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웡카' 초콜릿은 자본주의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웡카' 초콜릿은 자본주의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 김경수
  • 승인 2024.02.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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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나누어 먹으라"

<웡카>를 보기 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인 폴 킹은 <웡카>가 한국에서는 <초콜릿 천국>으로 알려진 1971년도에 제작된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이하 <윌리 웡카>)의 프리퀄이라고 말했다. 해외 언론의 인터뷰에서는 1971년도 영화의 동반자(companion)같은 작품이 되기를 바랐으며, 그 영화의 25년 전을 상상하는 것이 <웡카>의 시작이라 밝히며 원작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심지어 1971년도의 영화를 재발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폴 킹은 굳이 왜 <웡카>가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이하<찰리>)가 아니라 1971년도 영화와 이어지는 상호텍스트로 읽히기를 바란 것일까? 두 영화 사이에는 (속편이 제작되지 않은 지금까지는) 25년이라는 이야기의 공백이 있다. 폴 킹의 설정대로라면 <웡카>의 웡카(티모시 샬라메)는 25년 뒤, <윌리 웡카>의 웡카(진 와일더)로 자라날 것이다. <웡카>의 엔딩은 웡카가 외진 곳에다가 공장을 짓는 것으로  끝난다. 그 공장은 웡카의 은신처이자 훗날 찰리와 네 명의 문제아가 오가는 공간이 될 것이며, 웡카는 욕심쟁이 아이를 심판하는 심판관을 자처할 것이다. 이 영화가 흔히 이야기하듯이 마냥 선하기만 한 영화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웡카가 괴짜가 되기 직전까지만 그려내되 웡카가 왜 괴짜가 되어서 은둔할 수밖에 없는지 단서를 곳곳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웡카>는 세계 최고의 쇼콜라티에가 되고자 세계 곳곳을 방랑하던 웡카가 배를 타고 달콤백화점이 있는 19세기 런던풍 도시로 향하며 시작된다. 그의 수중에는 겨우 은화 12소버린과 작은 가방과 모자뿐이다. 의도치 않게 하루 만에 은화를 다 써버린 웡카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다. 그날 밤 블리처(톰 데이비스)와 스크러빗(올리비아 콜맨) 일당이 그에게 싼 숙소를 제공하겠다며 그를 꼬드겨 부당한 계약서를 쓰게 한다. 그들의 진짜 속셈은 웡카를 여관 지하에 있는 세탁소에 평생 가두고 노예로 부리려는 것이다. 웡카는 그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서명한다. 웡카는 1만 소버린이라는 빚을 안고 지하에 감금당한다. 웡카는 거기서 누들(칼라 레인)의 도움으로 세탁소를 탈출해 초콜릿을 팔기 시작한다. 세탁소에 함께 감금된 네 명도 이 계획에 동참한다. 한편, 달콤백화점의 상권을 독점하는 슬러그워스(패터슨 조지프)의 초콜릿 카르텔은 웡카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경찰서장(키건 마이클 키)를 초콜릿으로 매수해 웡카를 제거하려고 한다. 웡카가 마침내 달콤백화점의 빈 상가를 일주일간 대여해 초콜릿을 제대로 팔기로 한 날 웡카에게 끔찍한 참사가 생긴다.

<웡카>는 <패딩턴> 시리즈(2014 ~)의 감독 폴 킹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영화다. 웡카는 <패딩턴>의 말하는 마말레이드 곰 패딩턴(벤 휘쇼)을 인간으로 그려낸 존재에 가깝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복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오프닝에서부터 이러한 설정이 드러난다. 패딩턴이 페루에서 런던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 이방인이듯, 웡카도 마찬가지다. 패딩턴이 무일푼으로 패딩턴 역에 도착하듯 웡카의 주머니에도 겨우 은화 12 소버린뿐이다. 패딩턴의 모자에는 오렌지 마말레이드 샌드위치가, 웡카의 모자에는 초콜릿이 있다. 두 음식은 먹는 이를 곧장 반하게 할 수 있는 궁극의 달콤한 맛을 지니고 있다. 폴 킹의 세계관에서 오렌지 마말레이드와 초콜릿은 닥쳐오는 위기와 갈등을 곧바로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작동한다. 이 외에도 웡카와 패딩턴이 닮은꼴이라는 것을 증명할 장치는 영화에 수두룩하다. 웡카는 난민, 비-인간 등등 여러 타자를 상징하는 패딩턴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웡카는 폴 킹의 인장이 새겨진 캐릭터라 할 수 있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웡카>의 웡카는 1964년도에 그려진 로알드 달의 웡카와 다소 거리가 있다. 로알드 달이 그려낸 윌리 웡카는 키가 작은 데다가 "느닷없이 펄쩍펄쩍 뛰며 우스꽝스러운 토끼 춤을 추"며 수다스럽기까지 한 조증에 가까운 캐릭터다. 로알드 달이 그려내는 웡카는 고전적인 광대 캐릭터에 가깝다. 법의 바깥에 있기에 왕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는 움파룸파족(움파룸파족은 1964년 원본에서는 피그미로 그려져 있으며 인종차별적이고, 식민주의에 기반한 묘사하는 비판 아래서 1974년에 히피로 수정되었다.)이라는 직원이 있기는 해도 획일화된 레일이 즐비한 현대적인 공장과는 다른 생산 방식을 고집하는 반골 기질을 드러내며 은둔자로 살기를 자처한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쥐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버루카, 걸신이 들린 듯이 먹는 아우구스투스, TV쇼에 중독된 마이크 티비, 껌으로 세계신기록을 달성하려는 바이올렛 등 경쟁적인 소비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아이를 조롱하고 혼내는 특권을 얻는다. 동시에 민중에 가까운 찰리의 멘토가 되기를 자청한다. 로알드 달의 웡카가 괴짜로 드러난 이유는 웡카가 세속의 논리를 따르지 않아서다.

반면에<윌리 웡카>는 데이비드 셀처와 맬 스튜어트의 각색에 힘입어서 원작과 완전 다른 웡카를 그려낸다. 로알드 달 원작에서는 피그미족으로 그려져 논란이 된 움파룸파족을 주황색에 초록색 머리를 한 소인으로 각색했다. 웡카의 초콜릿 공장의 레시피를 노리는 슬러그워스라는 악당도 추가했다. 무엇보다 크게 다르게 그려진 것은 웡카의 캐릭터다. 1971년도에 제작된 영화 속 윌리 웡카의 매력은 권태와 냉소, 우울에 젖은 캐릭터로 그려낸 진 와일더의 해석이 크게 이바지했다. 영화 속의 웡카가 "거들먹거리는 웡카"라는 인터넷 밈으로 쓰인 것도 냉소 어린 그의 연기 덕분이다. 일례로 진 와일더의 웡카는 등장할 때 피곤한 몰골에 절뚝거리며 등장하다가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돈 다음에 멀쩡하게 걷기 시작한다. 이는 진 와일더가 윌리 웡카 역으로 캐스팅되었을 때 제안한 아이디어다. 작은 제스처 하나로 피곤에 찌든 현대인으로의 웡카 본인과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슈퍼스타 웡카의 차이가 확연히 압축된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진 와일더의 해석은 공장 안에서 더욱 과감해진다. 윌리 웡카를 환상에 묻혀 사는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웡카는 모든 것이 반토막이 난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업가로 그려진다. 공장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복잡한 절차를 지니는 계약서를 쓰도록 하며 어른을 향해 냉소에 가득한 얼굴을 전면에 드러낸다. (작은 글씨가 촘촘히 쓰여 있는 탓에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계약서는<웡카>에서 초반에 스크래빗과 블리처가 웡카에게 건네는 계약서로 변주된다.) 웡카는<순수한 상상Pure imagination>을 부르며 초콜릿 공장 내부를 안내하지만, 그의 몰골은 더없이 피곤해 보인다. 동화로 가득한 세상은 정적으로 보이기만 한다. 견학은 형식적인 절차에 따라서 진행되고 그 절차에서 벗어난 아이는 가차 없이 낙오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초콜릿 폭포가 흐르는 강에 빠질 때 그는 초콜릿이 오염된다고 소리친다. 아이는 안중에 없고 초콜릿 공장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다. 초콜릿 주전자에 신발을 툭 던져서 섞는 등 모든 것을 건성으로 하는 듯한 모습도 그러하다. 계약 조건을 따지며 처음에 약속한 것을 안 지키려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끝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찰리를 속이려는 연기인 것이 드러난다. 이 영화 속 웡카는 광대에 가까운 로알드 달의 웡카, 아버지에게 트라우마를 느끼며 본인의 히스테리에 갇혀버린 팀 버튼의 웡카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현대인을 캐리커처로 그리며 현대인의 삶을 낯설게 보게끔 하는 연기자를 자처한다. 이미 공장 바깥의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기에 가능하다.

진 와일더가 해석한 윌리 웡카가 로알드 달의 웡카보다 급진적인 이유가 그가 앞서 말한 이유에 있다. 1964년에 쓰인 원작이 1971년에 영화화되는 사이에 68운동이라 불리는 반-문화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윌리 웡카>의 웡카 캐릭터는 반-문화 운동의 상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큰 캐릭터다. 시대상과 연결해 생각해보았을 때 웡카는 1970년대의 청년 히피를 연상하게끔 한다. 곱슬머리에 괴상한 실험에 몰두하고 있으며 (마약으로 보이는) 초콜릿에 중독된 상태라는 설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웡카는 자본주의의 바깥에서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폐적인 동화 속 세계에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안에서 소비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연기하고 뒤집는 존재로 등장한다. 자본과 신용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계약서와 형식적 절차에 의존하는 관료주의 등이 웡카의 연기 스펙트럼에 포함되어 있다. 로알드 달과 팀 버튼은 웡카를 자본주의 바깥에 두지만 진 와일더의 웡카는 자본주의를 거스르는 존재로 묘사된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웡카>는 '웡카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학습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로 보인다. 웡카는 '타인의 친절에 의존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폴 킹은 <패딩턴> 시리즈에서 이미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에 불화하는 캐릭터를 그린 적 있다. CG로 그려진 패딩턴은 버스터 키튼과 자크 타티의 육체를 체화한다. 키튼이 극한의 스턴트로 기계의 움직임을 모방함으로 기계의 부자연스러움을 드러냈다면, 자크 타티는 마임을 기반으로 기계의 자동화된 움직임과 불화하는 육체를 그려내 기계와 인간 신체의 움직임이 상반된다는 것을 드러냈다. 패딩턴은 슬랩스틱과 스턴트를 오가며 오히려 자동화된 도시를 낯설게끔 보이게 한다.

반면에 티모시 샬라메는 스턴트와 슬랩스틱을 오가는 연기가 없다. 되려 정적인 샬라메는 동화의 세계로 되돌아가서 마법으로 도시와 기어이 충돌한다. 이 영화 속 시공간은 찰스 디킨즈가 그린 19세기 런던과 발터 벤야민이 그린 20세기 파리가 뒤엉킨 자본주의가 탄생한 여러 메트로폴리스다. (캐럴 리드의<올리버!>(1968)에서 세팅을 빌려온) 지하의 빨래 세탁소와 도시 풍경은 19세기 런던의 노동 환경을, (몽상이 금지된) 달콤백화점은 20세기에 파리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백화점과 닮아있다. 폴 킹은 패딩턴이 그려낸 지금의 런던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자본주의를 리부팅하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 셈이다. <웡카>는 미래의 아이에게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이해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바로 마법사를 자처하는 웡카의 마법과 그 마법을 담은 초콜릿을 통해서다. 초콜릿은 자본주의의 얼굴을 하지 않아서다.

웡카의 뮤지컬은 인물의 심리적인 환상이 아니라 플롯에 모든 것을 허용하도록 만든다. 이는 갈등하는 순간에 갈등을 드라마틱하게 치장하는 디즈니의 뮤지컬과는 다르다. 오히려 갈등을 이완하고 해소하는 장치다. 동화학자인 파바는 "6-8세의 아동은 발달 단계에서 사유와 사물 사이에 마법적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생물을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며 권위를 보복적 정의와 처벌의 형태로 존중하고 원인과 결과를 병렬적인 형태로 이해하며, 자아와 외부 세계를 구별하지 않고 사물의 위치가 지신의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웡카와 누들이 기린과 대화를 한다든지 하는 동화적 허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캐릭터의 소품이다. 온갖 잡다한 것이 들어가 있는 웡카의 모자, 손에 든 초콜릿 공장은 마치 마술쇼를 보는 듯하다. (휴대용 초콜릿 공장은<메리 포핀스>(1953)의 가방과 패딩턴의 팝업북(<패딩턴2>)을 조합한 것이다.)

또한, 분필 만화같은 연출도 이같은 마법적인 허용에 파바는 청소년기를 지나간 성인이 동화를 보는 것을 "현실 세계보다 만족스러운 정돈된 세계에 대한 끈질긴 추구"라고 보았다. 동화를 "소외가 없는 조건 하에 구축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즉 고향의 객관적인 표상으로 본 것이다. 움파룸파의 전통을 존중하는 카카오의 공정 거래, 카르텔의 재산을 재분배하는 등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도 공상적 공산주의의 상상을 나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록 감독의 비판이 날카롭지는 않아도 <웡카>는 동화의 저항성을 품고 있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웡카>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장면은 웡카가 부당 계약으로 갇히고 첫 노동을 한 다음에 누들과 가방에 든 휴대용 초콜릿 공장을 열어서 과거를 회상할 때다. 웡카의 회상은 초기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세피아 톤의 활동사진으로 재생된다. 이는 <패딩턴> 시리즈에서도 반복되는 회상이다. <패딩턴>(2015)에서 마말레이드 곰 패딩턴은 탐험가가 촬영한 필름에 담겨서 소개된다. 이는 (원래는 원주민을 기록하는 데에 쓰이는) 민족지 영화를 모방한 것으로 마말레이드곰이 서구인에 의해서 기록되고 박제된 존재라는 것을 단번에 드러낸다. 웡카가 하는 회상은 타인이 재생하는 필름이 아니다. 되려 본인이 그 필름을 그려내 이입한다. 웡카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처음 편입된 순간에 이 필름이 재생된 것은 왜일까. <웡카>는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 모든 것이 공평히 나누어지는 세계에 대한 향수를 원시로 그려낸다. 다만, 그마저 본인만의 시선에서 그려낸 환상이다. 웡카는 결국 환상 속에 있는 죽은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다. 대신 폴 킹은 서로가 첫사랑이지만 서로의 행방을 모르는 두 경비원의 로맨스, 누들이 친모를 만나는 가족애로 웡카의 상실감을 상쇄한다.

다만, <웡카>의 초콜릿은 후반 이후로 매력이 저하된다. 케이퍼 장르로 전개되는 순간 이 영화의 장치는 급작스럽게 마법같음을 잃는다. 이 영화가 슬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번개와 기린의 젖 등등 환상적인 사물로 제작된 웡카의 초콜릿은 중반부에 판매되기 시작하더니 끝내 화폐로 교환되기 시작한다. 회계사에 의해 슬러그워스와 적대자를 상대하는 수치로 환원된다. (이때 누들이 웡카에게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한 장치다.) 청혼을 할 용기를 준다든지 하늘을 날게끔 한다든지 하는 환상적인 초콜릿은 중반부부터 실종된다. 그저 평범한 초콜릿에 그치고 만다. 웡카가 팝업스토어를 연 순간은 초콜릿으로 제작된 수많은 소품이 나열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뮤지컬 넘버로 소개되는 여러 초콜릿은 어떤 효과를 지닌다기보다는 그저 "맛있다"라는 기준으로만 소개된다. 초콜릿은 그야말로 상품 가치에 귀속된 것이다.

슬러그워스의 계략으로 초콜릿을 먹은 이가 모두 모발이 자라는 순간에 티모시 샬라메는 "설인의 땀?"이라고 외친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이국적인 초콜릿 재료가 독이라는 것은 슬프다. 슬러그워스는 웡카에게 쇼콜라티에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에 친구를 구할 돈을 준다는 협상을 통해서 웡카를 굴복시킨다. 웡카는 그제야 초콜릿이 화폐로만 완전히 기능한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웡카가 돈이 적힌 장부로 슬러그워스의 만행을 고발하고 카르텔의 초콜릿을 모두에게 나누어서 복수에 성공한다. 웡카가 자본주의를 이길 방식은 그뿐이었다. 결국 25년 뒤의 웡카는 소비주의에 물들어 가는 아이를 혼내고 교육하고자 한다. 어머니가 초콜릿 뒤에 남긴 "서로 나누어 먹으라"라고 적힌 골든 티켓을 통해서 말이다.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 된 것은 아닐까.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웡카
Wonka
감독
폴 킹
Paul King

 

출연
티모시 샬라메
Timothee Chalamet
칼라 레인Calah Lane
올리비아 콜맨Olivia Colman
톰 데이비스Tom Davis
휴 그랜트Hugh Grant
샐리 호킨스Sally Hawkins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16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4.01.31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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