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 사이에서' 여분과 여운의 시간이 들어갈 틈
'두 세계 사이에서' 여분과 여운의 시간이 들어갈 틈
  • 변해빈
  • 승인 2024.02.1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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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름과 사로잡힘의 순간들에 대해서"

<두 세계 사이에서>는 세계 내 간극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성립된다. 그와 더불어, 이 영화는 '두 세계 사이' 틈의 간격이 있는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삶의 이치를 냉정한 현실과 씁쓸한 감성의 교환으로 전하는 영화다. 마리안(줄리엣 비노쉬)은 고용불안과 노동실태에 관한 르포 형식의 신작을 집필하겠다는 일념 하에, 유명 작가로서의 신분을 자발적으로 지운다.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구직 및 노동 현장에 직접 자기 자신을 밀어 넣어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 마리안은 실제로 청소 노동자로 일하게 되고 여러 현장 안에서 실감한 육체적 피로, 부당하고 결락된 시스템 문제를 겪으며 이를 토대로 극의 말미에 이르러선 무리 없이 출판 행사를 개최한다. 하지만 영화는 경계 지어진 영역을 그대로 남기며 마리안이 절반만 성공한 것임을 보여준다. 마리안이 '현실'이란 의미를 부여한 노동 현장은 그에게 있어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 작가로서 그의 삶 반대편에 위치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현실에 불과하다. 마리안의 현실은 자신이 어디까지나 누군가의 현실 안에 머물다 갈 사람임이 구별되어 있단 사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디오시네마
ⓒ 디오시네마

<두 세계 사이에서>는 극의 초반부까진 마리안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다. 영화는 마리안이 다른 이들과 관계를 쌓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그가 경제적 능력을 갖춘 남편과 이별하고 근 20년 만에 처음 노동 활동을 해야 하는 처지라는 허구적 사실을 활용해서 노동자들의 현실을 우리와 가깝게 배치한다. 그러니 항구도시 '캉'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먼저 이야기해 보자. 마리안이 만난 캉의 사람들은 주로 청소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다. 영화는 공중화장실과 펜션, 여객선 객실과 같이 비장소(non-place)를 주요 배경으로 극을 펼쳐낸다. 이 장소 아닌 장소의 문제는 작중 인물들의 문제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방문객들이 임시로 머물되 같은 이유에서 아무렇게나 사용한 각 공간은 악취와 오물, 온갖 오염된 것들이 떠도는 현장이다. 어쩌면 그보단 노동 환경을 보호할 체계와 질서의 부재,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시스템이야말로 더 궂은 무언가일 것이다. 각 인물을 비인간으로 대하는 빈약하고 간악한 질서와 유연적 노동, 고용주와의 암묵적 상하 계급은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작동한다.

정착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precariat)에게는 자기 주체성, 자기 역사가 쌓여 형성되는 장소 개념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 내부엔 그들의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일상 또는 시간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각 공간의 방문객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잠시간의 머무름만이 허용된 채 이곳저곳을 오고 가며, 무수한 이동성을 그릴 뿐이다. 감독은 일터까지의 거리감과 노동 행위가 반복되는 과정을 담아내면서 화면에 고단함이란 정조를 입힌다.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보이게 하리라는 마리안의 집필 행위에 부여된 가치를 부족함 없이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새삼 두드러지는 것은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저마다의 노련함, 오랫동안 시간이 쌓인 흔적인 어떤 노하우들이다. 시스템 아래에서 인물들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거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하던 '머무름'의 시간성과 지워진 일상의 흔적들은 그렇게 비범함을 입고 나타난다.

 

ⓒ 디오시네마

육체적 존재감(노동력)만큼이나 이 영화가 강조하는 건 인물들 간 정서적인 결합과 유대이다. 사실상 마리안과 그의 글에서부터 비롯된 파장은 실질적인 제도의 개선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향하는 영역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마리안이 노동자들의 일상에 끼친 영향이 있다면, 가령 나무의 형태나 바다에 대한 감상이라든지 몸의 감각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에서 미세한 틈을 발견하고 자기 감각과 사고 체계를 끊임없이 활성화하는 삶의 양상 말이다. <두 세계 사이에서>에 등장하는 바다는 어떠한 기교 하나 없이 일직선상의 배열을 갖춘 땅의 표면과 물과 하늘 사이의 지평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조한 풍경은 굳이 따지자면 마리안 보단 크리스텔의 시점 쇼트에 가깝다. 마리안은 그 풍경 안에 '느른하다'라는 식으로 몸의 감각을 덧씌우고 기어이 바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 크리스텔의 세계, 프레임 내부를 흔든다. 마리안의 개입은 누군가의 일상에서 작동하던 임의성과 일시성의 기질을 바꾸고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 위로 개별적인 기억과 감정을 덧입힌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마리안은 누군가의 현실이 이미 존재'해왔던 것'이기도 하단 사실을 고려해야만 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마릴루의 실수로 마리안, 크리스텔을 포함한 세 사람이 여객선을 빠져나가지 못하던 장면에서 인물들은 그들 자신의 노동 현장에서 벗어나 (관광 상품으로서의 여객선인) 외부 세계와 뒤섞이고 무엇보다 서로 간의 관계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노동자들과 마리안 사이의 경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마리안은 그 자신이 그들의 일상 안에 한때 드나들 수 있을 뿐이란 사실과 그 드나듦의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쯤에서 마리안의 글이 르포임을 고려하더라도 문학적 특성을 지니며 이따금 감정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현실과 사실 속에 개인의 내면적 작동이 개입되는 설정은 "때론 감상적인 것이 더 실제적일 때가 있다"라던 마리안의 내레이션과 맞닿는다. 이때 노동 현장과 그곳의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순간의 감정들을 기록한 글은 마리안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조명되고 장면을 보완하며 우리에게 전해진다. <두 세계 사이에서>는 정작 현실의 매개물로서의 책이 지닌 물성과 그것이 야기할 미래에 관해선 펼쳐내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생성되는 마리안의 목소리는 책의 내용물을 앞질러 전해지면서 동시에 이후의 현실을 뒷받침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마리안의 감상으로 채워진 문장들이 이미지로서의 언어로 존재하는 순간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 '순간'을 중시하는 이 영화는 결국 각 문장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마리안의 것'이란 사실, 책이 누구에 의해 읽힐 것인지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세계에 들어와 이야기하게 되는 이가 누구인지가 더 크게 작동하는 상황.

 

ⓒ 디오시네마
ⓒ 디오시네마

그런 이유에서 <두 세계 사이에서>는 한 인물의 성정에 따라 달라지는 영향권을 응시한다. 마리안은 반복적이고 더 충동적인 형태로 다른 이들과의 거리감을 초과하며 불필요하지만 불가피한 감상을 표하는 일에 속절없이 사로잡히곤 한다. 그런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는 때는 크리스텔, 마릴루와 불가능한 미래를 기약하던 장면에서 마리안이 불현듯 울먹인 순간이다. 마리안의 울먹임 자체를 의심할 여력은 없지만, 그것을 만들어 낸 감성적 요건은 중요하다.

세 사람의 관계는 오로지 노동자들의 핍진한 현실로부터 발생한 산물이다. 그 안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해당 조건 내에 더 이상 속해 있지 않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이들 관계를 둘러싼 현실이다. 울먹임은 마리안이 그들의 현실에 긴밀히 접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과 자기 현실 사이에 희미하지만 긴요한 틈이 있고, 언제든 빠져나오기가 가능하단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영화는 이를 말하려는 듯, 마리안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던 모습처럼 어떠한 설명이 붙지 않고 덩그러니 틉입되는 장면, 그러나 인물이 자유로이 건너가도 개연적 흐름을 훼손하지 않는 장면이 들어갈 여분의 틈을 영화 안에 마련한다. 따라서 울먹임은 이러한 차이를 자각하고 마리안 자신의 현실로 빠져나와야 한다는 무언의 마지막 신호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리안은 오히려 스스로가 노동자들의 현실 안에 잘 들어가 있으므로, 울먹임이라는 충동적인 현상을 겪는다는 혼돈에 빠진 것 아닐까. 정체가 가짜인 것과 마음의 거짓됨 사이의 차이가 구별될 것이라는 믿음 혹은 바람은 그녀가 노동자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순 있으나 그 현실을 메운 진짜 심경으로부터는 물러나 있기 때문에 가능할 따름이다.

울먹임이 실제적인 무언가를 드러내 주는 감상적 지표라는 말에는 인물들 사이 간극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두 세계 사이에서>는 마리안의 삶에 이면의 공간을 발생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뒤늦게라도 밝힌 사실이 무언가를 알리는 행위로 하여금 거짓이나 잘못이 아니게 되는 삶의 측면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믿어온 그 이치가 적용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마리안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4분간의 찰나 동안 그것을 제대로 경험한다. 그녀가 글과 책으로 생각할 수 있던 문제가 아니라 몸소 어떤 정념에 강렬하게 휩싸이는 방식으로. 크리스텔과 마릴루는 그녀에게 함께 피우던 담배와 함께 하던 청소를 권유한다. 정확히는 그녀가 다시금 그 일을 할 수 없으리란 확인을 요청하는 쪽이다. 마리안은 두 번의 거절을 건네고 두 사람은 그녀를 홀로 남겨둔 채 그대로 떠난다. 그들이 떠나간 모습 뒤로 시선을 길게 늘어트리는 마리안과 달리, 두 사람은 일터로 향하는 교통수단이 멈춰 버림과 동시에 노동을 위한 시간에 쫓겨야 한다. 그들에게 여운의 시간이 끼어들 틈은 없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디오시네마

두 세계 사이에서
Between Two Worlds
감독
엠마뉘엘 카레르
Emmanuel Carrere

 

출연
줄리엣 비노쉬
Juliette Binoche
헬렌 랑베르Helene Lambert
루이즈 포시에카Louise Pociecka
스티브 파파지아니스Steve Papagiannis

 

배급 디오시네마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3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1.31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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