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누가 이들을 내부의 적으로 만들었는가  [나의 올드 오크 #2]
과연 누가 이들을 내부의 적으로 만들었는가  [나의 올드 오크 #2]
  • 이상용
  • 승인 2024.02.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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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이 없는 광부의 도시에 관한 성찰과 연대"

켄 로치의 26번째 장편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광부들이 존재하지 않는(더 이상 탄광도 존재하지 않는) 2016년 북동부의 폐광촌 마을에서 시작한다. 대다수의 켄 로치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시작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시리아의 난민 가족이 마을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마을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난다. 

"왜 우리한테 말도 안하고 데리고 와?"

"시의회가 다 설명할 겁니다."

"설명? 일방적으로 데려와 놓고?"

"일리있는 지적이에요. 인정할 건 인정해요."

"애들이 아직 버스에 있고 지치고 겁먹었으니 일단 집으로 들여보냅시다."

"얘긴 나중에 해요." 

"두건 대가리들! 이라크에서 내 친구 쐈지."

"이러시면 안되죠."

실랑이가 계속되는 가운데 난민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시리아에서 온 소녀이자 주인공인 야라(에블라 마리)의 촬영에 주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리 중 하나가 카메라를 빼앗아 들고 다니다가 떨어뜨린다. 그는 로코라는 남자다. 마치 현지 사람인처럼 굴고 있지만 다시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 또한 이민자이거나 최소한 이곳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난민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남자의 사연이나 상황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라크에서의 상황에 대한 언급은 시리아 내전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시리아 내전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아랍 국가에서 일어난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 즉 '아랍의 봄'과 관련이 있다. 2010년 말에 일어난 아랍의 봄의 물결은 2011년 시리아의 시민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내전으로 확대된다. 시리아 내전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화 속에서도 이름이 등장하는 알 아사드 부자의 장기 독재 집권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야라의 가족 대부분은 영국까지 왔지만, 야라의 아버지는 아사드 정권의 감옥에서 억류 중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아사드는 폭력과 독재의 상징이다. 내전은 민간인을 위협에 빠트렸고, 야라의 동생에게 보내온 현지 영상에 등장하듯이 학교나 병원과 같은 민간 건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난민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 또한 눈치를 살피며 감행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가운데 벌어진다. 시리아의 주변국인 터키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어가면서 그중 일부는 난민 수용소에 억류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이민자를 위한 대책이 있던 서유럽으로 이입되었다. 2016년 당시 영국도 그러한 나라 중 하나였다(영국보다 먼저 독일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라크와의 갈등은 내전이 확대되면서 일어난다. 아랍 지역은 국가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무슬림 종파간의 갈등도 크게 작용한다. 전쟁을 둘러쌓고 국가와 종교의 알력관계가 뒤섞이면서 복잡해졌다. 정부군에 대항하는 반군들은 그 정체성이 제각각이고, 상당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적 입장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대립하기도 한다. 지원받는 반군과 그렇지 못한 반군 사이에서 내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가운데 2015년 이라크의 무장단체 IS가 시리아의 북동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내전은 확대된다. 2016년은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여러 이유와 정체성을 지닌 난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기였고,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주민으로 만나는 상황으로 연출된다. 자신의 친구들을 쐈다는 로코의 발언은 이러한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시리아인들에게 예민하게 구는 것도, 지신이 경험하였거나 아직 끝나지 않은 내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 영화사 진진

영화 속에서 난민과 관련한 언급은 이것만이 아니다. 종종 현지의 소식이나 관련 뉴스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난민의 도착 장면 다음에는 키프로스의 한 회사를 대리하여 부동산 업자들이 빈집을 정비하는 모습도 관련을 맺는다. 키프로스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고, 현재까지 영연방 회원국을 유지하고 있다. 키프로스는 지중해를 통해 시리아와 연결되는 통로이다보니 이곳을 경유하여 유럽(특히 영국)으로 진출하는 난민들이 존재했다. 구체적으로 난민 프로그램과 체류 지원 정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인구가 감소한 지역에서 난민을 수용하는 상황이 일어나면서 소외되어 있던 마을은 뜨거워진다. 이 뜨거움은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뜨거움이기보다는 소외의 소외가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충돌의 연속에 가깝다.

<나의 올드 오크>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난민들을 이주하게 하였는지 묘사하거나 설명되지는 않지만, 저 멀리 벌어진 내전이 유럽의 현재 역사가 되고, 그것을 수용하는 무너진 탄광촌의 현실과 자연스럽게 겹쳐지면서 시간과 공간은 접속된다. 그것은 켄 로치의 영화에서 종종 보여지는 방식인데,  가령 <랜드 앤 프리덤>(1995)과 같은 역사를 다루는 영화에서도 현실과 떨어져 있는 역사는 사적, 공적 유대감 속에 긴밀하게 작동한다. 1994년 리버풀의 공립 주택에서 한 노인이 사망한 이후 손녀가 유품 속에 담긴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편지를 발견하면서 영화는 본격화되고, 과거로 회귀하게 되는데 <랜드 앤 프리덤>처럼 현재는 과거의 역사적 전쟁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저 멀리 내전과도 오늘의 현실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켄 로치가 지속적으로 관심 갖는 세계의 유대이다.

다만, <나의 올드 오크>에서는 난민의 흐름이나 역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시리아 난민의 마을 도착과 함께 공무원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켄 로치는 이들의 입장이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런 물자도 없는 가운데 정착을 허락받은 난민들이 가난하게 살아가던 마을의 주민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음을,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관해 집중한다.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주인공 토미 조 밸런타인(데이브 터너)처럼 자신보다 어려운 난민을 돕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토미가 운영하는 펍에 모여 인종 차별과 성차별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운영하는 펍을 운영하면 토미는 두 입장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갈등한다. 그는 손님들의 대화에 끼어들지도 반론을 하지도 않는다. 이민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야라가 나타나 자신의 카메라를 떨어트린 남자를 아는지 묻자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로코를 알고 있었고, 그가 어떻게 나올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편이나 상황에 개입하기를 두려워했던 토미는 비어있는 펍의 내부를 회의 공간으로 빌려달라는 지인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그런데 이민자의 가족들이 모여 일주일에 두 번씩 식사 장소로 제공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는 끝내 받아들인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변화의 문제이고, 이전과는 다른 다른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결단을 필요로 했다. 이로 인해 펍 '올드 오크'와 토미는 복잡한 상황에 처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아들과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내던 폐광촌의 외로운 남자 토미가 어째서 20년 전 광부들을 위해 사용하던 공간을 이민자를 위해 오픈(열림)하게 되었는가? 이것은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기존에 있던 사람들의 배신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토미의 선택은 과연 어디로 향해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 대립 구도에 숨겨진 깊은 사연을 들여다보는 계기이자 현재를 성찰하는 과정이 된다.

 

ⓒ 영화사 진진

밥과 죽음의 연대 

고장난 카메라를 들고 펍의 내부로 따라 들어간 야라는 20년 동안 닫아 둔 먼지 쌓인 공간에서 과거의 액자 사진을 발견한다. 토미는 삼촌의 카메라를 꺼내어 보이며, 광부들의 사진을 찍은 것도 삼촌이라고 언급한다. 야라는 삼촌의 카메라 중 쓸만한 것을 골라보라는 토미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카메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장나버린 카메라는 시리아에 억류된 아버지가 선물한 것이었다. 토미는 카메라를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과거의 (남겨진) 카메라를 팔아 현재의(야라의) 카메라를 수리하는 데 쓰겠다고 제안한다.,

자신의 물건을 팔아 타인에게 환대를 보이는 장면은 켄 로치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이상화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캐릭터의 설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20년간 닫혀있던 공간이 야라의 시선에 의해 다시금 열리게 되고, 이 사진들이 야라의 카메라 혹은 사진과 연결되면서 과거를 반복한다는 데 있다. 야라와 토미가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는 글귀가 적힌 사진 앞에서 대화를 나눌 때 두 사람의 경험(기억)은 공유된다.

토미는 자신이 처음으로 광부일을 하던 때에 겪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의 어머니가 하던 말이었다고 회상한다. 야라는 "시리아에 있을 때 우리도 그랬어요."라고 말한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현실을 함께 견딘다는 것이고, 함께 싸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토미의 말에 따르면 20년 전 광부들의 싸움은 패배로 끝났지만 야라 혹은 시리아 난민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다시 밥을 지어 먹고, 다시 한번 부조리한 현실 세계와 싸우는는 꿈을 꾼다. 연도가 다르고, 사람들도 다르며, 삶의 형태도 달라졌지만 켄 로치의 이상 안에서 과거와 현재, 광부와 난민은 닮아있을 뿐만 아니라 연대한다. 전혀 다른 현실과 조건 속에서 새로운 반복을 꿈꾼다.

그런데 카메라 수리를 계기로 펍의 내부 공간을 보여주고, 이주민들을 위한 식사의 공간으로 내주게 된 토미의 선택은 다시금 좌절을 겪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점이 있다. 과거의 실패가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바깥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에 의한 것이었다. 펍에 찾아오는 지인들과 단골들이 식사 장소를 망가뜨리기 위한 계획을 꾸몄고, 그들 중에는 아버지들이 모두 광부이며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한 친구도 있었다.

내부로부터의 파괴. 그것이야말로 켄 로치가 이 영화를 통해 건드리는 진짜 현실이다. 난민이 이입되는 현실 속에서 토미가 새롭게 맞이하는 내부적 분열이었다. 더욱 어려워진 현실적 삶은 어떠한 형태로든 희생자와 공공의 적을 만들어 내면서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닫는다. 분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회적 모습은 끔찍해진 내면화된 폭력의 양상이자 약한 이웃들을 언제든 적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의 올드 오크>의 결말을 볼 필요가 있다. 토미는 펍의 내부 공간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주변의 도움을 모두 거절한다. 오래 된 친구의 배신과 지인들의 행위를 듣고 경악하면서 더 이상은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런데 영화의 결론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리아에 억류되어 있는 야라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결말인 동시에 전환의 계기를 찾는다. 먼저 토미를 비롯하여 야라를 도왔던 현지인들이 난민 가족의 집을 찾아간다. 잠시 후 기적적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조의를 표하며 야라의 집으로 향한다. 그들 중에는 난민들을 멸시하거나 사고를 일으킨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결말에는 확실히 비약이 있다. 만일 이 장면을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으로 읽을 수 있다면, 표면적인 감동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희망은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각성될 수 있다는 매우 씁쓸한 냉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은 화해의 몸짓에, 장례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일정한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이 감동의 실체는 해결이나 화해이기보다는 죽음 앞에서 겸손해지는 최소한의 도덕, 인간적 예의의 차원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아감벤과 같은 이가 벌거벗은 생명(nuda vita, bare life)이라고 불렀던 형상을 연상시킨다.

 

ⓒ 영화사 진진

켄 로치의 최근 영화에는 그러한 모습이 있다. 이 세계에 희망이 가능한 것은 '최소한의 도덕(도의)'이 필요하다. 한 존재의 죽음은 한 세계를 새롭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존재의 죽음을 통해 현재를 반추하는 것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마지막을 통해서도 보여줬던 것이었다. 하지만 두 영화에는 차이가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한때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서유럽 최고의 복지국가를 달리던 영국이 지난 시대를 통과하면서 어떻게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 만들어졌는가를 다루고 있다면, <나의 올드 오크>의 결말은 저 멀리 시리아의 감옥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방인을 향한 애도를 표한다. 두 죽음에는 다른 시대와 거리가 있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 '벌거벗은 생명'을 지닌 존재임에 주목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다르기 때문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후폭풍들에 주목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올드 오크>에서 블레이크와 닮아 있는 죽음은 토미의 반려견 '마라'의 죽음이다. 마라는 영화 초반 위협적으로 짖어대던 동네 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를 애도하기 위해 토미의 집을 유일하게 찾아온 것은 야라와 그의 엄마였다. 그들은 음식을 가져와 토미를 위로하고, 그가 먹는 것을 지켜본다. 이 일을 계기로 토미는 난민과 주민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준다. 그것은 마라의 죽음과 죽음 이후 야라(난민)가 보여준 행동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블레이크와 마라의 죽음을 통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죽음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다. 동네의 사나운 개들은 언제든 폭력을 행사하고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 힘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협이 되기도 하며, 이 폭력은 부지불식간에 동네 한 구석에서 일어난다. 어떤 정치적 대립이나 사상의 대립과 상관없이 만연해 있는 세계의 폭력은 약자들을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 저 멀리 시리아에서건, 북동부의 한적한 마을에서건 죽음이 일어난다. 만연한 차이의 폭력을 쉽게 봉합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바꾸고, 위로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하는 것이다.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하며, 함께 공감을 할 때 폭력을 말살할 수는 없지만 폭력을 망각하거나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토미는 마라의 죽음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위로받으며, 그 위로의 방식을 공유하기 위해 모두가 식사를 함께 하자는 야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난민들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소년들과 할머니들도 있다. 누구나 약자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밥의 연대를 실천한다. 

<나의 올드 파크>는 난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에 관한 영화이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해보려고 했던 토미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는 마라의 죽음으로 새로운 눈을 뜨고, 함께 밥을 먹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한다. 그것은 20년 전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인 동시에 여전히 그 희망을 믿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죽음은 다른 가능성을 열게 되고, 비록 식사 모임이 또 한 번 절망을 맞이하여도, 또 하나의 죽음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희망은 이어진다. 

그럴 때 야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은 상투적인 휴머니즘의 몸짓이기보다는 죽음을 통한 약자들의 각성인 동시에 위로의 근원적 가치를 질문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대립각을 세우던 주민들마저 야라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두 개의 사건과 관련을 맺는다. 하나는 밥과 술을 마시는 일상적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특별한 사건이다. 과거에 토미는 광부 일을 시작하고 시위를 선택하면서 함께 밥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

밥과 죽음.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 영화를 밥의 문제로만 본다면 아마 일상의 절반만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과 맞서기 위해 밥을 먹고, 죽음을 견디기 위해 함께 숟가락을 든다(마라의 죽음 이후 토미의 식사를 보고자 했던 야라의 어머니처럼). 20년 전에도 그랬듯이 밥(삶)과 죽음의 역사는 새로운 이들을 통해 반복되며 나아가고 연결한다.

 

ⓒ 영화사 진진

어떻게 내부의 적은 만들어졌을까

그런데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광부에서 난민으로의 전환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켄 로치가 지난 20년간 만들어 온 영화들을 돌아보게 한다. 켄 로치의 필모그래피에서 흥미로운 것은 1969년 <케스>(두 번째 장편이었다)라는 놀라운 영화로 등장한 이래 여러 작품을 만들어 오다가 1980년대에는 몇몇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고 그의 필모그래피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켄 로치가 다시금 영화와 함께 기세를 올린 것은 1990년대에 들어 노동자와 빈민의 삶을 다루는 영화와 일부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의 내전 역사를 다루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켄 로치가 19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1979년에서 1990년은 철의 여인으로 불린 대처 수상의 시절이었고, 많은 국영 기업들이 민영화 혹은 사기업으로 전환되고, 빈익부 부익부 현상이 급속도로 증가하며 신자유주의가 영국의 대표적 정책으로 시행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국영기업들이 상당수 민영화되었고, 수많은 탄광촌들이 폐업하였다. 켄 로치의 영화뿐만 아니라 탄광촌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1990년대에 대거 등장한 것은 이러한 역사와 관련을 맺는다(<브레스트 오프>, <풀 몬티>, <빌리 엘리어트> 등). <나의 올드 오크>에서도 최소한 20년 전에는 북동부 탄광의 폐업에 맞서 싸웠다. 켄 로치는 그 역사를 기억하며 기록하고, 노동자들의 가족과 삶을 다룬 영화들로 대부분의 필모그래피를 채워갔다. 이 작품들 속에서 적군과 아군의 구별은 또렷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고 대처리즘을 통과한 후 신자유주의가 내면화 시점에서 더 이상 정부와 싸울 명분은 과거처럼 형성되지 않는다. 북동부 3부작의 출발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정부의 정책이 황망함을 여전히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집단의 투쟁이 아니라 개인의 싸움을 보여주며, 복지가 무너진 현실의 냉엄함을 조용히 따라가는 자세를 취한다. 그것은 확연히 달라진 켄 로치의 세계였다. 다음 작품인 <미안해요, 리키>(2019)는 과거와는 다른 노동의 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자 아버지인 리키는 택배 회사에서 일을 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는 더 이상 노동자로서 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다. 차를 갖고 운영하는 개인 사업자(사장)로 계약을 한다. 오늘날 플랫폼 노동이 만들어 낸 현실의 노동 조건은 과거와는 다르다. 노동은 자발적으로 이뤄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임 아래 모든 것이 구현되기에, 불의한 상황에서 리키가 하소연하거나 싸울 수 있는 곳은 사라진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갈등하는 것은 노동자와 노동자다. 다만, 한 노동자는 마치 사장처럼 운영의 책임을 지는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며 자신의 대리점이 매출 순위가 높다고 과시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자 권력을 대변하고 있으며, 리키 또한 다친 몸에도 불구하고 백파운드의 벌금과 벌점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에 참여해야 하는 상황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가 차를 끌고 나서는 어리석은 장면은 플랫폼 노동자로 살아가는 극악한 현실의 이중성이다. 이 영화가 근래 등장한 켄 로치 영화 중에서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켄 로치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거와 같이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대립되는,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노동의 시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근로 조건 아래 '자발적으로 노동'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재독학자인 한병철이 여러 저작에서 다루고 있듯이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적인 노동 조건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인인 동시에 노예가 되는 피로 사회의 시대를 실천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오늘의 노동조건이다. 

 

ⓒ 영화사 진진

<나의 올드 오크>에서도 시리아 난민을 괴롭히는 것은 영국 정부나 유럽의 태도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둘러싼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지난 20년간 빈부의 격차 속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이 자신들 앞에 희망을 찾아온 이들을 홀대하고, 공격하는 현실에 있다. 대처는 노조를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면서 재임 기간 내내 노조의 파괴를 자행해 왔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노조라는 것의 의미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대처가 지시한 내부의 적이 내면화되어 모두가 경쟁하고, 모두가 혐오하며, 약자를 향해 자연스럽게 달려드는 적의 시대를 만들어 낸다.

토미를 포함한 광부의 자식들은 모두 패배의식 속에 살아왔다. 토미의 경우 아내가 떠나고 아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이 사실을 들어 그를 비아냥거리고, 토미 또한 선뜻 반격하지 못한다. 어쩌면 펍의 창문을 열고 몰래 들어왔던 토미의 친구는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라 토미와 지극히 닮아 있는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두 사람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 2016년 북동부의 한 탄광촌은 어렵사리 대처의 시대를 통과했지만 떨어지는 집값을 걱정해야 하고, 토미는 낡은 간판을 고치지 못하고 막대기를 세워 간판의 글자를 세우려고 애쓴다. 그 가운데 불평등의 불평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토미는 타니아를 따라 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는데 한 소녀에게 기증된 자전거를 가져다준다. 그런데 정작 마을의 아이들은 이 자전거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들도 갖고 싶다고 말한다. 토미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을 듣던 타니아는 토미를 힐난한다. 들어온 물자를 나눠주는 것조차 일손이 부족한 현실에서, 광부의 아이들도 난민의 아이들처럼 도와야 한다고 훈수를 둘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도 마을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축구라도 가르치라고 말한다. 토미는 타니아의 지적에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모두가 서로 소외되어 있음을 한탄할 뿐 바꾸려고 하는 이는 없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토미가 펍의 공간을 오픈한 것은 이러한 태도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일종이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패배주의와 절망에 붙들려 산다는 데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혐오의 감정을 키우고, 자신들의 마을에 시리아 난민들이 이송되자마자 불만을 터트린다. 영화 초반 대사 중 하나가 이들이 이주해 올 거라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은 정해진 루트를 따라 일을 하고,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통보를 하지 않은 현실. 그것은 서로에게 불신을 쌓는다.

영국의 현재를 만들어 낸 대처리즘이, 켄 로치와 영국과 유럽의 지식인 세대들이 공격하는 대처리즘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견이겠지만, 켄 로치는 과거의 영화들로부터 변화된 탄광의 현재로 이어가면서 지난 역사가 자신의 영화가 기록하고 있듯 가난과 혐오를 내면화 시키는 과정이었고, 그것은 2016년도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광부의 자식 세대들은 함께 밥을 먹으며 저항하던 기억을 망각한 채 매일 같이 동네 펍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sns에 옮겨 놓는다. 그중에는 토미의 반려견 마야의 사진을 깡통 스프의 광고 이미지와 대처하여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도 있다. 어쩌면 이 이미지는 켄 로치 감독이 이민자들을 비아냥거리는 이미지를, 마야의 이미지로 슬쩍 대처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혐오와 분노가 만연한 현실이 우리의 SNS를 채우고 있고,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는 반복 재생의 현실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 영화사 진진

(카메라와) 함께 행진할 수 있다면

영화는 야라 아버지의 영정 사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리아 난민들이 만든 광부들의 깃발을 들고 토미와 야라가 함께 행진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퍼레이드 장면은 개인에 대한 풍경이 아니라  모두가 섞여 있는 집단화된 이미지다. 영화 속에서 언급했던 '더럼'에서 열리는 7월의 광부 페스티발로 짐작이 되는데,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군중의 사진 이미지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야랴가 찍던 사진과 대비를 이룬다. 

야라의 사진 촬영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사진 속 세계는 개인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분노와 혐오 그리고 공격적인 언사로 가득한 채 분절되어 있다. 그 가운데 로코에 의해 카메라가 떨어진다. 어쩌면 그것은 카메라의 현실적 개입이 어려운 상황을 단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망가진 카메라를 토미의 도움으로 고치게 되고, 다시 시작된 야라의 사진은 동네 미용실을 비롯하여 새로운 장소를 기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진들은 난민들이 모여 식사를 한 후 열린 행사에서 악기 연주와 함께 시연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 위에 음악이 곁들여졌을 때 예술은 확장되고, 더 큰 울림으로 퍼져나간다.

영화 혹은 영화(사진)적 이미지는 그런 것이다. 단순한 카메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전시될 때, 음악의 힘으로 확장될 때 훨씬 더 많은 감정과 의미로 대화를 연다. 야라의 사진에는 난민들이나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야라가 이곳에서 만난 린다를 비롯한 새로운 사람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영화(사진)가 이처럼 나 혹은 가족 이외에 다른 것을 연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SNS에 넘쳐나는 소비적인 이미지나 혐오적인 이미지와 다를 수가 없다. <나의 올드 오크>에는 예술과 미디어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야라의 아버지를 기록하고 선물의 의미를 간직한 사적인 의미) 이 사진이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시리아의 친구로부터 학교가 파괴된 장면을 보는 대목이다. 사진적 이미지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세계의 비참을 연결하고 증언하며 공유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또 다른 행동의 가능성이 열린다. 난민들이 20년 전 광부들의 정신을 기리며 "용기, 연대, 저항"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만들었던 것처럼 변화를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하고, 용기는 곧 연대할 용기이자 확장이며, 이를 통해 비로소 저항의 가능성을 열 수가 있다. 

 

ⓒ 영화사 진진

스스로 유작이라고 피력했던 켄 로치의 26번째 장편 영화는 이러한 가능성을 카메라로 붙잡는다. 그것은 여전한 켄 로치일 뿐만 아니라 변화된 현재를 담아내려는 켄 로치의 노력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으로 향한다. 전통적인 광부의 손을 벗어나 난민들과 함께, 야라와 같은 젊은 세대들과 함께 간다. 

물론, 현실의 벽은 높을 것이다. 이러한 연대를 통해 과연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까. 연대 위에 펼쳐진 저항은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하는 의심도 일어난다. 다만, 켄 로치의 영화는 예술이 이 점을 다루고 기록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다룬다. 하나의 태도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영화는 물론이고, 유럽의 영화조차도 망각해 가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켄 로치의 영화는 단 한 편의 영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독들의 손에 의해 이러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을 희망하게 하며, 여전히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드물고 고귀하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단지 예술이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태도가 분명하기에 또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예술이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영화사 진진

나의 올드 오크
The Old Oak
감독
켄 로치
Ken Loach

 

출연
데이브 터너
Dave Turner
에블라 마리Ebla Mari
로렌조 맥거번 자이니Lorenzo McGovern Zaini
데비 허니우드Debbie Honeywood

 

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1.17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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