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케 쇼 #2] 일상의 기록과 발견으로서의 영화
[미야케 쇼 #2] 일상의 기록과 발견으로서의 영화
  • 함윤정
  • 승인 2024.03.1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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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상을 발견하는 인물의 실천"
ⓒ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미야케 쇼'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선택은 내일을 추동하는 결심이 되고, 엔딩은 사건의 결론을 정식화하는 마침표가 아닌 세계의 연장을 지시하는 접속어로 기능한다. 가령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에서 '나'와 사치코의 관계는 사치코의 작은 사인에서 시작된다. 이때 당혹감과 동시에 은근한 기대감으로 제자리를 서성이는 자신의 행동을 부연하는 '나'의 독백은 관객을 청춘의 초상에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의 매력적인 시작점이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에서 사치코는 결국 시즈오와의 교제를 결심한다. 이에 여유롭게 반응하는 '나'이지만, 얼마 못 가 그는 급격하게 태도를 전환한다. 그렇게 공연한 기다림과 내면의 독백은 비로소 상대를 향한 뜀박질과 진심을 표출하는 음성으로 바뀐다.

또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의 케이코는 청각 장애를 가졌으나 꽤 실력 있는 프로 복서다. 생업과 훈련 모두에 충실한 그녀의 일상은 그 묵묵함만큼이나 안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양과 달리 내면의 갈피가 원심에서 벗어나려던 때쯤 마침 체육관의 폐점 소식이 들린다. 이때부터 케이코의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되고 시합에서의 참패 이후 그녀의 내일은 더욱 기약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된다. 그러던 어느 아침, 케이코는 길에서 상대 선수를 우연히 만난다. 상처투성이인 얼굴로 노동의 복장을 갖춘 상대의 모습에서 여느 날의 자신과 마주한 케이코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미야케 쇼의 카메라는 흘러가는 청춘의 일기에 대한 은유로서 사치코의 얼굴과 새로운 일상의 리듬을 구축하는 케이코의 몸짓을 비춘다. 그리고 영화는 새로운 오늘을 향한 문 앞에서 막을 내린다.

이처럼 인생의 한 과정으로서의 편린을, 영화로 쓴 누군가의 오늘을 지켜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짙은 여운을 남기는 미야케 쇼의 영화는 여러 방면에서 '일기'를 떠올리게 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나'와 시즈오의 내레이션은 멀지 않은 시점에서 그들의 내면을 직접 서술하는 독백의 자리로 주어지고, 무엇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케이코는 매일 일기를 쓴다. 이때 미야케 쇼의 카메라가 복싱뿐 아니라 케이코의 생업과 때로는 여백에 가까운 일상을 엇비슷한 밀도로 담아내는 것과 달리, 그녀가 직접 쓴 일상의 기록은 온통 복싱과 훈련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녀가 쓴 일기에서 늘 첫대목을 차지했던 '로드워크'를 반복하는 엔딩의 몸짓은 그렇게 새로운 오늘의 실천이자 내일을 향한 다짐이 되어 모종의 감동을 선사한다.

 

ⓒ 영화 <와일드 투어>

한편, 최근 국내에 뒤늦게 공개되어 순회 상영 중인 미야케 쇼의 2019년 작 <와일드 투어>는 미야케 쇼의 그 어떤 작품보다 일기를 닮았다. 다만, 이때의 닮음이란 영화에 일기의 독백적 화법을 적용한 연출이 가미되거나, 주인공의 일기가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다른 맥락에 있다.

야마구치 정보 예술 센터(YCAM)에서 진행된 'DNA 도감' 워크숍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워크숍의 참가자들이 등장한다. 각 장면의 도입부에는 날짜가 표기되어 있고,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으로 직접 촬영한 영상은 종종 영화의 개별 숏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사실만 두고 보면 미야케 쇼의 다큐멘터리 연작 <무언일기>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막상 <와일드 투어>와 <무언일기>는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다. <무언일기>가 미야케 쇼의 실제 일상 중 촬영된 클립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졌다면, <와일드 투어> 속 인물들이 촬영한 클립은 철저히 미야케 쇼가 창작한 픽션의 세계 안에서 적재적소에 배치된다.

미야케 쇼는 우메와 슌이 마주친 첫 장면에서부터 다큐멘터리에서 성립할 수 없는 컷 전환을 보여주며, <와일드 투어>가 엄연한 극영화임을 적극적으로 환기한다. 그리고 그의 카메라는 타케와 슌, 우메와 야마자키를 중심으로 워크숍을 수행하는 인물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그런데 이때 영화가 표방하는 '기록'의 화법은 극의 배경인 워크숍이 목표 삼는 '도감'의 언어와 대척점에 선다. 

일기란 하루 중의 경험이나 집필 당시 떠오른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서술하는 글의 한 갈래다. 일상에서 얻은 경험의 재료를 일기의 형식으로 문맥화하는 일은 때때로 논픽션의 소재를 극화하는 활동이 된다. 정보를 수집하고 다듬어 나름의 규칙으로 배열하는 과정은 다르지 않지만, 일기에는 도감이 다루지 않는 이야기와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감정들이 있기에 특별하다. 미야케 쇼의 실험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일기 쓰기'의 활동과 '영화 제작'이란 실천을 마주보게 하면서도, 이들 양식과 교집합을 이루지 않는 텍스트를 한 편의 작품 속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그리고 <와일드 투어>는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자 증명으로서 스크린 너머에 도달한다.

 

ⓒ 영화 <와일드 투어>

미야케 쇼는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를 세밀한 감각으로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감독이다. 그가 <와일드 투어>에서 그려낸 일상의 풍경은 마치 어린 날의 일기처럼 느슨한 정취 속에서도 나름의 치열함과 도전정신으로 채워진다. 그중에서도 때로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때로는 저돌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성장기 소년 슌과 타케의 순수함에 특히 눈길이 간다. 영화로 기록된 소년들의 일상에서 워크숍이란 활동 본연의 목적과 그 과정에서 겪는 감정적 격랑의 비중을 가늠한다면 과연 후자의 우세함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와일드 투어>의 장면들은 워크숍의 테마에 철저히 종속되면서도, 그 서사의 초점만은 늘 '우메'를 중심으로 한 다각의 관계에 맞춰진다.

<와일드 투어>의 삼각관계는 일견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의 삼각관계를 연상케 한다. 물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인물들이 이성과의 육체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성인인 것과 달리, <와일드 투어>의 소년들은 아직 어린 청소년이다. 하지만 이때 둘 사이에는 단순히 연령이란 조건 이전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육체적인 성숙의 여부가 아니라, 인물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에 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나'에게는 자기 인식이나 책임 의식 따위의 관념이 거의 부재하다. 그는 무언가에 얽매이는 일 없이 상황과 감정에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이런 그의 성격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음악에 몸을 맡기듯 청춘이란 파도 위를 부유하는 '나'의 일상은 그렇게 낙관 아닌 낙관으로 지속되다 사치코의 결심 이후 변화의 기로에 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상대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얼마간의 즉흥성을 내포한 실천에 가깝고, 이 순간을 붙잡듯 멈춰선 영화로 인해 그 결말은 유보된다. 이와 달리 자신의 미성숙함을 인식하고 있는 <와일드 투어>의 소년들은 마음을 섣불리 표출하지 않을 뿐 비교적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한 편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오늘의 희망 속에서 내일의 '우리'를 주체적으로 겨냥한다. 때로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서사가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떤 중간자들의 우정담처럼 느껴지는 것과 반대로, <와일드 투어>의 삼각관계는 풋사랑이란 가벼운 표현으로 재단하기 어려울 만큼 진중한 접근 위에 성립한다.

 

ⓒ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삼각관계'란 표현을 쓰긴 했지만, 사실 위의 두 작품에서 인물들의 관계는 단순한 삼자 구도로 고정되지 않는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점장'이 세 청춘 남녀의 관계에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미친 것처럼 <와일드 투어>에서는 '야마자키'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다. 사실상 삼각관계 이전에 두 남녀의 관계가 선재했고, 이후에야 그 사실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령 '2월 3일'이란 날짜로부터 시작된 <와일드 투어>에서 야마자키의 존재는 '2월 14일'의 장면에서야 전면화된다. 우메와 야마자키의 대면에서 정면숏의 교환으로 이루어진 고백과 거절의 상호작용은 다시 이 모습을 바라보는 슌의 시선과 만나 그 관계를 사각의 구도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2월 17일'의 장면에서 야마자키가 여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그가 찍은 영상은 우메를 장면 안으로 끌어들여 워크숍이란 테마 아래 펼쳐지는 탐험과 발견의 서사에 우메를 중심으로 한 관계의 양상을 덧입힌다. 달리 말한다면 야마자키가 촬영한 영상을 감상하는 우메의 시선을 통해 해당 장면은 다시 쓰인다.

<와일드 투어>에서 인물들의 마음은 그들 시선의 향방을 따라갈 때 비로소 구체화되고, 영화는 다른 인물의 시선을 경유해 그들이 보는 것을 다시 보게 한다. 그리고 어떤 풍경이 인물의 카메라로 기록되는 모습이나 해당 클립이 영화의 개별 숏으로 활용될 때 영화의 화면은 흡사 다큐멘터리의 논픽션적 면모를 보이지만, 이 화면이 다시 어떤 경로를 거쳐 누군가의 시선에 가닿을 때 해당 클립은 비로소 픽션적 서사의 영역에 안착한다. 카메라로 기록된 영상을 보며 상대의 시점 위에 자신의 시선을 겹치거나, 화면 혹은 창 너머 상대방의 모습을 남몰래 바라보는 행위 속에서 픽션의 자장에 무람없이 스미는 것은 기록된 정보 너머의 내밀한 감정이다. 그렇게 <와일드 투어>는 은밀하면서도 풋풋하고, 수줍으면서도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가득한 탐색과 발견의 일기로 완성된다.

 

ⓒ 영화 <와일드 투어>

누군가 <와일드 투어>라는 한 권의 일기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2월 12일'이라 답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평일인 해당 장면의 주인공은 이름 모를 두 소년이다. 법적 규율을 근거로 활동을 제지하거나 지도와 보호의 명목 아래 미성년의 인물들을 인솔하는 성인 캐릭터를 동반하지 않는 이 장면에서 소년들은 망설임 없이 철창 사이를 비집는다. 또 이들의 여로는 비탈진 길이나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 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식물의 표본을 채집하고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는 소년들의 행동은 여전히 워크숍의 일환으로 낯설지 않고, 위에서 언급한 예외 역시 영화의 근간을 흔들 만큼 돌출적이지 않다. 다만 이처럼 사소한 예외와 우연한 만남이 불러온 모종의 영화적 효과는 대개 일상으로의 회귀로 상징되는 '월요일'이란 시간의 단위에 다소 예외적인 감흥을 부여한다.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소년들 내부의 결심이 아닌 외부의 간섭으로 일어난 사태, 즉 '우메'에 의해 이뤄진 모험의 일시적 중단이다. 하천을 따라 내려가던 소년들은 끝내 땅과 바다의 경계에 다다른다. 그러다 카메라가 돌연 시내 가까운 길 위에 멈춰선 채 걸어오는 우메를 비춘다. 우메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반응하며 영상을 찍기 시작하고 다리 아래로 내려간 우메는 소년이 채집한 돌에 관심을 표현한다. 그리고 소년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돌을 건넨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만남과 제안과 수락의 상호작용은 얼마간 예외적이었던 두 인물의 여로를 우메를 중심으로 한 극의 관성으로 끌어들인다. 이후 야외에서 실내로의 공간적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이어지는 숏은 현미경으로 돌을 관찰하는 우메의 시점으로 보인다. 여기에 시종 들뜬 목소리로 돌의 외양에 갖은 서사를 부여하는 우메의 음성이 덧입혀진다. 그런데 우메가 현미경에서 눈을 떼고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다. 부재를 인지한 우메는 복도 밖으로 나가보지만 그 행방은 여전히 묘연한 기색이다.

 

미야케 쇼의 인물들은 잠시나마 몸에 닿았던 상대의 손길과 삶의 어떤 조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공백의 감촉을 매만진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나'에게 닿았던 사치코의 손길이 그랬듯 이는 <와일드 투어>의 주요 인물인 타케와 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메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타케는 우메가 떠난 자리에서 그녀의 손이 스친 부위를 더듬는다. 또한 우메가 미국으로 떠났음을 알게된 슌은 언젠가 우메가 기록한 것과 동일한 구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그녀의 부재를 감각한다. 그런데 위의 장면에서 느껴지는 정취는 이들과 다르다. 물론 우메와 소년들은 해당 장면 이외의 곳에서 눈에띄는 교집합을 이룬 적이 없고, 따라서 그들이 애정의 관계로 묶여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소한 만남과 사라짐의 과정이 우메에게 어떤 감정적 변화를 일으킬 만한 명분은 없다는 해석 역시 타당하다.

하지만 그러한 논리와 별개로 마치 두 소년이 우메를 두고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2월 12일'의 후반부에서 우메의 몸짓에 아쉬움이나 애틋하고도 저릿한 정감과 사뭇 다른 미스터리의 감흥이 배어있고, 이러한 감흥이 작은 흥미로움과 함께 몇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바다로 간 소년들은 우메와 함께 연구실로 돌아오긴 했던 걸까? 우메의 곁에 있었던 누군가는 그 소년들이 맞을까? 무엇보다 우메는 끝내 그 혹은 그들을 찾았을까? 다소 싱겁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기엔 어쩐지 아쉬운 이 질문에 응답하는 이는 다름 아닌 미야케 쇼의 카메라다. 더 구체적으로, <와일드 투어>에서 이처럼 사소한 미스터리를 만들고 회수하는 일은 미야케 쇼의 편집이란 자의적인 행위에 전적으로 일임된다.

우메가 복도 끝으로 프레임 아웃된 후, 미야케 쇼의 카메라는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는 두 소년의 모습을 비춘다. 워크숍의 목적에 복무하지 않는 이 유희의 몸짓은 그저 가능한 하나의 우주처럼 화면 위에 수 놓인다. 우메에 의해 얼마간 예외적이었던 두 인물의 여로가 극의 관성으로 끌어당겨졌던 직전의 상황과 반대로, 이 장면으로 인해 소년들은 다시 그 관성을 따돌린다. 바다의 경계에 섰던 두 소년이 돌연 시내 근처의 냇가에서 우메에게 발견되었던 일은 그들의 모험을 본격적인 일탈의 구도 안에 놓기 위한 잠깐의 경유지였던 걸까.

다만 이 장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때 미야케 쇼는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과 서사 중심에 선 우메를 수수께끼의 덫에 빠뜨리고, 그녀에게 탐험과 발견의 운동을 강제한 뒤 장난스럽고도 태연하게 소년들을 향해 카메라의 시선을 돌린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2월 12일'은 <와일드 투어>라는 일상의 연대기에서 가장 일탈적이면서도, 영화의 제목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반영의 하루로 남는다.

 

ⓒ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미야케 쇼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관계는 특정 인물을 중심에 둔 채 형성되고, 그 관계는 늘 고정된 형상이 아닌 작은 움직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영화는 해당 중심인물에게 어떤 특권적 시점이나 위계적인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사치코에게는 '나'와 시즈오와 달리 독백이 허락되지 않고, 영화의 엔딩에서 '나'가 스스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기'의 끝에 섰을 때 사치코의 얼굴은 불가해한 시기의 끝을 발견한 또 하나의 불가해한 시선으로 각인될 뿐이다. 또한, <와일드 투어>의 관계에 중심에 선 우메는 영화에서 꽤 빈번하게 소외의 순간을 맞는다. 그때마다 우메의 시선은 공간 혹은 프레임을 이탈한 상대를 쫓고,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는 우메 역시 그들처럼 자신이 있던 장소에서 자취를 감춘다. <와일드 투어>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메의 현재는 다시 한번 슌의 시선을 경유해 전해진다. 슌은 이국의 터전에서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영상을 보고,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메가 촬영했던 구도와 유사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슌마저 이 장소를 떠나면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런데 이때 끝난 것은 이야기일 뿐 영화 자체가 아니다. 픽션이 닫힌 자리에 픽션의 재료가 된 논픽션의 조각들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이후 워크숍의 결과물인 '도감'의 이미지와 극 중 각 역할을 맡은 인물들의 실제 이름,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이 화면에 수 놓인 후에야 <와일드 투어>는 진짜 완결을 맞는다. 그런데 이때의 이름들은, 논픽션의 고유 명사들의 나열은 왜 이리도 감동적인 걸까. 어떤 이의 삶과 영화가 만나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은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아름다운 걸까. '논픽션과 픽션이 결합된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 따위의 형언으로는 이때의 감흥과 영화의 매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어서 나는 이를 다르게 말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픽션의 언어가 머금었던 실제 삶의 조각이 화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날 때, 두 지대의 틈에서 영화의 감각과 감정들을 더듬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 순간 <와일드 투어>란 세계가 아름다운 청춘의 일기로 완성됨을 느꼈다고.

 

ⓒ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첫 장면에서 케이코는 일기를 쓰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이른 하루의 시작점에 서서 늘 반복되던 일기의 첫 문구를 몸소 체현한다. 그렇게 케이코는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풍경 속에 스며든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점에서 이야기는 갈무리되지만, 이때도 영화에는 서사 너머의 과업이 아직 남아있다. 이야기가 열린 채로 닫힌 자리를 채우는 것은 미야케 쇼가 포착한 도시의 풍경이다. 그 논픽션의 이미지 속에 머금어진 픽션의 세계를 상상하며 마침내 우리는 케이코라는 인물이 새로이 발견한 일상을 감각하고 그 풍경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일탈의 특별함은 일상의 만연함 위에 성립하고, 진정한 일상은 일탈의 순간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미야케 쇼의 영화는 어떤 비일상적 순간의 도래야말로 곧 새로운 일상을 발견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일상이 탈각된 자리에서 인물이 무언가의 '이후'를 살아가는 방식을 발견하는 과정은 '청춘'이란 이름에 걸맞은 모종의 실천처럼 보인다. 그 청춘의 일기가 카메라를 통해 변화와 모험의 제스처로 다시 쓰일 때, 그렇게 픽션으로 구축된 누군가의 새로운 일상이 논픽션의 세계 속 풍경으로 자리 잡을 때, 미야케 쇼가 포착한 이른 아침의 푸른 빛은 한낮의 따스한 색채를 닮는다.

지난 2월 25일 막을 내린 제74회 베를린영화제에서 미야케 쇼의 신작 <새벽의 모든>(2024)이 공개됐다. 과연 이번 작품은 어떤 풍경과 색채로 우리 앞에 당도할까. 새로운 일상을 발견하는 인물의 실천을, 영화가 기록한 생생한 감정을, 그를 통해 느껴지는 아름다움의 모양새를 상상하는 오늘이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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