 앵거스, 요리사 메리만을 남겨두었을 때, 이 극단적인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지어 학교 주변에 둘러싸인 눈과 그 눈을 치우는 사람들, 학부모의 헬기를 타고 떠나는 학생들의 모습은 이 영화를 마치 밀실극 내지는 조난극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는 그 막다른 곳에서 남겨진 이들이 보스턴으로 떠나는 것은 끝내 <바튼 아카데미>를 진정한 로드무비로 만들겠다는 다짐이다. 이 여정은 어쩌면 아내를 잃고 떠도는 여행(<어바웃 슈미트>)이나, 새로운 사랑을 찾는 며칠 간의 일탈(<사이드웨이>), 또는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모험(<다운사이징>)보다도 더 원초적이고 도전적인 여정일 것이다.

<어바웃 슈미트>의 워렌 슈미트가 그러했듯이 <바튼 아카데미>의 여정의 주체는 삶에서 새로울 것을 기대할 수 없는 끝자락에 있는 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찾아온 여정은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라기 보다는 그들의 삶을 한없이 처절하게 만드는 기폭제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타인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고 정작 스스로는 그것에게서 멀찍이 퇴장한다. <어바웃 슈미트>의 워렌은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위를 딸과 결혼시키고, 홀로 집에 돌아온다. <바튼 아카데미>의 폴은 앙숙과도 같았던 앵거스의 앞날을 응원하고 학교를 떠나야만한다. 마찬가지로 <사이드웨이>의 마일즈는 잭의 결혼식의 들러리를 서고 전 부인의 재혼을 뒤늦게 축하해준다. 비록 그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마야의 집 문을 두드리지만 말이다.

 

ⓒ 유니버설 픽쳐스

여정의 끝에서 누군가를 축복하고 스스로는 퇴장해야 하는 이 페이소스 짙은 아이러니는 폴, 앵거스, 그리고 메리가 이웃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여하는 시퀀스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크리스마스를 학교 밖에서 보내고 싶다는 앵거스의 치기 어린 마음과 메리의 설득에 못 이겨 폴은 둘과 함께 리디아의 파티에 방문한다. 이전에 폴과 리디아의 사이는 어떠한 관계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기에 파티의 장은 서로의 욕망이 얽히고 미끄러지는 복합적인 장소가 된다. 이때 영화는 앵거스를 아이들이 모여있는 지하로, 메리를 음악이 흘러나오는 턴테이블 옆으로 자연스레 배치하면서 셋의 공간을 교묘하게 분화한다. 셋의 공간을 교차하며 진행되는 이 시퀀스에서 앵거스는 처음 만난 소녀와 뜻밖의 키스를 한다. 메리는 학교 청소부와 만나 솔직하고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보낸다. 폴은 리디아와 단둘이 긴장감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다소 갑작스럽게 또는 기대에 맞추어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이 펼쳐지는 것도 잠시, 리디아는 문을 열고 들어온 다른 남성과 키스를 나눈다. 메리는 술에 취해 전사한 아들을 떠올리며 부엌에 박혀 소리 지르고 흐느낀다. 앵거스는 어쩔 수 없이 이들과 함께 파티를 떠나며 불평한다. 키스가 이루어지는 커플은 폴과 리디아가 아니라 앵거스와 소녀다. 다시 말해, 그 만남의 진정성과 간절함과 상관없이 누군가는 아무나와 키스하고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키스의 상대를 빼앗긴다. 이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폴 지아마티의 초상은 타인의 키스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량한 역숏/반응숏의 위치에 놓인다. 그 얼굴은 <시티라이트>의 채플린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처연한 얼굴이며 결국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은 어김없이 알코올을 홀짝이며 침대에서 뒤척인다.

 

ⓒ 유니버설 픽쳐스

폴이 앵거스의 부모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때, 당신이 왜 떠나야 하냐는 앵거스 앞에서 헤어짐을 순간을 받아들일 때, 폴 지아마티의 얼굴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누군가를 축복하고 스스로 퇴장한다. 술에 취해 한없이 늘어지고 뒤척이는 이가 그 처량한 얼굴로 이별 앞에 놓이고 결국은 차를 타고 핸들을 꺾으며 도로를 미끄러질 때 다시 한번 시작하는 또 다른 여정의 감각은 감동적이다. 폴은 잊지 않은 듯이 위스키를 홀짝이고 약간 머금은 뒤 창밖으로 내뱉는다. 알렉산더 페인은 '남겨진 사람들'로 이토록 기이한 로드무비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작가다. <바튼 아카데미>의 이 엔딩은 끝내 마야의 집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리는 데에서 끊어져 버리는 <사이드웨이>의 엔딩 만큼이나 숨 멎을 듯 난감한 순간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 유니버설 픽쳐스

바튼 아카데미
The Holdovers
감독
알렉산더 페인
Alexander Payne

 

출연
폴 지아마티
Paul Giamatti
데이바인 조이 랜돌프Da'Vine Joy Randolph
도미닉 세사Dominic Sessa
캐리 프레스턴Carrie Preston

 

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3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2.21.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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