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사물을 깊이 명상한다는 것
[Critique] 사물을 깊이 명상한다는 것
  • 이현동
  • 승인 2024.01.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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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움직임>(1985) 카메라의 편재성

벨기에로 망명한 상태였던 '마누엘라 세라'는 1974년 일어났던 카네이션 혁명 이후에 본국으로 돌아와 활동을 개시했다. 혁명 당시 농업 개혁, 산업화, 양성평등에 대한 정부의 약속은 마누엘라 세라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에게 창작 활동을 부여할 수 있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1979년과 1980년 겨울에 촬영한 <사물의 움직임>은 처음에는 포르투갈 여성을 담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 제목을 <우먼>으로 정했지만, 제작을 함께하던 이들과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결국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상업적으로 개봉되지 않았던 이 영화는 몇몇 영화제를 통해 세 차례 선을 보인 후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물의 움직임'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고요하게 멈춰있었던 이 영화가 다시 움직임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완성된 지 무려 35년 이상이 지난 2021년 6월에 상업 개봉이 시작된 직후였다. 후에 MUBI와의 인터뷰에서 마누엘라 세라는 자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슬픔을 표현하기도 했다. 촬영 당시 청춘이었던 그녀는 이제는 칠순을 넘은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단 한 편의 영화를 회고하며 이 영화가 가진 가치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었다.

 

시선의 움직임

움직임이란 제목을 지닌 이 영화에서 과연 사물이란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뜻하는 이미지일까. 아니면 사물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방식이 매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물로부터 기인한다는 말일까. 현대회화의 아버지인 폴 세잔의 그림이 원근법의 공식을 해체하며 우리에게 전송해 준 에포케(Epoche)는 지각 대상이 우리 자신에 의해 조합될 수 있다는 모종의 확신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 시선을 옮기는 행위가 그의 회화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초인 동시에 이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회의주의(감각이 온전히 외부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전제)를 넘어 존재의 문제가 아닌 시선, 해석의 문제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세잔의 사과 그림을 처음 본 자에게 은폐된 원근법, 영화로 대입하자면 평화로운 마을에 생생하게 진동하는 시대적 감수성이 외부에서 내부로 전이될 때 영화는 시선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사물의 움직임>도 그러하지만, 어떠한 내러티브도 없이 삶의 행적만을 진술하는 다큐멘터리 장르는 관습적일지언정 리얼리즘이라는 오래된 용어와 함께 그 모종의 범위를 유지하거나 확장하기 마련이다.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요구되는 재현은 인위적 요소를 제거하고 관객을 그 장소로 인도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요소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매개한다기보다 삶의 순환과 일상을 부여하면서 개시되는 것이다. 최초의 뤼미에르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관객이 그 안에 펼쳐진 일상에 대한 기억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도록 공간을 허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의 움직임>을 평론한 이들이 이 영화를 ‘명상’을 수행하는 영화로 평한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간 주류 영화가 수행하던 자극이란 지도가 없이도 목적지를 스스로가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슬픔과 애도, 기쁨과 희락이 쉽사리 고개를 들지 않는다. 줄거리, 감정 등이 의도적으로 배제된 자리를 채워 넣는 것은 이승민 평론가가 저서 『영화와 공간』에서 밝히듯 '실제적 창조적 처리'다. 관객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개입이 가능한 일종의 '번역' 작업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포르투갈 관객들이 아니고서야 무차별적으로 이미지를 응시하는 관객으로선 이것이 설사 재현이든 비재현이라 한들 저 너머에 있는 장소를 더욱이 담론의 장소로 인지할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그런 의미에서 관객에게 신비하고도 기묘하게 장소를 탐험하게 하는 편재성을 지닌 도구로 작동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자연과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기 위해 시도된 균등한 각도와 평등한 시간, 세심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같은 숏들은 어떠한 것 하나도 주체적인 이미지로 소비되지 않기 위한 신호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한 영화에 대한 인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이미지의 형태와 기원에 대해 접촉하기 마련이다. 영화 전체를 진동시키는 카메라가 공간과 시간을 하나의 의미체로 통합하기 위해 관객에게 촉구하는 믿음은 결국 움직임에 관한 것일 테다. 현란한 움직임으로 감각을 교란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영화와는 반대로 정직한 움직임을 통해 탐구를 유발하는 영화가 가진 사명은 결국 형식이나 이미지가 가진 풍요로움을 온 감각을 동원해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민속지학적 이미지가 나열되어 있는 이 영화는 포르투갈 영화가 가진 명상적 이미지가 가진 풍요로움, 연대와 더불어 시간이 가진 움직임을 소중하게 간직하게 해준다.

 

시간의 강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강의 이름은 리마 강이다. 로마인에게 불린 리마 강은 망각의 강이란 뜻으로 지하 세계에서 죽은 자들이 필연적으로 마셔야 했던 레테의 강이라는 신화에서 기원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영속적인 생명을 지닌 자연은 결코 망각하는 일이 없다. 자연은 시간을 역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면서 시간의 증거다.

특별히 자연의 움직임을 맨 처음 조명하는 <사물의 움직임>에서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 ‘강’의 모습은 시간의 형상이면서도 존재의 움직임을 너무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마술과도 같은 풍광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번 등장하는 강의 흐름은 시간과 카메라에 의해 변용된다. 첫 번째 ‘강’의 모습에선 왼쪽으로 패닝 하여 교회를 줌 인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장면에선 부자연스럽게 오른쪽 패닝을 하다 숏이 단절되고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과 처음 장면과는 달리 변형된 강의 모습을 등장시킨다. 이때 흥미롭게도 첫 번째 장면에서만 카메라에 물방울이 묻어 있는데, 이는 자연의 생기로움과 에너지가 발산되는 듯한 흥미로운 장면으로 보인다. 영화는 패닝을 통해 시간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배치한다. 가령 시계 반대 방향이었던 첫 번째 장면은 회귀하는 자연과 창조를 상징하는 교회로부터 끝내지만 시계 방향인 두 번째 강은 시간의 본래 방향을 드러냄으로 산업화의 현장을 드러낸다. 이는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종속된 장소를 나타낸다.

외부로부터 추동되어 변화된 장소는 사물과 공간의 성질마저 바꿔놓는 시간의 역학 관계에 대한 적절한 묘사다. 이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강이란 모티브를 차용한 아피찻퐁 위타세라쿤의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라오스와 중국의 새로운 댐이 태국과 라오스의 국경을 이루는 메콩강에 미친 영향을 보며 그는 <선인장 강>(2012), <메콩호텔>(2012)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메콩강은 진흙탕 갈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화했으며 이는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퇴적물과 생물의 다양한 변화의 신호다”라고 말했다. 사물의 개입은 자연을 급격하게 밀어내고 영화는 이를 관측하여 그 개입을 기호로 제작한다는 지점에서 두 영화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영화들이 지속하는 움직임은 영원할 것 같은 자연이 시간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일 수밖에 없음을 지시한다.

 

일상의 움직임

리마 계곡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 북쪽의 작은 시골 마을인 란헤세스는 혁명에 의해 급변하는 산업화와 자연과의 경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영화에서 처음 들려오는 플루트 연주는 마치 유화처럼 그려진 이 영화의 질감을 강조하면서도 잔잔하게 흐르는 물처럼 사운드 또한 움직이는 인상을 준다. 새벽안개가 짙게 깔린 강의 모습과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 동이 튼 횡단보도를 이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내 유일하게 이름이 호명되는 여성인 이사벨이 출근 준비를 하는 모습을 비춘다. 그녀는 일종의 루틴처럼 라디오를 켜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 물의 온도를 조절하고 거울을 보고 자신을 단장한 다음 마른 빵과 따스한 음료를 마신다. 출근하려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마을 주민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곧이어 영화는 긴 패닝으로 주변에 출근하는 이들, 버스를 타는 이사벨로 시퀀스를 종료한다. 다음으로 묘사되는 풍경은 소에게 짐을 싣고 집으로 간 여성이 젖을 짜는 장면이다. 그리고 가족과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는 곧 안에서 밖으로 이동하여 공장으로 향하는 이세벨의 모습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산업혁명의 상징이기도 한 재봉틀을 사용하여 옷을 손쉽게 제조하는 이세벨의 모습과 건물을 건축하는 일꾼을 통해 산업화한 일상을 지속해서 담는다. 반면에 농사일하며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어떤 가족주의의 형상은 이전 시대가 교차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시장에서 옷을 살 때 이세벨은 할인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의문스럽게도 이세벨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장면은 산업화한 사회에서 증식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농사를 마치고 수확한 곡식들을 집으로 가지고 귀가하는 길에 교차하는 오토바이와 차의 엔진 소리는 이러한 시간의 경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고스란히 담는다. 자본이 왕복하는 시퀀스는 후반부에도 존재한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주일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장례를 치를 때 많은 이들이 천주교 신부와 주고받는 부조금 또한 묘한 기시감을 지닌다. 그러나 어떠한 움직임으로도 시대를 적극적으로 웅변하려 하지 않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뛰어난 도전은 포르투갈 영화에서 가끔 모습을 드러내던 시적 이미지를 격변의 시대에 투입한다는 것이다. 이런 산업과 자연이라는 두 종류의 발화가 명상적 이미지가 조립하며 제시하는 주제란 실은 교차라기보다 합일에 가까운 것이다. 그 대상은 곧 일상이다.

그 가운데 영화는 감정이 주로 서술되는 얼굴을 포커싱 하지 않고 때때로 손이나 사물을 지시한다. 이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움직임을 포착하며 이미지를 기록하는 카메라가 언제 어디서나 편재적인 도구로 활용된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빵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수확을 위해 가족들이 모여 농기구를 활용하는 모습들, 옥수수 수확을 하며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벌이는 장면, 심지어 빨래를 널어놓는 모습까지도 이 영화는 마을 주민의 모든 움직임을 담고 있다. 심지어 남편이 아내가 해준 밥을 먹고 정말 좋은 아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랑스러운 모습까지도. 이 영화가 소유한 이미지란 단순히 산업화나 자연주의에 대한 은밀한 대조가 아닌 일상이 가진 숭고함으로부터 점철된다. 이 영화가 분배하고 있는 이미지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를 다루면서 시간을 명시적으로 표명한다. 영화의 최초 움직임이 패닝과 강의 흐름인 것처럼 결국 움직임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시간이다. 마치 필름이 영사기라는 기계의 힘뿐만 아니라 시간에 의해 구동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기어코 카메라는 편재하여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여전히 긍정도 부정도 없는 시간을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사물의 움직임
The Movement of Things
감독
마누엘라 세라
Manuela Serra

 

제작연도 1985
상영시간 89분
등급 15세 관람가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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