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라스 폰 트리에, "세계를 불태우느니, 내 영화를 불태우겠다는 의지"
[Critique] 라스 폰 트리에, "세계를 불태우느니, 내 영화를 불태우겠다는 의지"
  • 김경수
  • 승인 2024.02.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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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그리고 <킹덤: 엑소더스>

본인이 몽유병 환자라 생각하는 카렌(보딜 요르겐센)은 밤마다 덴마크 최대의 종합병원 킹덤을 로케이션으로 찍은 드라마 라스 폰 트리에의 <킹덤>(1994)을 시청한다. 그녀는 졸음이 쏟아지자 침대에 드러누워 온몸을 구식 구속복으로 칭칭 감은 뒤 두 눈을 감는다. 깊은 새벽, 카렌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손과 발에 감긴 사슬을 푼 다음에 비몽사몽으로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종합병원 킹덤이다. 그녀가 킹덤의 문을 연 순간에 급작스레 스크린이 세피아톤으로 전환된다. 그때 <킹덤>의 오프닝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킹덤: 엑소더스>의 오프닝이 시작된다.

<킹덤>은 라스 폰 트리에의 드라마로 원래 13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다. <킹덤1>은 1994년, <킹덤2>는 1997년에 제작되었다. <킹덤1>과 <킹덤2>는 각각 4시간 분량의 영화로 합쳐져 영화관에도 상영되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심야에 상영되었고 10만 명 관객을 동원하는 컬트 영화로 입지를 다졌다. 나머지 3편이 담긴 <킹덤3>은 극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두 주연 배우의 죽음으로 제작이 무산되었다. <킹덤: 엑소더스>는 그로부터 25년 뒤 제작된 후속편이다. 전작의 주연 가운데 넷 정도만 재출연했으며, 나머지는 새로운 캐릭터로 구성되었다. 감독은 <킹덤1>, <킹덤2>의 플롯을 이어나가기보다 <킹덤1>, <킹덤2>에서 그려낸 세계관을 토대로 이야기를 리메이크하였다. 무엇보다 25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는 동안 라스 폰 트리에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킹덤: 엑소더스>를 설명하기 전에 <킹덤>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피하므로, 일단 <킹덤>의 설정과 플롯을 살펴봐야 한다. <킹덤: 엑소더스>가 <킹덤>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으로 플롯이 전개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영화 <킹덤: 엑소더스> ⓒ 엣나인필름

정교한 <킹덤>의 세계

블랙코미디와 오컬트, 의학 드라마라는 상반된 장르가 혼성모방된 <킹덤>은 기술 문명의 정점이자 이성을 상징하는 의학과 그 반대편의 오컬트를 뒤엉키게끔 한다. 이 드라마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킹덤 병원 지하에는 오래된 늪이 있다. 한때는 이곳에서 천을 표백했다. 표백꾼들이 아마포를 얕은 물에 적셔 표백했다. 안개처럼 자욱한 증기가 언제나 이곳을 뒤덮었다. 킹덤은 그 위에 세워졌다. 표백꾼이 있던 자리에는 의사와 과학자, 이 나라 최고의 지성과 완벽한 기술이 들어앉았다. 이 성취를 더욱 빛내고자 킹덤이라 이름 붙였다. 이제 생명의 정의가 규정되고 무지와 미신은 두 번 다시 과학에 도전하지는 못하리라. 지나치게 오만해진 이들은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영혼이 나타나면 냉기와 습기가 돌아오니 피로의 징후들이 조금씩 현대적인 견고한 건물에 드러나고 있다. 아직 산 자는 모르지만, 킹덤으로 향하는 입구가 또다시 열리고 있다."

또한, 드라마 한 화가 끝날 때마다 본인이 등장해 화마다 멘트를 하고, 마지막에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과 "선과 악이 함께 하길"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이 드라마의 문제의식을 압축한 기승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병원 시스템이 광인을 규정한다는 문제의식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생각나게끔 한다. 다만, 라스 폰 트리에는 시스템이 생기는 방식보다는 시스템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오류에 주목한다. 시스템 안에서 희생자가 계속 생겨나지만, 시스템에서는 희생자의 원한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는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이자 유럽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전염병>(1987)의 연장선에 있다. 원인이 모를 전염병이 퍼지는 이 영화의 설정은 병원 전반에 유령이 돌아다니는 <킹덤>의 상황과 유사성을 지닌다.

<킹덤1>은 영혼을 숭배하는 오컬트 신자 시그리드 드루세(크리스틴 롤페즈)와 스웨덴에서 논문 표절로 추방되어서 덴마크의 킹덤으로 온 안하무인 신경외과 전문의 스티그 헬머(에른스트 휴고 야레가드), 애인인 유디트(비르지트 라베르크)가 사탄의 아이를 밴 사실을 알게 된 젊은 신경외과의 요르겐 크로그소이(쇠렌 필마크)의 서사가 교차된다. 드루세는 위장환자로 킹덤 신경외과에 입원해 마리라는 아이의 원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마리의 과거를 추적한다. 스티크 헬머는 덴마크를 후진국으로 보고 모든 것에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와중에 모나의 수술을 잘못 집도해 불구로 만든다. 그는 애인의 도움으로 수술 당일의 마취 기록에 커피를 쏟아서 증거를 인멸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와 라이벌 관계인 크로그소이는 모나에게 일어난 의료 사고가 헬머의 잘못이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마취 기록 사본을 입수하는 데에 성공한다. 또한 커다란 암세포를 추출하고자 간암 말기 환자의 간을 본인의 몸에 이식하는 본도, 연상의 간호사를 짝사랑하는 신경외과 과장의 아들, 무능한 신경외과 과장 등 여러 캐릭터가 어우러지면서 커다란 교향악을 만든다. 드루세는 마리가 아버지이자 킹덤 병원이 생길 당시에 의사로 일한 아게(우도 키에르)에게 살해당한 것을 알고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려 퇴마의식을 벌이지만 의식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안다. 한편 아게는 유디트를 임신시키고 도망간 남자이기도 하다. 크로그소이는 아게가 사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배 속의 아이를 죽이려 한다. 배 속의 아이(우도 키에르)는 결국 죽지 않고 탄생한다. 모든 이가 기형인 아이에 놀라지만 유디트만은 아이를 사랑으로 감싼다.

<킹덤2>는 전작의 세계관을 계승한다. 크로그소이에게 아이티에서 공수한 독약을 먹여서 죽이려 하는 스티그 헬머의 고군분투와 유디트에게서 탄생한 아이의 이야기가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이는 일명 리틀 브라더로, 계속 비대하게 몸통만 커질 뿐 움직일 힘도 없다. 드루세는 지하에서 도망친 숱한 영혼과 소통하려 애쓰던 중에 리틀 브라더의 정체를 안다. 리틀 브라더의 몸에서 아게가 남긴 사탄이 빠져나오려 애쓰는 중이고, 리틀 브라더는 선한 마음으로 그 사탄을 정화하는 중이다. 아게가 리틀 브라더를 방문해 그를 압박하는 동안 헬머는 끝내 크로그소이에게 독약을 먹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 뒤 아게가 활개치기 시작하며 킹덤은 아수라장이 되면서 드라마가 끝난다. 병원장의 아들 모게가 사탄 숭배자로 밝혀지고, 리틀 브라더의 생사는 불명확하게 된다.

 

영화 <킹덤: 엑소더스> ⓒ 엣나인필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다면 <킹덤>은 그가 (미학적 도발에 그친) 도그마 95 선언을 외친 중기의 출발점에 있다. <도그빌>(2002) 이전,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백치들>(1998), <어둠 속의 댄서>(2000)까지 라스 폰 트리에는 종교와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천착한다. 세 영화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여럿 있다. 우선 세 영화 다 여성이 주연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그들이 세속의 핍박을 견디는 성자로 그리는 설정이며 세 번째는 세속에서 벗어난 경지에 이르는 결말이다. 물론 그들이 다다른 숭고가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숭고에 다다르기 직전의 정황만 찍으려 할 뿐이다. 또한 그 숭고가 선인지 악인지 판단하기도 불가능하다. 이는 라스 폰 트리에의 우상이기도 한 칼 드레이어의 세계관을 계승한 것이다. 감독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 대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종교는 공격받되 신은 공격받지 않는" 칼 드레이어의 관점을 지니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성에 의해서 운영되는 시스템의 부조리와 종교 사이의 긴장은 <킹덤>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감독 본인이 선함(goodness)에 대한 영화라고 한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베스(에밀리 왓슨)가 남편 얀(스텔란 스텔스가스)을 위한 희생을 택하는 순간에 유정에 있는 모든 노동자가 하늘을 올려본다. 그때 하늘 높이 위치한 카메라 앞에 두 개의 종이 등장하고 베스가 평소 즐겨 듣던 종소리가 울리며 끝난다. 이때 카메라가 유정에 있는 노동자의 시선을 따라서 하늘로 움직이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동자가 종을 마주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이때 종은 CG로 그려진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하기에 관객은 이 종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선함에 기반해서 생긴 베스의 숭고한 희생을 그려내되 그 희생 이상의 기적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드러낸다. 이 영화 전반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톤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이 장면만은 CG다. 가장 사실적인 톤에서 가장 인공적인 톤으로의 도약이 곧바로 신과 같은 존재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신이 등장하는 것이다.

감독은 그 이후로 환상을 그려내지 않는다. <킹덤2>에서는 선과 악을 함께 견디는 리틀 브라더의 운명을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백치들>에서 카렌(보딜 요르겐센)은 가족이 보는 앞에서 먹던 케이크를 토하는 백치 행위를 행한다. 남편이 카렌의 따귀를 때린 다음에 수전(안나 루이스 헤싱)이 그녀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때 카메라는 수전을 올려다보는 카렌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도그마 원칙에 충실한 <백치들>에서는 환상이 허락되지 않기에 카렌은 자신을 외면하는 가족의 얼굴만 볼 뿐이다. 카렌이 백치로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어둠 속의 댄서>(2000)에서는 셀마(비요크)가 죽는 순간 카메라가 암전되고 죽은 셀마를 본 주위의 반응만 사운드로 드러난다. 이후 <도그빌>에서 그레이스(니콜 키드만)은 갱이 마을 주민을 대학살하는 광경을 볼 뿐이다. <킹덤>에서 드러낸 "선과 악을 함께 취하기를"의 문제는 점차 시스템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저 진정성과 순수함에 대한 갈망에 가득한 힙스터에 불과했던 라스 폰 트리에는 점차 윤리적인 문제에 맞부딪힌다. 그는 정교한 사유에 기반한 불편하고 위악적인 감독이라기보다는 그저 본인의 영화처럼 백치에 가까운 감독에 가깝다. 더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실패를 전시하기 시작한다.

 

영화 <킹덤: 엑소더스> ⓒ 엣나인필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촬영'이다. <킹덤>과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촬영할 때 파나비전을 비디오로 변환하고 이를 다시 필름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때 필름에 세피아톤이 입혀지고 핸드헬드나 배우의 사실적인 연기가 비디오로 촬영한 것을 보는 는 듯한 현장감과 어우러져 다큐멘터리적인 효과가 생긴다. 그의 영화가 종종 편집점이 거친 데다가 점프컷 등으로 상황이 통째로 생략되는 등 과감한 편집으로 진행되는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으로는 드라마틱하고도 신파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파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킹덤>의 경우 프로 정신과 휴머니즘에 기반한 미국의 의학 드라마를 패러디한다. 시종일관 이성, 효율성을 예찬하지만 스웨덴 의사인 스티그 헬머는 모든 것을 대충 처리하고 제 감정에 휘둘리는 파렴치한이다. 덴마크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으로 킹덤의 모든 것을 비난하나 정작 본인이야말로 거기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존재다. 헬머가 속한 의사 협회는 지하실에서 오컬트를 숭배하는 교단처럼 묘사되며 병원에 퍼지는 대체의학을 경계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대체의학에 심취하는 자가당착으로 가득하다. 분도는 <킹덤1>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혼을 먹는 의사의 등장으로 자신의 암덩어리를 모두 빼앗기고야 만다. 오컬트야말로 킹덤과 그곳의 의사를 구원한다. 또한 오컬트가 초자연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긴장감 넘치는 숏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반-장르적인 치기는 MGM 뮤지컬을 해체하는 <어둠 속의 댄서>에서 정점에 이른다. <어둠 속의 댄서>는 뮤지컬을 조롱하듯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을 안무로 삽입하고, 셀마가 노래하는 중간에 교수형을 당하는 등 뮤지컬이 만드는 심리적인 환상과 그것을 구체화한 무대, 환상이 만드는 가상의 공간을 파괴하는 데에 일조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종교적인 신파극을 사실감과 함께 그려내 냉소적 현실과 초월 사이의 간극을 벌린다. 이로써 더 큰 충격 효과를 자아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충격 효과에 의존하며 말 그대로 백치 행위를 벌인다. 카렌의 백치 행위에서 드러나듯이 백치 행위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반항이 될 수 없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의 영화는 그 무엇도 타격하지 못하며 오히려 본인의 우울감을 캐릭터에 투사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이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비판된 것도 그의 여주인공이 굳이 그토록 많은 시련에 처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다. 여성 캐릭터를 근대적 시스템에 대한 냉소를 드러내는 거울로 쓰는 데에 그치며 여성 캐릭터에게 지나칠 정도로 가학적이라는 당대의 비판에 동의한다. 무엇보다도 여성 배우에게 가학적으로 대하고 개인적인 감성을 투사한다는 비요크의 폭로와 그를 둘러싼 온갖 소문이 당시 그에 대한 비판에 기름을 쏟아부었다. 지금은 그의 성폭력을 고발한 비요크의 미투 폭로 이후 그에 대한 논란이 커지기에 이르렀다.

 

영화 <킹덤: 엑소더스> ⓒ 엣나인필름

분명한 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보다 <킹덤>이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그의 텅 빈 사유를 복잡다단한 캐릭터의 힘으로 드러낸다. 과거의 의학 시스템이 지금의 의학 시스템보다 더 잔인했다는 대비를 통해서, 또한 미래 세대가 사탄 숭배로 가득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통해서 시스템에 대항하는 개인의 드라마틱한 삶을 더욱 잘 드러냈기 때문이다. 드루세는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매번 실패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에게 이 실패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분신으로 보이는) 리틀 브라더의 말로 드러나듯이 "인간은 모두 세상의 일부"이며 인간은 선과 악의 끝없는 투쟁 가운데에서 죽음에 다다르면서도 결국 인간성을 지키는 인간을 옹호하고자 했다. 나아가 시스템이 어그러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킹덤1>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씬은 결말 직전에 드러난다. 병원 원장 밥(헨닝 옌센)이 보건부 장관을 데리고 신경과로 데려간 날, 신경과는 신경과 환자가 아닌 다른 환자로 가득다. 분도는 간암 이식 수술을 하고 있으며, 병원장의 아들 모게(피터 민긴드)는 수면 실험실에서 간호사와 성관계하는 중이다. 또 유디트가 아이를 낳는다. 감독은 이같은 능수능란한 작법술로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낸다.

또한, <킹덤>은 <도그빌>, <님포마니악>(2013), <살인마 잭의 집>(2018) 등등 상징되는 그의 후기작의 스타일을 예언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그빌>부터 시작해 그의 세계는 세계를 압축해 드러내는 알레고리화된 공간이 된다. 연극적 세팅을 쓴 <도그빌>은 가장 직접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킹덤>은 우회적으로 근대적인 이성관이 지배하는 세계 드러낸다. 이를 그려내는 스토리텔링도 눈여겨볼 만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스토리텔링은 18세기 철학 소설의 형식과 비슷하다. 볼테르와 사드, 디드로 등이 본인의 철학을 드러내고자 특정 에피소드를 그려낸 뒤에 화자가 개입해 본인의 철학적 사색을 이야기하는 식이다. 철학 소설은 계몽 사상이 발전한 시기에 탄생한 형식이었으므로 그의 변호는 어느 정도 타인을 계몽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기는 하다. 드라마의 중간에 등장하는 두 다운 증후군 환자의 대화와 드라마 <킹덤>의 에피소드가 끝나갈 무렵에 라스 폰 트리에가 개입해 이야기를 해설하는 설정이 철학 소설을 생각나게끔 한다. 이 두 다운 증후군 환자가 초월적 능력으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운명을 한탄한다면 라스 폰 트리에는 그 의미를 지정하는 식이다. 그러나 <킹덤>은 픽션이라기보다는 픽션 바깥에 있는 라스 폰 트리에가 만든 공간으로 드러난다. <살인마 잭의 집>에서 전면으로 드러나는 공간성은 결국 그의 영화가 SF에 그려진 미래와 같은 사유 실험장임을 드러낸다. 철학 소설의 형식은 사유실험의 장이 된 공간에서야 가능하다.

<킹덤>처럼 <님포마니악>과 <살인마 잭의 집>도 화자가 본인의 이야기를 말한 다음에 이야기에 대한 타인의 해석을 반박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본인의 예술을 살인마에 빗댄 <살인마 잭의 집>은 토마스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마르키 그 사드의 <미덕의 불운> 등 18세기의 철학 소설에 기반한다. 라스 폰 트리에가 그간 저지른 여러 기행에 대한 변론인 셈이다. 라스 폰 트리에가 2012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멜랑콜리아>(2012) 인터뷰 당시에 "나는 히틀러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발언이 특히 그러하다. 이는 라스 폰 트리에 본인이 덴마크계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 혼혈이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거기에 큰 충격을 느꼈다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말실수한 것이다. 여성 혐오, 어린이 살해등의 과격한 방법을 통한 예술관, 미투와 PC에 대한 거부감 등 감독의 개인적 문제가 더해진다. <멜랑콜리아>까지만 하더라도 라스 폰 트리에는 본인의 내면을 미학화했다. 그는 <님포마니악>과 <살인마 잭의 집> 등에서 본인의 곤란한 처지를 철학적으로 변호한다. <살인마 잭의 집>은 챕터마다 글렌 굴드의 바흐 콘체르토 연주 영상을 삽입해 예술지상주의를 옹호하고, 심지어 후반부에 본인의 영화 스틸컷을 중간중간에 삽입한다.

 

영화 <킹덤: 엑소더스> ⓒ 엣나인필름

그리고 <킹덤: 엑소더스>

<킹덤: 엑소더스>의 세계관에서 <킹덤>은 픽션에 불과하다. "바보 천치 감독이 만든 영화"이자 병원의 명성을 폄훼하기만 한 실패작으로 그려진다. 중간에는 관광상품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킹덤: 엑소더스>의 주인공이 <백치들>의 카렌으로 선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감독 본인이 그려낸 가장 순수한 캐릭터의 눈으로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절망이 영화에 가득하다.

카렌은 병원의 지하에서 선과 악이 공잔하는 양날의 검인 엑소더스를 발견한다. 또 <킹덤: 엑소더스>에서는 스티그 헬머의 아들 헬머 주니어(미카엘 페르스브란트)가 등장한다. 아버지가 덴마크에서 미쳐서 죽은 것을 안 그는 덴마크에서 그의 흔적을 찾으려 애쓴다. 신경외과에는 헬머의 속을 박박 긁는 신경외과 과장인 폰토피단이 있고, 헬머 주니어를 골리려고 애쓰는 여성 안나(튜바 노보트니)가 있다. 안나는 헬머와 마찬가지로 스웨덴인으로 그를 병원의 지하의 스웨덴인 모임으로 데려간다. 헬머는 안나에게 성적인 말을 던진 다음에 성폭력으로 고소당한다. 그는 병원 지하의 스웨덴 변호사와 상담하지만 변호사는 그에게 되려 안나에게 고액의 합의금을 물어주라고 한다. 헬머는 안나에게 성적인 감정을 버리지 못해 그 뒤로도 성폭력을 저지르고 계속 합의를 보게 되면서 그녀에게 돈을 가져다 바친다. 카렌은 몽유병인 채 병원 지하에서 킹덤의 우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병원을 지키는 리틀 브라더와 여전히 울고 있는 모나를 발견한다. 리틀 브라더는 투병 중이고, 본인이 흘렸던 눈물에 잠겨서 죽어가는 중이다. 카렌은 유디트와 함께 리틀 브라더의 병을 고치고, 킹덤을 지키려 하지만 이미 사탄의 부하(윌렘 데포)가 깨어나 병원을 활보하는 중이다. 그는 크리스마스날 킹덤을 무너뜨리려 한다. 반면 카렌은 크리스마스날 선한 영혼과 악한 영혼을 지하에 잠재우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한다. 사탄은 그 의식을 망가뜨리려 온갖 수를 쓰고, 카렌은 끝내 그 의식에 실패한다. 사탄의 계획은 이보다 더욱 큰 것이었다. 킹덤은 세계를 지키는 9개의 문 중 하나고, 킹덤은 그 중 두 번째에 위치한다. 사탄은 차례대로 세계를 멸망에 빠뜨릴 것이다. 문제는 사탄의 정체가 라스 폰 트리에라는 것이다.

<살인마 잭의 집>에서 살인마를 자처한 것을 넘어서 이 작품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사탄을 자처한다. 살인마 잭이<신곡>의 지옥에 입장하듯이 라스 폰 트리에도 기어이 <킹덤>의 지하에 있는 연옥에 입장한다. 이 드라마에서의 라스 폰 트리에는 천막 뒤에 숨는다. 그는 조심스레 유럽 정세가 엉망진창이니 본인이 보수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건넨다. 마지막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불태우며 사라지기까지 한다. <킹덤: 엑소더스>는 픽션이라기보다 본인의 삶을 토대로 이 세계가 왜 파국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지 분석하는 에세이영화에 더욱 가깝다. 안나와 헬머의 관계는 PC와 캔슬컬처 등을 비판하고, 본인이 거기에 유린당했다는 생각을 담은 캐릭터다. 헬머는 본인이 스웨덴 혈통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중간에 덴마크 혼혈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만다. 이는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을 반영한다. 또한 양자가속기를 두고 다른 병원과의 경쟁 관계는 의학이 아니라 기술 문명을 신봉하는 세계상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눈여겨볼 만한 설정은 지하의 여러 컬트적인 집단이다. <킹덤: 엑소더스>의 재밌는 설정은 <킹덤>에서 유령으로 가득한 지하층이 컴퓨터와 모임이 가득해있다는 것이다. 악마의 아이를 되살리는 것도 지하에 사는 해커 칼레(이다 앵볼)의 3D 프린팅 기술이다. 칼레는 병원장이 하는 카드게임의 난이도를 조정하는 알고리즘과 같은 존재다. 또 헬머가 이끄는 스웨덴인 모임은 거기에서 바르바로사라는 이상한 선전 작전을 펼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르바로사는 독일이 러시아와 스웨덴 등을 침략할 때 쓴 구호이기도 하다. 스웨덴인은 킹덤을 무너뜨리려 나름대로 파업으로 저항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덴마크인이 너무 게으른 데다가 제 나름의 집착하는 형식적인 인간이어서다. 무엇보다 크로그소이가 머물러 있던 아편굴은 50-60대의 현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병원 지하에 숨어서 아편에 젖어서 과거만 회상하다 죽는다. 카메라는 그곳을 긴 테이크로 드러낸다. 라스 폰 트리에에게 유럽인의 담론은 <킹덤>의 지하와도 같다. 50-60대는 노스탤지어에, 20-30대는 이름뿐인 혁명에 골몰하는 컬트에 불과하다. 병원 위의 세계를 결정하는 것은 해커의 장난이다. 그들이 유령을 대체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유럽이 파편화되었고 모든 것이 부족화된 사회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병원이 망하는 순간 닥치는 폭풍은 본인이 말하듯 기후 위기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작품으로 비로소 빌런을 벗어나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영웅의 숙적을 자처하는 반-영웅이 되었다. 다만 모든 것이 인상 비평으로 그친다는 아쉬움이 이 작품의 결함이다.

 

영화 <킹덤: 엑소더스> ⓒ 엣나인필름

<킹덤: 엑소더스>는 <킹덤>의 기법을 그대로 이어간다. <님포마니악>과 <살인마 잭의 집>의 사실감은 우화적인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은 편이었다. <킹덤: 엑소더스>는 라스 폰 트리에가 자기연민에 기반한 변론을 한 두 영화와 다르다. 그는 현실의 거울상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을 통해서 세계를 정확히 냉소하고자 한다. <킹덤>을 오마주하고 재조립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든 것이다. 이 세계에서 그는 본인이 직접 사탄을 자처해 킹덤으로 직접 강림한다. 그는 세계는 내가 만든 세계에 불과하다고 변호한다. 또 이는 스노우볼에 담긴 킹덤의 이미지로 잘 드러난다. 다만 라스 폰 트리에는 아직 세계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킹덤: 엑소더스>는 킹덤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만, 아직 7개의 병원이 남아 있다는 설정으로 끝난다. 커튼 뒤에 숨은 라스 폰 트리에는 차라리 이 세계 전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본인이 그려낸 세계만 불태우고 끝낸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조금이나마 성숙했다는 징후일지도 모르겠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영화 <킹덤: 엑소더스> ⓒ 엣나인필름

킹덤: 엑소더스
The Kingdom Exodus
감독
라스 폰 트리에
Lars Von Trier

 

출연
보딜 요르겐센
Bodil Jorgensen
미카엘 페르스브란트Mikael Persbrandt
라스 미켈슨Lars Mikkelsen
니콜라스 브로Nicolas Bro
튜바 노보트니Tuva Novotny
니콜라이 리 코스Nikolaj Lie Kaa

 

배급 엣나인필름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31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4.01.31.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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