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영화를 이상한 방식으로 본 한해였다. 상당수의 개봉작은 뒤늦게 확인하거나 관람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스트리밍 등의 방법으로 이전의 영화들을 진득하게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는 무성영화부터 뉴 할리우드 시네마, 21세기의 영화사를 난잡하게 넘나드는 정체 모를 근본 없는 계보들이 가득하다. 돌이켜보면 지난해에 보았던 영화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숏들이 주었던 잊지 못할 감흥들은 희미한 잔상들이 뒤섞인 오해와 착각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그 와중에 본 2023년의 영화들은 일종의 시험처럼 다가왔다. 내 앞에 놓인 숏을, 실재와 재현, 원본과 복제, 현실과 환상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이미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시험. 이때, 과연 나는 나의 눈을 믿을 수 있을까. 나의 눈은 앞의 존재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볼 수 있을까. 성급하게나마 내린 결론은 나의 눈 이전에 눈앞에 존재 자체를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카메라를 믿기 이전에 카메라 안의 대상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지난해의 영화들이 나에게 주었던 감흥을 껴안고 싶다. 이게 착각이라면 그 착각을 사랑한다.
1. <파벨만스 The Fablemans>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 2022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자면, 창작의 열망을 지닌 사람으로서 <파벨만스>는 남다르게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새미로 그려내는 스필버그의 유년시절은 창작자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또렷이 증명한다. 새미가 찍은 두 편의 영화(엄마의 캠핑영상과 졸업 영상으로 찍은 <땡땡이의 날>)가 보여주듯이 영화는 진실을 생략하거나 과장한다.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희생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눈앞에 있는 존재에 대해 솔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윤리와 진실의 스펙터클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그것을 만든 창작자는 멀찍이 퇴장해야 한다. 새미는 부모의 이혼을 막을 수 없고, 클라우디아가 키스하는 것은 새미가 아니라 로건이다.
창작자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의 재현을 두고 유희할 수 있지만, 내 앞의 현실을 바꾸진 못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변하는데 '나'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감독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은 '감독의 영화'를 사랑한다는 말이며, 그렇기에 모두가 로건에 열광할 때 새미는 복도에 홀로 웅크려 훌쩍일 뿐이다. 지금까지 현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던 스필버그는 결국 자신의 가장 내밀한 영화에서 영화는 현실을,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파벨만스>는 그렇게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처를 맴돌 수밖에 없는 스필버그의, 또는 지난 그의 영화들의 사적인 고백록이다. 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어떻게 좋았는지보다, 내 지난 삶이 얼마나 고통이었는지 주절거리고 싶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스필버그는 진정한 이야기꾼일지도 모르겠다.
2. <사랑의 고고학 Archaeology of love> 이완민 | 2022
2023년의 영화를 돌이킬 때면 나도 모르게 <사랑의 고고학>의 인상적인 숏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잔디 언덕의 풍경이 스크린 위로 떠 오르고, 나지막히 피아노 음악이 들리며,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제자리를 찾은 듯 자연스레 소파 위에 몸을 누인다. 그저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던 이미지. 단연 최근의 한국 독립영화가 보여주었던 것 중 가장 가슴 뛰게 만드는 이미지이다.
<사랑의 고고학>에서 이완민은 인물(혹은 배우)의 몸이라는 영화적 장소이자 투명한 형상을 통해 프레임 안팎을 유영하고 에워싸는 존재들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것들은 이상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시차를 두고 기묘한 방식으로 소환되며, 텅 빈 자연과 일상의 랜드스케이프 위에서 천천히 떠오르거나 사라져 버린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 '고고학'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곳'의 프레임을 빠져나가는 모호한 존재들을 인물의 몸에 어떻게든 붙들어놓고 그 기원에 대해 몰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에치던 방>(2018)의 겨울처럼, <사랑의 고고학>의 끝나지 않는 여름은 다시 한번 이완민의 영화 속에서 길을 잃고 하염없이 헤매게 만든다. 2023년 최고의 한국 영화인 <사랑의 고고학>으로 이완민은 지금 그 누구보다 중요한 한국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3.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백조 The Swan>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 2023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넷플릭스와 함께한 네 단편으로 웨스 앤더슨은 또 다른 확실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연극을, <백조>(를 포함한 네 단편)는 소설을 기반으로 하며, 한때 문학의 시종이라 불렸던 영화 매체가 문학 텍스트를 어떻게 재현해 낼지에 대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완벽에 가깝게 세공된 숏으로 이를 구현해 낸다. 누군가는 이 영화들을 보고 단순히 '연극적'이라고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막의 풍경과 지평선 너머로 끊임없이 펼쳐진 길(<애스터로이드 시티>), 그리고 참호처럼 프레임을 에워싸는 갈대밭과 기찻길(<백조>), 게다가 그 이동과 운동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음마저 세밀하게 포착하는 사운드가 무엇보다 잃어버린 시네마의 영광을 되살리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유독 마음을 울렸던 장면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제이슨 슈워츠먼이 연극 밖으로 나와 발코니 맞은편에 있는 마고 로비와 조우하는 씬이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내레이션이 주도하는) 영화적 상황과 극중극으로 이중의 레이어를 지닌 이 영화에서 두 세계는 그 순간에 다다라서야 이상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극중극에서 죽어 사진으로만 남겨졌던 마고 로비가 비하인드 텍스트를 발화하는 이 장면(극중극에서 등장한 창문을 두고 대화하는 제이슨 슈워츠먼과 스칼렛 요한슨의 숏/역숏의 변주이다)은 그 말들이 결국은 극중극에서조차 삭제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진실에 맞닿아 있는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착각이다.
4. <플라워 킬링 문 Killers of the Flower Moon> 마틴 스코세이지 Martin Scorsese | 2023
<플라워 킬링 문>이 스코세이지의 영화 중 특별하거나 새로운 것을 내세워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욕망으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는 한 남성의 서사는 <분노의 주먹>(1980)의 파괴력을, 종반부 재판 장면에서 펼쳐지는 무자비한 살인들과 치욕스러운 역사 <좋은 친구들>(1990)의 활력과 <아이리시맨>(2019)의 장엄함을, 장르와 형식을 비틀어 동시대를 비추는 독특한 시도는 <코미디의 왕>(1982)의 시의적절함을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말인즉슨 <플라워 킬링 문>이 스코세이지의 모든 장점을 고루 갖춘 영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더불어 스코세이지의 스토리텔링은 아직도 놀랍다. 미스터리의 서사 구조를 기이한 방식으로 변주하고 있는 <플라워 킬링 문>은 어느 순간 미스터리로 극을 끌어나가는 것을 포기하는 듯하다가 끝내 그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을 추적하고 발가벗기며 독특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해왔던, 또는 그 표면을 보았지만, 끝을 볼 수 없는 치욕의 역사다. 어김없이 하게 되는 말임을 알고 있지만, 스코세이지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영화 장인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5. <러브 라이프 LOVE LIFE> 후카다 코지 Fukada Koji | 2022
전작 <하모니움>(2016)이 그랬듯이, 후카다 코지의 사려 깊은 영화 <러브 라이프>는 사건으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기적인 사건으로 벌어진 관계의 틈을 하염없이 골똘히 들여다보는 방법을 택한다. 여기서 사건은 가족의 죽음이며,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있고 앙상하게 남아있는 기이한 가족 공동체다. 후카다 코지는 가족공동체를 허무는 재난의 이미지에 스릴러와 공포, 죽음과 불륜의 서사를 겹쳐놓으며 아이러니로 가득한 상처 입은 영혼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비극적 사건을 앞에 두고 20분가량 긴 호흡으로 펼쳐지는 첫 시퀀스 또한 압도적이다. 관계와 시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몸의 자세와 방향, 창밖과 방안, 그리고 그사이를 수놓는 동물(고양이)과 비인간 사물들(오셀로, CD, 풍선, 파티의 장식들)은 주위를 에워싸는 풍경들(운동장, 하늘, 비, 전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계단, CD에 반사된 빛)과 어우러져 놀라운 감동의 순간을 만든다. 그리고 집안에서 운동장까지 긴 패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숏과 그 사이를 묵묵히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의 이미지, 그 위로 야노 아키코의 'Love Life'가 흐르는 엔딩은 2023년의 영화 중 가장 묵직하고 여운을 남기는 엔딩이다.
6.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 조아킴 도스산토스 Joaquim Dos Santos | 2023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된 이후로 수없이 반복되고 변주된 이 질문을 동시대에 가장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는 독창적인 영화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스파이더맨(들)의 액션들은 타자도 자기 자신도 아닌 세계 너머로 확장되고, 전작보다 더 심도 있는 멀티버스의 세계관과 그 모호한 무형의 빌런들은 세계와 개별 영화의 존립을 의심하고 위협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액션과 멀티버스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의 관건은 그것이 그 세계를 견디고 있는 동시에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스펙터클을 믿는 또 다른 방법. 배명현 평론가가 글(「다정한 스파이더맨의 정의(들)」)에서 지적한 대로 흑인 스파이더맨 마일스가 빌런으로 하고 있는 것은 개별 영화가 지닌 마일스의 운명을 넘어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자,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운명을 둘러싼 이야기의 질문들 그 자체다. 이 전복과 야심은 어쩌면 마지막 한편을 남겨두고 있는 이 트릴로지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으로 장황하게 막을 내린 '인피니티 사가'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다가온다.
7. <빅슬립 Big Sleep> 김태훈 | 2022
한국영화의 새로운 작가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 김태훈은 지난 몇 년간의 한국 독립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경향, 또는 매너리즘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가장 솔직하고 가슴 떨리는 첫 장편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힙하고 자극적이고 동시대적이기만을 의식하는 최근의 영화 사이에서 탄생한 가뭄 속 단비라고 할까.
<빅슬립>은 다르덴 형제, 켄 로치, 박정범 등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면서도 지나친 메타포와 모방의 욕구에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활력을 유지한다. 극 중 인물을 쉬이 단죄하려 하지 않으며, 황상과 꿈의 영역에만 남아있을 구원으로 무책임하게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는다. 김태훈은 그저 이들을 잠시 멈춰 세움으로써 그다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불법적인 일을 벌이는 이들이 탄 차를 멈춰 세우고, 지친 이들에게 잠깐의 깊은 잠을 선물한다. 인상적인 엔딩의 투명한 이미지 앞에서는 어떠한 미학적 분석의 도구를 들이대고 싶은 섣부른 마음도 들지 않는다. 담배 연기와 늙은 화분으로 가득했던 베란다 뒤에 창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사이를 통과해 거실 바닥에 퍼지는 빛은 혹한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빛이다.
8.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Small, Slow But Steady> 미야케 쇼 Miyake Sho | 2021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는 이상하리만큼 미적으로 돌출된 숏이 있다. 강변은 케이코가 트레이닝을 하거나 생각에 잠길 때마다 찾아오는 곳인데, 하룻밤은 순찰을 돌던 경찰이 경기에서 진 케이코의 얼굴에 난 상처를 수상하게 여긴다. 경찰이 자리를 떠난 뒤 케이코는 기차가 다니는 다리 아래를 지나간다. 이때 다리의 건축적 패턴 때문에 기차에서 나오는 빛이 특정한 문양을 지닌 채 점멸하며 케이코의 실루엣을 메우는 이미지는 초현실적 이게까지 느껴진다. 16mm 필름의 촬영과 무성영화 시대의 자막이 이 시대에 사라진 아날로그의 감각을 간신히 붙잡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이 초현실적인 숏은 초당 24프레임으로 지나가는 활동사진으로서 영화의 감각을 되살리고 있는 듯하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삼각관계(두 남자와 한 여자)와 뒷날을 생각하지 않는 청춘의 활력이 고다르와 트뤼포를 떠올리게 했다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무성영화의 감각과 오즈의 풍경들을 부활시키려는 것만 같은 영화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마치 실험 영화로 나아가는 것만큼 감각적인 숏을 보여주며 영화 매체에 대한 잃어버린 감각을 일깨운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숏을 만들 줄 아는 감독'이라고 말한 것처럼, 미야케 쇼는 고전에 무한한 존경을 표하면서도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단단히 세워진 숏으로 다시 한번 청춘의 한순간을 그려냈다.
9. <어느 멋진 아침 One Fine Morning> 미아 한센-러브 Mia Hansen-Love | 2022
로맨스와 가족 드라마라는 서사의 장르적 수식을 걷어내고 나면 <어느 멋진 아침>은 우리 앞에 놓인 것을 '보는 것' 또는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영화가 된다. 병든 아버지는 딸의 짧은 머리를 보지 못하며, 아이들은 커튼 너머에 있는 산타클로스를 보지 못한다. 미아 한센-러브는 의도적으로 이들의 시력을 '퇴화'시키거나 '유아화'시키는데, 결국 그사이에 놓인 산드라조차 눈앞에서 갑작스레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전 연인과 몸으로 대화할 뿐이다. 늙고 시들어가는 육체보다 지금 여기 있는 책이 그 사람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며 당면한 현실에 회의를 비추면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엔딩씬에서 세 사람이 파리 도시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또 다른 아침이 찾아오고 햇빛 아래 놓인 세계를 골똘히 응시하는 순간.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되뇌었다. '내 눈앞의 존재를 보는 것' 어쩌면 영화를 본다는 것도 같은 의미다. 내 눈앞의 존재를 전적으로 믿고 사랑할 것.
10. <바빌론 Babylon> 데이미언 셔젤 Damien Chazelle | 2022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영화관에 가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하며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것들을, 즉 소리의 결, 상영실, 어둠, 다수의 어두운 다른 몸들, 빛줄기, 입구, 출구를 물신화할 준비가 있는 비뚤어진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빌론>의 엔딩씬, 영화관에 앉아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는 매니는 스크린에 매혹되면서도 바르트가 언급한 '비뚤어진 몸'이 된다. (매니가 좌석에 앉자마자 하는 첫 번째 행동은 예배당과 흡사한 규모를 가진 영화관의 천장 부근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이때 영화관은 그 공간을 오롯이 체험하는 종교적 제의의 공간이 되며, 카메라마저 비뚤어진 몸이 된 듯 영화관의 풍경과 관객들(다수의 어두운 다른 몸들)을 하나씩 훑어 내려간다. 가장 순수한 빛과 색의 형태로 우리의 눈에 도달하는 엔딩씬의 현란한 몽타주는 우리에게 이 비뚤어진 몸을 갖게 할 소격효과다.
한마디로 <바빌론>은 영화를 거의 종교의 수준으로 떠받들고 있는 동시에 영화에 대한 영적 체험을 요구하는 영화다. 초반부부터 <공포의 보수>(1952), <달콤한 인생>(1960), <선셋대로>(1950)의 이미지들을 노골적으로 따라가던 영화는 <사랑은 비를 타고>(1952)를 거쳐, '앨리게이터'와 괴인이 있는 지하실까지, 국적과 장르를 넘나들며 고전과 장르 영화들을 일사불란하게 오마주하고 패러디한다. 영화사라는 역사를 넘어 시네마의 단일한 이미지를 좇으며 그 여정에 도취시키는 이 영화는 끝내 진 켈리와 브래드 피트의 어색한 말투를 따라 고백해 보고 싶게 만든다.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영화에 대한 가장 순수한 고백 또는 기도.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