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무속의 끝과 하드보일드 음모론랜드
'파묘' 무속의 끝과 하드보일드 음모론랜드
  • 김경수
  • 승인 2024.02.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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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히 그리겠다는 우직함"

젊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은 굿을 의뢰받고 LA행 비행기에 오른다. 의뢰인은 '밑도 끝도 없이 부자'인 30대 남성으로 병원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에게 삼대째 내려오는 돌림병의 마수가 뻗칠까 두려워한다. 화림과 봉길은 돌림병이 묘에 묻힌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는 묫바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화림은 의뢰인에게 그 묘를 파헤치기로 한다. 이윽고 풍수사로 일하는 상덕(최민식)이 소개된다. 그도 장의사 영근(유해진)과 전국 곳곳의 묫자리를 소개한다. 상덕은 남은 전국의 명당이 몇 안 되며 풍수사의 유통기한이 끝나간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화림과 봉길은 상덕과 영근에게 가서 5억이라는 거액의 건수를 제안한다. 상덕은 딸의 결혼식에 드는 돈을 마련하고자 제안을 수락하고 넷은 힘을 합치기로 한다. 의뢰인의 고모(박정자)는 묘를 파헤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의뢰인은 파묘를 강행한다. 넷은 강원도의 산에 있는 문제의 무덤에 접근한다. 상덕은 무덤 인근 흙을 맛보더니 묫자리가 '악지 중의 악지'라며 이런 곳을 파다가는 줄초상이 난다고 물러선다. 화림은 의뢰인의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상덕을 설득한다.

 

ⓒ ㈜쇼박스

<파묘>의 장르적인 재미는 일본 아니메를 보는 듯한 캐릭터 설정에서 비롯한다. 배설굿을 하기 직전 스니커즈화를 신으며, 헬스장에 다니기도 하는 화림과 봉길은 미디어에서 그려진 MZ세대의 기호에 정확히 부합한다. 김상덕도 최민식 배우가 <명량>(2014)과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2022)에서 드러냈던 토속적인 웃어른의 이미지를, 영근도 기독교의 신자이면서 염쟁이라는 이중적인 캐릭터를 지니지만 유해진 배우가 지금껏 영화에서 연기한 세속적이고도 수다스러운 어른의 이미지를 빌린다. 화림과 상덕의 과거도 최대한 배제되어서 깊고도 복잡한 캐릭터가 형성되지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와 1장에서 드러나는 화림과 상덕의 나레이션도 무속적인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에 그친다. 화림은 자신이 "빛과 어둠, 과학과 미신 그 사이에 있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나는 무당 이화림이다"로 설명한다. 상덕도 "풍수지리하면 미신이니, 사기니 하는"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국 상위 1%들에게 풍수지리는 종교이자 신앙"이라고 자부하는 모습을 보인 다음에야 "나는 지관 김상덕이다"라고 소개한다. 일본의 정신분석학자 사이토 타마키는 이처럼 캐릭터의 내면이 드러나지 않으며 외양이 캐릭터의 성격에 반영되는 아니메 서사 속 인물을 '캬라'라고 분석했다. 캐릭터가 평면적이라는 비판은 어쩌면 영화가 이 의도한 바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캐릭터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만화적인 캐릭터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는 듯한 건조하고 정확한 톤의 이질적인 조화를 이룬다. 이 영화가 그리려 하는 것은 복잡한 캐릭터 사이의 강렬한 충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캐릭터의 사명과 거기에 따르는 노동과 프로 정신, 사력을 다해서 악을 퇴치하는 과정이 진중한 톤으로 두드러진다. 하물며 여러 캐릭터가 부대끼면서 생기는 잔재미와 로맨스와 가족애 등의 신파적인 감정, 캐릭터 사이에 충분히 생길 수 있는 갈등마저 제외한다. 이는 감독의 전작에서도 이어져 내려온 톤이다. <검은 사제들>(2015) 속 퇴마 신부 김범신(김윤석), <사바하>(2020) 속 종교를 불문하고 사이비를 추적하는 극동종교문제연구소의 소장 박웅재 목사도 사명감을 느낀 순간부터 한없이 진지해진다. <파묘>의 경우 화림과 봉길 둘 사이에는 연대감 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싹트지 않는다. 상덕과 영근 사이도 마찬가지다. 후반에야 김상덕이 말하듯 이들은 비즈니스 관계에 불과하고, 하나의 목적으로 뭉쳐있을 뿐이다.

<파묘>의 하드보일드한 톤은 카타르시스를 최대한 배제하는 숏의 경제성과 유물론적인 태도에서 생기기도 한다. 이는 영화가 캐릭터를 소개하는 순간부터 두드러지는 덕목이다. 화림이 귀신을 보려고 휘파람을 불 때, 흙을 맛보는 상덕을 포착할 때 초자연적인 것의 개입을 최대한 막으려 한다. 클로즈업으로 관객이 보이지 않는 것을 곧장 보는 등장인물의 표정을 드러낼 뿐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화림이 벌이는 세 차례의 굿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굿판을 연출하는 데에 장재현 감독은 현란한 편집을 동원하지 않는다. 교차편집이 이루어지기는 하더라도 굿의 과정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보통 관객은 굿을 최후의 수단으로 마주한다. 굿을 둘러싼 모든 이의 염원을 담고 그것이 폭발하는 과정으로 그리는 데에 익숙하다. 굿이 펼쳐지는 순간에 나뭇잎 등 자연이 감응하는 것으로 초자연적인 것의 존재를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굿판에서 각자의 작업에 열중하는 인물을 그려낼 뿐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것은 화림이 처음 배설굿을 펼치는 순간 굿을 바라보는 의뢰인 고모를 연기한 배우가 박정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김기영의 <이어도>(1977)에서 무녀 역할을 한 적이 있다. 이 영화가 무속을 그려내는 톤은 <이어도>의 건조한 카메라와도 비슷하다. 배설 굿은 감정이 배설되는 카타르시스가 되지 않는다. 초자연적 존재를 부르지도 않고, 그것의 시선을 카메라로 매개하지도 않는다. 영화 1부에서 혼령이 사방팔방을 돌아다닐 때마저도 창문을 열어야만 그 혼령이 움직이는 등 물질적인 제약이 분명하다. 장재현의 유물론적인 태도는 영화 전체의 문제의식과도 이어져 있다.

 

ⓒ ㈜쇼박스

장재현 감독이 지금껏 만든 영화는 오컬트라는 장르적인 외피를 둘렀을 뿐이지 1980년대 할리우드 모험 영화, 특히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표층적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로버트 저메키스의 휴머니즘을, 심층적으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성을 볼 수 있다. 감독이 시대착오적인 "꼰대" 어른이 나름의 보수성과 전통적인 가치에 기반해 젊은이를 구원하는 서사를 반복해 그리기 때문이다. 데뷔작 <검은 사제들>은 신부 김범신(김윤석)이 최준호(강동원)와 이영신(박소담)을, <사바하>는 박웅재(이정재)가 이금화(이재인)을 구원하는 이야기다. <파묘>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상덕이 화림과 봉길을 구한다. 세 영화는 카톨릭과 불교, 무속 신앙이라는 제각기 다른 종교에 기반해 제각기 다른 세계관을 펼치더라도 이 설정만큼은 유지된다. 김상덕이 한 말마따나 살 만한 땅을 물려주는 것이 웃어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 세대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약자를 수호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2011)를 생각나게끔 한다. 김상덕을 연기한 최민식의 심란한 얼굴은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이쯤이면 "감독은 왜 하필 오컬트 장르를 선택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미국의 영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오컬트 영화의 새로운 물결은 (<엑소시스트 1>이 개봉한 1973년과 60년대 말에 생긴 세계적 경제 위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선과 악이 절대적인 흑백 범주였던 체제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오컬트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기반한다. 선과 악이 무한히 대립하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다. 오컬트 장르는 선악이 명확히 지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하고, 캐릭터는 어느 정도 시련을 거쳐야 그 믿음을 체감한다. 장재현은 오컬트를 통해서 관객이 두 번의 악당을 마주하게 한다. <검은 사제들>에서는 일본 귀신이 아니라 외국 귀신이 진범임을 알아차리게끔 만들고, <사바하>에서는 정나한(박정민)이 아니라 일제부터 영생을 살아온 김제석(유지태)이 진범으로 드러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이금화의 자매는 악마가 아니라 미륵으로 드러난다. 장재현은 악을 두 층위로 나누고 그 심층을 겨냥한다. 무엇보다도 장재현은 오컬트를 그리되 절대 그 악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추상화하지 않는다.

<사바하>에서부터 장재현 감독은 영화 곳곳에 영화 밖 현실의 기호를 흩뿌린다. <사바하>의 박웅재부터가 지금도 운영되는 사이비 종교 전문지 <현대종교>를 창립한 탁명환을 바탕으로 한 캐릭터다. 감독은 이 영화 곳곳에다 현실 속 사이비 종교의 흔적을 남기고 웃어른인 박웅재가 청년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세계에 진입하도록 이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다음에 생업으로 사이비 종교를 추적하는 박웅재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지하세계에 비견할 만한 세상이다. 나한이 사이비에 빠지게 된 것도, 99년생의 죽음도 그를 보살필 만한 시스템의 부재라는 사실을 마주한다. 장재현 감독이 오컬트에서의 적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그려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에게 악은 믿음이나 진실 등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다. 알레고리나 은유같은 우회도 아니다. 오히려 직유로 눈앞에 명확히 드러내야만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선악을 명확히 그리겠다는 우직함이 영화 곳곳에 드러난다.

 

ⓒ ㈜쇼박스
ⓒ ㈜쇼박스

<파묘>의 1부와 2부는 장재현의 유물론적 시각의 양면성을 반영한다. <파묘>의 1부는 오컬트 장르의 공식에 부합한다. '밑도 끝도 없는 부자'의 정체 등으로 미스터리를 흩뿌리다가 1부가 끝나는 지점에야 묫바람을 일으킨 혼령이 친일파라는 진실을 드러낸다. 그마저 의뢰인의 몸에 직접 강림해 욱일기를 찬양하고 조선인 학도병을 모집하는 친일파의 행동을 모방한다. 그때 친일파가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에는 조선총독부가 그려져 있다. 영화 1부의 긴장감은 친일파의 후손을 일상적인 시선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장재현 감독은 미국으로 혼령의 존재를 카메라의 매치컷으로 드러내며 그 혼령이 어디에든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파묘>의 2부는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의뢰인의 몸에 깃든 혼령의 유언으로 시작해서 악의 정체를 뚜렷하게 그린다. 일본이 한민족의 정기를 단절하고자 태백산맥 곳곳에 쇠침을 박았다는 음모론에 가까운 속설을, 혼령이 아니라 귀신이 물건에 깃들어 자라난 일본 정령을 소재로 삼은 것도 감독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민족주의적인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매력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친일파의 흔적은 지금도 여기저기에 있지만 혼령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로 드러나는 데에 비해, 훼손된 민족 정기와 무속 신앙을 억압한 근대적 이데올로기는 쇠침이라는 물질로 드러나는 아이러니를 택해서다. 또한, 17세기 일본 장군이 친일파의 아래에 첩장되어 있다는 설정에 기반해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본과 한국, 중국 사이의 이어지는 "북으로 전진"을 외치는 동아시아의 군사주의가 우리의 미래를 망칠 것이라는 불안을 물질화한 지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파묘>는 <유령>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시대를 장르로 우회하는 시도로, 일제강점기의 항일을 장르적 규칙으로 드러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밀실 소설을 생각나게끔 하는 <유령>이 밀폐된 성을 통해서 은유로 드러낸 데에 비해서 <파묘>는 더 직접적으로 선악을 분명하게끔 하고 항일의 코드를 영화 전반에 삽입한다. 영화 속의 자동차의 번호판은 0815와 1945이다. 즉, 한국의 광복절을 숫자로 그려낸 것이다. 네 주인공의 이름은 모두 독립운동가의 이름이다. 봉길은 윤봉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철혈단은 실재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 곳곳에는 이름으로만 남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다른 방식으로 우회되어 드러난다. <파묘>는 독립운동에 대한 기호를 곳곳에 흩뿌리며 음모론을 동원해 항일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불러오는 데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보수적인 영화임에도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프로파간다와 허구화된 민족 개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득하고자 한다. 특히나 일본 장군이 처음으로 봉길을 공격한 순간, 단순히 간을 적출하는 것이 아니라 척추를 공격하게끔 한 것도 태백산맥의 정기를 파괴하는 일본군의 행위가 개인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드러낸다.

심지어 영화에서 기순애라는 법명으로 활동한 일본 음양사 무라야마 준지는 조선의 풍속을 민족지로 정리한 일본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쥰의 이름을 딴 것이다. 무라야마 지쥰은 무속 신앙에 영향을 끼치려 한국 귀신을 폄훼하는 데에 일조했다. 지쥰은 한국 귀신이 기본적으로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고, 한국의 무속 신앙은 재화를 몰아내고자 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라 서술해두었다. <파묘>는 이같은 시선을 거부한다. <파묘>의 굿은 망자를 달래는 것이지, 망자를 몰아내고자 한 것이 아니다. 네 명의 초자연과학 연구자가 뭉쳤다는 이유로 <고스트 버스터즈>(1984)와 흔히 비교되는 영화지만, 감독이 <고스트 버스터즈>와의 비교를 거부한 것도, 그 영화가 유령을 퇴치해야만 하는 것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유령을 퇴치한다기보다는 유령을 달래고 돌려보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는 "핏줄. 같은 DNA로 엮여진 공혈(共血)의 집단. 흙에서 만물이 생성되고 모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김상덕의 나레이션으로 설명되는 영화의 순환론적인 세계관과도 이어져 있다. 유령이 흙으로 돌아가야만 우리 후손이 밟고 살아가야 할 땅이 생긴다. 역사를 가르치는 강사처럼 말하는 최민식의 대사는 물론 일차원적이고 유치하기까지는 해도 호소력은 있다.

 

ⓒ ㈜쇼박스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언론은 일본의 정령으로 인해 생긴 참사를 반달가슴곰의 행동이라 보고 앳된 반달가슴곰을 죽이느냐 살리느냐로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 정령이 물러나고 난 뒤에도 모든 인물은 제각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김상덕도 계속 간에서 피를 흘리게 되자 땅을 파는 일을 포기하고 건설현장을 돌아다닌다. 한국적인 것의 훼손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단번에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해피엔딩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전범국이었던 독일인과 한국인 김상덕의 딸 사이의 결혼으로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다만 영화의 엔딩에서 결혼식 사진은 왜인지 독립운동군의 사진처럼 찍힌다. 과연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그 가능성을 남기며 끝난다. <파묘>는 미래를 지킬 만한 웃어른의 끝을 걱정하는 듯하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쇼박스

파묘
Exhuma
감독
장재현

 

출연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배급 ㈜쇼박스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3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2.22.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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