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차일드 시네마'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의 계보가 있다. 보통은 혼란을 경험하는 한 어린아이가 여름방학을 지나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는 흔한 이야기 구조다. 이른바 '갔다가 돌아오기'는 모든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게다가 바캉스는 유럽인에게는 일상 속 규칙적인 의례, 즉 리추얼이기도 하다.

그저 한바탕 소동극으로만 끝날 수 있는 이 이야기에 매력을 더하는 것은 알레고리다. 이때 알레고리는 A라는 원관념을 B라는 우회된 이미지로 빗대어 드러내는 수사다. 어린아이가 경험하는 초현실적이고도 의뭉스러운 일(A)은 직접 재현할 수 없는 독재자 프랑코의 치하에 있던 스페인의 암울한 일상(B)을 우회해서 담기에 적절했다. 알레고리는 관객이 B 너머에 있는 A를 발견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데, 이에 따르지 않을 관객에게는 그저 B를 보는 데에 그친다. 직접 드러나는 정치적인 기호만을 검열하는 검열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검열을 우회하려면 B만을 보도록 하는 알레고리가 효율적인 셈이다.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1973)과 카를로스 사우라의 <까마귀 기르기>(1976) 등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스페인 차일드 시네마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2006), 카를라 시몬의 <알카라스의 여름>(2022)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에스티발리스 우레솔라 솔라구의 <2만 종의 벌> 또한 이 스페인 차일드 시네마의 계보를 잇는 또 하나의 영화다.

<2만 종의 벌>은 단발머리의 8살 코코(소피아 오테로)에 대한 오해로 시작된다. 그는 아침부터 에네코에게 마르티나라는 여자아이의 속옷을 훔쳤다는 이유로 그녀를 사랑하냐는 질문 공세를 받는다. 코코의 반응은 왜인지 시큰둥하다. 하필이면 그날은 코코와 그의 형 에네코, 누이 네레아 셋과 그들의 어머니인 아네(파트리샤 로페즈 아르아니즈)가 할머니네로 여름휴가를 가기로 한 날이다. 예술가인 아네의 진짜 목적은 할머니네에서 일주일간 작업실을 빌리는 것이다. 그녀는 거기서 작품을 완성해 대학교에 포트폴리오를 보내서 교수 심사에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네는 세 아이가 말을 잘 따르기를 바라지만, 코코가 수영장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등 돌발적으로 행동한다. 코코를 둘러싸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다투며 아버지는 코코를 외면한다. 코코는 거기서 단 한 곳, 자신의 성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봐주려고 노력하는 이모할머니의 양봉장에서만은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다.

<2만 종의 벌>은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역대 최연소 주연상(은곰상)을 수상했다. 코코를 연기한 소피아 오테로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성적 정체성은 여성인 것을 다소 이르게 자각한 아이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잘 드러낸다. '크면 아버지처럼 생길까 무서워하는' 아이로 공포에 가득해 있는 표정을 이만큼 잘 드러내기 어렵다. 영화는 코코의 성정체성을 억압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그리고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맨박스를 환기하는 동시에 코코가 자신이 선택한 이름인 루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잘 그린 LGBTQ 영화로 만듦새가 무난하다. 다르덴 형제 스타일의 카메라로 코코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그려내어 관객이 공감할 빈틈을 만드는 점부터가 그러하다. 벌통이라든지 성인 루시아 등 여러 오브제로 상징을 체계적으로 만드는 작법술은 단편 소설의 작법처럼 촘촘하다.

하지만 <2만 종의 벌>은 유리병 안에 갇혀서 웽웽거리는 벌로 코코의 혼란한 심리를 이미지로 드러낸다든지, 할머니가 사는 동네에서 만난 친구와 같이 수영복을 갈아입는다는지 등 이미지로 주제를 압축하는데, 이는 정석으로 볼 수 있으나 감독만의 개성이 없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똑같이 아이를 다루는 '루카스 돈트'나 '카를라 시몬' 등 동시대 젊은 감독과 비교하더라도 그러하다.

더군다나 각본은 아쉬울 정도로 주제와 거기서 주려는 교훈을 직접 노출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는 코코가 어머니인 아네와 함께 할 때와 이모할머니 레이레와 함께 할 때 차이에서 두드러진다.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려는 의도가 더욱 선명히 느껴질 정도로 두 장면에서 흐르는 대사의 톤은 정반대다. 수영장에 가려는 코코가 아이토르라는 본명, 코코라는 별명을 거부한 데에는 이 두 이름의 뉘앙스가 자신이 남성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어서다. 아이토르는 남성의 이름이다. 코코라는 이름은 아이토르가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을 진지한 뉘앙스로 인정하지 않아서다. 또 남성과 여성의 일을 구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아네의 자유주의에 기반한 태도도 코코의 성정체성을 수용한다기보다는 피상적인 차원으로 접근한다. 아네는 네레아로 하여금 "이상적인 몸매를 꿈꾸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만족하라"라는 등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편이기는 하나 결국 이해의 차원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특히, 사회적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연에 가까운 이모할머니의 세계는 작위적인 대사로 가득하다. 코코가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제 성정체성을 신뢰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기를 바라는 어른의 마음을 드러낼 때 더욱 그러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라는 말과 후반에 다다를 즈음 이에 화답하는 "너의 이름을 너 스스로 지으라"라고 말하는 이모할머니의 대사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또한, 이모할머니가 벌통을 길러온 집안의 전통을 이야기하며 누군가가 죽거나 탄생할 때 벌집을 세 번 툭툭 치는 풍습이 있다고 말한 것이, 코코가 스스로 루시아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에 드러난 것은 분명 감동적이다. 그러나 코코가 자신의 이름을 루시아라고 지을 만큼 확신이 설 때까지의 과정이 문제다. 강가에 떨어진 성인 요한 조각상을 물색할 때 이모할머니를 도우러 온 노인이 믿음의 정의를 코코에게 알려준다. 믿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네가 느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든지, 인어를 이야기할 때 인어는 상상 속의 존재이지만 상상도 현실 속에 있다고 말하는 등 코코의 성정체성이 가시화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전달한다. 명대사의 남발은 이 영화에 신파를 깃들게 한다.

<2만 종의 벌>의 흥미로운 점은 가족이 국경을 넘어서 있는 바스크로 여름휴가를 간다는 점이다. 바스크는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 국경지역에 걸쳐서 있는 스페인 지방 중 하나로 독자적인 언어를 쓰고 인종마저도 다르다.

코코와 아네는 둘 다 바스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는 영화 대사로도 충분히 언급된다. 이 영화 초반에서 분명 아네는 국경을 넘어간다고 언급한다. 즉, 영화는 스페인이 아니라 프랑스의 바스크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한편 프랑스가 전적으로 배경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친 바스크의 공간성을 드러낸 것이다. 하물며 이 영화의 감독, 소피아 오테로도 바스크인이다. 이 영화는 LGBTQ의 서사이지만 은연중에 바스크인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을 드러내는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육체는 남성이지만 여성인 성정체성은 민족 정체성으로도 드러난다.

사실 이 영화가 문제적인 이유는 바스크 영화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통일 국가의 외양을 지니고 있으나 사실은 지역 갈등이 심각한 국가다. 탄생부터 카탈루냐, 바스크 등의 여러 이질적인 언어와 인종을 지닌 지역이 600년 전 중심으로 강제적으로 봉합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2022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알카라스의 여름>이 최근 독립운동이 활발히 벌어지는 카탈루냐를 배경으로 하고 카탈루냐어를 쓴 카탈루냐 영화인 것은 의미심장한 선택이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신재생에너지 산업으로 인해서 무너지는 농장을 경유해 카탈루냐의 빈곤, 그로 인한 민족적 정체성의 붕괴를 드러낸 영화로 해석할 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다.

지난해에도 베를린 영화제는 바스크를 배경으로 하고 바스크어를 쓴 <2만 종의 벌>에 주목했다. 바스크도 1970-80년대부터 (2017년 즈음 무장해제를 선언한) 무장단체 ETA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으킨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전히 바스크 독립을 지지하는 정당이 2023년을 기준으로 국회에서 13석가량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바스크 독립은 스페인 정치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바스크 영화로 코코가 바스크의 자연 풍경과 전통을 학습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는 국지적인 영화다.

영화는 코코의 서사와 함께 조각상을 만드는 아네의 서사도 함께 드러낸다. 아네도 어릴 적 남성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여성이기를 거부한 적이 있다. 아네는 무언가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아네가 택하는 것은 아버지가 만든 조각상을 자신이 만든 조각상이라는 듯이 대학에 제출해 교수직을 따내는 것이다. 아네가 교수에 임용되었다는 연락받은 순간 그녀는 프랑스어로 답한다. 후반에 이르러서 그녀는 수치심으로 인해서 교수직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조각상으로 상징되는 바스크의 전통, 그 전통에서 벗어나 중산층에 진입한 자신 사이의 괴리를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소수자 예술가의 정체성에 괴리가 온 듯하다. 카메라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얼굴을 그녀와 함께 포착한다. 아네는 바스크인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실패한 듯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를 고백하고, 코코를 루시아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코코가 그러하듯이 아네도 어릴 적에는 바스크인으로의 정체성, 성적 정체성 둘 다 혼란을 경험한 셈이다.

한편 코코가 루시아라는 본인의 이름을 짓는 과정은 외할머니를 통해서 바스크인으로의 정체성을 학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때 루시아라는 이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루시아는 바스크 지방의 종교인 카톨릭 전통에 따라서 지어진 이름이다. 영화 전반에 카톨릭 풍습이 깃들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믿음이라는 주제가 반복되고, 세례 요한이 사라진 것이 미스터리로 작동하는 데다가 아기의 세례식이 핵심 사건으로 그려진다. 또 바스크의 벌집통을 두드리는 풍습 등을 배운다든지, 벌이라는 매개로 바스크인의 세계관을 학습한다. 스페인 차일드 시네마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셈으로, 정치적으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메시지가 그대로 담긴 셈이다.

<2만 종의 벌>에서 유일한 위기는 코코가 사라지는 사건인데 이마저 바스크인으로의 정체성 자각과 이어져 있다. 코코가 루시아로 본인을 부르기 시작한 시점은 바스크에서 만난 친구 니코가 그를 여성으로 인정한 뒤부터다. 코코는 드레스를 입고 가족이 한 데에 모이는 파티에서 숨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이 여성이라는 것을 드러낼까 말까 고민한다. 이때 카메라는 코코에게만 초점을 두고 그 나머지를 흐릿하게 포착한다. 코코가 처음으로 제 정체성을 고민하는 순간이다. 이때 니코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코코는 곧장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아네가 코코를 루시아로 부르기 시작할 즈음에 그는 이모할머니의 벌통에 가 통을 세 번 두드린다. 코코는 바스크인 루시아로 재탄생한 셈이다. 니코, 이모할머니 등바스크인으로의 정체성을 그대로 살아가는 이를 마주한 다음에야 그는 부끄러움과 공포를 거둔다.

<2만 종의 벌>은 LGBTQ이면서도 바스크인이라는 이중의 소수자 정체성을 한 데에 통합하려 하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은 안온하기만 한 작품의 형식에 매몰된다. <알카라스의 여름>처럼 전통적인 서사 양식에서 탈출한다든지 <벌집의 정령>과 같이 이미지를 탐미한다든지 형식적인 우회로를 발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 영화는 조금은 더 급진적일 수 있는데도 아쉬운 지점에서 그친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명대사에 담긴 진심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결국 바스크인으로, LGBTQ로 살아가야 하는 훗날의 아이들에게 약간이나마 혼란을 덜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아마 감독은 레이레보다 아네에 더 가까운 입장일 듯하다. 미래의 아이를 당장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혼란을 바탕으로 그들을 이해할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고. 미래에는 마땅한 이름이 필요하며, 이를 존중할 것이라고.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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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