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아미코' 부분들의 합으로서 삶을 이해하기
'여기는 아미코' 부분들의 합으로서 삶을 이해하기
  • 변해빈
  • 승인 2024.03.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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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지나간 자리에 깃든 귀기, 상실에 빠진 인간이 취하는 무형의 전략들"

<여기는 아미코>에 감도는 정체불명의 귀기는 인물이 겪는 환각 증세에 따른 즉각적인 인상만은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는 소음에 시달리는 초등학생 아미코(오사와 카나)는 그것이 사산된 동생이 이승에 떠돌며 내는 기척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집 발코니에서 시작되어 시시때때로 들려오던 출처 미상의 소음도, 급기야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름 없는 유령들도 모두 사실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전자는 보금자리를 찾아 둥지를 튼 새의 날갯짓이 낸 소리이고, 후자는 아미코가 만들어 낸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인물의 망상증이란 사실은 관객에게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아이의 상상력으로부터 끌려 나온 귀신은 하나같이 검푸른 피부 따위로 해석된 다분히 일차원적이고 인위적인 형상들이다. 이것이 죽음의 급습과 그것에 뒤따르는 깊숙한 감정을 스스로 개념화하지 못하는 실존적 경험의 일환임은 자명하다.

귀기는 가족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기도 하다. 네 가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실 앞에 놓여있고 그것을 무겁게 감당하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는 아미코>는 마냥 잠식되는 영화와는 다르다. 무의식의 영역만큼이나 그걸 버티는 의식적 요소를 배치한다. 혼란한 삶의 문제를 알고자 하는 아미코의 의지를 계속 보여준다. 인물 스스로는 그것이 의지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또래에 비해 엉뚱하고 산만한, 동시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아미코를 경유해 침잠의 무게를 덜어내고 경쾌함을 유지하려 한다. 아미코는 귀신이 나타났다고 느낄 때면 경쾌한 톤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무서움을 덜어내려 애쓴다. 물론, 두려움을 외따로 감당하는 인물의 모습은 그것이 표면상의 경쾌함을 지니면 지닐수록 결과적으론 그와 반대인 고통의 실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방법이라 하겠다. 다만 <여기는 아미코>가 상실과 애도라는 주제 의식에 도달하는 데 있어, 스산하고 음울하며 때로는 냉정함으로 가득 찬 세계를 운용하는 것만큼은 아미코의 혼자만의 눈을 넘어, 아미코를 보는 우리의 눈을 포괄적으로 요청하는 쪽이다.

 

ⓒ 슈아픽처스

<여기는 아미코>가 원초적으로 스산함을 방류하던 첫 순간은 의외로 아미코의 가족에게 죽음이 다가오기 전이다. 극의 시작부, 문틈으로 무언가를 훔쳐보던 아미코의 시점 쇼트를 떠올려 보자. 가정집에서 아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엄마(오노 마치코)는 아미코의 아빠(이우라 아리타)와 재혼한 사이인데, 어떤 이유에선지 아미코를 수업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후에 밝혀지는 바에 따르면 아미코의 학습 능력은 다른 이들에 비해 속도가 뒤늦은 편이다. 그것이 부모의 방임과 아이의 부적응, 둘 중 어느 쪽의 문제인지에 관해선 이 영화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엄마가 아미코를 함께 가르치지 않는 이유 또한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는 인물들이 공유하는 어떤 질서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객관적 상황 자체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그 상황에 내포된 단면 하나를 비대하게 확대하여 거기 엄청난 주의를 기울이며 시작된다.

따라서, 영화는 철저히 아미코의 좁고 끈덕진 감각에 중점을 둔다. 우리는 특정 상황을 보편적 질서에 따라 명료화하기보다 인물에 의해 불현듯 감지되는 것들을 집요하게 따라가야 한다. 그러니 앞의 장면에서 긴요하게 다루는 건 따로 있다. 아미코는 문틈으로 서예에 열중한 노리라는 남학생을 은밀히 응시한다. 낌새를 느낀 노리가 짧게 주춤하며 반응하던 것도 잠시, 선생님을 향해 자신의 종이를 들어 보인다. 그러자 판판한 종이 위에 고여있던 먹물 한줄기가 아래로 흘러내린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것을 아주 가까이 클로즈업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짐작하건대 이 클로즈업 쇼트는 아미코의 시선일 가능성이 높다. 아미코가 먹물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던 그때, 별안간 옥수수 알갱이가 터지며 액체가 후드득 흘러내린다. 카메라는 그것을 힘껏 움켜쥔 아미코의 손을 먹물을 담을 때와 같은 거리감으로 확대하여 담는다. 이 쇼트의 나열은 특정 사물과 극단적으로 가까이 달라붙은 거리감을 강조한 뒤 그대로 존재감 없이 사라진다. 물론 앞의 쇼트들은 전술했다시피 아미코의 난해한 기질과 천성을 읽어내는 용도로 마무리 지어도 무리는 없다. 하지만 지극히 사소한 대상물을 뜬금없을 정도로 기이하게 확대한 이유는 묻고 싶어진다.

 

ⓒ 슈아픽처스

<여기는 아미코>가 먹물과 옥수수 쇼트를 통해 '갑작스레 엄습'하는 사태를 감각적인 실체로 만들 때, 그것이 예고 없이 닥친 죽음과 그 뒤에 남겨진 삶의 문제와 이상하리만치 연관성을 가진단 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가령 우리는 흘러내린 먹물이 노리가 아미코의 존재를 의식하며 생긴 것이란 사실과 더불어, 아미코가 손아귀의 힘으로 조용하게 표출한, 그러나 마땅한 체계를 갖추거나 언어화되지는 못한 감정적 복잡함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빤히 존재하는 해당 쇼트에 관한 설명은 불필요하다는 듯 무마하며 다음 컷을 들여보낸다. 중심인물이 아미코가 그러한 복잡한 것들을 설명해 낼 수 없다는 점에 전착해서. 그럼에도 아미코에겐 거대하게 다가오는 무언가 있고, 영화는 이 미지의 세계를 위해 시청각적인 장치를 강조해 감각적으로 부딪히길 반복한다. 이 간결한 맥락이 극을 이끌어 가는 절대적인 질서로 작동한다. 일상에서 상실감을 처리하는 방법에서도 그렇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며, 벌어지고 있지만 설명해 내지 못하는 것. 아닌 게 아니라, 죽음이란 사건은 구체화하거나 정의 내릴 수 있는 질서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영화는 죽음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겪게 되는 문제를 가능한 한 무방비하게 체득하며, 상실에 뒤따른 무능력에 가해지는 불필요한 책임을 덜어내기 위해 아미코의 관점을 요구한다. 그렇다 하여 그녀가 가족에게 벌어진 일 자체를 감지하지 못하는 쪽은 아니다. 다른 가족들이 무관심과 무기력에 빠지고 급기야 터전을 떠남으로써 무언가를 비워낸다면, 아미코는 부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어 애도의 길을 탐색한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애도 방식은 관계의 와해로 이어진다. 어긋난 관계는 얼마간 죽음 자체보다 더 가혹하게 그려진다. 이를 드러내 주는 장치가 바로 슬픔을 극적으로 표출하는 인물의 몸짓과 반대로 보이지 않는 시간의 관계이다. <여기는 아미코>는 (죽음의 성질을 연상케 하는) 돌출된 이미지를 반복 발생시킨 뒤, 불균질한 상태를 그대로 열어젖힌 채 선형적 시간을 따라 말없이 이동한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카메라를 패닝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릴 때면 장면 안에서 무언가 연속되고 있단 사실 자체가 외려 날카롭게 의식된다. 카메라는 화면에 여백을 만들고 그 안의 인물을 너무나 가만히 응시하는데, 움직임이 지연될수록 균일한 속도를 유지하는 시간의 존재는 압박감을 준다. 아미코가 무언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쇼트가 안기는 건 암시라기보단 당장에 막연하게 다가오는 인물의 속내다.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되고 혼자 남겨지는 순간 섬뜩하리만치 적막해지는 시공의 조건은 아미코의 환각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방황하는 아미코의 '이상한' 행위는 돌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 돌출성을 어떤 식으로 수습하겠다는 의지 없이 인물들을 무심히 계속되는 시간의 진행 위에 올려버린다.

서로 헛도는 시간과 인물의 관계는 '죽음에 의한 삶의 불연속적인 형태'를 '삶의 연속성' 안에서 바라보기에 기이하고 두려운 느낌을 준다. 시간을 뛰어넘어 중학생이 된 아미코의 왜소한 체구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몸은 시간의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착한 오빠의 비행과 가출은 어떠한 조짐도 부연 설명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엄마의 세계는 이상함을 더 깊이 느끼게 만든다. 물론 아미코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사산된 아기의 죽음을 그 느낌의 실체로서 따라가진 않는다. 말하자면 아미코에게 더 크게 와닿는 건 아기에 대한 직접적인 상실감보단 죽음 사건 이후로 잃어버린, 가족들의 과거에 대한 짙은 그리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감도는 귀기는 떠나갔거나 생기를 잃으며 서서히 형상이 사라져 가는 가족 관계를 잇는 끈, 그 사라짐을 마치 죽음처럼 받아들이는 이의 심경을 대변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아이를 교육하고 보호하지 못하는 부모의 행동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죽음의 영향력을 논할 때만큼은, 그들을 반대편에 세우기보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잃어버린 가족의 끈을 이어 붙여 바라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여기는 아미코>를 보고 마음이 아프다면 우리가 '아미코 시절'을 지난 어른의 심정을 외면할 수 없으므로, 혹은 상실 앞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취약하지만 절실한 무형의 몸짓에 담긴, 그 전략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 슈아픽처스

그런가 하면, 영화 속 헛돎으로 인해 확연해지는 사실이 있다. <여기는 아미코>는 삶과 죽음, 지속되는 것과 중단된 것 사이의 간극이 공존하는 풍경 안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확신을 준다. 마비된 상태, 있던 걸 없는 듯 구는 태도, 부재하는 대상을 존재하게 만들어 상실감을 알고자 하는 인물들의 모습들. 이때 모습 자체보다 중요한 건 그 모습으로 하여금 죽음의 '잘못된' 지점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단 점이다. 죽음을 외면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저항의 몸짓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작정 삶을 향한 강직한 의지를 읽어낼 순 없을 테다. 하지만 인물들이 무조건적으로 나아가는 시간에 순응하지 않고 멈춤을 표방할 때, 이것이 과거의 한 지점을 끝없이 맴도는 또 다른 시간의 축(aion)을 발생시킨 쪽이라면 무참히 순행하려는 시간을 잡아끌며 질서를 어그러트리고 있음이 동시에 상기된다. 이 영화는 애도가 죽음과 조우하는 과정이라는, 조직된 논리를 앞세워 속단하기보다 '잃어가고 있음'을 실제 삶 안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보여준다. 그것의 무거움과 어려움을 전한다. 어두운 면을 응시하는 영화의 선택은 역설적이게도 죽음 앞에는 또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한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가 남편과 두 아이의 존재에 감사함을 느끼던 순간보다 아기의 무덤(부재)을 마주하고 적극적으로 상실의 아픔을 표현할 때, 그것은 인물 안에 살아있는 감정이 작동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인물들의 삶은 죽음에 순응하거나 지배된 게 아니다. 다시 말해 영화는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이 아닌, 삶의 어려움을 깊이 느끼는 것으로서 자기 무의식과 갈망을 마주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기억의 문제도 말해야 한다. 아미코 주변에 머물던 가족과 귀신이 서서히 사라져가면 그녀의 기억이 선명해진다. 줄곧 직선적인 시간을 펼쳐내던 극 중반부부터 기억 두 조각이 현재의 시간 속에 끼어든다. 첫 번째 기억은 아미코와 오빠가 지금의 엄마와 처음 만난 날을 담고 있다. 엄마의 얼굴에 난 점을 노골적으로 응시하는 아미코의 버릇은 기억이 가리키는 이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해당 기억은 이것이 인물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기억이 된 시점, 즉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더 중요해진다. 두 번째 기억은 오빠가 아미코에게 엄마의 점을 '괴물 같다'고 말해선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던 순간이다. 이 자체로도 과거 기억은 현재의 와해된 가족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애달픈 감응을 준다. 하지만 이에 더해 흥미로운 건 따로 있다. 영화엔 두 번째 기억의 틈입과 함께 엄마의 점을 보는 아미코의 시점 쇼트(클로즈업)가 반복 제시된다. 동일한 이 쇼트가 단지 기억의 형태로 반복되었을 뿐인데, 응시되는 대상이 얼굴의 점에서 조금씩 벗어나 표정으로, 인식의 외연이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기억이 시간을 왜곡하며 무심코 나타나는 성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 슈아픽처스

앞의 두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로서 반복된 것이라면, 영화의 마지막엔 실재인지 허구인지, 아빠가 본 아미코의 모습인지 아미코가 또 다른 자기 자신과 조우한 꿈인지 모를 장면이 하나 있다. 아빠는 아미코를 시골에서 지내는 할머니에게로 데려간다. 병원에 입원한 아내와 혼자 자라기엔 아직 어린 딸, (방법이 옳은가는 차지하고) 그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아빠가 자신을 남겨둔 채 떠날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한 아미코는 시골집 마루에서 잠이 든다. 이 잠에 선행해서 기묘한 꿈이 나타난다. 먹이사슬 구조에 따라 개구리를 물고 늘어지는 뱀, 그 뱀을 가지고 노는 아미코, 도망간 뱀과 남겨진 개구리. 형식적으로 죽은 사운드, 핸드헬드 카메라의 요동침이 이례적으로 더해지며 날것 그대로의 위험하고 서늘한 느낌을 준다. 과거를 공전하는 인물들을 바라보던 영화에서, 과거를 지나간 시간 위에 남겨두고 현재와 분리하는 흐름이 나타난다는 것. 영화는 인물에게 각인된 과거의 사실을 다시 보게 만들어 그것을 다르게 이해하게끔 조력한다. 지나간 무언가 떠오른다는 건 시간의 흐름에 구속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우주적 질서도 한순간에 무용하게 만드는 '내' 갈망을 보게 한다. 그 갈망은 무언가를 채워내기보다 지나간 것,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쪽이다. 그러니까 아미코의 기억과 꿈이 제공하는 건 대상물의 복원 아닌 잃어버림 자체다. 그에 알맞은 감정이다. 그래서일까. 아빠가 떠난 뒤, 텅 빈 새벽 안에서 발견되는 아미코의 조용한 뒷모습은 유별남 또는 부적응으로 이해된 부차적 판단 없이, 비로소 인물의 공허와 외로움을 정확히 표현하는 이미지가 된 것 같다. 앞으로 인물이 어떻게 살 것인지 잘 그려지지 않고... 인물의 몸짓이 시공의 고요함에 균열을 낸다고 해야 할지, 넓은 화각 안에 둘러싸여 운동감을 빼앗긴 쪽인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여기는 아미코>는 이 단편적인 기억과 꿈의 작동을 경험한 것만으로 아이가 삶의 이치를 깨달았으리란 결론에 곧장 도달하진 않는다. 아미코가 죽음의 손짓을 잘못 이해하고 귀신들을 배웅해 내는 결론 또한 어쩌면 상대를 헤아리기보단 직관대로 반응하는 아이의 순진함 없이는 불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프레임 바깥의 낯선 이에게 "괜찮아요"하고 말하는 아미코의 모습으로 끝맺어지는 영화는 존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건 아닐 테다. 낯선 이는 프레임의 안과 밖이라는 그 거리감을 유지하고 그걸 넘어서는 건 어디까지나 막연한 말 한마디이다. 무엇보다 인물들에겐 여전히 많은 것들이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여전히 혼자인 것, 자신을 지켜내는 일의 어려움, 그래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관계. 결국, 이 영화는 어떤 시련과 불운, 슬픔이 삶의 한 부분으로 존재함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얼마만큼의 외로움, 흐릿한 미래 안에서 어디까지나 당장의 순간에 적용되는 '괜찮은' 부분 역시 삶 안에 있음을 전할 뿐이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보기에도, 냉정할 것만 같던 이 세계에 이따금 다른 결의 순간도 있었다는 사실, 이를테면 폭주족 오토바이에 동생을 태워 등하교를 돕고 새였던 귀신을 쫓아내는 오빠의 모습이 영화 안에 짧고 무심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단 것을 깊이 되새기게 만든다. 미약할지언정 여기 고갈된 위안을 주며 삶과 이 세계(영화)를 지탱하고 있었음을 전한다. 그런 작은 순간이 이 영화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슈아픽처스

여기는 아미코
Amiko
감독
모리 유스케Morii Yusuke

 

출연
오사와 카나
Osawa Kana
이우라 아라타Iura Arata
오노 마치코Ono Machiko

 

배급 슈아픽처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4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24.02.28.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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