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경성크리처' 시대라는 감옥 속의 영웅들
[NETFLIX] '경성크리처' 시대라는 감옥 속의 영웅들
  • 김민세
  • 승인 2024.01.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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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콤플렉스의 시대극"

<경성크리처>(2023)의 '괴수'가 출처로 하는 것이 존 카펜터의 <괴물>(1982)임은 분명하다. 누군가는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1979)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물론 두 영화는 괴수 영화에 있어서 클래식이다. 다시 말해 이후의 수많은 괴수 영화가 이 영화들을 어떻게든 경유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두 영화의 크리처를 노골적으로 모방한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2016~)와 <라이프>(2017)에서 우리는 미심쩍은 기시감이 아니라 부활한 크리처가 주는 쾌감을 우선하여 느낀다.

한편, 봉준호의 <괴물>(2006)과 <7광구>(2011)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지옥>(2021~)과 <스위트홈>(2020~) 같은 최근의 한국 넷플릭스 시리즈들은 좀비와 더불어 괴수를 불러오기 시작했다. CG 기술과 SF의 상상력으로 스펙터클을 확장하고 있는 근래의 한국영화와 시리즈들의 경향이 낳은 결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적지 않은 선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경성크리처>를 존 카펜터의 <괴물>과 <에일리언>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밀실과 감옥이라는 주제를 장르적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그것을 시대와 엮으며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성크리처>는 아무리 보아도 '카펜터(의 괴물)적'인 크리처를 일제 강점기 경성이라는 시공간에 옮겨 놓은 시리즈다.

<괴물>과 <에일리언>이 그러했듯이, 또는 수많은 괴수 영화가 그러했듯이, 공간은 빠져나갈 수 없는 제한된 공간으로 한정된다. <경성크리처>는 시즌2를 포함해 700억이라는 큰 예산을 들이고 있음에도, 극 중 로케이션은 경성, 또는 옹성병원, 옹성병원의 별도 건물로 있는 군 병원, 그 군 병원의 지하실, 지하실의 감옥으로 점점 규모를 좁혀간다. 흥미로운 점은 장태상과 윤채옥이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옹성'으로 스스로 뛰어들며 때, 극중 인물의 시선에서는 그것이 경성이라는 공간에 숨겨진 헤테로토피아의 발견이자, 장소의 확장이지만, 인물들이 움직이는 영화적 공간의 입장에서는 그 공간이 계속해서 제한되고 수축한다는 것에 있다.

 

ⓒ 넷플릭스(NETFLIX)

<경성크리처>의 게임적 공간과 캐릭터

회차를 거치며 <경성크리처>가 그리는 감옥의 공간을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감옥 내외로의 출입이 생각보다 유동적이고 자유롭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윤채옥(한소희)은 당연한 듯이 뛰어오르며 이쪽 건물에서 저쪽 건물의 옥상을 넘나들고, 환풍구를 통해 지하실의 은밀한 장소에 도착한다. 생체 실험의 마루타로 잡혀 있던 아이들은 인력거의 비밀 공간에 숨고, 그것을 직접 끌고 뛰어나가면서 옹성병원에서 탈출한다. 일본군 간부는 장태상(박서준)과의 협상 끝에 감옥 문을 여는 열쇠를 건네주고, 장태상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너무 쉽게 감옥을 벗어나게 된다. 한마디로 <경성크리처>의 인물들은 건물에서 또 다른 건물로, 건물 밖에서 건물 안으로, 문밖에서 문안으로, 감옥 안에서 감옥 밖으로 한정된 공간에 수 놓인 경계를 무심하게나마 수시로 오간다(그 반대로의 이동도 당연하다시피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삼엄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허술한 일본군들의 감시 때문이기도 하며, 윤채옥의 신체적 능력이 여성의 액션에 있어서 훨씬 자유롭고 비정상적으로 날렵한 한소희의 액팅으로 보여지고 있거니와, 초반부 다소 엉뚱한 캐릭터로 그려진 장태상조차 위기 앞에서는 유의미한 액션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지점은 종종 작품의 개연성과 핍진성의 문제와 함께 이야기 되곤 한다. 이들의 액션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날렵하고, 강하며, 때로 그것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멍청하기도 하다.

특히, 세탁실에서 펼쳐지는 4화의 격투씬은 적절한 예가 된다. 이 장면에서 윤채옥이 일본군의 타격으로 인해 쓰러졌을 때, 그의 부친 윤중원(조한철)은 싸움이 한창인 장태상을 돕지 않고 마치 어린 소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윤채옥에게 달려드는데, 이때 윤중원의 액팅은 장태상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노골적인 설정처럼 보인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윤채옥이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의 선두에 나서는 것을 항상 꺼리지 않았던 윤중원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지점이다) 또한, 그 격투의 한가운데에서 친구 권준택(위하준)이 자신을 버리고 홀로 상황을 벗어났을 때도 장태상은 그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장태상을 어떻게든 비상한 영웅이자 선인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 넷플릭스(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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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노골적으로 짜 맞추어진 듯한 부자연스러운 액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시 말해, <경성크리처>는 장태상이라는 캐릭터를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이쯤에서 돌아볼 수 있는 것은 도망자와 추적자의 구도로 나뉜 인물들이 서로를 밀고 잡아당기는 움직임의 양상이다. <경성크리처>에서는 도망자가 남기는 흔적과 추적자가 그 흔적을 발견해 내는 추격,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도망자가 빠져나가는 일련의 반복적인 과정이 거의 틈새를 보이지 않고 연쇄적으로 이루어진다. 또는 이들의 움직임은 추적자가 도망자를 감옥에 잡아 가두면 도망자는 다시 그곳에서 탈출하는 술래잡기의 외양을 띤다. 이때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맥락 아래서 주인공은 도망자가 되고 장태상이 된다. 고립된 공간 안에서의 추적과 도망, 그리고 장태상이라는 이상한 영웅. 이러한 것들이 최종적으로 지목하는 곳에 게임적 공간과 상황, 캐릭터가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것이 <경성크리처>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비범한 액션과 폐쇄적이고 설정적으로 짜 맞춰진 듯한 공간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방법이다.

옹성병원이라는 이름이 지목하고 있듯, <경성크리처>는 영화적 무대를 일종의 '옹성', 즉 '감옥'이라는 제한된 게임적 공간으로 한정한다. 이때 장태상을 제외하고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나월댁이 "여까지 오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마치 퀘스트를 마친 게이머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같다. 그리고 이 승리의 엔딩을 축하하듯 조선인들은 경성 거리 한복판에서 춤사위를 벌인다. 하지만 춤사위를 벌이는 축제 자체가 탈출을 위한 장태상의 탈출 계획 안에 있는 거짓이자 속임수이듯, 이 승리는 거짓된 승리다. 조선인들이 거리를 혼란스럽게 메울 때, 일차적으로 일본군들은 윤채옥과 사람들을 계속 추적하는 데에 실패한다. 그때, 그 추적이 실패하자마자 일본군들이 하는 일은 탈출이 곧 승리인 것처럼 보였던 게임의 규칙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 앞에 있는 것이 윤채옥이든, 옹성병원의 지하감옥에 있던 사람들이든, 그저 거리를 지나가다 축제를 즐기던 행인들이든, 주변 상점의 상인들이든, 일단은 때려잡으면 된다.

 

시대라는 감옥

그 순간 게임의 승리와 패배의 룰이 무너지듯, 옹성병원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진다. 감옥의 경계는 무너지고, 일본군들의 폭력과 권력이 있는 곳이 곧 감옥이 된다. 옹성병원 안에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곳에서 탈출해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조선인에게 감옥은 옹성병원과 지하감옥이 아니라, 경성이자 그들이 처한 시대 자체다. 지하에 감춰져 있던 것만 같았던 헤테로토피아는 모든 것을 뒤집고 경성 거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감옥에 갇힌다. 괴물로 변한 명자와 이치로 원장을 피살한 윤채옥은 다시 지하감옥에 갇히며, 장태상과 윤중원은 윤채옥을 구하기 위해 다시 옹성병원에 잠입한다. 장태상의 계획 아래서 작전을 수행했던 갑평과 수많은 조선인은 유치장에 갇히고 온갖 고문을 당한다. 한마디로 <경성크리처>의 조선인들에게 '옹성병원'이라는 감옥은 결국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곳이자, 시대라는 감옥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거대한 메타포이다. 또는 <경성크리처>의 탈출은 언제나 '가짜 탈출'이다.

 

ⓒ 넷플릭스(NETFLIX)

앞선 이야기를 되짚어 보며. <경성크리처>의 인물들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경로는 결국 감옥에서 탈출하고, 누군가를 감옥에 가두고, 탈출을 저지하고, 때로는 자처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출입(出入)의 양상이다. 모든 인물의 액팅은 그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자체가 감옥일 때, 이들은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무화(無化)하는 것이 '세이싱'이라는 괴수의 존재다. 세이싱은 <경성크리처>의 초반부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 출입의 액팅 바깥의 행동을 하는 존재다. 세이싱은 도망자와 추적자의 구도 안에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허물고 '생존본능'에 이끌려 일단 죽인다. 수면 중에 내뿜는 탄저균은 조선인들을 죽이고, 조선인과 일본인 구별할 것 없이 사람들의 뇌를 먹어 치운다. 중반부에 윤채옥이 '어머니'라며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 세이싱은 공격을 멈추고 그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엔딩에 다다라 결국 윤채옥을 죽이는 것도 세이싱이다. 이렇게 경계를 허무는 모호함과 예측불가능함이야말로 세이싱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

그렇다면 세이싱은 도망과 추적이라는 게임의 규칙 앞에서 어디에 자리 잡고 있을까. 세이싱을 움직이는 욕망은 생존본능에서 가족주의로 맺어진다. 엔딩에서 세이싱은 윤채옥을 죽이고 말지만, 그가 연모한다고 고백하는 장태주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몸에 있는 나진을 윤채옥에게 옮겨 연명 또는 영생을 선물한다. 이 행동은 오로지 자신의 딸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욕망에서 비롯한다. 세이싱은 생존본능으로만 가득했던 초반부에선 룰 바깥에 있는 듯하다, 윤채옥을 지각한 순간부터 룰 안으로 서서히 편입되며 이분법적인 구도에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세이싱의 마지막 행동은, 게임의 규칙에 있어서 또 다른 차원의 묘수로 다가온다. 이때 세이싱이 윤채옥에게 선물하는 영생은 앞선 질문은 다시 한번 무화(無化)한다.

시대라는 감옥 안에서, 이들은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장태상이 했던 말처럼,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감옥에 끌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라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죽었던 윤채옥이 눈을 뜨고 <경성크리처>는 거짓말처럼 경성을, 일제강점기라는 고통의 시대를 뛰어넘어 남산타워가 보이는 현대의 서울에 도착한다. 시즌2의 공개를 기다려야 하는 시점에서 이 급작스러운 탈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것 또한 진정한 탈출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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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와 존 포드의 영웅들

<경성크리처>는 장태상의 내막을 나중에야 들춘다. 독립운동에는 관심 없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돈을 벌던 그가, 사실은 이전부터 친구 권준택의 독립운동을 유일하게 응원하던 자였으며, 마냥 엉뚱한 면모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렸을 적부터 싸움을 제일 잘하고서도 대장의 자리는 마다했다는 과거의 미담들 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죽은 어머니와 관련한 아픈 기억 또한 뒤늦게 밝혀진다. 그런 장태상은 모두를 위해 홀로 옹성병원에 남고, 결국 그곳에서 탈출해 유치장에 잡혀있던 조선인들 앞에 나타나 모두를 구출한다. 한때 눈앞의 이익만 밝히는 속물적인 인간으로 여겨졌던 장태상은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환호하고 떠받드는 영웅이 된다.

<경성크리처>는 이런 방식으로 장태주의 과거를 들춰 그 또한 시대의 피해자였음을 설득하며 끝내 영웅화시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리즈가 장태상이 고통의 시대를 통과한 인물로서 지닐 수 있는 과오를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고, 누명을 하나씩 벗겨내야만 하는 듯이 그를 고결한 선인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영웅 신화는 최근의 한국영화에서 익히 볼 수 있는 경향이다. <노량: 죽음의 바다>(2023)는 이순신이라는 건들 수 없는 희대의 영웅을 두고, 개인적인 욕망을 들춰내며 그를 신화에서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동시에 그의 영웅적인 행동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시도다. <서울의 봄>(2023)은 악당이 승리한 시대에 그에 반하는 영웅상을 내세워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또는 지금의 육군 장병들에게 그 영웅성을 호소하는 듯한 괴상한 영화다. (공교롭게도 이태신은 광화문을 지날 때 이순신 동상을 올려다본다. 또는 광화문을 비추는 카메라는 마치 이순신의 시점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듯, 동상의 뒷모습을 프레임 한쪽에 걸친다) 그리고 <경성크리처>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역사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시대에 어울리는 동시대적이고 로맨틱한 영웅상을 제시한다.

2023년 말에 개봉하고 공개된 이 세 작품은 모두 영웅이 필요한 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불러오면서 동시대에 유효한 영웅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영웅에게 과오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들은 언제나 시대라는 감옥 속에서 그들의 삶을 포기하고 동시대가 지닌 무의식적인 분노의 정서를 해소하는 고결한 영웅으로서만 작동한다. 하지만 이 영웅들이 어느 순간부터 도리어 한국의 역사가 지닌 과오를 어떻게든 씻어내고 포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면 지나친 착각일까. <경성크리처>가 장태상의 과거를 들춰내며 그에 대한 오해를 풀기 이전에, 그를 고통의 시대 속에서 변화하는 인물로 그려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동시대에 필요한 건 존 포드의 영웅처럼 과오를 인정하며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변화하는 처절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보통 사람 또는 안티히어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황색 리본을 한 여자>(1949)와 <리오 그란데>,(1950) <수색자>(1956)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 넷플릭스(NETFLIX)

 

경성크리처
Gyeongseong Creature
연출
정동윤
극본
강은경

 

출연
박서준
한소희
수현
김해숙
조한철
위하준

 

제작 글앤그림미디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부작(파트1 7부작, 파트2 3부작)
공개 2023.12.22.(파트1), 2024.01.05(파트2)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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