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 접근한 말과 소리의 윤리 ['괴물' #2]
서사로 접근한 말과 소리의 윤리 ['괴물' #2]
  • 배명현
  • 승인 2023.12.14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스터를 다시 한번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괴물>은 폭력을 전면에 다룬다. 이때의 폭력은 크고 거대한 권력이나 압도적인 물리력이 발생시킨 힘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스며들어있기에 폭력이라 의식하지 않는 것(들)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고속도로를 시속 160㎞의 속도로 달리는 것도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일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 『밤이 선생이다』 中 「폭력에 대한 관심」, 난다, p.115

 

ⓒ NEW

그렇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조차 폭력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너무나 일상적이라 그것이 폭력일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함해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 폭력에 기댄 채 유지되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괴물>의 1장은 바로 이러한 인식 위에서 시작한다. 사오리(안도 사쿠라 분)은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 분)이 머리를 갑자기 잘라버리는 일과 신발의 한 짝이 사라진 사실, 물통에 흙이 담겨 있다는 점 그리고 차에서 갑자기 뛰어내린 일화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아들이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거짓말이 끼어든다. 그녀는 담임선생 호리(나가야마 에이타)가 왕따를 주동한다고 굳게 믿어버린다. 1장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기괴한 반응은 폭력과 거짓에 관한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걸스바를 다니고 아들의 귀를 당겨 피를 내고 돼지와 뇌가 바뀌었다 말하는 담임선생 그리고 손녀가 사고로 죽은 충격으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교장(타나카 유코)까지. 학교 내 선생과 교장의 반응은 카프카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괴이하다. 하지만 이 반응에 대한 적절한 반론은 2장에서 곧바로 보여진다.

호리 선생은 학폭을 주동하지도 않거니와 걸스바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선한 사람이다. 그는 초임한 선생으로 아이들을 이해하고 배려한다. 미나토의 코를 친 것도 미나토의 격한 반응을 말리려다 일어난 사고였지만, 그 누구도 호리를 지켜주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다른 선생들이 호리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거짓이 거짓이기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며 힘든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이야기하라 말하지만, 정작 힘든 상황에 놓인 호리를 두고선 지긋지긋하다 말한다. 교장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아무 상관 없어. 자네가 학교를 지키는 거야." 여기서 호리 선생이 비참해지는 사건이 중첩해 쌓인다. 진실을 듣기 위해 미나토를 찾아갔을 때에도, 미나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지만, 그가 도망치다 홀로 넘어졌음에도 다른 아이들은 호리 선생에게서 도망치다 넘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감당해서도 안되는 감당할 필요도 없는 거짓들을 떠안은 채로 학교 옥상에 올라간다.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이때 그는 아마도 추락과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과 상세한 경로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정과 박자가 전혀 맞지 않는 그저 소음에 가까운 금관악기의 소리가.

3장에 가서야 우리는 사실 너머에 있던 진실을 보게 된다. 미나토가 왜 머리를 잘랐는지, 그의 물병에 왜 흙이 담겨 있었는지, 돼지와 뇌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요리의 집에 미나토의 신발 한 짝이 있는지와 미나토와 요리가 어떤 관계인지. 두 사람은 자신의 뇌가 돼지의 뇌와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가족을 이루는 것은 '행복'이고 입술이 쫀득쫀득하다 말하는 건 혐오가 아니라 개그가 된다. 때문에 미나토와 요리는 대안적 공간을 찾아낸다. 아무도 오지 않는 터널에 버려진 '전철'은 오로지 두 사람만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퀴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대안적 공간은 보통 안식처이자 일시적인 쉼터로 표현된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에서 테레즈(루니 마라)와 캐롤(케이트 블란쳇)이 함께 탄 차가 터널을 지나자 펼쳐지는 설경과 그들이 여행 중 머문 모텔이 바로 이 임시적 대안 공간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임시적이란 어휘가 설명하듯 이곳에도 한계는 있다. 인물들이 다시 본인이 본래 위치한 곳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은 여행 과정에서도 이어지지만 삶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는 우리에게 '어떤 삶'을 강요한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 강요는 전적으로 폭력적이고 강제적이다. <캐롤>(2016)의 결말이 둘의 삶을 꾸리는 가능성에 대한 제시가 아니라 사랑의 재확인으로 매듭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부박한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대안적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그저 '그(들)것이 존재-했음'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숭고해져 버리는 비참이 세계의 어딘가에 있다. 캐롤의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비참속에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다시금 재확인하는 두 인물의 시선의 교차가 증거가 되고 이 시선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그물처럼 엮이며 그들의 삶을 증언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부정이란 방식으로 매장당했던 생을 다시금 길어 올리는 것으로 존재를 증명하기에.

 

ⓒ NEW

<괴물>은 증거와 증언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미나토와 요리는 정상의 세계에서 버려진 공간에서 '빅 크런치'를 기다린다. 세계의 시간이 거꾸로 가기를 그래서 다시 태어나기를. 이 기다림은 두 사람의 뇌가 돼지의 뇌로 바뀌기 전, 그러니까 사람이었을 때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는 아픈 시간이다. 이 고통 안에서도 둘은 계속해서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한다. 각자의 이마에 붙은 단어를 추리해 맞추는 게임인 '누가 괴물입니까'를 진행하며 미나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요리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요리야?" 실제 정답은 나무늘보였지만, 이 정답이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것도 느끼려 하지 않는 것이 본인이라 말하는 요리의 마음이 중요하다. 성소수자라는 인식과 이를 부정하는 아빠의 학대, 같은 반 아이들의 괴롭힘까지. 그는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이 불가능한 바람을 미나토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요리가 쓰다듬었을 때, 느낀 모종의 충격은 그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게 만들었다(디나이얼 게이로 묘사되는 이 장면은 세계의 폭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안식처에 머무는 동안조차 온전한 평온을 느끼지 못한다. 이를 시각화하듯 두 사람의 혼란은 터널 너머 공간에서 잠깐 등장하는 막힌 철도로 표현된다. 버려진 전차가 오갔을 것이라 예상되는 이 철도는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두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캐롤과 테레즈와 마찬가지로 미나토와 요리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차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상성을 요구하는 사회로 돌아가 교육받고 밥을 먹는, 아이들이 생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을 뜻한다. 빅 크런치와 같은 거대한 사건을 염원하는 마음도 여기서 발생한다. 뇌가 돼지의 뇌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세계는, 돼지의 뇌를 가졌으면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세계는 둘의 삶에 큰 고통이다. 이들에게 고통을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아빠의 폭력이 아닌 빅크런치와 같은 거대한 불가항력이 둘을 정상성의 세계로 편입시켜주는 것이다. 폭풍이 부는 날 어른들은 산사태를 두려워하지만 둘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삽입되는 아이들이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쇼트라든가 요리의 아빠가 길에 넘어져 비를 맞는 장면은 쾌감을 주기까지 한다. 재난은 어른들의 재난일 뿐이다.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평화로운 세계가 재난이며 재해는 경이로운 빅크런치다.

하지만 진정한 경이는 빅크런치가 아닌 둘의 언어로 결정지어진다. 산이 무너지고 전차가 넘어진 이후 미나토와 요리는 전차에서 나와 비가 그친 들판으로 향한다. 영화 내내 보인 적 없던 이 들판은 새로운 출구와 연결되어 있었다(아마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둘을 찾지 못한 것도 이 둘이 들판으로 넘어간 시간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라는 듯 영화 안에서 전차의 내부를 카메라로 비추었을 때 화면의 상단에 작지만 선명한 빛 한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때 두 사람은 이렇게 대화한다. "우리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런 일은 없어. 그대로야", "다행이네." 둘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말과 함께 소리치며 뛰어간다. 우리는 물론 그들조차 알지 못하는 방향과 이해할 수 없는 기호의 소리로 말이다. 이들은 환호하고 만끽하며 행복해한다. 마치 보통의 여느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물론, 이후 미나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밥을 먹을 것이고 요리는 할머니네 집으로 보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삶에는 이제 절대 지울 수 없는 어떤 순간이 깊게 각인되었다. 둘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긍정을 감각하고야 말았다. 이들의 달리기는 이야기의 끝에서 영화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린다.

 

ⓒ NEW

<괴물>은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시간을 되돌린다. 건물에 불이 나고 소방차가 등장하고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화재는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는 점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고 3개의 장을 하나로 엮어준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인물의 접점이 된다. 화재는 거짓(소리)을 만들어낸다. 호리선생이 걸스바에 다닌다는 거짓말과 돼지의 뇌 실험을 말하는 미나토의 거짓말 이 두 소리는 언어로 구조화된 거짓이다. 이 소리는 널리 퍼져나간다. 손녀를 치어 죽인 사람이 사실은 교장이라는 소문도 비슷하다. 이 소문은 사실(로 보)이지만 언어로 구조회 되어 있기에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다.

하지만 교장과 미나토가 분 금관악기의 소리는 그렇지 않다. 입술의 작은 떨림이 복잡한 금관의 길을 따라 증폭되는 소리. 이는 오로지 발화자 자신만이 아는 진실이다. 관객인 우리가 2장에서 들었지만, 3장에서야 소리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건 그렇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그 누구도 알면 않되는 의미를 지닌 소리들. 영화의 오프닝 사운드이자 요리가 러닝타임 내내 돌리는 장난감의 소리도 금관악기의 소리와 정확하게 겹친다. 이 소리들은 언어화되기를 포기한 대신 가장 내밀한 진실을 담는다.

영화의 마지막 씬 내내 들려오는 미나토와 요리의 환호도 그렇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악기가 아니기에 환호는 언어화될 수 있다. 미나토와 요리의 소리는 세계의 언어가 아닌 두 사람의 진실한 언어가 될 것이다. 이미 다행이네, 라는 자기 긍정을 이룬 이후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어른들의 세계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의 소리를 언어로 구축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둘도 교장의 말처럼 '모두'가 되어 행복을 누릴 것이다. <괴물>의 미덕은 이 긍정과 가능성의 제시로부터 발생한다. 이 영화는 영화를 본 관객이 세계를 바꿀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저 다음 세대의 누군가들을 믿는다. 달리 말해 영화는 세계 그 자체를 믿기보단 '어떤 세계'를 믿는다.

다만, <괴물>은 현실의 우리에게 특이한 방식으로 말을 건넨다. 러닝타임이 끝난 후 영화관에서 나온 우리는 <괴물>의 포스터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흙이 묻은 미나토와 요리의 뒤로 아웃 포커싱된 철로가 보인다. 우리는 철문으로 굳게 닫힌 장면만 보았지만, 두 사람은 우리가 포스터 안의 공간을 파악하기 전부터 이미 철문 너머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가 끝난 후, 포스터 속 의미는 완벽하게 달라져 있다. 영화는 러닝타임이 끝난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채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 NEW

괴물
Monster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Koreeda Hirokazu

 

출연
쿠로카와 소야
Soya Kurokawa
히이라기 히나타Hinata Hiiragi
안도 사쿠라Ando Sakura
나가야마 에이타Nagayama Eita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NEW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2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11.29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