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다정한 스파이더맨의 정의(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다정한 스파이더맨의 정의(들)
  • 배명현
  • 승인 2023.07.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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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와 다른 방식으로 모색한 세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는 마일스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가 끝나버렸기 때문에 후속작에서 일어날 사건과 서사의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섣부른 선언과 단언을 조심해야 한다. 이 글은 영화의 서사를 예측하는 '궁예짓'(후속작인 <비욘드 더 유니버스>는 24년에 개봉할 예정이다)이 아닌, 작품이 심어둔 단서를 기반으로 유니버스 시리즈의 방향과 경향 그리고 마일스와 여러 동료가 대결하고자 하는 상대를 면밀하게 살펴 영화가 성취한 지점을 살피고자 한다.

 

ⓒ 소니 픽쳐스 코리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마일스 모랄레스'가 '마블'과 대결하려는 영화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물을 수 있지만, 분명 마일스는 마블과 싸우고 있고 앞으로도 싸우려 한다. 다른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이 싸움이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시리즈'가 앞으로 가려는 방향을 드러낸 첫 시발점이자 변곡점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그웬'이다. 그녀는 드럼을 치며 내레이션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몇분 되지 않는 러닝타임 동안 화면엔 사운드를 시각화한 움직임과 그웬의 활동을 담은 영상이 교차로 상영된다. 영화의 오프닝이라 부를 수 있는 이 흥미로운 시퀀스에서 두 가지를 집중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래픽 노블의 형식을 영화(Moving Pictures)에 적극적으로 차용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웬의 세계에서 피터 파커는 평범한 왕따 소년에다가 빌런이면서 친구였다는 점이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시작부터 이전의 애니메이션(들)과 가지는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인 동시에 만화이며, 너희(관객)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세계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라는 선언의 일종이다.

그웬과 피터의 서사 차이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만화 버전의 스파이더맨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서사와 형식, 둘 먼저 집중해 볼 부분은 후자다. 애니메이션과 만화라는 장르의 근본적인 차이는 움직임에서 비롯한다. 만화는 한 면의 종이 안에 있는 여러 컷(정지된 시간)의 배열이지만, 애니메이션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프레임 속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관객에게 현실성을 부여한다. 만화는 독서의 방식으로 참여해야 향유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독자는 읽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심지어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만화는 능동적이며 촉각적 경험이다. 다시 말하면 독자가 캐릭터를 계속해서 만져야만 그 캐릭터가 살 수 있다.

 

ⓒ 소니 픽쳐스 코리아

반면에 애니메이션은 프레임 속에서 캐릭터가 살아 움직인다. 이는 우리의 반응이나 해석 속도와 무관하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는 우리와 독립적인 인물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기술'의 발전도 엮여 들어가 있다. 가령 픽사의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1편에서부터 4편까지의 24년이란 시간은 '현실의 장난감'과 닮는 것을 넘어 하이퍼리얼이라 부를 정도까지 도달했다. 애니메이션 기술의 발전은 아이러니하게도 '보다 애니메이션'의 방향이 아닌 '보다 현실적'으로 진화했다. 어딘가에 그들이 정말로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애니메이션에는 형식의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움직이고 말하는 것들을 현실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고유한 형식.

하지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며 최신의 기술을 가지고도 현실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을 분할하고, 대사를 띄우고, 다양한 그림체를 뒤섞어 놓는다. 애니메이션임에도 만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둘 중 어디에 속해있지도 않은 '혼종'임을 보여준다.

'뿌리'는 마일스 모랄레스의 서사와 이어진다. 그는 기존 스파이더맨의 고민을 반복한다. 학교와 가족관계 같은 개인의 일상과 빌런을 처단하는 히어로로써의 역할 사이에서 발생하는 고민. 이 둘은 한 명의 개인/히어로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는 숙명이다. 숙명이란 어휘로 파악할 수 있다시피, 둘 사이의 고민은 정체를 숨긴 채 활동해야 하는 히어로에게 부여된 유서 깊고 고유한 DNA이다. 슈퍼맨이 그랬고 배트맨이 그랬고 스파이더맨이 그랬다. 반면 <아이언맨1>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이 전통을 벗어났다(정체성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뇌하긴 하지만).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소년이고 보호자가 있다. 변해버린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공포감이 그를 고백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이 공포는 벤 삼촌(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와 스테이시(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메이 숙모(존 왓츠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파이더맨의 모든 시리즈는 거대한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소년(녀)라는 존재론적 과도기에 있는 스파이더'들'은 부여된 역할과 운명을 수행해야 한다.

 

ⓒ 소니 픽쳐스 코리아

잠시 영화의 바깥을 떠올려 보자. 스파이더맨은 한 명의 인물이기 전에 캐릭터고 마블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이다. 가상의 그는 작품 안에서는 스토리를 수행하고 밖으로는 시리즈를 잇는다. 하지만 리부트나 뉴 버전이라면 같은 스파이더맨이면서도 새로운 스파이더맨이 필요하다.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건 전 작품과 공유하는 존재론적 핵심이다. 최근 개봉한 <인어공주>(2023)가 주인공의 인종과 캐릭터의 성향을 바꾸었음에도, '인어'와 '공주'는 바꿀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마블이 생각하는 스파이더맨의 핵심은 스파이더 웹이나 수트가 아닌, 공식 설정(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만일 스파이더맨이 운명을 어기고 소중한 사람을 지켜낸다면, '그 차원(Dimension)은 사라진다'는 영화 속 전개. 세계를 지켜야 하지만 정작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다는 공식 설정의 핵심은 히어로의 공리주의적 희생과 같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설정을 배반했을 때 하나의 차원(여러 버전 중 하나)이 사라진다는 것은 '차원-작품'이 더 이상 스파이더맨이 아니기에 발생한 현상이고, 이는 작품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근거한 결과다. 지나가듯 삽입된 영화의 차원 붕괴 씬에서 파괴의 주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오히려 파괴의 주체를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그가 영화 속에서 드러날 수 없는 마블이기 때문이다.

마일스가 공식 설정을 무시하고 아빠를 구하겠다는 다짐은 정확하게 마블과 싸우겠다는 것과 의미가 같다. 애니메이션에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창작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탄생시킨 신과 대립하겠다 말한다.

모두를 구하면 더 이상 스파이더맨이 아니게 됨에도 불구하고 마일스는 "한 명도 구하고 모두를 구하는 것이 스파이더맨"이라 말한다. 이 말은 기존의 스파이더맨을 부정하는 문장이며, 스파이더맨에 대한 새로운 정의(Definition)이다. 마일스는 기존의 스파이더맨에 알파를 추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스파이더맨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스파이더맨이 되려 한다. 이건 새로운 버전이나 리부트가 아닌 '새로운 차원'의 스파이더맨을 의미한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에 '정식 스파이더맨(들)'이 추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구도는 흥미롭게도 세대의 대립으로 그려진다. 미겔(스파이더맨 2099)이 마일스를 저지하며 행위의 정당성을 경험과 시스템에 기댄다면, 마일스는 새롭게 내세운 정의(Definition)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얻어진다. 그에게 스파이더맨이란 모두를 구해야만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설사 자신이 운명적으로 선택받은 존재가 아닐지라도 히어로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스파이더맨이다. 요컨대 기존의 히어로가 정의(Justice)이기에 히어로로 행동할 수 있었다면, 마일스는 정의(Justice)를 수행하기에 히어로라고 정의(Definition)한다. 마일스는 두 개의 정의로 스파이더맨에 다가서는 중이다.

이런 맥락 위에서 우리는 "모두들 자꾸 내 이야기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이 떠드는데, 아니야, 내 이야기는 내가 정할 거야"라는 마일스의 선언을 소년의 치기가 아닌 개인의 정체와 정치성에 관한 혁명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영화 속스파이더 펑크(호비 브라운)의 등장을 상기해보자) 이 선언은 과학적 사실을 뛰어넘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2017)의 원작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는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우리가 그 미래를 알 수 있을 때, 심지어 그 미래에 벌어질 비극을 명징하게 감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소설에서 테드 창은 과학 전공자답게 물리학적 진실(과거-현재-미래는 모두 현재 존재한다)이란 절대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화라는 불가피한 절망을 경유한다. 인간이 절대적 세계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을 때, 그는 결말에서 자신의 고민이 도달한 지점을 보여준다. 내면의 것, 그러니까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우리가 온전하게 선택하고 소유할 수 있다고.

주인공 마일스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얼마나 과학적 인간인지를 알 수 있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진술이다. 그런 사람이 미래를 바꾸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느껴지는 마음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2022)의 그것과 정확하게 같다. 다중우주의 확률적 필연성을 거스르고 지금-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보듬을 수 있게 하는 마음, 돌이 되어 움직여선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마음. 다른 차원의 수많은 비극을 눈으로 보기까지 한 마일스가 미래를 바꾸겠다 마음먹었을 때 내면에서 발생했을 태도는 과학이란 절대적인 사실을 넘어서 모두를 구하는 히어로가 되고야 말겠다는 '다정한 마음'이다.

 

ⓒ 소니 픽쳐스 코리아

마일스의 다정한 마음이 스팟과 스파이더맨(들)과 창작자를 뛰어넘어 관객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이전에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지구-1610버전의 마일스를 끌어안아야 한다. 뉴 유니버스의 이야기는 이제 예측불가능할 지경이다. 하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과 성취점은 공고하다. 다정함을 담보한 이 싸움에 그웬과 호비 브라운, 이전 작품의 스파이더맨들이 참가한다. 그들은 다정함에 무게를 더하며 이렇게 말한다. "함께 하겠어?(You want in?)" 이 순간 배경은 '만화적'이 되고 그들의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 시선의 끝엔 관객이 앉아있다. 이들은 데드풀같은 메타 캐릭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범접 불가능한 존재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차원과 존재 불가능을 거슬러 마일즈와 함께 대항하려 한다. 영화 바깥에 있는 신과 싸우기 위해선 영화 바깥에 있는 관객이 필요하다는 듯 참여를 권유한다. 우리와 관계없이 독립적인 존재가 우리의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영화 내부가 아닌, 외부의 참여를 요청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행위는 지지가 아닐까. 흑인인 마일스와 토슈즈를 초록색 컨버스로 갈아신은 그웬(트렌스 젠더에 대한 지지까지), 흑인 펑크의 호비, 어린이면서 동양 여성인 페니와 동물인 포커까지. 그들이 모든 차원을 거스르면서 싸우는 여정을 응원한다면 영화 밖에도 있을 그들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영화 속 다정한 마음은 '창백한 푸른점'까지 다정하게 감싸 안으려 한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 소니 픽쳐스 코리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감독
호아킴 도스 산토스
Joaquim Dos Santos
켐프 파워스Kemp Powers
저스틴 K. 톰슨Justin K. Thompson

 

출연(목소리)
샤메익 무어Shameik Moore
헤일리 스테인펠드Hailee Steinfeld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Brian Tyree Henry
로렌 벨레즈Lauren Velez, Lauren Luna Vélez
제이크 존슨Jake Johnson

 

배급|수입 소니 픽쳐스 코리아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39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06.21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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