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원#2] 통제하는 영화감독의 즐거움
[신정원#2] 통제하는 영화감독의 즐거움
  • 이우빈
  • 승인 2024.03.1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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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통제의 작가"

<점쟁이들>(2012)의 중반부, 귀신에게 겁먹고 도망가려는 무당 박선생(김수로)이 절벽 아래의 바닷가에 혼자 서 있다. 다른 무당들은 돌까지 던지며 박선생을 욕하고 먼저 떠난다. 그리고 화면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바뀌어 깎아내린 기암절벽과 그 위에 자리 잡은 2층 주택, 화면의 상단을 시원하게 가르는 푸르른 바닷가의 절경을 청명하게 담아낸다. 박선생은 그 화면의 하단에 점처럼 작게 보이지만 새하얀 턱시도를 입고 있는 덕에 눈에는 꽤 잘 띈다. 박선생은 자신을 버리고 가는 무당들을 급히 쫓아 절벽 위로 향하는 오르막길로 달린다. 오르막길은 프레임의 아래 외화면에 있는 터라 오르막길을 오르는 박선생의 형체가 내화면에서 사라진다.

못해도 25m 내외는 될듯한 절벽이기에 "박선생이 열심히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라는 정도에서 컷이 전환될 것이라 예상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외화면으로 사라졌던 박선생은 기껏해야 겨우 3초가 흐른 뒤 카메라의 정면에 미디엄 숏의 크기로 등장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화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듯한 움직임. 박선생은 대체 어떻게 이 높은 언덕을 3초 만에 올랐는가. 그것보단 신정원 감독은 대체 왜 박선생의 순간이동과도 같은 움직임을 일부러 담아냈는가. 어째서 익스트림 롱숏의 사이즈로 고정한 화면 속에 한 인물의 신묘한 동선을 지시했는가.

이 단일의 숏에 담긴 신비함은 이 숏만 두고 어떤 생각을 해본대도 특별한 답은 없다. 오히려 이 숏은 어떤 의미를 생산 해내고자 하는 원인으로서의 장면이 아니다. 서사적인 근거나 플롯에 필요하지 않고 순수하게 놀라움만을 안기는 동작의 활력에 가깝다. 이것이야말로 신정원이라는 감독이 계속하여 반복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장면'들 중의 하나이며 신정원이란 작가가 구가하는 무척이나 강력한 고유의 즐거움이다. 신정원은 늘 관객에게 명확한 사실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예측 밖의 놀라움을 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무언가의 활동성에 근간하는 영화적 재미라는 본령에 아주 가까운 면모다.

 

ⓒ <점쟁이들>(2012)

완연한 통제의 작가

'말도 안 되는 것'은 움직임의 독특함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의 연출과 화면 전반을 지배한다. 다시 처음부터 그의 첫 장편 <시실리 2km>를 복기해 본다. 동료들의 다이아몬드를 훔치고 도망가는 석태(권오중)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배신당한 양이(임창정)에게 전화가 오고 석태와 양이의 발화에 따라 화면이 교차한다. 한쪽은 당연히 차에 탄 석태인데 한쪽은 양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옥탑이다. 카메라는 옥탑 건물이나 문, 자질구레한 물건들 사이에 있는 샌드백을 줌인한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시작된 속임수. 관객은 둘의 음성을 듣고 있으나 양이의 존재를 확인받지 못한다. 관객은 화면의 단서를 종합하게 되고 "양이는 어디 있는 것일까?"란 질문에 빠지며 연출자의 속임수를 파헤치려 한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너무도 맥없이 끝나 버린다. 양이의 정체가 드러나기도 전에 석태는 전화를 끊어 버린다. 도로 위의 귀신에 놀란 석태는 교통사고를 내고 도보로 숲을 거닐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프닝 타이틀이 오른다.

오프닝 타이틀이 끝나자, 석태는 어느새 넓은 농경지에 다다라있다. 이후에 그를 죽이려 할 마을 주민들은 밭일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화면의 질감은 오프닝 타이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다. 거의 바랜 듯한 노란빛의 색감과 필름의 노이즈가 거의 저열할 정도의 화면을 구성한다. 빛이 얼마나 과하게 쓰이는지 노출을 초과한 구름은 아예 형체를 잃어 조악한 세트 미술이 배경인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단 4초 남짓의 오프닝 타이틀을 틈으로 둔 후에 일어나는 격변에 관객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별한 이유도 설득도 없는 이 황당무계의 전환이 바로 말이 되지 않더라도 감각적으로 순수한 즐거움을 주려 하는 신정원의 고집이다. 저열한 화면의 비현실성은 외려 석태가 이미 숲을 떠돌다 죽은 것은 아닌지, 시실리라는 마을은 결국 망자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지를 의심하게도 유도하나 사실 이러한 진실 게임은 무용하다. 서사적 상상보다는 시각을 꿰뚫는 감각과 말 그대로 질감의 차이로만 증명되는 세계의 다름. 기술적으로만 따졌을 때 거의 수준 이하에 가까운 이 화면의 대담함이야말로 신정원이 앞으로도 쭉 자신의 세계를 펼칠 것임을 예고하는 20년짜리 선언에 가깝다.

 

이야기가 15분이나 흐른 뒤에야 양이가 등장한다. 서스펜스의 유예를 언제 어떻게 끊을지는 그 효과와 무관하게 영 동떨어진 곳에서 감독의 리듬에 따라 해소된다. 양이는 오프닝 시퀀스에 비췄던 샌드백 안에 갇혀 있었고 신정원은 이 사실을 아주 맥없이 드러낸다. 동료 조폭들이 샌드백을 찢으면 그렇다 할 극적 효과 없이 양이는 우스꽝스럽고 조용하게 관객의 시야에 나타날 뿐이다. 영화의 외화면은 이처럼 프레임의 상하좌우, 앞과 뒤와 같은 6개 내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프레임 내부에 은폐시킬 수 있는 공간이란 어디까지나 연출자의 재량이며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지조차 연출자의 권력이다. 이후에 주민들이 석태를 콘크리트 벽에 가둔 후 일어나는 일련의 코미디 역시 마찬가지다. 양이의 부하인 해주(우현)가 벽에 못을 박으며 석태의 머리에 못질하는 장면의 서스펜스는 관객의 경험이다. 동시에 해주와 양이 등의 조폭들이 벽 속의 석태를 발견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관객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경험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줄다리기를 영화의 내외부에 공명시키는 힘, 요컨대 영화 안팎의 요소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줄 아는 연출력이다. 신정원은 오만할 정도로 자신의 화면을 본인의 소유로 만들 줄 안다.

한편,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도 장박사(양동근)의 반송장이 스타일러 안에 가둬짐에 따라 들킴과 발견 사이의 서스펜스를 추동한다. 흔히 말하는 '신정원식 좀비', 즉 죽지도 않고 기묘하게 살아나는 석태나 장박사의 '말도 안 되는' 기능은 기실 인간마저 프레임 내부의 수동적 오브제(시신)로 사용하며 외화면에 가둬버리는 영화감독의 철저한 역량을 증명한다. 신정원의 인물들은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듯하면서 도무지 정상의 인간이라 보기 힘든 돌출의 코미디를 뻗어가는데, 그 원동력은 인간을 연출의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신정원의 특질이다. 완전한 수동성의 세계, 폐쇄된 상상과 영화 밖의 작가가 주도하는 순간들. 예컨대 <차우>의 산장 씬에서 백포수를 연기한 윤제문 배우에게만 몰래 지시하여 잠들어 있는 수련(정유미)에게 은밀한 스킨십을 하게 한 일은 자유로운 연기 연출이나 우연의 순간을 주조하려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각본 내부에 있어야 할 배역의 캐릭터성을 소거하고 오히려 영화 바깥의 감독에게 전권을 양도한 연출적 통제광의 면모라 할법하며 이에 대해선 아래에 더 상세히 적어보려 한다. 여하간 이러한 통제력이 신정원의 주제적 반복이 모든 영화에서 공통으로 발현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 영화 <차우>

자꾸만 들키는 사람들

전술한 <차우>의 산장 씬에서 백포수의 은밀한 스킨십 시도는 다른 이들이 잠에서 깨며 실패로 끝난다. 백포수는 재빠르게 다시 자는척하고 상황은 무화되며 그곳엔 어떠한 서사의 기능도 없이 순간의 즐거움 혹은 말초적 코미디만이 남게 된다. 사건, 움직임, 감정이란 3요소만 남은 순수한 영화적 순간은 나쁘게 말하면 휘발이고 좋게 말하면 독립하여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이처럼 '무언가를 들키는 사람들'의 순간 역시 신정원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고유의 인장이다. <차우>의 초반부에서도 경찰서장이 야밤 어느 집 욕실에 비친 사람의 실루엣을 훔쳐보다가 마을 주민들에게 발각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시실리 2km>에서 양이는 귀신 송이(임은경)가 나오는 꿈을 꾼 후 바짝 겁먹은 탓에 기상 후에 아주 우스꽝스러운 허공의 칼질을 보여준다. 고정된 풀숏에서 이상한 춤과도 같은 양이의 원맨쇼가 진행되더니 카메라가 반대를 비추자 그러한 양이를 보는 해주의 모습이 나타난다. 양이는 멋쩍어하고 코미디가 유발된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선 외계인 만길(김성오)이 한밤중의 주유소에서 몰래 기름을 꿀꺽꿀꺽 삼키는 장면을 아내 소희(이정현)와 장박사가 목격한다. 이러한 들킴의 순간들은 전술했듯 이 장면만의 활력을 키우는 긍정을 도출하면서 더 한 의미까지 만들어 낸다.

<점쟁이들>에서도 반복된 유사한 장면까지 곰곰이 되짚어봐야 한다. 박선생이 자기 방의 정중앙에 의자를 두고 앉아 다른 무당들 몰래 초코파이를 먹는다. 그런데 동료 무당이 들어오자 놀라며 수련 중인 척하며 먹는 행위를 감춘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초코파이를 먹는데 동료 무당이 또 다른 문으로 들어와서 또 이상한 기합을 내며 무술 하는 척에 힘쓴다. 단순하게 보면 정말 쓸모없어 보이고 그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코미디다. 반대로 말했을 때 지금 공개되는 일군의 상업영화에 이처럼 무용한 순간이 있던가. 이런 순간이 대개 없음을 과격하게 전제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무용함의 기준이 철저하게 각본과 기획, 찍기도 전에 완성 되어있는 콘티 대로의 촬영 행위에 복무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 장면 역시 신정원 감독은 원래의 대본 계획과 다르게 김수로 배우의 애드리브를 전면으로 밀어붙였다고 밝힌 바 있다. <차우>의 산장 씬까지 재론되는 대목이다. 다시 말하자면 촬영 현장의 즉흥성이 통상 '자유로운' 것이라 여겨지는 경향이 있으나 달리 볼 관점이 분명히 있다.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그 어느 외압이나 정해진 것, 이를테면 제작이나 기획 단계와 각본과 콘티에서 정해지지 않고 순수하게 감독의 판단만으로 'OK'를 외쳐야 하는 감독만의 자유인 셈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과 상황에 부자유를 안기는 방법이다. 신정원은 그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줄 알고 실제로도 누렸던 무소불위의 작가다.

 

배우 이정현, 감독 신정원 ⓒ 영화 <죽지 않은 인간들의 밤>

영화작가라는 모호한 단어를 여기서 완전히 정의 내리려 한다거나, 그것의 가치가 다른 연출의 방식보다 위대하다고 고집부리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 글(「총이지만, 총이 아닌 것들」)에서 밝혔던 신정원이 총을 대하는 방식의 고유성, 그리고 위에서 말했던 '말도 안 되는' 이질적 질감의 화면을 급작스레 표현하는 그의 대담함과 서스펜스의 시간을 마음대로 지연하는 여유로움, 정해진 것을 따르지 않는 완연한 통제광의 면모와 그러한 면모를 밝히기 위해 사용하는 '들키는 사람들'이란 주제적 반복이 있었다. 반복건대 이러한 신정원의 작가성이 그 어떤 감독보다 옳다거나 혹은 그의 작품이 한국영화의 가장 높은 걸작이란 의견을 강조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적어도 신정원처럼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영화적 작법을 고수하며 그것을 보고 쓰는 이들에게 영화 보기에의 풍부한 동력을 선사했던 이가 지금의 한국영화에 많지 않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신정원이 통제한 영화들의 균질적이며 불균질적인 연결을 감지하는 물적이고 심적인 활력, 감독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의 세계를 다시금 마주할 수 있단 설렘과 기쁨, 그 속에 대체 어떠한 변주와 함의가 숨어있을지 독해하고 싶은 욕망의 근간이 더는 없다는 아쉬움이 클 뿐이다. 신정원만큼의 재미를 줄 이름을 기어코 다시 기다려 보는 이유다.

[글 이우빈 영화평론가, 731dnqls@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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