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사랑' 종말 이전 혹은 이후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종말 이전 혹은 이후의 사랑
  • 이지혜
  • 승인 2024.02.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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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지구 종말이 온다면, 여러분은 뭘 하고 싶으세요?"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잘' 사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다. 그런데 이 '잘'이라는 부사가 참 애매하다. 사전적 의미에서 '잘'이란, '옳고 바르게, 좋고 훌륭하게, 익숙하고 능란하게'를 뜻한다. 말하자면 '잘' 살아가는 것의 기준과 모양이, 즉 쾌락의 형태가 다양해진 것이다.

 

'쾌락'에 대해 꽤 흥미로운 정의가 있다.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다. 아타락시아는 영혼의 평화를 유지하고, 내면의 평정을 중시하며, 삶을 유지하는 이상적 경지의 쾌락을 뜻한다. 

 

정형적이던 삶의 모양이 해체되고,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다. 홀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오롯이 혼자인 삶을 감정의 동요 없이 유지하는 것,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기다리는 것,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일체의 모든 행위도 일종의 쾌락이자, 아타락시아다.

 

지금 혼자 있으며 미래에도 혼자이길 원하는 사람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 흔들리게 하는 것,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 우리의 '아타락시아'를 무너지게 하는 계기가 있다. 어떤 이에게 쾌락은 어떤이에게는 고통이 된다. 어떤 이의 기쁨은 어떤 이의 공포가 된다. 나는 그러한 계기를 사랑이라고 본다.

"만약에 지구 종말이 온다면, 여러분은 뭘 하고 싶으세요?"

정직테크에서 경리로 일하는 영미(이유영)는 일하는 도중 질문을 하나 받는다. 그러나 이 질문은 영미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영미가 사무실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영미는 대답 대신 창 밖 너머 한 사람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 끝엔 배송기사 구도영(노재원)이 있다. 영미는 도영과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사이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고 있다. 따라서 도영이 회삿돈을 횡령하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하지만, 눈감아준다.

영미는 중증 치매를 앓는 큰어머니를 사촌오빠 대신 보필한다. 말하자면, 영미는 출퇴근과 빠듯한 살림살이 전부를 홀로 견뎌내는 가장이다. 그러한 도중 도영을 위해 부업을 자처한다. 그는 잠을 미루고 재봉틀을 돌린다. 이는 도영이 훔친 돈을 몰래 메꿔놓기 위해서다. 세기말의 영미는 착하다 못해 미련하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은 사람이다. 그런 미련함을 상대는 알아주지도 않는 짝사랑에 온전히 헌신한다. 그러니까 <세기말의 사랑>(임선애)은 미련하고 바보 같은 영미의 짝사랑에 대한 영화다. 말하자면 세기말과 새천년 사이를 배경으로 삼은 '사랑 영화'다.

 

ⓒ 엔케이컨텐츠

왜 하필 세기말일까?

영화에서 말하는 세기말이란 'Y2K'와 '밀레니엄 버그' 이슈로 전세계가 대혼란에 빠져있던 1999년 연말을 뜻한다. 컴퓨터가 연도 표시의 마지막 2자리만을 인식해 1900년 1월 1일과 2000년 1월 1일을 같은 날로 인지하며 발생하는 오류로 인해 디지털로 작동되는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 복구가 어려울 것이며, 그로 인해 세계가 종말할 거라는 종말론이 'Y2K'와 '밀레니엄 버그'였다.

지금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 같겠지만, 정부 주요 부처와 굴지의 기업들도 비상사태였다. 필자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가 사뭇 진지했다. 그런 뉴스가 사회 전반을 뒤덮은 때였다. 각종 매체에서 '종말'이란 단어가 무분별하게 나뒹굴었던, 대혼란의 시기였다. 어렴풋 1999년의 마지막 달이 기억난다. 라디오를 들어도, 티비와 신문을 보아도, 인터넷에 접속해봐도 온통 '종말'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나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을 가정하며 비슷한 질문을 화두에 올렸다. "만약 종말이 오면, 그러니까 올해 마지막 날 뭐 할거야?"

'만약'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지칭하기 위한 단어다. 그러므로 '만약'이라는 단어는 세기말과 새천년 사이에 숨어든 '종말'의 가능성을 형용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종말'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이 비자의적이고 비의도적인 죽음을 갑작스레 맞이하는 상황을 뜻한다.

'만약'은 삶을 지키려는 의지이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전쟁과 천재지변 등을 근거로 들어 만약의 종말을 상상하고 가정한다. 그리고 이를 대비하며 삶을 꾸려나간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꼭 숨이 끊어져야만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임선애 감독은 <세기말의 사랑>을 통해 사회적인 죽음도 '종말'이라고 지칭한다. 이름에 그어지는 빨간줄은 사망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망하지 않아도 이름에 빨간줄이 그어졌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범죄로 인해 전과가 생길 때가 그렇다. 현대사회에서 전과는 사회적인 죽음 선고나 다름없다.

앞서 말했듯 영미는 구도영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횡령을 모른척하는 선택을 한다. 그 결과로 영미는 큰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횡령동조 혹은 방조죄의 명목으로 체포된다. 상복을 입은 영미는 새천년 아침을 취조실에서 맞이한다. 영미의 상복은 고스란히 감옥의 죄수복으로 치환된다. 그러므로 <세기말의 사랑>은 종말의 공포를 이겨낸 사랑, 말하자면 '죽음 앞에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경찰은 영미를 조사하던 중 "돈 빼돌리는 경리는 봤어도, 남의 돈 메꿔주다가 잡혀 온 경리는 처음봤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경찰 앞에서도 영미는 웃고 만다. 영미는 이를 계기로 가족 전부를 잃는다. 직장도 잃는다.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전과라는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는다. 생의 종말을 선고받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오직 도영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런데 삶은 참 잔혹하다. 영미는 투옥되기 직전에서야 도영이 유부남이었다는 것을, 횡령한 돈은 아내의 카드값을 갚는데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영미는 불륜녀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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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이전의 사랑

석방된 영미는 한 번 죽었다 깨어난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다. 이처럼 <세기말의 사랑>은 종말의 의미를 다각도로 조망한다. 세상이 망하는 것만 종말이 아니라, 개인의 인생이 망하는 것도 종말이라고 말한다. 그깟 사랑 때문에 종말이 도래하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임선애 감독은 영미의 투옥을 기준으로 종말 이전과 이후를 가름한다. 그리고 이를 영화의 '색'을 통해 구분한다. 영화에서 흑백은 하나의 상징 체계로 '과거'를 의미한다. 따라서 횡령 방조 혹은 협력 비슷한 죄목으로 감옥에서 형을 살아내기까지의 영미는 흑백 화면 속에 담긴다. 투옥을 기준으로 한 영미의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모노톤으로 붙박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미가 교도소 대문을 나서는 장면은 이 영화의 진정한 시작점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총천연색으로 변모하는 이 지점이 종말 이후이며, 영미에게 있어 진정한 새천년인 '현재'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회색이었던 영미의 운동화가 사실은 분홍색이었다는 것도, 그가 아주 독특한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사실도 모노톤의 화면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사실이다. 타인의 눈에 못생기고 칙칙하다는 이유로 별명마저 '미스 세기말'로 불리었던 영미의 과거는 종말과 함께 소거되었다. 영미의 개성이나 취향은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사실 모노톤이 아닌 컬러풀이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세기말의 사랑>이 'Y2K'와 '99년도'에 대한 시대 고증에 힘을 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기말'이라는 배경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무색하게, 임선애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대의 재현이나 묘사에 힘을 쏟는 것을 최소화한 듯하다. 대신 99년도 말과 2000년 초반의 분위기를 영미의 헤어스타일이나 주요 소품 일부로만 조심스럽게 증명한다. 그 시절 유행했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캐릭터를 오마주하거나 패션지의 낱장을 보여주는 식이다. 종말 이후 영미의 모습에서는 언뜻 2000년대 초 방영되었던 TV시리즈 <말괄량이 삐삐>와 <빨간머리 앤>, 그리고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롤라 런>(1999)이 보인다.

대신에 <세기말의 사랑>은 99년과 2000년 사이의 틈에서 떠돌던 '질문'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건져낸 질문에 답하기를 주력한다. "만약 지구 종말이 온다면 여러분은 뭘 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은 "만약 지구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뭘 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라는 질문으로도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장은 인생에 복잡다단하게 편재하는 다양한 모양의 '후회와 미련'에 대해 묻는다. 임선애 감독은 이 질문 앞에 영미와 유진(임선우), 도영 등의 인물을 차례대로 세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행동과 대답을 하는지 카메라의 눈을 통해 면밀하게 관찰한다.

새천년의 세상은 눈부시게 멀쩡하고, 영미의 인생은 쫄딱 망했다. 교도소를 나온 영미가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유진이다. 삶의 노고에 일찍 주름진 외모의 영미와는 달리,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유진은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증 사지마비 환자다. 그리고 그의 다른 이름은 '지랄 1급'인데, 성격이 너무 지랄 맞아서 생긴 별명이다. 어쨌든 그는 유별난 미모 덕분에 다수의 호구를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헤어디자이너 준(문동혁)과 기훈(김기리)은 유진의 손과 발이 되어 준다. 남편 도영도 그중 한 명이었지만, 회사에서 횡령한 돈으로 유진 명의의 카드값을 대신 갚아주다가 교도소에 갔다.

따지고 보면 영미가 교도소에 간 이유 중 일부는 유진의 탓도 있다. 그러나 영미는 유진의 탓을 하지 않는다. 유진도 영미에게 미안해하지 않는다. 영미는 유진의 소변 시중을 돕는 와중에도 그의 과소비를 힐난한다. 유진은 영미의 손에 의지해 생리현상을 해결하면서도 그를 불륜녀라고 비난한다. 자유로운 신체를 가진 영미와 부자유스러운 신체를 가진 유진이지만, 감정적으로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마음껏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힐난한다. 이들의 연민에는 서로에 대한 혐오와 수치심은 찾아볼 수 없다. 서로의 속을 긁고 까뒤집던 둘은 결국 전략적 동거 메이트가 되기로 한다. 옥살이 이후 오갈 데가 없어진 영미와, 옥살이 중인 남편 대신 온종일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한 유진은 함께 지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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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연민

연민이란 무엇일까?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연민'을 '감정이입'과는 다른 개념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연민은 '대상이 나쁜 상태에 있을 것(혹은 그렇게 생각될 것)'을 의미하는 상태다. 한편 감정이입은 '고통받는 사람의 경험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감정이입이라는 가치판단은 그 자체가 틀릴 수도 있고, 도덕적으로도 중립적인 능력이다. 감정이입은 때때로 연민과 연결되지만, 모든 감정이입이 연민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연민은 대상을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또한 타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관심은 '나도 어느 날 그러한 처지가 될수도 있겠다.'라는 공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발생한다. 그래서 연민은 돌봄이나 봉사같은 이타적 행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종말 이전 삶에서 치매에 걸린 큰어머니를 돌봤던 영미는 종말 이후의 삶에서 유진을 돌본다. 그러나 영미와 유진의 관계는 영미와 큰어머니의 관계처럼 일방적인 돌봄의 모양새를 취하지는 않는다. <세기말의 사랑>은 사지가 마비된 사람(유진)도 사지가 자유로운 사람(영미, 준, 기훈, 미리)을 돌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종말 이전 영미의 삶은 그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으로 들끓었다. 치매에 걸린 노모의 돌봄을 맡기고 영미 몫이어야 할 권리를 빼앗는 사촌오빠가 대표적적이다. 영미의 몸 전반에 커다란 화상흉터까지 만든 그는, 영미가 구치소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인생 대부분을 알뜰히 갉아먹고 옭아맸다. 그러므로 세기말까지의 영미는 사지만 자유로울 뿐, 그의 삶 자체는 '한복집'이라는 아날로그적 공간에 속박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새벽 밤을 수놓는 수동 재봉틀의 바늘땀을 보듯, 일말의 여유도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 영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신체의 일부나 전부가 부자유스러운 사람이다. 영미를 믿고 부업용 일감을 몰아주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면직물 공장을 운영하는 남사장, 나아가 사지가 마비된 유진이 그렇다. 이들은 영미를 포함해 사지가 건강한 사람들에게 이입하고, 나아가 연민해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영미를 돌본다.

그렇다고 유진의 일상이 영미보다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유진은 부자유스러운 사지 탓에 혐오와 수치심으로 가득한 일상을 살아간다. 멀쩡한 몸으로 장애인 화장실을 차지한 중년 남성은, 용변이 급해 소리를 지르는 유진을 비웃으며 병신이라고 욕한다. 휠체어에 앉은 유진은 때때로 소변 실수를 하지만, 그런 모습을 하나뿐인 혈육 미리(장성윤)에게 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어쩌지 못해 막막한 유진의 심정은 영화에서 '지랄과 막말'로 표현되는데, 그러한 유진의 상황을 온전히 공감하고, 헤아려 이입하는 것은 또래의 여성인 영미뿐이다.

그러므로 별명이 '지랄 1급'인 유진은 사실 별명만 '지랄 1급'이라고 볼 수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런 유진 곁에서 호구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로, 혹은 본의 아니게 유진을 등쳐먹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진은 이를 다 알면서도 그들을 내버려 둔다. 예컨대 호구들이 유진의 명의로 장애인 할인을 받아 차를 사도, 명품 구두를 가짜 구두로 바꿔치기해도, 신용카드를 가져가 마음대로 할부를 긁어도 모른척하며 견딘다. 유진이 참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는 척을 하면, 유진을 등쳐먹은 상대들이 유진을 떠날까봐, 그래서 그들을 다신 보지 못할까봐 겁이 나서다.

유진은 자신이 후회하고 미련할 것 같은 지점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다. 유진은 자신을 무는 모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는 떠나겠다는 사람을 붙잡을 신체적 자유와 힘이 없다. 그럼에도 유진은 영미에게 고백한다. "난 왜 도영이를 구하고 싶었을까?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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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의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보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구 종말이 온다면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가?

영미는 불륜녀다. 영미가 도영에게 품은 연정이 일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도영이 유부남인걸 몰랐다고 하더라도, 과정이 어찌되었건 마음의 결말은 더럽게 순정적이어서 복잡한 치정의 마음이므로 그것은 불륜이다. 지구 종말을 앞둔 순간 영미는 도영을 떠올렸고, 자수하겠다며 횡령을 고백하러 온 그에게 잠깐만이라도 함께 있어달라고 매달렸다. 말하자면,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 영미가 주마등처럼 떠올리는 후회와 미련은 바로 '도영'이다. 그러나 도영은 영미와 함께 있는 잠시의 순간에도 계약 결혼 상대인 '유진'을 떠올리고 걱정한다. 그리고 유진에게 못 해줬던 것만 생각한다. 따라서 새천년을 앞둔 모텔방에서 도영이 영미에게 했던 말, "대관람차를 타볼 걸 그랬나 봐요."라는 대사는 영미가 아니라 유진을 향한 것이다. 종말 앞에서 영미는 오직 도영을 걱정했고, 종말 앞에서 도영은 오직 유진만 걱정한다. 한편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는 유진은 빚에 허덕이던 도영이를 어떻게든 구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타인을 걱정하는, 그래서 어떻게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자 무모한 용기 아닐까? 물론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전부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걱정은 사랑일수도 있을 것이다. 영미에게 몸이 씻겨지던 유진은 영미의 상반신을 잡아먹은 화상흉터를 발견한다. 혈육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혐오에 가까운 비명을 내뱉게 하는 영미의 화상흉터를 본 유진은 그것을 만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화상의 모양이 맨드라미꽃 같다고, 예쁘고 부드럽다고 말하며 담담하게 웃는다.

영화의 말미, 유진의 드레스를 만들던 영미는 유진의 휠체어 바퀴까지 반짝이는 장식과 전구를 단다. 그들이 합심해 미용대회에 나가기까지의 시퀀스 중 일부 씬에서 휠체어의 바퀴가 두어번 카메라에 잡힌다. 이때 바퀴는 한밤에 돌아가는 대관람차처럼 자유롭고 여유롭게 반짝이며 빛난다. 도영이 태워주지 못한 대관람차를 영미가 태워주려고 시도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쩌면 영미는 끝까지 도영 생각뿐이었을수도 있다. 영미는 도영의 미련과 후회를, 걱정을 대신 해결해 보고자 노력한다. 나아가 유진과 도영이 대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새천년의 영미는 도영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유진도 걱정한다. 따라서 영미는 더 이상 유진과 함께 지낼 수 없다. 유진과 도영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 화면보호기를 사이에 두고, 도영에게 관계의 종말을 고하며 우는 유진을 그대로 두고 영미는 미련 없이 돌아 나온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연민하고, 또 걱정해 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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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용기

세기말의 영미는 '정직테크'의 경리였다. 경리는 회사에서 금전의 출납과 회계 전반을 관리하는 직무를 뜻한다. 이는 영미가 수와 계산에 밝은, 손해와 이득을 꽤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미는 계산하지 않는다. 손해를 보더라도 있는 힘껏 자신의 모든 것을 퍼붓는다.

<세기말의 사랑>은 사랑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 한번도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 영화다. 맨드라미의 꽃말인 '치정'과 '시들지 않는 사랑'처럼 이들의 사랑이 과연 어떤 모양으로,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영화다. 두 시간여의 상영시간 속에서 영미와 유진 사이에, 도영과 유진의 틈에, 영미와 도영의 찰나에 다양한 모양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 영화는 명백히 사랑 영화다.

정말로 시들지 않는 사랑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 사랑은 연민의 모양을 하고 걱정의 형태를 띄고 있지 않을까? 종말 앞에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조차 구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셈하거나 따져볼 사이도 없이 남을 구하고 싶어서 애쓰게 되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고 이름 지어진 용기 아닐까? 이 순간 최악이지만 돌이켜보면 삶에 있어선 최선이었을 어떤 선택들에 용기라는 이름을 가만히 붙여본다.

[글 이지혜 영화평론가, leehey@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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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사랑
Ms. Apocalypse
감독
임선애

 

출연
이유영
임선우
노재원

 

배급 엔케이컨텐츠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1.24.

이지혜
이지혜
 영화가 삶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계관의 일부가 될 수는 있다고 믿는다. 인생 첫 영화는 주말 저녁 부모님과 본<패왕별희>(첸카이거, 1993)였지만,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9)가 세계관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OTT로는 <레디 플레이어 원>(스티븐 스필버그, 2018)를 본다. 지독한 사랑영화 처돌이이기도 하다.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부문으로 등단했다. (공식인스타 @leehey_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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