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축으로 뒤돌아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 축 너머엔 역시 영화들이 가장 먼저 놓일 것이다. 한 해 동안 경험한 영화에 대한 기억과 감상을 차곡차곡 포개어 정리하는 잠깐의 시간. 잠시 영화가 살아나는 이 감각으로 지난 일 년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 잠시간 떠오르는 마음은 다음 해에 개봉할 영화에 대한 기대와 분명 맞닿아 있다.
과도하게 낭만적인 문장을 뒤로 감정을 누그린 채 말을 잇자면 올해는 지난 몇해보다 영화적으로 즐거운 한 해였음이 분명했다. 특히 국내 영화의 성취가 돋보였다. <거미집>(2023)을 비롯한 <너와 나>(2023), <지옥만세>(2023), <다섯 번째 흉추>(2023), <비밀의 언덕>(2023), <잠>(2023)과 같은 영화가 있었고 대부분 독립 영화 혹은 신인 감독이었기에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이란 나의 이기적이며 낙천적인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해외에서도 <괴물>(2023), <오펜하이머>(2023), <바비>(2023),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2023), <존 윅4>(2023), <미션임파서블: 데드 레코닝>(2023)와 같은 대형 영화들이 몰려 있었다. 이 영화들은 작품의 완성도라는 측면은 물론 상업적인 결실까지 놀라워 영화라는 산업이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물론 모두 '미국영화'이기에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지만, 어떤 작품의 흥행이든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생명을 늘려준다고 믿고 있다).
아무튼 올해는 2024년이다. 이미 지난 시간의 2023년을 이 글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수많은 영화가 동시에 밀어닥쳤다. 그 작품들을 선택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고통스러운 것은 포기였다. 순위에 들지 못한 영화를 떠올리며 더욱 정당한 이유를 생각해야 했다. 이 글은 그 정당이라 이름 붙인 나의 변명이다(순위는 무순이기에 자음 순서로 배치하였음을 밝힌다).
<괴물 MONSTER> 고레에다 히로카즈 Koreeda Hirokazu|2023
<괴물>의 감독은 분명 고레에다 히로카즈지만, 영화를 떠올릴 때면 왜인지 영화 속에 묻어 있는 사카모토 유지의 흔적을 발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왜일까. 그건 아마 <괴물>이 성취해내고야 말았던 지점에 대한 근원이 너무나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사려 깊고 섬세한 그의 감각으로 어린이에 대한 서사를, 그것도 퀴어인 어린이에 대한 서사를 쓴다면, 바로 <괴물>이란 작품까지 도달할 수 있었구나. 이는 윤리적 서사가 도달한 미적 성취에 대한 상찬인 동시에 미적 서사가 도달한 윤리적 성취에 대한 상찬이기도 하다.
최근 코아르에 쓴 「서사로 접근한 말과 소리의 윤리」라는 글에서 미나토와 모리 둘은 두 사람만의 언어를 발명해낼 것이라 말했다. 이 언어는 두 사람 사이의 영속적인 하나의 세계와 공간을 만들어 낸다. 지금까지의 퀴어 서사가 가지고 있던 한시적 대안공간에 대한 더 길고 넓은 대안이 상상의 세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이를 보며 생각했다 이 영화는 올해 가장 훌륭한 영화 중 하나이자 필요한 영화라고.
<괴인 a Wild Roomer> 이정홍|2023
올해 한국 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빛나는 자리에 두어야 할 작품은 <범죄도시3>(2023)나 <서울의 봄>(2023)이 아닌, <괴인>이다. 두 영화의 흥행과 영향력은 말을 붙일 필요 없이 놀라웠지만 두 영화가 딛고 있는 두 발이 너무나 빈약(헐거운 서사와 관성적 연출)했기에 두 작품을 지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괴인>은 제목처럼 괴이한 작품이었다. 한국 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한 접근으로 구성된 인물과 내용은 작품 안에서 퇴적되는 시간과 상응하며 우리-관객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가버리고 말았다. 물론, 작품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까지도.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건 영화 속 쇼트와 인물 하나하나가 전혀 생경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너무나 이상한 한국을 경험해 보지 못한 형태로 마주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다른 작품으로 그 모습을 바꿀 것이다. <괴인>은 2023년이란 시간에 가둬지기를 거부하는 그런 영화이다.
<거미집 COBWEB> 김지운|2023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김기영 감독이고, 다른 하나는 흥해 실패이다. 전자인 김기영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평론가들이 이야기 했으니 이 글에선 후자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김지운 감독은 <인랑>(2018)에 이어 <거미집>까지 흥행에 실패했다. 이 영화를 베스트로 꼽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너무나 거친 어휘지만 영화적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창작과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상황을 코믹이란 외향으로 둘러놓은 재미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수라는 통계와 수치로 외면받았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을 굳이 꼽자면 영화의 장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영화라는 장르가 본래 대중-소비자의 감각과 거리가 있기에 주동 인물의 행동을 공감하기가 어렵지만(<위플래쉬>나 <블랙스완>과 같은 장르는 작가에게 가학적인 상황과 그에 분투하는 모습으로 공감대를 만들어 냈다) 거미집은 예술 중에서도 창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작의 고통'은 <위플레쉬>(2015)와 <블랙스완>(2010)의 주인공처럼 작품을 연주-수행하는 자의 고통과 다르다. 김열 감독이 맞닥뜨린 상황이 주는 고통 자체는 이해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감각과 그 욕망 아래 숨겨진 '시나리오의 원주인'에 대한 복잡한 층위는 단 하나의 영화만으로 전달시키기엔 불가능하다.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옛 연기를 하는 톤에 웃는 관객이 꽤나 많았던 기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의도치 않은 소격효과도 한몫한 것 같다.)
<너와 나 The Dream Songs> 조현철|2023
작품이 세계에 존재했던 고통의 기억을 건져 올릴 때, 가장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은 윤리라고 나는 믿는다. <너와 나>는 이미 여러 평론가가 말했든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나 또한 이를 이야기할 땐, 보다 세심하고 보다 정확해져야 한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에 희생당한 그 한 명 한 명에 대한 기억을 복기하고 영구 저장하려 한다. 이 시도 끝에 세월호에 관한 기억이란 영화 안과 밖에서 다양한 양태로 변주되어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그날'을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직접 마주했던 적 없던 희생자를 상상으로 기억하게 한다. 2014년으로부터 2023년까지 9년이란 기간 동안 우리는 세월호를 마주하면서 순식간에 지나치는 이미지가 아닌 두 시간의 허구적 서사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나>의 시도는 결국 기억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미션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Mission: Impossible - Dead Reckoning - PART ONE> 크리스토퍼 맥쿼리 Christopher McQuarrie|2023
<미션임파서블>은 톰 크루즈라는 배우의 얼굴을 한 하나의 장르인 동시에 영화(movie) 그 자체이다. 일곱편의 시리즈 동안 감독은 계속 바뀌면서도 작품으로써 성립되었지만 톰 크루즈가 아닌 <미션임파서블(그런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진 않지만)>이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고전적인 첩보 액션영화인 <미션임파서블(1996)>부터 27년이란 시간 동안 톰은 건물에 매달리고 비행기에 매달리고 뛰어내렸다. 스턴트 액션은 더 화려해졌(과거부터 이어져 온 신체성이란 유산)지만 이제는 무형의 존재인 A.I와 싸운다. 시리즈는 시대의 반영이란 영속성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게다가 <미션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은 에단 헌트-톰 크루즈를 '게임의 작동 방식'으로 움직이게 한다. 보스를 죽이기 위해 '탄'까지 나눈 미션 임파서블은 현재 촬영 중이며 2025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2025년의 베스트에도 임파서블 시리즈가 들어갈 수 있을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 조아킴 도스산토스 Joaquim Dos Santos | 2023
앞서 「다정한 스파이더맨의 정의(들)」이란 글에서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이 하나의 장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의 맹점은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란 장르가 다른 작품으로 전이되며 크기를 키우는 장르가 아닌 해당 시리즈의 이름을 달고 탄생한 몇 작품만이 속할 것이란 협소한 크기에 있지만, 나는 여전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가 장르가 될 것이란 주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이 장르적 탄생의 기저에는 다인종에 대한 윤리를 건설해내려는 치밀한 동기 -미국 내 유색인의 대표인 흑인으로 시작해 퀴어는 물론 유니버스를 넘어서 존재할 그 모든 인간과 비인간까지 상상해내는 것은 물론 그들 모두를 포괄하려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다- 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파이더맨은 오늘의 훌륭한 영화인 동시에 내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장 최신의 서사 예술이라는 말이다.
<어파이어 Afire> 크리스티안 펫졸드 Christian Petzold|2023
<거미집>에서는 "비평이란 예술가가 되지 못한 사람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나는 이 대사를 비틀어 이 영화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파이어>는 예술가가 예술가에게 가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복수다." 푸코는 사랑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에 다른 것을 새로 쓸 수 있다고 말했지만, 페졸트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예술을 붕괴시키고 작품을 전멸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기후이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기후는 폼페이의 유적과 재를 불러온다. 기후 이후에 자신의 이야기로 예술을 해도 그곳에 사랑은 없다. 새로운 탄생이 없는 것(이는 단순히 다음 세대를 의미하지만은 않는다)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 2023
이제 웨스 앤더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파스텔 톤과 대칭을 이용한 동화적 화면과 카메라의 수직 수평 이동을 이야기하는 건 지루하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화면은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이고(물론 중요도가 높긴 하다) 그 화면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가 아닌, 미적 쾌감만을 이야기하는 건 껍데기만 건드린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웨스 앤더슨를 언급하는 글 중 너무 많은 문장이 그 껍데기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그의 영화는 환상이고 꿈이라고. 그렇기에 현실이 없다고. 이런 이야기에 대한 응답일까. 감독은 이제는 그 외향이란 표면 아래 있는 것들을 <에스터로이드 시티>를 통해 보기를 어느 때보다 갈급하게 요구한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 웨스 앤더슨에게도 영화는 꿈이다. 하지만 도피로서의 꿈이 아닌 깨어나기 위해 잠든 꿈이다. 그러니까 영속적으로 머물러야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세계라는 현실과 동시에 존재하며 오가야만 하는(오갈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 속 영화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설득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작품으로 그는 영화라는 존재를 사랑할 만한 것으로 설득해 내고야 말았다.
<플라워 킬링 문 Killers of the Flower Moon> 마틴 스코세이지 Martin Scorsese | 2023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창작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그리고 어디까지 도달할까. <플라워 킬링 문>을 만든 그는 81세이고 직접 영화에 등장해 미국을 대표한 사과문을 낭독했다. 평생 시네마를 만들어온 그가 결국은 시네마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일까. 아니, 그는 결국 경지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아이리쉬맨>에 이어<플라워 킬링 문>까지 그는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영화로 해내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이것이다. 그는 과연 앞으로 몇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또 어디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파벨만스 The Fablemans>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 2022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말고도 시네마가 된 감독이 있다. 페이블 맨(이야기꾼) 스티븐 스필버그이다. 그는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며 영화(시선)가 사건의 진실을 찍어낸다는 가능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평생 영화를 만들어온 스티븐 스필버그는 러닝타임의 끝에서 영화의 만신전에 오른 존 포드의 말씀을 수행한다. 지평선을 중앙이 아닌 곳으로 옮기기 위해 그는 영화 밖에서 지시하고 그 지시로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수행이 예술가의 자의식 과잉이 아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파벨만스>라는 작품을 개인 창작의 결과(자전적 이야기라 할지라도)가 아닌 '과학이자 꿈이며' 그 둘 모두를 긍정하는 매체로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과 꿈 모두를 긍정하는 그의 영화는 과거의 영화와 오늘의 영화 그리고 내일의 영화 모두를 긍정한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