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BEST] 퇴락되지 않을 반영의 영화들
[2023 BEST] 퇴락되지 않을 반영의 영화들
  • 이현동
  • 승인 2024.01.2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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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식될 가능성을 차단한 영원한 영화의 영혼들 앞에서"

확실히 작년에 비해 개봉작을 감상하는 횟수가 줄어 들었다. 이제는 동시대 모든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이전보다 자유로워졌다. 특히나 개봉 영화만을 감상하고 글을 쓰는 것이 비평의 가능성이 축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커졌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평론가마다 각자의 취향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아예 극단적일지언정 다른 형식을 보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비평의 확장이 불가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2023년은 전시에 대한 몇몇 글과 서평을 코아르에 기고하면서 비평가로의 정체성과 내가 가진 관념, 취향, 선입견, 텍스트를 재정비하는 해였다. 영화제에서 보았던 보석 같은 작품 몇 편과 인상 깊었던 상영작을 순위와 관계없이 올려둔다.

 

<스트라이킹 랜드 Striking Land> 라울 도밍게스 Raul Domingues|2023

ⓒ <스트라이킹 랜드>

제20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인 <스트라이킹 랜드>는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를 중립적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 중립적이란 이미지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객체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임을 의미한다. 특정한 주제를 명시하거나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기보다 각기 다른 이미지가 서로 교합하면서 이 영화는 서로를 도구화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자연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카메라 앵글은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을 드러내듯 핸드 헬드로 찍혀 그 리듬을 활성화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 장면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성장하고 숙성되기도 하는 오렌지 나무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오렌지를 먹는 인간은 영화 내내 중첩되어 관측되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서로를 의존하고 순환되고 있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아주 투박한 렌즈로 이미지를 담은 <스트라이킹 랜드>는 본래 제목의 의미인 '표시하는 땅'(TERRA QUE MARCA)이 함의하듯 땅의 균질을 무엇보다 잘 표시한다. 마치 흙을 만졌을 때의 투박하고 거친 촉감처럼 말이다.

 

<황금도둑의 전설 Otro Sol>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테아레 Francisco RODRIGUEZ TEARE|2023

ⓒ <황금도둑의 전설>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황금도둑의 전설>을 본 건 가장 큰 수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대상을 차지했던 실뱅 조지의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2023)가 시적 기법을 통해 아이들의 실상과 불행을 초연한 자세로 다루는 한편, <황금도둑의 전설>은 가상의 인물과 실재의 인물이 혼재된 상태로 사건을 찾아 나서는 형태를 지닌다. 즉, 이것은 '논픽션' 혹은 '픽션'이라고 할지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큐멘터리의 규범을 파괴하기 위해서 선례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는 다큐가 갖고 있었던 형식을 서서히 부식되는 형태로 기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가 다큐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방법은 없다. 인터뷰하는 장면과 내레이션은 이러한 의혹을 증폭하기도 한다. 실재 성당 유물을 훔친 전설적 사건이 발생한 성당에서 발생하는 픽션적 요소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우정'이란 주제를 선명하게 안내하면서도 가장 영화적인 순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처럼 말이다. 우린 이 로드무비를 바라보면서 전설 너머 인물의 관계를 상상하고 조명한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형상을 넘어서 의미를 담는다.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 A Letter to You Who Used to Live in My House> 전준혁|2023

ⓒ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는 와이프와 함께 제20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감상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제법 많이 다녔던 나나 와이프에게 집에 대한 기억은 파편적이지만, 어찌 됐든 그 주변을 관계로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집은 기억의 근거지로 활용되기도 한다. 전준혁 감독의 작품에서 보이는 폐허는 기억이 기입이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낯선 사람에게 배달 온 편지로부터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관습적으로 상상하게 되는 과거의 시간을 침범하며 시간의 범위를 확장한다. 영화에서 수집되는 이미지는 분명 특정한 대상을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를 다시금 조직하는 건 감상자 본인이다. 이 영화의 작동 원리는 관객을 수신자로 설정하여 그 공간에 끌어들인다. 이때 '개입하지 않고 관조하는 시선'에 대한 그의 탐구는 누구에게나 깊이 귀속되어 있는 '집'이란 공간을 소환하여 기억에게 응답을 요청한다. 또한 시적인 영화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지 뿐만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진동하는 내레이션 혹은 내레이션 없는 자막은 외화면 밖을 상상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미지는 관객에게 순전히 현실을 자극하게 하는 힘을 소유하게 한다. 단순히 영화가 공간, 기계의 힘을 빌려야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구조적 환경에서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는 영화를 편지로 변용하는 대담한 창작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하루 In Our Day> 홍상수|2023

ⓒ <우리의 하루>

홍상수는 영화를 구조화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조를 드러내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않는다. 대부분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이를 은폐하고 있는 '리얼리즘'이라는 요소가 대중에게 편만하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그의 영화가 모종의 리얼리즘으로 묶여 많은 이들에게 성찬을 받는 경우에도 그는 리얼리즘이 아닌 구조주의 작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가상)와 현실을 중개하기 위한 카메라의 작동은 홍상수 자신의 상황을 반영하며 다소 의문스러운 여지를 남기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도락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자신은 <우리의 하루>에서도 기이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다루는 두 그룹은 묘하게 겹쳐 있다. 노년을 향해 가는 홍상수와 홍의주(기주봉), 그리고 김민희가 연기하는 상원은 '우리'라는 것으로 묶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홍상수와 김민희는 연인 사이기도 하고, 몇몇 영화에서 둘은 그런 뉘앙스를 풍겨 왔었다. <우리의 하루>의 이미지는 공간의 배치와 사물의 사용 등의 구조에 있어서 서로 포개어지는 포인트가 있다. 이러한 중첩은 내가 이전 홍상수 평론에서 이야기했듯이 둘의 위치를 현실로 조명하는 방식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홍상수가 은유하는 김민희와의 관계를 흥미롭게 드러내는 방식이며 그의 가장 다큐멘터리 적인 작품이 아닐까.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Juhee from 5 to 7> 장건재|2023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아녜스 바르다의 작품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를 참고하여 만든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병에 걸린 주인공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공통점이 없다. 제목이 드러내는 2시간이란 시간이 암시하고 있는 죽음은 단숨에 감정을 고양하기엔 무리가 없는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이 영화가 맨 먼저 채굴하는 형상은 단연 주희(김주령)의 얼굴이다. 그녀가 처음부터 마주하는 암이란 질병은 단숨에 어떤 위기로 착상되지 않고, 그녀에게 찾아오는 여러 상황 속에서 마지막 전까지 희석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시계를 통해 시간을 우리에게 알람처럼 울려대며 공간이 주희의 교수실에서 남편 호진(문호진)의 무대로 넘어가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둘의 현실을 지목한다. '중년 부부의 위기'를 다루는 연극 무대가 2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펼쳐질 때 극단 배우들은 이것이 실제 경험담이 아니냐고 말한다. 여기서 두 공간이 절대 병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상을 배출한다. 공간을 횡단하며 서사를 세공하는 장건재 감독의 솜씨는 병렬되어 있는 시간 안에서 인물의 삶을 평행세계로 다룬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Fallen Leaves>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2023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제목의 이 영화는, 번역된 제목임에도 스탠리 도넌과 진 켈 리가 공동 연출한 <사랑은 비를 타고>(1954)를 연상하기에 무리가 없다. 나는 그가 2023년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예전에 끝난 줄로 알았던 프롤레타리아 3부작을 이 작품을 빌어 4부작이라 정정한 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솔직히 그게 진담인지 농담인진 잘 모르겠다). 지난 <희망의 건너편>(2017)를 은퇴작이라 말했던 아쉬움을 뒤로한 채 6년 만에 등장한 이 작품은 너무나 희망적인 작품이라 여기서 은퇴를 고백해도 좋을 정도로 만족한 작품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지금에도 난민의 유입은 불가피한 상황일지라도 이러한 사회, 정치적 문제를 남녀의 관계를 통해 희망으로 은유한다는 점도 굉장히 담백한 방식이었다. 지난번 <르 아브르>(2011)와 <희망의 건너편>(2017)이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 문제를 다룬 내용이라 그러한 것인지 주제를 반복하지 않아 더욱 좋았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많은 평론가가 이 영화를 보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관련하여 글을 쓴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를 향한 관심이 영화를 통해 드러나다 보니 채플린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뒷모습을 비추며 남녀가 걸어가는 카메라 앵글은 너무도 흡사해서 아마 카우리스마키가 채플린을 염두하고 촬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단언컨대 올해 본 가장 뛰어난 노동 영화(?)였다.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The Wonderful Story of Henry Sugar> 외 단편들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 2023

ⓒ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대부분의 평론가가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를 순위에 올렸겠지만, 필자는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아 단독으로 스트리밍된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외 단편을 순위에 올렸다. 로알드 달의 인기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 이 영화의 에너지는 다분히 응축된 것이어서 정신없이 흘러가는 많은 대사량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체감할 수 있던 작품이다. 고다르가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언어권이 달라 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이미지로도 충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그의 말에 가장 합당한 작품이라 여겨진다. 덧붙여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그의 이번 작품은 어쩌면 가장 웨스 앤더슨 작품답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양한 광고 활동에도 참여한 만큼 어떻게 하면 단시간 내에 관객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장센도 미장센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상기하게 되는 서사의 위력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와는 전혀 다른 힘을 구사하면서 앤더슨이 가진 잠재력에 대해 또 다른 기대를 하게 만든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Incredible But True> 캉탱 뒤피외 Quentin Dupieux|2022

캉탱 뒤피외 영화가 가진 어떤 괴팍하지만 교훈을 더하는 아이디어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나오는 무언의 삐걱거림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을 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가장 처음에 접했던 <광란의 타이어>(2010) 같은 작품이 주는 파격적인 형상은 그를 주목해 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12시간을 워프하며 시간과 공간이 분할되는 컨셉은 한 부부의 일상이 욕망으로 인해 붕괴하는 과정을 한편의 우화처럼 보여준다. 여자 마리는 이 워프를 이용하여 회춘을 꿈꾸며 외형적으론 젊어지지만, 욕망이 가진 궁극적인 죽음에 불타 사라지고 만다. 욕망을 단숨에 해소할 수 있는 이러한 장치는 마치 기계를 편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인류에 대한 모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편리하면 편리해질수록 인간의 신체가 점차 부패해지고 그 안에서 욕망은 그 부패를 타자에게 유포하게 되어 있기 마련이다. 영화는 관계의 단절을 보여주며 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감각을 갱신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피터 본 칸트 Peter von Kant> 프랑소와 오종 Francois Ozon|2022

ⓒ <피터 본 칸트>

최근 오종의 몇몇 작품이 실망감을 안겨주긴 했지만, <피터 본 칸트>는 설정의 변화와 배우의 개입에 힘입어 진중하게 다가온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원작인 <페트라 콘 칸트의 쓰디슨 눈물>(1972)과 함께 이 작품은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어 동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자신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고백했던 파스빈더가 이전에는 여자의 관계, 그리고 사후에는 남자로 다시금 변용되어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더불어 피터(드니 메노셰)의 외형이 파스빈더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오종이 파스빈더에게 헌정의 의미를 담은 영화임이 자명해진다. 또한 파스빈더의 영화가 전부 다 실내극이었던 반면 외부의 시선을 제시하는 이 영화는 분명 이전과 다른 세계에 대한 오종의 상상이 결부된 장면들이다. 원작에서 활약하고 파스빈더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한나 쉬굴라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파스빈더를 위로하고 있는 장면 또한 이 영화의 핵심적인 축 중에 하나다. 프랑스어로 진행되던 영화가 원작의 언어인 독일어로 바뀌는 흐름의 변화와 아미르(칼릴 벤 가비아)와 연락이 끊겨 절망하는 피터에게 “필요한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야”라고 말하는 로즈마리(한나 쉬굴라)는 마치 파스빈더에게 전하는 전언처럼 들려진다. 오종도 자신이 게이임을 공공연히 밝혀온 만큼 이 영화에서만큼은 파스빈더가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다섯 번째 흉추 The Fifth Thoracic Vertebra> 박세영|2022

ⓒ 영화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는 한편의 로드무비이면서 침대라는 요소를 통해 일상을 조금 더 가까이 관측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부에 내용물을 도무지 상상할 이유가 없이 도구화된 침대는 아이러니하게도 내밀하게 인간과 밀착되어 있는 존재다. 밑에 번식하고 있는 곰팡이가 인간의 흉추를 먹고 자란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인간의 형상으로 탄생한다는 설정은 다분히 신화적(마치 단군신화와 같은)이면서도 그 신화에 기생하는 영화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서사에 운송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화가 가진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인 서스펜스는 불명확한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 그리고 곰팡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카메라 앵글이 잡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경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 경과는 곰팡이의 진화된 형태를 상상하게 하고, 주제 의식에 대한 발화의 조건을 추궁하게 한다. 이에 비해 틈입하는 편지의 내용은 너무도 일상적인 내용이다. '비타민 잘 챙겨 먹고, 오메가는 아침에 두 스푼 물에 타서 먹고' 등인데, 이것은 영화가 가진 무거운 소재를 환기시켜주고 침대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온 흉추의 임무가 일상을 배송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보편적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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